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일가 복식
국립고궁박물관 지음 / 국립고궁박물관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이 곳을 가면 원래 읽으려고 했던 책은 놔두고 꼭 다른 책에 먼저 눈이 간다.
보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이런 비싼 도록들은 이 곳 도서관이 아니면 절대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읽게 된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영친왕비가 입었던 적의 같은 것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본격적인 도록으로 출간한 모양이다.
가격은 무려 10만원!
책 무게가 굉장하다.
사진이 얼마나 세밀하게 잘 찍혔는지, 실제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섬세하다.
자수 부분 등을 확대해 놓은 사진을 보면, 실 한 올 한 올의 질감까지 느껴진다.
복식에 관심이 많다면 소장해도 좋을 도록이다.
영친왕과 왕비, 아들 진과 구의 복식, 장신구 일체가 실려 있다.
일본에서 결혼한 후 큰아들 진을 낳고 형인 순종 내외를 알현하러 왔을 때 입었던 복식이 대부분이다.
그 가엾은 큰아들 진은 8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둘째 구가 태어난다.
이 분이 미국 여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분이다.
영친왕은 키가 굉장히 작아 이방자 여사와 거의 비슷하고, 생김새가 고종을 닮기 보다는 어머니 엄귀비와 비슷한 것 같다.
솔직히 젊은 시절의 모습은 그다지 매력적인 왕자님은 아닌 듯.
일본 육군 장교로써 군을 시찰하는 사진 등은 식민지 시대 왕자로 태어난 시대적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조선 하면 어쩐지 소박하고 검소한 문화, 혹은 백의민족 등이 떠오르는데 궁중 문화는 확실히 선비들의 사대부 문화와는 격이 달랐던 것 같다.
중앙박물관에서 본 조선 시대 옷이나 장신구, 가구들을 보면 굉장히 단아하고 소박한 멋이 있는데, 궁궐에서 쓰는 물건들은 그 화려함과 다채로움에 정말 깜짝 놀랬다.
의례복 뿐 아니라 평상시에 입는 상복 등도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 색색의 비단으로 지었는지, 또 문양은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지 감탄했다.
전통적인 방식의 염색일텐데 분홍, 자주, 녹색, 청색 등 옷감의 색깔이 하도 고와서 몇 번을 들여다 봤다.
대부분 비단천인데 민무늬는 거의 없고 고운 문양이 다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자수 장식도 정말 아름답다.
재봉질 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손바느질이라 책의 설명대로 당시 침방 나인들의 뛰어난 바느질 솜씨를 엿볼 수 있었다.
여느 왕실 못지 않은 화려함에 정말 놀랬다.
또 장신구나 그것을 보관하는 상자와 보자기 등이 얼마나 다채롭고 화려한지!
특히 머리를 장식하는 비녀나 뒤꽂이 등은 온갖 보석들로 꾸며서 감탄 그 자체였다.
희한하게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악세사리는 전혀 없고, 반지도 장식이 전혀 없는 단아한 옥반지 같은 걸 끼는데 머리 장신구들 만큼은 정말 화려하다.
한복에는 치렁치렁한 악세사리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인가?
이 머리 장신구만큼은 사대부가의 마님들도 매우 화려했던 것 같다.
노리개와 주머니 등도 색감이나 자수 문양이 정말 아름다웠다.
이런 장신구를 보관하는 상자는 비단천으로 곱게 싸서 그 자체만으로 감상의 미가 있다.
누가 조선의 문화를 소박하다고 했던가!
유럽 왕실 못지 않은 화려함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뒷쪽에 실린 유물 기증 과정을 읽어 보니, 원래 이 복식은 이방자 여사가 도쿄국립박물관에 위탁했던 것이라고 한다.
88서울 올림픽을 기념하여 도쿄박물관에서 우리나라 전시회를 기획했는데, 조선 왕조의 복식들이 일본에게 넘어가 전시회를 열게 되면 여론이 나쁠 것이라 우려한 우리 박물관 측에서 이방자 여사와 도쿄 박물관을 설득해 결국은 반환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가 일본을 방문해 한일 정상회담을 했는데 이 때 성과로 복식들을 돌려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지 위탁한 건데 그냥 돌려 받으면 안 되나 싶기도 한데, 책에 따르면 아마도 그냥 맡긴 것은 아니고 뭔가 반대 급부가 있었을 거라 무조건 달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만약 이런 중요한 유물이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동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면, 우리로서는 조선 시대 궁중 의상을 실제 볼 수 없을 뿐더러, 이것을 일본에 가서 봐야 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야 말로 식민지 지배를 상기시키는 슬픈 현실이 아닌가.
다행히 일본 정부가 원만한 외교를 위해, 또 이방자 여사의 입장을 배려해 유물 일체를 반환하기로 결정해서 지금은 고궁박물관에서 이 복식들을 볼 수 있고, 도록까지 나와 많은 사람들이 열람할 수 있다.
이런 걸 보면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의궤들도 어서 빨리 돌아와 연구가 진행되야 할텐데 안타깝다.
프랑스에 있어 봤자 그 사람들에게 무슨 중요도 있겠는가. 

실제 착용 사진이 없어서 좀 아쉽긴 하지만, 궁중 복식과 장신구를 볼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고 다음에 박물관에 가면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자세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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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그림 수집가들 -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니 모으게 되더라
손영옥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비교적 재밌게 읽었다.
신문 기자들이 쓴 책은 여기저기 발표한 기사들을 모아 엮은 게 많아, 나중에 한 권의 책으로 보면 시의성이 떨어진다거나 글의 전문성이 결여된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이 책은 그런데로 읽을 만 하다.
무엇보다 과도한 감상 찌꺼기가 없어서 읽기 편하다.
요즘 유행하는 미술품 수집 열풍에 힘입어 가까운 조선 시대로 범위를 넓힌 점이 참신하다. 

책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아쉬운 오탈자나 잘못 알려진 사실을 기록한 게 몇 개 있어 먼저 언급한다.
1) 예종은 29세에 사망한 게 아니라 19세에 사망했다
2) 계유정난은 문종 4년이 아니라 단종 1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3) 헌종의 원비는 효헌왕후가 아니라 효현왕후다.
4) 헌종의 계비는 보통 효정왕후라 부르지, 명헌왕후라 하지 않는다.
   명헌은 후에 대비가 되서 받은 존호다.
5) 가장 큰 문제인데, 연산군이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을 강간하여 자결케 했다거나 인수대비를 구타하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은 명백히 야사에 불과하다.
<조선국왕이야기> 2권에 보면 월산대군 부인은 연산군 보다 20여 세나 많은 연상이고 계모였던 정현왕후를 대신하여 일종의 유모처럼 연산군을 어려서부터 맡아 키운 것으로 되어 있다.
<금삼의 피>와 같은 소설에 삽입되어 널리 유포된 야사에 불과함이 요즘에는 인터넷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왜 간단한 사실 확인도 없이 책에 삽입했는지 모르겠다.
더 성실한 집필 태도가 요하는 부부인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컬렉터는 안평대군이다.
본인이 조맹부의 송설체를 본받아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도 했던 이 왕자는, 당대 최고의 컬렉터였다.
서른 여섯이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만, 다행히 신숙주가 보한재집이라는 자신의 문집에서 안평대군의 수장 목록을 기록해 자취를 남긴다.
안견의 작품 뿐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그림 등을 147점이나 소장하고 있었다는데 대체 그 귀한 그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전반적인 생각은, 조선 시대 서화 감상의 한계가 바로 완물상지인 것 같다.
물건에 집착하면 뜻을 잃는다는 이 말은 조선의 그림 수집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끝나고 만,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다.
예술 지상주의가 발전하기에는 성리학적 틀이 너무 견고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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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 김순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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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페이지 정도 되는 아주 얇은 책인데 내용이 심오하다.
너무 쉽게 쓰여져 이해하기 편했다.
신문의 북리뷰에서 보고 도서관에 신청한 책이다.
이런 얇은 책이 만 원이라니, 만 원의 화폐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 계기였다.
하여튼 책 판형도 작고, 표지도 예쁘고 읽기도 편하다.
저자가 1915년 생이라고 하니, 올해 나이가 무려 95세!
그런데도 책을 쓸 수 있는 그 체력과 열정이 놀랍다. 

정치적 평등에 대해서는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현대는 너무 바쁘고 정치에 무관심한 게 대부분의 젊은이들이니까.
심지어 정치에 무관심할수록 좋은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정치하면 어쩐지 권력 집단의 헤게모니 장악 싸움 같고 지역감정이 떠올라서 흔히 얘기하는 사회 정의나 민주주의 같은 위대한 가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 혹은 소외가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회가 커갈수록 정치적 평등은 멀어져만 간다.
규모가 커지니 다 모일 수가 없고, 모두에게 발언권을 줄 수도 없기 때문에 시간과 규모의 제한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대표를 뽑고 그에게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사회가 팽창하면서 대표는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을 대신하게 되고, 이들의 의견을 전부 경청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지극히 제한된 소수의 지역구민과만 대화하게 된다.
또 시민들은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
이것을 정치적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라고 한다.
먹고 살만 해야 권력에의 의지가 생기고 특히 경제 엘리트 집단의 경우 쉽게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돈이 뒷받침 되면 다음은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게 순서다.
9.11 테러 같은 국가적 위기가 닥쳐도 시민들의 정치적 평등은 제한된다.
위기 상황이 되면 행정부는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되고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권한을 더 많이 양도한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늘 위기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정치적 불평등을 더욱 조작한다.
신기하게도 국가가 통제하는 사회주의는 시장에 의해 생산과 가격이 결정되는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더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며 비효율적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이 시장경제에 의해 소외받는 하층민들은 더욱 불평등이 심화되어 정치적 평등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우리에게 대안이 있을까?
저자는 소비 문화에 한계 효용의 법칙을 대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곧 미덕이고 일정 기준선까지는 많이 소비할수록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수준을 넘어서면 아무리 소득이 늘어도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소득 증가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를 우월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일종의 과시재이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애쓴다.
요트를 가졌으면 안 가진 사람에 비해 우쭐하고 자부심을 느끼지만, 더 큰 요트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기가 죽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컨대 이 시기심이야 말로 끝없는 경쟁의 나락 속에 인간을 압사시키는 주범인 것이다.
저자는 소비 문화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그 때부터는 사람들이 정치적 권리를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시민권이 소비 문화를 이길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60년대의 반문화, 히피 문화처럼 말이다.
소비주의에서 시민권으로의 변화,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아쉽게도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에 논의는 여기서 끝난다. 
내가 좀 더 살아봐야 할 일이다. 

정치적 평등이 민주주의의 목표이면서도 이 당연한 권리를 얻기 위해 수많은 도전과 노력들이 있었다.
18세기 이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는데 칸트의 순수이성론과는 다르게 저자는 롤스 식의 공리주의적 정의를 그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 일이 옳은 일이고 그것을 실행하므로써 내적 즐거움을 느끼는 도덕적 명령, 즉 이성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저자는 공정함에 대한 감각, 열정 때문에 정치적 평등을 추구한다고 했다.
사실 이 말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들린다.
원숭이의 예에서도 보듯, 인간 역시 공정함에 대한 본능적 감각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다른 동물들 보다 훨씬 민감하다.
어떤 계층이 특권을 가졌다면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감각 말이다.
보통 상위계층은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종교나 철학의 힘을 빌린다.
이를테면 왕권신수설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층민은 이 부당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회의 변화가 무르익어 역전시킬 기회가 오면 뭉치고 일어난다.
이 혁명에의 위협이 상위층으로 하여금 특권의 일부를 내놓도록 만든다고 했다.
제임스 밀은 폭력을 수반한 혁명이 실제로 일어나서는 안 되고 다만 위협으로 그치면서 상위 계층이 하위 계층에서 특권을 양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했다.
공정함에 대한 타고난 감각과, 혁명, 즉 현재의 질서와 안정이 깨진다는 두려움이 상위 계층으로부터 권력을 쟁취하는 힘이었다고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움직임은 열정에 기초한 것이므로 임시적이고 매우 가변적이다.
그러므로 영구하게 존속시킬 수 있도록 법과 제도로 명시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의 열정이 사라진 후에도 하층민은 권리를 지속적으로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정치적 평등에 대한 좋은 고찰의 시간이었고 정치에 좀 더 관심을 갖고 내 권리를 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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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 톨스토이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인생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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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신간 신청을 해 놓고 계속 못 읽다가 해가 바뀌고서야 겨우 읽게 됐다.
의외로 작은 판형에다가 내용이 가벼워 좀 놀랬다.
저자인 석영중씨라면 <러시아 정교>를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좀 어려울 줄 알았는데 굉장히 쉽게 쓰였고 저자가 상당히 글솜씨가 있어 문장이 한 번에 쉽게 읽힌다.
마치 주경철씨 저서를 읽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용이나 주제의 전문성 못지 않게 저자의 문장력도 가독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이상하게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직 제대로 접하질 못했고, 톨스토이 작품들은 그런대로 읽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특히 러시아의 대화가인 레핀의 초상화가 너무나 인상적이라 톨스토이 하면 어쩐지 성자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그는 50대 이후 자신의 인세를 포기하고 영지를 소작농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을 해방시키려고 애썼다.
아내 소피야와의 갈등 때문에 다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책에 나온대로 노동의 신성함을 실천에 옮기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성자로 추앙받기도 했다.
비록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파문당했지만.
사실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성자 같은 삶을 산 (즉 청빈의 삶) 톨스토이가 왜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약간은 이상한 쪽으로 묘사됐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책을 보면서 비로소 이 문호의 극단적인 사상에 대해 조금은 이해를 하게 됐다.
그가 주장했던 것들은 따지고 보면 오늘날 현대인이 추구하는 웰빙의 삶이다.
환락과 사치가 만연한 도시를 떠나 맑은 공기와 자연이 있는 시골로 돌아가 땀흘려 일하고 소박한 음식을 먹고 가족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단순한 삶!
현대인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헨리 소로우의 삶이 아닌가.
술과 담배와 마약과 도박, 섹스 등을 멀리해라.
더 좋은 건 육식을 포기하고 채식만 해라.
현대인들이 얼마나 좋아할 소리인가.
채식주의가 무슨 유행처럼 대단한 이념과 사상인 양 포장되고 있는 요즘 시류에 정말 딱 들어맞는 주장들이다. 

톨스토이가 육식을 금하라는 것은, 정욕의 억제와 관련이 있다.
도살 자체가 비인도적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음식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를 자제함으로써 섹스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고 노동을 통해 기쁨을 얻는 소박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톨스토이는 섹스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했다고 한다.
소작농의 아내와 바람을 피워 소피야를 미치게 만들기도 했다.
욕구가 강했기 때문에 더욱 금욕적이 되라고 설파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강한 통제라고 할까?
따지고 보면 그가 섹스에 강렬한 욕구를 느끼지 않았다면 그렇게도 섹스를 혐오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확실히 섹스를 혐오하는 사람은, 무의식 중에 끝없이 섹스를 동경하고 그 욕구에 괴로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마치 내가 먹는 것에 집착하면서도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억누르듯 말이다. 

심지어 톨스토이는 소박한 삶을 위해 예술도 다 쓰레기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한다.
사실 이 부분에서는 너무 놀라 정말 이랬을까 싶기까지 했다.
그 자신이 위대한 소설가이면서도 귀족 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예술의 퇴폐적 기능을 비판하고 오직 착한 감정을 전파시키는 교훈적인 이야기만 예술로써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작품 역시 다 쓰레기고 그것으로 인세를 번다는 사실에 대해 늘 괴로워 했다.
톨스토이에 따르면 정부에서 귀족들을 위한 예술, 즉 오페라나 클래식, 발레 등 고상한 척 하는 공연 예술에 보조금을 쏟아 붓고 정작 민중의 대다수는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민중이 즐기는 것에는 전혀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일컫어지는 푸슈킨의 동상 건립마저도 대체 저게 무슨 의미가 있는 짓이냐고 비판한다.
대다수의 민중들은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존심 때문에 결투 벌이다가 죽은 천박한 시인의 동상 건립이 왜 이슈가 되냐고 비난한다.
고급 예술로부터 소외된 민중을 위한 톨스토이의 관점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야 말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지극히 불평등한 장르이고 보면, 고급예술에 대한 특혜는 어쩔 수 없는 부분 같다.
오히려 예술의 궁극적 목적이 감각적 만족, 아름다움의 추구, 정신적 쾌락에 있는 게 아니라 감정이입, 상호간의 감정 교류에 있기 때문에 선, 즉 착한 감정을 전파시키기 위해 교훈적인 것들, 즉 우화 같은 것만 진짜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그 교조주의적인 톨스토이 사상이 놀랍다.
이건 공산주의의 인민 예술과 비슷하지 않은가?
사실 톨스토이가 진정한 사상가이자 도덕주의자로 추앙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도 이러한 지나친 교조주의에 있지 않나 싶다.
어떻게 보면 말만 번지르하게 내뱉고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위선가들 보다는 훨씬 위대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사상에 지나치게 철저한 나머지 거기에 너무 집착해 외골수로 빠진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열 세 명의 아이를 낳으면서 남편의 작품들을 정서하느라 평생을 보낸, 지극히 평범한 욕망의 소유자였던 아내 소피야로서는, 이러한 "위대한 사상가" 톨스토이를 이해한다는 게 너무너무 어려웠을 것이다.
피아니스트와 플라토닉 러브를 갈구했던 소피야의 외로움과 고단함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책은 <안나 카레리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당시에도 재밌게 읽었지만 이 소설이 톨스토이의 이런 심오한 뜻을 전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대답이 바로 이 책일 것이다.
그의 디테일한 묘사를 읽다 보면, 저자의 찬사대로 정말 타고난 작가이고 위대한 문호임이 분명하다.
어쩜 이렇게 세세하게 캐릭터와 상황을 묘사한단 말인가.
도덕주의자로 빠지면 맥빠진 성인군자처럼 변하기 일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의 캐릭터는 놀랍도록 정교하다.
다시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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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 충격과 공포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5
김태권 지음 / 길찾기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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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을 먼저 구입해서 읽었고 1권을 읽어야지 벼르기만 하다가 항상 대출 중이라 못 읽어서 늘 미진했던 책이다.
드디어 근 몇 년만에 1권을 읽게 됐다.
2권 읽을 때만 해도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고 감이 잘 안 잡혔는데 그동안 중세에 대한 약간의 지식도 쌓여서인지 1권은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내친 김에 2권도 다시 한 번 읽게 됐다.
작가의 원 계획은 5권까지 스토리가 잡혀 있었던 모양이다.
겨우 두 권에 그친 후 소식이 없어 아쉽다.
아마 본격적인 역사서로 읽었다면 굉장히 지루하고 빨리 머릿속에 들어 오지 않았을 거다.
작가가 재밌게 풀어 쓴 덕분에 적어도 은자 피에르, 기사 르노, 2권의 주인공 보에몽 공작 정도는 확실히 알겠다. 

책에서 못마땅한 점을 들자면 현대 정치사에 역사적 사건의 교훈을 지나치게 많이 대입시킨다는 점.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십자군 파병과 연결짓는 시도는, 뭐 한 두 번이야 작가의 소신으로 이해한다 쳐도, 이건 도대체 전 권에 걸쳐 끊임없이 등장하니 읽는 사람 입장으로서는 산만하기 그지없고 따지고 보면 꼭 들어맞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거부감만 더 생겼다.
본격적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다루는 책도 아니면서 곁가지를 마치 중심 주제처럼 부각시켜 십자군 전쟁이라는 큰 틀을 아주 많이 흔들어 놓는 꼴이 되버렸다.
어떤 역사가든 마찬가지지만, 과거의 역사를 현대의 사건에 대입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그야말로 절제가 필요한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지난 번 김종성의 책에서도 강감찬 장군과 박정희 연결 시도가 너무 황당해 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는데 이 책의 저자 역시 자기 책의 진가를 스스로 깍아 먹고 있는 꼴이 되버렸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부분은, 현재 이슬람을 테러 집단으로 몰고 가는 미국의 우익 세력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은 평화와 관용의 종교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슬람의 침략사까지 미화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건 뭐, 오리엔탈리즘의 반작용으로 오히려 옥시덴탈리즘을 추구하는 꼴이랄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우즈베키스탄 전시회에 대한 도록을 읽던 도중 이런 부분이 나왔다.
원래 이 곳은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의 문화가 혼합되어 발전했는데, 8세기 이후 이슬람이 침략하면서 당시의 토착 문화 상당 부분을 훼손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우즈베키스탄은 완전히 이슬람화 되어 있다.
어떤 문화나 세력이든 힘을 가지면 그것으로 타자를 억압하게 마련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강압과 훼손이 될 수 밖에 없다.
십자군 전쟁이 성전이 아니고 경제적 이윤을 위해 동방으로 향했다는 진실을 파헤치는 것까지는 좋지만, 서유럽의 팽창주의를 너무 비판하다 보니 반작용으로 이슬람의 포교 행위는 모두 평화적이고 자발적이었고 침입을 받은 민족들은 오히려 그들을 반겼다, 라는 식으로 포장하는 건 위험하다.
한 쪽에 대한 비판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쪽에 대한 찬사로 둔갑해서는 안 된다.
그것 역시 역사 왜곡이다.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겠으나 역사가라면 자신의 주관과 이념에 너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이고,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보다 날카로운 식견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에서는 자국의 역사에 대한 해체주의가 폭넓게 시도된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그럴 듯 하게 포장되고 미화된 역사를 보다 날카로운 시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자크 르 고프의 십자군 비판도 이런 맥락이 아니겠는가. 

하여튼 복잡다단한 십자군 원정에 대해 만화로 쉽게 설명해서 재밌게 읽었고, 원 계획대로 다음 이야기도 빨리 출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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