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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과 죽간으로 본 중국 고대 문화사
도미야 이타루 지음, 임병덕 옮김 / 사계절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예상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막연히 생각하길, 목간이나 죽간에 남아 있는 글들의 의미를 파악하여 그동안 잘못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하여 정보를 주는 그런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 목간과 죽간, 즉 간독 그 자체에 대한 물리적 성질부터 시작해서 중앙집권체제 정립에 이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서사 자료가 종이로 이동한 시기는 언제인지, 간독은 언제쯤 사라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간독이 둔황이라는 먼 변경 지대까지 전달이 됐는지 등을 상세히 밝히는 꽤 전문적인 책이었다.
일본 사람들의 책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주제에 파고드는 그 집요함에 종종 놀라곤 한다.
가끔은 너무 조잡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주제에 대한 그 성실함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한국에서는 함안산성에서 죽간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일본에서는 나라 시대의 목간들이 종종 발견된다고 한다.
일본인 학자가 고대 중국의 간독에 대해 이렇게 자세한 연구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목간이나 죽간은 다 그게 그거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도 구분이 있다.
그래서 책 제목에서도 이 둘을 따로 명명했나 보다.
목간은 말 그대로 나무 조각 하나에 글을 쓴 단독간이고, 죽간은 여러 조각을 이어 만든 일종의 편책이다.
이 죽간은 주재료인 대나무의 북방 한계선 이하에서만 발견된다고 한다.
죽간의 특징은, 마치 파일처럼 첨부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종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 즉 후한 이전 시대의 저작들은 모두 여러 사람의 글을 첨가한 형태라고 본다.
예를 들어 공자의 논어를 비롯한 유교 경전들이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꾸준히 첨가된 기록으로 보는 것이다.
목간은 일종의 행정 문서나 증명서의 역할을 했다.
둔황이나 내몽골의 사막 일대에서 발견된 간독들을 보면 대부분이 중앙에서 전달되거나 반대로 중앙으로 상주하는 행정문서들이라고 한다.
이 간독을 전달하는 일종의 우체국인 우정도 마을마다 존재했다.
저자는 간독을 쓰는 형식과 글체에 대해서도 자세히 분석한다.
보통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도량형과 화폐, 수레바퀴에 이어 서체도 일순간에 통일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저자는 이런 일반적인 해석에 반대한다.
승상 이사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소전은 대전을 간략하게 쓰기 위한 방법인데 한대에 유행한 예서가 이미 전국 시대에도 쓰여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사 한 사람이 단독으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서체를 소전으로 통일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오래 전부터 쓰여 오던 간략화된 소전체를 행정문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게 바로 이사라고 본다.
진이 통일 왕국을 세운 후 전국 각지에 보낼 문서의 양은 그 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글자는 점점 간략해지고 더불어 모양의 예술화를 추구한다.
이런 방향성 때문에 전서에서 예서로, 다시 팔분체로, 그리고 초서와 해서로 발전했다고 본다.
진 통일 이전의 간독에 이미 예서체가 등장했다고 하니, 어느 날 갑자기 서체 통일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저자는 또 채륜이 기존의 종이 만드는 법을 발전시켜 본격적으로 종이가 널리 사용되게 됐다는 학설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채륜이 채후지를 발명한 후한 화제 시대인 105년 이전에도 물론 종이가 쓰였으나 그것은 서사의 재료로서가 아니라 목간 등을 포장하는 일종의 포장지로 사용됐다고 본다.
본격적으로 종이가 간독을 대신하여 서사의 재료로 사용된 것은 채후지가 발명된 이후부터이고, 서진 시대가 되면 종이로 완벽하게 대체가 된다.
이 시대의 무덤에서 연습용 종이들도 발견되는 걸 보면 이미 종이의 생산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대신 이 당시에도 여전히 신분의 증명용 등으로 목간은 남아 있었고, 그런 까닭에 일본에 전래될 때는 종이책이 대신해 버린 죽간 대신 여전히 사용되는 목간만 전해져 나라 시대에 발견되는 간독은 모두 목간의 형태라고 한다.
하나하나 끼워 맞출수록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들어맞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신안선의 물표로 달려 있던 그 나무패들은 죽간이 아닌 목간이었던 것이다.
결국 중앙집권국가 체제는 문서 행정으로 가능한 것이었고, 이것의 물리적 형태가 바로 목간과 죽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종이가 발명되기 전 파피루스처럼 종이 대용으로 나무조각을 썼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나무조각들이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한 일등공신이었다니, 역사의 숨겨진 사실이 놀랍다.
나는 고대의 간독이 단순히 옛 역사적 기록들을 보충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놀라운 의미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300 페이지가 안 되는 가벼운 분량이면서도 내용은 무척이나 전문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어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