우리 악기, 우리 음악
국립국악원 편집부 지음 / 국립국악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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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는 테마다.
바로크 로코코展 보러 갔다가 급하게 둘러 보고 왔다.
기왕이면 큐레이터가 해설할 때 봤으면 좋았을텐데 쓱 훑어 보기만 한 것 같아 아쉬웠는데 이렇게 훌륭한 도록이 편찬되어 무척 유익했다.
도록은 사진이 많기 때문에 가격이 비싼 편이다.
이 책도 2만 5천원이라는 가격 때문에 살 엄두를 못내고, 대신 국립중앙박물관의 도서실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박물관 도서관은 6시까지 밖에 개관을 안 하고, 대출도 안 되기 때문에 직장인이 이용하는 건 쉽지 않으나 대신 박물관에서 편찬된 도록들은 빠짐없이 구비가 되서 시간이 될 때 한꺼번에 몽땅 읽고 온다.
대충 둘러 봤던 전시가 하나하나 의미있게 다가오는 좋은 책이다. 

고대 악기들은 토우나 박산향로 조각, 무용총 벽화 등으로만 전할 뿐 실제 악기 자체는 전해지지 않아 추정만 할 뿐이다.
실제 어떤 소리를 냈는지도 모호할 뿐.
그러나 청동 방울부터 시작해 줄을 뜯는 금이나 피리, 북 등의 유래는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인류의 본성과 같은 부분이다.
실제 소리가 어떤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이 많다.
전통 음악이 현대에 많이 연주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다.
전시실에는 진잔도의 그림을 바탕으로 춤추는 모습을 인형으로 재현해 놔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미시사가 갈수록 중요함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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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황제들 - 청 황실의 사회사
이블린 S. 로스키 지음, 구범진 옮김 / 까치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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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말 쉽게 잘 쓰여진 책.
두께 보고 놀라서 약간 긴장했는데 주석이 100 페이지나 되서 실제로는 400 페이지가 약간 못 되는 분량이다.
무엇보다 어렵지 않아서 좋다.
아마 전에 청나라와 팔기군, 즉 기인들의 관계에 대해 다룬 책을 읽었기 때문에 더욱 이해가 쉬웠던 것 같다.
저자의 빼어난 글솜씨와 매끄러운 번역도 한 몫 한다.
오랜만에 정말 즐거운 독서를 한 것 같다. 

예전에는 팔기군의 문란으로 청나라의 지배계급이 무너졌고 만주족 자체가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알고 있었는데 요즘 학계의 추세는 여전히 팔기군은 청 제국의 중요한 원동력이었고 만주족의 문화 역시 현재의 중국에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서양 열강에 의해 물어 뜯기고 만, 근대화에 실패한 비운의 제국이라기 보다는 현대화 직전의 청 제국이 가졌던 역사성과 시의성, 의미를 강조하는 느낌이 든다.
이래서 역사는 시대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는 것 같다.
다원주의, 다민족 국가로서의 통합성을 강조하는 (얼핏보면 제국주의 같기도 한) 요즘 중국이 추구하는 바와도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어쨌든 한족화 되어 역사 속에 사라져 버렸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에 비해, 중국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고 300 여년 가까이 제국을 유지한 청나라가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 것 같아 바람직한 변화라 생각한다. 

역자가 서문에서 밝힌 바대로 한국인처럼 중국 역사를 친숙하게 잘 아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중국 역사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을 맺어 왔으나 세부적인 면에서는 중국과 상당한 차이가 있고 무엇보다 청이라는 현대 이전의 마지막 왕조는 여진족이라는, 한 수 아래의 민족이 이룩한 정복왕조였기 때문에 그 질투심에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면이 많다.
제일 의아했던 게 장자 계승 대신 황제가 죽기 전에 후계자를 결정하는 방식이나, 황후가 아닌 후궁도 아들이 왕이 되면 태후로 승격되는 시스템이었다.
광해군이나 인조 모두 후궁이나 군부인이었던 어머니를 왕후로 추숭하기 위해 신하들과 지리한 싸움을 지속해야 했던 것에 비해 서태후의 경우처럼 청나라에서는 아들이 왕이 되면 자연스레 황태후가 되는 것 같아 속사정이 무척 궁금했다.
책에 그 과정이 자세히 나오는데, 만주족 역시 황후는 한 명이지만 대신 황후든 후궁이든 그 자손은 똑같은 황위계승권을 갖는다.
오히려 비빈으로 들어오고 나면 친정집과 완전히 단절시켜 태후가 되서 섭정을 하더라도 친정 가문이 아닌, 남편의 측근들, 즉 시동생과 연합하도록 했다.
이를테면 서태후 역시 처음에는 함풍제의 6등급 (8등급까지 있다) 후궁으로 들어왔는데 그 아들이 동치제가 되자 태후로 격상됐고, 친정 가문 대신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과 연계하여 정권을 휘둘렀다.
모후의 친정이 황제 가문을 압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철저히 차단한 것이다.
이 점은 흔히 간과되기 쉬운 부분인데 책을 통해 청나라 황실의 특징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외척 가문이 전권을 휘두를 가능성을 철저하게 차단한 것이다.
명나라가 황제의 형제들을 변방으로 보내 정치적으로 고립시킨 것에 비해 (자연히 황제는 황후의 남자 형제들이나 환관과 연합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청나라는 황자들을 정치에 참여시켰다.
대신 이들을 종친부에서 관리해 자율성을 빼앗았다.
황제의 수많은 아들들은 동등한 황위계승권자였기 때문에 자금성 안에 살면서 능력을 평가받았고 황제는 죽기 직전 후계자를 발표했다.
장자 계승이 원칙인 한족에 비해 아들들간의 후계자 다툼이 치열하다는 단점이 있겠으나 대신 능력있는 사람이 왕이 된다는 점에서는 장점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 보니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조선만의 악법이라고 한탄했던 글을 읽었다.

새롭게 안 사실은, 청나라가 몽골과의 연대를 통해 제국을 안정시켰고 라마교를 이용해 티벳의 신정정치를 지지해 제국 안에 묶어 뒀다는 사실이다.
원나라 때부터 티벳 불교를 받아들인 몽골은, 14세기 이후 겔룩파를 지지하면서 라마교의 후원자 역할을 자임했다.
몽골의 칸은 달라이 라마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고 반대로 티벳에서는 몽골의 지배자가 달라이 라마의 신정 정치를 보호했다.
이것은 후에 문수보살로 상징화 된 건륭제가 대신한다.
청 황제들은 준가르 원정 이후 몽골을 기인에 포함시키고 혼인동맹을 통해 연대를 다졌으며 라마교의 의례를 적극 지지하여 티벳과 몽골을 다스렸다.
또 위구르 정복 이후 이슬람까지 포용하였다.
넓은 의미로 보면 서양 선교사들이 황실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다민족 국가 운영이라는 틀에서 황제의 권력이 서양에도 미친다는 맥락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중국의 영토와 문화는 전 왕조였던 청의 공로에 기인한 것이니 확실히 청나라는 좀 더 가치있게 평가받아야 할 것 같다.
저자는 그러나, 청의 다원주의 문화가 결코 오늘날의 국민국가 개념와는 다름을 강조하고, 어디까지나 황제 개인의 권력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다양한 민족과 정치체를 아울렀음을 분명히 한다.
제국의 속성을 현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우를 범하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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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한양진경 - 북악에 올라 청계천 오간수문 바라보니, 양장본
최완수 지음 / 동아일보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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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 이렇게 멋진 연재가 있었다니, 음, 갑자기 신문 구독하고 싶어진다.
작년인가, 박물관에서 겸재 정선 서거 250주년 기념으로 전시회가 열려서 갔었는데 도록을 사 놓고도 제대로 못 보고 대충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리움 미술관에서 인왕제색도를 생각지도 않게 보기도 했고 경기도미술관에서는 임진강 특별 전시회 때 수령으로 나가 그 근방을 그린 그림들을 감상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몇 번 감상할 기회가 있었던 셈.
그런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발견하고 굉장히 반가웠다.
겸재가 그린 한양 풍경은 어땠을까?
비슷한 그림들이 많아 아주 흥미로운 건 아니었다.
뭐랄까, 좀 지루한 느낌?
아마 한꺼번에 모아 놔서 그런 느낌이 강한 것 같다.
연한 수묵 담채로 인왕산 자락 밑을 사생한 정선만의 개성이 느껴진다.
삼연 김창흡이나 농암 김창협 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천 이병연 등과 더불어 이른바 백악사단을 형성했다고 하는데 어쩐지 이건 좀 저자의 오버 같다.
안동 김문이 정치 뿐 아니라 학계도 쥐고 흔들었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과연 그 중심에 겸재 정선이 있었는지는 모호하다.
오늘날 그가 화성으로 높히 평가되고 있으나 당대의 평가와는 또다른 의미지 않을까?
진경시대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당대에도 학계를 움직이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건 약간은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쨌든 화본에 의지하지 않고 실경을 그렸다는 점, 그리고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해 18세기 화단에 자신의 뿌리를 내린 점은 높히 평가해 마땅하다.
장수는 집안 내력이었는지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으나 모친 박씨는 92세라는, 오늘날에도 드문 장수를 했고 겸재 역시 84세라는 천수를 다 누렸다.
그래서 더욱 작품이 많이 전해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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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택리지 1 - 경기 충청편
신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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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지, 벼르고만 있다가 드디어 읽게 됐다. 
음, 생각보다 재밌다.
아마 내가 경기도로 이사 오고 나서 이 곳 지명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훨씬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종묘나 궁가 이야기가 실린 책들은 서울 지명에 익숙치 않아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서 (막연하게 이름만 들어본 정도라) 크게 재밌지는 않았는데 (공간적 느낌이 쉽게 안 잡힌다고 해야 하나?) 경기도 편은 실제 내가 살고 있는 곳이라 지역 유래나 역사 등이 실감나게 다가와 무척 흥미진진했다.
내 고향인 전라도 편은 훨씬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경기도로 이사온 후, 안 그래도 공간 감각이 없는 터에 서울 근교 위성 도시들이 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지 감이 안 잡혔다. 
이를테면 구리 등은 경기 북부이고, 안양 등은 남부라는 것도 몰랐다.
다 서울 주변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한강을 건너네 안 건너네 이런 것도 몰랐다.
몇 년 지내다 보니 이제야 약간 거리감각이 생기고 내가 살고 있는 의왕을 중심으로 경기도 남부 지역은 조금 알겠다.
통근 지역인 수원이나 과천, 안양, 안산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나와 있어 무척 흥미로웠다.
특히 반월공단 자리가 원래는 바닷가였다는 게 신기하다.
우리 집 근처인 수리산이나 모락산 등도 책에 등장해 반가웠다.
가능하면 이 시리즈를 다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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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 8
김남이 지음 / 보고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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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완전 많이 하고 신간 신청을 했건만...
전혀 재밌지 않다.
순수한 이런 학술적 기획보다는, 전문가들의 보다 자세한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건 전공자를 위한 책 같다.
한자를 풀어 써서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으나 재미는 별로 없었다.
소득이라면 부인들도 남편의 벼슬에 따라 유인이니 숙부인이니 하는 작위를 받았다는 걸 확인하는 정도?
문중에서 글 잘 쓰는 친척이 여자들의 상을 치룰 때 제문을 썼던 모양이다.
딸의 죽음을 애통해 하기도 하고, 형수나 시집간 조카의 제문을 써 주기도 했다.
천편일률적인 칭찬 일색이라 지루하고 밋밋한 느낌이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남자들은 이름을 소중히 여겨 임금이나 부모가 아니면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고 호나 자 등을 추가로 만들어 썼는데 왜 여자들에게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그만큼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남편이나 아들 뒤에 숨어 있어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누구누구의 처라고만 나오고 족보에도 딸의 이름 대신 사위의 이름이 오르니, 18세기 조선 여성들의 삶이 서글프다.
문자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오히려 그런 재주를 숨기는 것을 덕으로 아니, 기생 같은 특수 계급이 아니면 시 한 수 짓기도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런 걸 보면 윤지당이나 허난설헌, 빙허각 이씨 등은 매우 특수한 경우였던 것 같다.
모두 남편이나 남동생 등의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문집 출간이 가능했던 경우다. 

남편이 죽자 바로 따라 죽지 않고 대상까지 다 치룬 후에 굶어 죽은 여인의 이야기가 나와 가슴아팠다.
삶이라는 게 얼마나 절대적인 명제인데 이런 순절 풍습을 여자의 덕목으로 강요했을까?
심지어 영조의 딸이었던 화순옹주마저도 남편 김한신을 따라 굶어 죽은 예가 있다.
왕실의 여인부터 몸소 이 끔찍한 풍습을 정절이라는 이름으로 실천했으니 참으로 불행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또 한 가지 의외의 경우는, 시집을 간 후에 시부모가 있는 상황에서도 친정에 와서 친정 부모를 봉양한 예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려 6년 동안 친정에서 지내다 시부모는 살아 생전에 딱 한 번 보고 친정에서 죽은 예도 있었다.
친정 부모가 몸이 아프고 며느리의 봉양을 받을 처지가 아니었긴 하지만, 어쨌든 오늘날의 관점으로 봐도 좀 놀라운 사례다.
반드시 시집살이만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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