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온한 선비다 -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 틈새 한국사 1
이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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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가볍게 읽기 딱 좋은 크기와 내용.
머리 아프지 않아서 좋다.
대신 깊이도 얇은 편.
주의를 환기하는 정도랄까?
시리즈 제목인 <틈새 한국사>대로 주류 대신 비주류, 그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인물들들 다뤘다.
제일 반가웠던 인물은 조선 천주교의 시조로 일컫어지는 이벽이다.
조선왕조5백년 같은 사극에서 처음 접한 인물인데 그 때는 물먹인 창호지 여러 겹을 얼굴에 덧씌우는 식으로 자살을 강요받았다고 나왔던 것 같다.
가문에 의한 자살 강요랄까?
그가 유학에도 조예가 깊고 정약용 등에 의해 언급됐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따지고 보면 천주교가 중세 천 년을 지배했던 유럽에서도 만인이 평등한 세상은 결코 실현된 적이 없었으니,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삶은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고 보면 절대적인 사상이아 종교의 옳고 그름을 논박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조선 역시 주자학 일변도로 사상을 통제할 것이 아니라 그냥 허용했어도 세상은 별 차이가 없었을 것 같다.
결국 기득권자들의 권력 지키기 용으로 이용된 셈이다. 

금오신화로 유명한 김시습이나 황진이와 함께 송도3절이라고 일컫어지는 서경덕 등의 일생은 제대로 알게 됐다.
막연히 서거정과 헷갈려서 서경덕도 벼슬살이를 꽤 한 인물로 알았는데 재야에서 교육에 힘썼던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소개된 사람들은 중앙 정계에서 활약한 경력이 거의 없다.
그래서 틈새 한국사에 낀 모양이다.
예외가 <우서>를 남긴 유수원 정도?
이 사람은 소론 강경파로 영조의 미움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체적으로 여기 소개된 인물들은 주자학 일변도를 비판하고 양반도 농상업에 종사해야 하고 인재 등용에 개방적이어야 하며 상업 진흥에도 힘써야 한다는 비교적 사회비판적이고 개혁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저자의 지적대로 구체적인 행동 방안은 부족하고 변해야 한다는 당위성, 즉 구호로 끝난 것들이 많은데 시대적 한계일 수도 있고 원래 재야 지식인이라는 게 실제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집단이다 보니 행동에 옮기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나온 최한기는 좀 흥미롭다.
자세한 일생은 안 나와서 모르겠는데 인간의 본성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일반적인 성리학 입장과 달라서 흥미롭다.
저자는 존 로크의 경험론을 비교한다.
마치 빈서판 이론을 연상시키는데,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인식의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기론에서는 선한 본성인 이, 즉 사단을 본성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발현인 기를 잘 통제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래서 극기복례 같은 인격 수양이 필요함) 최한기는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태어났고 욕망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본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구는 본능적이기 때문에 좋은 쪽으로 유도하고 제한을 둬야 한다고 했다.
욕망의 긍정이라는 점에서는 상당히 앞선 견해이고 저자는 이것을 마르크스의 유물론과도 비교한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는 점이 상당히 신선했다.
실학파로 알려진 이익이나 홍대용 등등이 결국은 실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재야 지식인에 불과했지만 사상의 다변화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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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평전 - 60가지 진풍경으로 그리는 조선
신병주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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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개의 주제를 가지고 가벼운 필체로 조선사를 대략적으로 훒은 책.
장점은 관심가는 표지와 편집, 그리고 지하철에서도 읽을 수 있을만큼 평이한 수준.
단점은 장점의 반대로 깊이가 얕은 일회성 에피소드 나열과, TV 등에서 방영된 내용의 재탕.
아마 저자가 역사스페셜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약해 그 내용들을 많이 차용한 것 같다.
나처럼 역사스페셜 애청자에게는 같은 내용의 반복이라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사진과 그림이 많고 편집이 잘 되어 있어 보기 편하고, 또 시의성에 맞게 요즘 이슈가 되는 문제들과 연관지어 설명한 것 등은 흥미로웠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역대 조선왕들의 장례 절차를 연관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워낙 한국사에 관심이 많아 눈에 확 띌 만큼 흥미로운 주제는 없었지만 550 페이지에 달하는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참 편하고 즐겁게 읽은 것 같다. 

한 가지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극적인 보관이다.
고려 시대에도 실록이 편찬됐으나 거란과 몽골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됐다고 들었는데 조선왕조실록도 하마터면 임진왜란의 불길 속에 사라질 뻔 했으나 전주 유생들의 힘으로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쩐지 고려 시대는 아주 옛날인 것 같아 실록이 소실됐다는 게 당연하게 들리는데, 근세라고 생각되는 조선의 실록이 사라진다는 건 엄청난 대사건 같고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러나 남대문이 우리 시대에 불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임진왜란과 일제 시대를 버텨낸 국보 1호 남대문이 말이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네 곳에 실록을 보관했던 조상들의 지혜와, 실록의 중요성을 알고 전란 중에도 실록을 이고 지고 산으로 피신했던 선비들의 노력이 참으로 눈물겹고 자랑스럽다.
조선은 정말 기록의 나라고 유학자들의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은 좀 더 조명되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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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을 고백하다 백제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의 재발견 1
이희진 지음 / 가람기획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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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제목에 확 끌려 신간 신청한 책.
230여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인데 4~5세기 한반도 남부로 주제를 한정시켰기 때문에 부족하지 않다.
분량에 비해 책값이 비싼 게 흠이랄까?
이희진씨의 책은 <전쟁의 발견> 을 통해 오래 전에 접했고 백제와 고구려, 왜, 신라 등이 대립한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묘사해 관심있었던 차다.
학위 주제였던 임나일본부설에 관한 책도 읽어 보고 싶었는데 너무 오래 된 책이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머릿말을 보니 아마도 그 책을 다시 손봐서 시류에 맞는 제목으로 편집한 것 같다.
급조된 책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은 신뢰가 간다.
그러나 제목과는 다르게 근초고왕에 대한 고백은 거의 없고 5세기 무렵의 한반도 정세에 관한, 더 정확히는 임나일본부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근초고왕에 대한 자료가 워낙 적기 때문에 가필을 하지 않는 이상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뒷쪽의 성왕 부분이 더 자세하고 흥미롭다.
성왕의 관산성 전투야 말로 가장 극적이고 백제 역사를 바꾼 일대 사건이지 않았나 싶다.
일본서기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진실이다.
사실 그 점에서 자료의 취사선택이 공정했나 의문이 생긴다.
저자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데 특정 부분에서는 그 쪽 자료를 근거로 대고 있어 자칫 아전인수 격의 해석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신공황후조의 기록은 아다시피 다 날조다, 이렇게 끝내고 마니 일본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과연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겠다.
식민사학자들도 김부식의 삼국사기 중 삼국의 성립 시기는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기록에 신뢰를 보내고 있다. 

저자는 광개토대왕비문에서 5만 대군을 신라에 원조하려고 보낸 부분에 대해, 실제 왜의 세력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 아니라 한번에 기선을 제압하려고 엄청난 대군을 파병했다고 해석하는데, 그다지 매끄럽지가 않다.
이런 식으로 정황적 해석을 하려면 그에 따른 실제적인 증거, 이를테면 다른 기록이나 고고학적 발굴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비문에 왜구 세력이 신라을 에워싸 5만이나 되는 대군을 보내 물리쳤다고 쓰여 있다면 (그것도 일본이 아닌 고구려쪽 기록에) 그만큼 왜의 침공 규모가 컸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임나일본부의 정체도 참 모호하다.
우리 역사에서 임나라고 하면 일본의 고대사 왜곡이라고만 알려져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책일 보니 아마도 백제를 주축으로 한 가야, 왜 연맹체 정도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일단 가야가 한 국가가 아니고 마한처럼 여러 소국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공동 집단으로 묶은 것이 임나이고, 거기에 같이 끼여서 대표를 보낸 게 왜, 주도자는 바로 백제라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에 의해 움직이는 오늘날의 나토와 같다고 비유했다.
삼국사기에도 임나라는 얘기가 나오는 모양인데 대체 임나의 정체가 뭔지 좀 더 알아보고 싶다.
일본측에서는 이 기록을 들어,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어찌 됐든 고대 한반도와 왜가 이렇게까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 미처 몰랐고 상당히 신선하다.
일본 식민지 시절 이 기록이 악용되어 내선일체 등의 어이없는 구호 등으로 연결되긴 했지만 고대사에서 일본의 존재는 한반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낙랑군처럼 임나 역시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 어쨌든 우리 땅에 존재했던 역사의 일부이니 보다 객관적이고 치밀한 고증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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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화자기 - 대륙의 역사와 문화를 담는 그릇
황윤.김준성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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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재밌게 쓰여진, 특히 도판이 훌륭한 책.
230여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지만 도자기 사진들이 선명하게 많이 실려 있어 보는 내내 즐거웠다.
중국 청화자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한 셈.
이 도자기들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중국이나 대만의 박물관으로 가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결국 그런 기회는 안 오겠지만) 세계 여러 나라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면서 차분히 감상해 보고 싶다.
언어와 시간, 그리고 돈이 항상 문제다...  

백자 위에 그려진 화려한 청화 무늬는 코발트라는 안료 덕분에 가능했다.
청대로 오면서 안료와 유약의 발달로 마치 수묵화를 그리듯 농담 표현까지 자유로워졌다.
도자기가 투명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까닭은, 고령토라는 태토의 우수함과 1300 도의 고열로 가공하기 때문인데 이런 자기를 경질도기라고 한다.
예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베트남 도기들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중국 도자기와는 다른 (코끼라 형상이라든가) 독특한 미학이 있어 관심이 가면서도 왜 투명한 느낌이 없을까 의아했는데 좋은 흙으로 높은 온도에서 구워 내는 게 바로 기술력의 차이였던 것 같다.
지금 봐도 이렇게 눈이 황홀한데 공산품이 없었던 17,18세기에 아시아와 유럽인들이 청화자기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열광했을지 짐작이 간다.
황제들의 고급스러운 취향도 도자기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옹정제의 경우는 직접 법랑채의 밑그림까지 그렸을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안료가 더욱 발달하여 나중에는 법랑채나 분채 같은 다양한 채색자기도 등장한다.
기계도 아닌 수공업으로 이렇게 화려한 자기를 생산해 내다니, 중국 도공들의 솜씨가 그저 놀라울 뿐. 

책 뒷면에 참고도서들이 수록되어 좋은 책들을 많이 소개받았다.
청화자기 뿐 아니라 중국 도자 역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고, 유럽 자기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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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음식 문화사
왕런샹 지음, 주영하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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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신간 출시됐을 때 도서관에 신청했다가 못 읽은 책이다.
두께가 상당해서 약간의 중압감을 느꼈는데 의외로 술술 읽혔다.
중국 음식의 기원과 발전 상황에 대해 알고 싶었는데 역사적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나라 음식 문화사였다면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자도 잘 모를 뿐더러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인지 감이 안 잡혀 술술 읽었다.
그래도 꽤 흥미로웠다.
음식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가 아닐까?
공자가 한 말, <음식남녀>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식욕과 성욕을 뜻한다.
지금이야 기아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실감을 못하겠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을 정도로 굶주림에 대한 공포감이 심했을 것이다.
그러니 먹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이었겠는가.
인류의 발달사는 농경과 토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잉여 작물을 보관하기 위해 토기가 만들어지고 계층이 분화되면서 이 그릇들은 청동기로 만들어져 의기화 된다.
음식에 대한 가장 빠른 기록인 주례를 위주로 소개하는데 왜 중국인들이 고대 서주 시대를 이상향으로 삼았는지 실감이 날 만큼 주나라의 예기 문화는 참으로 철저했다.
신분에 맞춰 부장품을 묻었기 때문에 무덤만 봐도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3첩, 5첩, 7첩 반상등도 모두 주나라에서 시작된 음식 예절 문화였다고 하니 가히 그 영향력을 알 만 하다. 

제일 인상깊었던 말은, 사람의 위는 한계가 있어 일정 수준 이상의 음식은 모두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눈으로 먹는다는 말이 있다.
가끔 한정식 집에 가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져 다 못 먹고 나올 때가 있는데 돈 아깝고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보니 맛으로만 즐기는게 아니라 눈으로 같이 먹는다는 의미였나 보다. 
부유한 사람은 눈까지 호사를 해야 하니 많은 양의 음식이 필요했고, 가난한 사람은 능력이 없으니 배가 찰 정도 밖에 못 먹는 것이다. 
그래서 예는 서인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고 했나 보다.
예를 지키려면 돈이 많이 들고 여력이 없는 사람은 체면을 차리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음식에 관한 어떤 책에서는 눈으로 먹지 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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