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 철의 왕국, 국립중앙박물관 명품선집 07
김정완.이주헌 지음 / 통천문화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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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야라고 하면 막연히 삼국 시대에 낙동강 끄트머리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만 알고 있다.
오히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더 유명해진 느낌도 든다.
끝내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연맹체 수준에서 신라에 합병되고 말았기 때문에 그 전의 변한이나 진한, 마한 시대처럼 알려진 것이 적지 않나 싶다.
그러나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되고 있는 만큼 보다 입체적인 역사를 그려낼 수 있길 바란다.
요즘 드라마에서도 김수로를 조명하고 있는데 계기가 되어 보다 가야 문화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가야는 철 생산의 중심지로 낙동강 하구를 이용해 일본과 교역하면서 성장한다.
그래서 철의 왕국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 같다.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처럼 일찌감치 제철기술이 도입되어 철기를 만들고 덩이쇠를 수출하면서 중심세력으로 부상한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가야의 실체를 기원 전후가 아니라 3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얼마 전에 읽은 <철의 왕국 가야>의 저자와는 전혀 다른 시각인데 아마도 3세기 후반을 정설로 보는 게 학계의 중론인 것 같다.
그 전의 역사는 3한 시대로 보는 것이다.
즉 변한과 진한의 시대로 보고, 본격적으로 가야가 성장한 것은 3세기 후반부터 신라에 의해 멸망하는 6세기 무렵까지를 가야 역사로 본다.
이 쪽이 더 고고학적 증거나 정황에 부합할 것 같다.
허황옥이나 석탈해 등의 신화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이 없어 아쉽다.
아마 고고학적 증거들이 없는 상황이라 언급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처음에는 철이 풍부한 김해를 중심으로 금관가야가 세력을 넓혔는데 5세기 무렵 고구려가 남정하여 낙동강 유역의 교류를 장악하고 후에는 신라가 주변으로 진출하면서 가야 연맹의 주도권은 내륙의 대가야로 넘어간다.
고령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대가야는, 479년에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관직을 수여받을 정도로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기도 한다.
새롭게 안 사실은, 신라가 여러 가야들을 복속시킨 게 6세기지만, 이미 그 전부터 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금관가야 등의 낙동강 하구 근방의 가야 소국들이 신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형 고분들이 사라지고 부장품으로 신라토기들이 등장하며 신라에서 하사받은 위세품들이 발굴되는 것을 증거로 들고 있다.
그 외의 알려진 가야로는, 함안을 중심으로 한 아라가야, 고성을 중심으로 한 소가야, 한천 옥전고분군의 주인인 다라국 등이 있다. 

가야의 무덤은 네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먼저 덧널무덤인 목곽묘다.
전기가야 때 이런 양식인데 부장공간이 커서 대형고분이 많고 유물을 넣어 두는 부곽과 순장도 함께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음은 구덩식돌덧널무덤, 즉 수혈식석곽묘로 구덩이를 파고 주변에 돌을 쌓아 네 벽을 설치한 다음 시신을 안치하고 천장돌을 덮은 후 봉분을 올리는 양식이다.
5세기 무렵부터 유행했다.
그 후에는 앞트기식돌방무덤, 즉 횡구식석실묘가 생겼는데 이것은 아치형으로 한 면을 입구로 만들어 추가장이 가능했고 땅을 파고 묻는 게 아니라 지상에 묘광을 설치했다고 한다.
마지막 6세기로 오면 굴식돌방무덤인 횡혈식석실묘가 유행한다.
묘도와 널길, 널방, 둘레돌, 봉분 등을 갖춘 양식이다.
정확히 이해한 것은 아니고 나중에 사진 자료를 참조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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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선과 도자기 길 - 국립중앙박물관 명품선집 18
김영미 지음 / 국립중앙박물관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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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쓴 김영미씨는 중앙박물관의 큐레이터로 그냥 보기에는 평범한 아줌마 같은데, 설명을 찬찬히 잘 하신다.
박물관에서 신안선에 대한 전시회를 여러 번 개최했기 때문에 몇 번 본 적이 있다.
배에 실린 만 점이 넘는 도자기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는데 마침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어 반갑게 읽었다. 

잘 알려진대로 신안선은 원나라 시대 중국의 영파 항구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던 중 난파당하여 신안반도에 침몰한 것을, 1975년에 어부의 그물에 걸린 도자기를 보고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얼마 전에 발견된 태안선은 고려 시대 강진에서 개경으로 가던 도자기 수송배인 반면, 신안선은 원거리 교역을 하던 국제선이고 한국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고려청자가 7점 정도 발견됐고 당시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교역 실태를 알 수 있는 엄청난 발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일 관심이 갔던 건 역시 도자기였다.
전시실에 가 보면 온갖 종류의 도자기들이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고려청자의 청아한 비색과는 다른 불투명하지만 너무나 선명하고 고운 분청색의 도자기들이 자태를 뽐내는데 이것은 용천요의 특징이라고 한다.
저장성 도자기인 용천요는 신안선 도자기의 60%를 차지할 만큼 그 수량이 많다.
막연히 도자기는 청자나 백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복건성의 건요에서 만들어진 흑유자기나, 강서성의 길주요에서 제작한 백지흑화, 경덕진요의 청백자 등 다양한 종류의 자기가 있었다.
역시 도자기가 처음 시작된 나라이고 땅이 넓다 보니 개성도 정말 다양한 것 같다.
특히 송나라 휘종이 차를 즐겨 마셔 유명해졌다는 건요의 흑유자기는 검정색 잔이라는 독특한 미감을 뽐낸다.
북방자기로 유명했던 하남성의 균요를 모방한 철점요는 자주색을 띈다.
이 균요는 백탁유를 칠해 회색을 띄었다고 한다.
경덕진요에서 많이 생산된 백자나 청백자의 경우, 조선의 백자처럼 맑고 청아한 색이 아니라 유탁청유를 시유하여 투명도가 떨어지고 유층이 두툼해 조선백자와는 또다른 느낌이 난다.
이것은 점요의 상아색을 모방했다고 한다.
길주요의 백지흑화는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그림을 그린 것인데 주로 민간 도자기를 만들었던 하북성의 자주요에서 시작된 수묵화 기법을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 백자에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린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기하학적 도형이 매우 개성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의 고려청자는 남방청자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절강성의 월요에서 건너 온 도공들이 9세기 무렵 정착하면서 전해졌고 12세기에 이르면 고려청자만의 독특한 색인 비색을 얻게 되어 개성있는 미감을 뽐내게 된다. 

대체적으로 중국 도자기의 느낌은 고려청자처럼 단아하고 우아하다기 보다는, 매우 화려하고 정교한 느낌을 준다.
도자기가 생활용품으로도 많이 쓰였겠지만 바다를 건너 오는 이런 상품 도자기들은 주로 귀족의 집안을 장식하고 불교 의식을 행하는 의례 용기로 쓰였다.
향로가 특히 많아 당시에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는 다도 문화가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로 치면 향수를 뿌리고 커피를 마시는 모임이라고 할까?
가마쿠라 막부 시절 중국 문화가 대거 유입되면서 일본에서는 자기에 꽃을 꽂아 놓고 감상하는 花會나, 차를 마시는 다도 모임, 와카를 짓는 모임 등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원에서 뿐 아니라 귀족들의 자기 수요도 엄청났다고 한다.
어찌 보면 무사들이 이런 우아한 취향을 가졌다는 게 약간 의아하긴 한데 서양의 성주나 기사 계급 같은 전쟁을 수행하는 귀족 계층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중국 문물은 수집과 감상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 외에 덩이쇠나 자단목, 동전 등의 수입품도 많았지만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부분이라 간략하게만 설명하고 넘어갔다.
신안선은 14세ㅣ 무렵 중국과 일본의 활발한 교역 상황을 알려 주는 실제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
당시로서는 중국 문화가 최첨단을 달리는 세계적인 문화였을테니 고려나 일본에서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고자 했던 사정이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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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마을풍경
국립중앙박물관 지음 / 그라픽네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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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요시노가리 특별전>에 대한 도록 덕분에 이 책은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의 수준도 요시노가리전에 비하면 상당히 쉬운 편이다.
또 이 전시회는 올해 중앙박물관에서 열렸기 때문에 직접 다녀 왔고 큐레이터의 설명도 들었던지라 훨씬 친숙하다.
청동기 시대 구분에 대해서는 깊게 파고들지는 않고 대략적인 설명으로 그친다.
전시회 할 때 직접 마을도 만들어 놓고 논밭이나 무덤 등도 보여 제작해서 입체적인 이해를 도왔다.
요시노가리전을 읽을 때 대체 청동기 시작을 알리는 각목돌대문토기가 뭔가 하고 궁금했는데 이 책의 사진을 보니 금방 이해가 된다.
박물관에서 흔히 보던 민무늬 토기로, 구연부 아래에 점토띠를 두르고 그 띄를 사선무늬로 장식한 토기였다.
또 공렬토기는 구연부 아래로 구멍을 일려로 뚫어 놓은 토기다.
사진과 설명을 보니 금방 매칭이 된다.
일괄적인 빗살무늬토기와는 달린 무문토기는 손잡이나 굽다리가 있어 바닥에 세울 수 있고 붉은 간토기나 검은 간토기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굽다리가 달리고 붉은 간토기는 대부분 무덤에서 발굴되기 때문에 의례용으로 보고 있다.
간토기는 전체를 곱게 갈아서 만든 마연토기를 뜻한다.
더 정성을 들였다고 할까?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고인돌과 돌널 무덤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고인돌은 기둥을 세운 북방식과 고임돌이 있는 남방식으로 나누는 줄 알았는데 그 외에도 아예 고임돌 없이 큰 판석만 있는 개석식이 잇고, 요즘에는 무덤방 주변으로 둥글게 돌을 까는 묘역식도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당연히 무덤 하면 매장은 땅을 파서 지하에 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북방식, 즉 탁자식 고인돌의 경우 매장을 지상에 한다고 한다.
그래서 기둥을 세웠나 보다.
돌널 무덤의 경우, 말만 들어서는 대체 어떤 무덤인지 상상이 잘 안 갔는데 책에 만드는 과정이 사진으로 설명되어 있다.
일단 구덩이를 파서 돌로 장방형 무덤방을 만들고, 그 네 벽에 돌을 세운다.
시신을 돌방에 넣은 다음 그 위에 뚜껑돌을 덮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무덤들은 요즘처럼 시신을 넣는 관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신석기 시대에 유행했던 널무덤, 즉 토광묘의 경우는 그냥 구덩이를 파고 바로 시신을 안치한 후 흙을 덮은 게 아닐까 싶다. 

한 가지 의문점은, 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의례용으로 쓰였다고 알려진 청동검들이 피홈의 존재를 들어 실제 살상 무기로 쓰였을 거라고 추측했다.
아마도 홈의 존재는, 사람을 찌른 후 피를 빼는 장치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기존의 학설대로 실제 사용하기에는 불편한 크기이므로 신분을 상징하는 의례용으로 보고 있다.
과연 청동검은 실제 전쟁에서 쓰였을까?
궁금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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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변상도의 세계
국립중앙박물관 엮음 / 지앤에이커뮤니케이션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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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두껍고 표지가 고급스럽게 장정되어 꽤 비싼 책인 줄 알았는데 4만원 정도 한다.
이런 도록들은 도서관에 비치된 경우가 별로 없고 있더라도 대출불가기 때문에 사서 보는 수 밖에 없는데 사기에는 또 부담이 되서 서점에서 들춰 보기만 하고 아쉽게 포기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중앙 박물관의 도서관에 가면 이런 비싼 도록들을 열람할 수 있다.
서가에 꽂혀 있는 걸 보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꺼내 와 읽었는데 내용도 상당히 두툼하다.
2007년도에 일본에 있는 고려의 사경변상도와 전국 각지의 미술관에 산재한 유물들을 모아 전시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봤다면 감지에 금선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변상도들을 한 곳에 모아 놨으니 대단했을 것 같다.
직접 보지 못해 아쉽다. 

사경은 말 그대로 경전을 베껴 쓴다는 뜻이고, 변상도는 경전의 내용을 이미지로 간단하게 압축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외에도 왜 이 경전을 쓰게 됐는지에 관한 발원문이 붙는다.
백지에 먹으로 쓰는 백지묵서도 있지만 대부분 귀족불교였던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므로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인 감지금니경이나 상지은니경이 다수다.
감지는 쪽으로 염색한 종이고, 상지는 도토리 열매로 염색하여 갈색빛이 난다.
이런 염색 종이라야 금과 은으로 그림을 그리면 선명하게 잘 드러난다.
종이 제조 과정에서부터 향을 입힌 닥나무를 재배하였다고 하니 사경에 쓰인 그 정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특히 몽골의 지배를 받던 충렬왕 이후 시대부터는 국왕 발원의 사경 제작이 활발하여 전문 사경원을 설치하고 엄청난 정성과 경제력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경 풍조가 나라를 망친다는 말까지 나오고 숭유억불 정책의 조선이 등장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변상도라는 말이 그림인 줄은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했더니, 승려가 경전을 강의할 때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일화 등을 삽입해 이야기 하는 것을 變文 이라고 하고, 그림으로 나타낸 것을 變相 이라 한다고 한다.
쉽게 풀어 쓴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은 만큼 한국 불교는 전통적으로 선종의 색깔이 강했다.
제일 많이 사경이 이루어진 경전은 묘법연화경, 즉 법화경과 대방광불화엄경, 즉 화엄경이다.
이 중에서도 선재동자가 53인의 선지식들을 찾아 보살행에 대해 질문하는 구도여행을 그린 그림이 가장 많았다.
수월관음도에 등장하는 그 선재동자인데 변상도에서는 관음보다는 맨 마지막에 찾아간 보현보살, 즉 보현행원도가 가장 많이 그려진 것 같다.
사실 이 변상도들은 어찌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거의 똑같은 도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감별이 잘 안 되는데 조그만 꼬마가 등장하는 선재 동자 그림은 금방 알겠다.
불교에 대해 워낙 무지하기 때문에 그 그림이 그 그림인 것 같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불화의 도상은 너무 비슷해 작품 하나하나의 개성이 금방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가느다란 선묘로 그려진 변상도는 더욱 그렇다.
중국의 변상도를 보니 선 외에도 공간감과 입체감을 주는 채색 등이 들어가 있어 고려의 변상도와는 구분이 갔다.
일본의 경우는 고려 보다 더 단순하고 변상도가 그려진 폭도 작은 편이다.
고려의 변상도는 후기로 갈수록 공간을 빽빽히 선으로 채우는 바람에 후대 것은 더욱 그림을 정확히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조선 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을 편 만큼 초기 변상도 외에는 남아 있는 게 없다.
사경을 만드는데 엄청난 돈과 인력이 소비되기 때문에 고려 시대처럼 쉽게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인쇄 문화가 활발해지면서 더욱 줄어들지 않았나 싶다.
물론 고려 역시 인쇄술이 발달했으나, 당시에는 경전을 베끼는 것이 공덕의 일종으로 숭앙됐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가장 오래된 사경은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가 총신인 김치양과 함께 발원한 <대보적경>이다.
일본 교토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그 외에도 고려에서 제작된 다수의 사경들이 일본으로 건너 갔는데 이런 문화재 반출이 식민지 시대에 이뤄진 게 아닌가 싶어 많이 아쉬웠다.
한 가지 새로 안 사실이 원각사탑의 유래다.
효령대군의 회암사 원각법회를 기념하여 세조가 세운 탑인데, 이 원각이라는 말이 석가가 열 두 보살과 원각을 얻는 방법에 대해 논한 원각경에서 나온 말이고, 이 경전은 선문의 3대 소의경전 중 하나라고 한다.
원이름은 <대방원각수다라료의경>이라고 하는데 대방은 대승불교의 대승기신론을 뜻하고, 원각수다라는 화엄경에 나오는 원각수다라을 뜻하는데 수다라는 sutra의 음역이다.
산스크리트어로 sutra가 곧 경전이다.
요의경은 불법의 도리를 말한 진짜 경전이라는 뜻이다.
원각경을 사경한 것도 꽤 된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여 뒷쪽으로 갈수록 흥미가 감소했으나 사경변상도라는 독특한 예술 분야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됐고, 결국 발원하는 이들의 깊은 신앙심이 바탕이 됐기 때문에 문화예술적 접근보다는 종교적 접근이 이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큰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교 문화에 대해 대부분 관심이 적은 편인데 전통문화의 이해 측면에서라도 불교는 좀 더 깊이 이해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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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 2 - 동서 문명의 교차로, 자세히 읽기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 2
유재원 지음 / 책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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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왜 트로이가 안 나오나 했더니, 2권이 또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관한 책을 낸 사람답게 아나톨리아 곳곳에 스며든 신화 이야기를 상세하게 풀어 쓴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한반도는 중국 대륙 끝에 붙어 있어서 그런지 중동 지역처럼 온갖 민족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한 역사에 비하면 비교적 균질한 역사를 이어온 것 같다.
히타이트나 아시리아 같은 비교적 많이 알려진 고대 국가 외에도 온갖 나라와 민족들이 너무 많이 등장해 머리에 다 집어 넣질 못했다.
일종의 용량 초과라고 해야 하나?
처음에는 꼼꼼하게 비교하면서 읽어 나갔는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집중력이 확 떨어져 대충 읽었다.
기행문이라고 하기에는 역사 문화적인 부분이 너무 많아 그 점이 책의 장점이면서도 읽기가 다소 버겁다.
사진이 많이 실렸지만 스냅 사진 위주라 유적지의 특징을 한 번에 잡아 내지는 못한다.
터키 곳곳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았던 저자는, 역시 책도 두 권 분량으로 출판했다.
버스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를 봤는데 저걸 어떻게 버스 안에서 가볍게 읽고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저자가 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 볼 생각이다.
소아시아 역사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갖고 싶다.
막연히 히타이트, 아시리아, 미탄니, 호라이, 리디아 등등 이름만 들어 봤지 실제로 어떤 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정보가 없다시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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