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밖의 경제학 - 이제 상식에 기초한 경제학은 버려라!
댄 애리얼리 지음, 장석훈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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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한 경제학 이론서는 아니고, 제목은 경제학이라 붙였지만 인간의 심리 상태나 행동 패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경제학에서 미리 전제하고 있는 것, 즉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주변의 영향을 무시하고 가장 경제적인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전제가 잘못됐다는 게 주제이기도 하다.
전혀 얼토당토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편견과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저자의 논의를 조금 더 발전시키자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고, 어느 정도의 국가 개입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상깊은 대목들이 많았다. 우선 앵커라는 개념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는 스타벅스 커피가 예로 제시됐다. 스타벅스 커피가 나오기 전, 미국인들은 그보다 싼 던킨 도너츠의 커피로 만족했다. (한국에서는 둘 다 커피 가격이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갑자기 비싼 커피가 나오면서 미국인들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의 취향이고 커피에 대한 개성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비싼 커피는 앵커가 되어 커피를 선택할 때 가격이나 맛이 아닌, 분위기나 이미지가 기준이 되버렸다. 이것은 스타벅스의 창립자가 내세운, 스타벅스를 둘러싼 제반의 이미지가 큰 역할을 했다. 소비자의 심리는 마치 이 광고 문구 같다. "난 로에알을 써요, 난 소중하니까요" 자신의 취향을 지키려면 이 정도 가격의 커피, 화장품, 구두, 가방 등은 써 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생각하기에 스타벅스 커피 가격이 내 경제력으로 지불하지 못할 만큼 엄청나게 비싼 것은 아니다. 그런데 스타벅스 커피는 어쩐지 세련되게 느껴지고 커피숖에 들어가면 활기를 얻게 된다. 그래서 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내 취향, 즉 앵커로 인지하게 됐고 그 다음부터, 난 스타벅스 커피를 좋아해, 이렇게 스스로에게 인식을 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커피 가격은 이 정도 된다. 서울 시내에서 5천원 이하 커피를 마신다는 게 쉬운 일일까? 자판기 커피를 마시지 않는 이상 말이다.) 

 저자는 어떤 제품이 앵커로 작용하면 재화를 선택했을 때의 기쁨을 정확한 가격으로 환산하기 어렵다고 충고한다. 그러므로 물건을 구입하거나 돈을 소비할 때는 반드시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마음 속의 앵커가 자리잡은 건 아닌지 이성적으로 숙고해 보고 결정해야 한다. 반대로 기업의 입장에서는 우리 제품은 단지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신의 자존심이고 사회적 지위다는 느낌을 심어 줘야 할 것이다. 이른바 명품이라는 마케팅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미루기에 대한 관찰도 무조건 미루고 보는 나에게 유용한 부분이었다. 나 뿐 아니라 모든 학생들은 미루기의 천재라고 하니 다행스럽긴 하다. 사람들은 심리적 부담감 때문에 누구나 과제를 미루곤 한다. 그러므로 강제적인 기한이 반드시 정해져 있어야 한다. 외부의 목소리가 있어야 비로소 정해진 시간 안에 과제를 끝낼 수 있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스스로 마감 시한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현실적인 방법으로, 자기절제 도구를 제안했다. 이를테면 월급의 일부를 미리 떼서 저축한다든지, 신용카드에서 일정 부분 이상 지출할 경우 자신에게 안내 메일이 오게 만든다거나 일정 금액을 기부하게 하는 것처럼 미리 한계선을 설정해 주는 것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개념도 비슷한데,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런 상황을 안 만드는 게 가장 좋다고 한다. 그 감정 상태를 겪어 보지 않고서 이렇게 해야지, 결심하는 것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다이어트를 결심할 때도 그렇다. 막상 음식의 유혹이 눈 앞에 펼쳐지고, 배고픔이 밀려오면 원하는 칼로리만 섭취하겠다는 다짐이 얼마나 허망한지 실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충동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려면, 유혹의 순간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다. 

 직업윤리의식도 인상깊게 읽었다. 십계명이 세상을 정직하게 만들 수는 없어도, 십계명 즉 도덕적 원칙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제도를 통한 도덕성 유지는 한계가 있기 떄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 즉 윤리의식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방법이 그저 말뿐인 추상적 구호에 불과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무리 제도를 정교하게 만들어도 피해갈 구멍이 생기는 만큼 직업윤리나 도덕의식 등을 상기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정직을 유지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회를 안정시켜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이익을 주는 만큼, 윤리의식 강화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 같다. 

 그 외에도 실생활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많았다. 정말 내 생활에 응용할 수 있을지 여부는 아직 모르겠으나 한 번쯤 관심을 가져 볼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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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역사
이상태 지음 / 지오북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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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읽었던 <양치 식물의 역사> 와 비슷한 포맷의 책으로, 그 책보다 더 쉽고 재밌게 쓰여 있다.
번역서가 아니라 그런지 문장도 이해하기 쉽고 저자가 꼼꼼하게 과학적 사실들을 설명해 준다.
식물의 사진들도 많이 실려 있어 보는 즐거움도 컸다.
전에는 식물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흥미가 많이 생겼다.
칼 세이건의 전 아내로도 알려진 린 마굴리스의 미토콘드리아 공생설이 실은, 혐기성 세균 안에 호기성 세균이 내공생 하게 된 사건을 일컫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김이 바로 바다 가장 깊은 곳에 살고 있는 홍조류의 일종임도 책을 통해 알게 됐다.
김이 붉은 색을 띄는 이유는, 가시광선 중 보라색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바다 속 깊이 침투할 수 있는데, 이 보라색을 이용해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색소가 바로 빨간색 색소라고 한다.
반대로 가장 윗부분에서 반사되는 붉은 광선은 초록색 색소인 엽록소를 가진 녹조류가 잘 흡수하고, 그런 이유로 바다 표층에서 산다고 한다.
흔한 말이지만, 이런 걸 보면 자연의 신비는 얼마나 놀라운지! 

양치식물에서는 이해가 잘 안 갔던 세대교대도 그림과 함께 자세히 설명되어 큰 도움이 됐다.
반수체인 1N의 배우자체는 유전자가 전부 발현되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생겨도 100% 다 표현된다.
반면 배수체인 2N의 포자체 세대가 되면 상동 염색체의 두 유전자 중 우성만 발현되고, 돌연변이가 생기면 두 개가 다 고장나야 표현이 되기 때문에 생존에 더 유리하고 유해한 돌연변이로부터 개체를 보호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육상으로 올라오기 위해서는 배수체가 되야 한다.
식물의 육상에도 변형설과 삽입설이 있는데 유전 분석이 활발해지면서 요즘에는 삽입설이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동물보다 더 간단한 구조를 가졌을 것 같은데 혐기성 세균에서 광합성 세균이 탄생하고, 광합성 결과 산소가 생기면서 그것을 대사할 수 있는 호기성 세균이 태어나고, 다시 이 호기성 세균이 혐기성 세균과 공생하게 되고 핵이 유전자를 보다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진핵생물로 발전하고 거기서 녹조류와 선태류 등이 발달하고 배아를 더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씨방을 가진 피자식물에 오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마치 하나의 잘 만들어진 알고리즘처럼 너무나 정교하고 완벽하다.
생명의 탄생에서 오늘날의 다양한 종들이 있기까지 진화의 과정은, 그것이 너무 정교하고 완벽해 창조주의 존재를 범신론적 차원에서 인정할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다.
사막 식물이나 고산 식물들의 적응 형태도 굉장히 재밌게 읽었고 사진도 무척 유용했다.
책 제목은 <식물의 역사>지만, 생명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설명한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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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차악의 선택 - 자살의 성찰성과 소통 지향성
박형민 지음 / 이학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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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나 역시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어느 정도는 충동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대체 어떤 심리 상태에서 자살을 선택하는지 궁금하던 차에 연구서가 나와 반가웠다.
자살을 병리학적으로 보기 보다는, 유서의 분석을 통해 개개인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책이라 그만큼 객관성도 있고 이론만 내세우는 오류를 저지르지도 않았으나 대신 명확하게 수렴되는 주제의식이 약한 편이다.
그러나 주변에 자살을 주제로 한 책이 드물기 때문에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자살은 정신과 의사들의 연구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저자는 사회학자의 관점으로 자살을 해석했다.
특히 유서를 남긴 사람들을 연구했기 때문에 책 제목대로 자살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책으로 자살자들에 의해 선택된, 충동적이거나 병적인 행위가 아닌, 명백히 의식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소통이나 해결의 한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유서를 남기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대부분 수신자가 있고 그것을 읽는 사람이 뭔가를 해결해 주길 바라고 (꼭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할지라도 감정적인 부분에서라도) 쓰게 된다.
빚을 많이 진 사람은 자신의 죽음으로 빚이 탕감되길 바랄 것이고,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기가 죽어 가족들이 병원비에서 벗어나길 바라기도 한다.
혹은 내가 죽음으로써 사랑했던 사람이 조금이라도 나의 고통을 이해해 주길 바라기도 하고 분노 때문에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 상대가 괴로워 하길 바라기도 한다.
저자가 지적한 것 중 하나가, 문제 상황 그 자체 때문에 자살을 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인식하는 자살자의 태도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다고 한다.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자살자가 내리는 결정은 달라질 수 있다.
보통 우울증이 있는 경우 자살 확률이 높아지는데 그 까닭은,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타인 대신 자기 자신을 공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건강한 자아상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거식증에 걸리는 사람 역시 왜곡된 신체 이미지 때문에 충분히 날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전히 뚱뚱하다고 인식하여 음식을 거부하다 죽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허망한 말장난 같은 긍정의 힘이라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말 같기도 하다. 

나는 항상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싶고 주변에 휘둘리지 않는 강인한 인간상이 늘 꿈꾸는 모델이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결국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매우 사회적인 생명체임을 깨달았다.
사막 한 가운데 홀로 살아가는 사람마저도 주변의 것과 감정 교류나 의사 소통을 원한다.
무인도에 억류된 로빈슨 크루소가 앵무새 하고 말하고, 톰 행크스가 배구공을 친구로 삼듯 말이다.
인간에게 있어 타인의 평가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모르겠다.
자살자들 역시 문제 상황 그 자체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한국처럼 성공과 실패에 유난히 민감한 사회에서 자살은 증가할 수 밖에 없는 문제 같다.
주변의 평가에 궁극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누구나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듣고 싶어 하고, 관심과 애정을 받길 원하며 또 내가 관심쏟을 상대를 원한다.
이런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자살자들은 최선이 아닌 다음 선택으로, 혹은 최악의 경우를 막기 위해 차악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거나 살해 위협에 시달리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용기로 살 것이지, 이런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도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락사가 허용되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살한 어떤 사람의 유서처럼, 스스로 선택하여 목숨을 끊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적대시 되고 남은 가족들이 피해를 보는 분위기는 분명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겠으나, 자살자들이 기대한 것처럼 과연 사회가 한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을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가끔 분신자살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거창한 문제 해결은 물론이고 심지어 개개인의 감정 변화에도 남의 죽음이 과연 얼마나 환기를 불러 일으킬지 회의적이다.
상대방이 내 죽음으로 자책감을 느끼고 괴로워 하길 바라는 마음에 죽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문제 해결을 바라고 죽는 경우 역시, 이미 죽은 사람의 말에 누가 제대로 귀를 기울이겠는가?
자살자들의 소통에 대한 욕구는 충분히 이해를 했으나 그 성과는 매우 미미하다는 게 책을 읽고 난 후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좀 더 효율적인 방법적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
마지막 장에서 자살을 막기 위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을 간단히 나열했는데 실제로 지역사회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주긴 어려울 것 같고, 잘못된 사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도움 정도는 주변에서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신과도 좋은 상담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서 결론은 아이러니 하게도 더 열심히 살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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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ㅅㅇ 2011-08-1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정말 조사중에
느낌표 15개!!!!
정말 고마워요 ㅠㅠㅠ
 
한국의 가난 (반양장) - 새로운 빈곤, 오래된 과제
김수현.손병돈.이현주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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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 블로그에서 보고 제목이 impact 해서 관심을 갖고 보게 된 책이다.
굉장히 도발적이고 애둘러 가지 않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낸 느낌이 들어 기대를 많이 하고 봤는데 의외로 가독성도 높고 흥미진진했다.
우리 주변의 실생활을 리얼하게 그려내서인지 공감대가 확 오고, 아프리카의 절대 가난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와 닿았다.
한국은 이미 잘 사는 나라 축에 끼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선진 복지 국가라기 보다는 기아에 허덕이지는 않는다는 의미로)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문제되는 것은, 부의 불평등, 소득 재분배, 부의 지위의 세습, 사회 안정망 결여와 같은 상대적 가난의 해소가 아닐까 싶다.
여전히 못 먹고 물이 없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대륙의 가엾은 빈곤층들을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으나, 함께 부대끼고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 빈곤 못지 않게 상대적 빈곤도 정말 심각한 문제다.
언젠가 주간지에서 쪽방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월세도 안 되서 일세를 내고 하룻밤을 보내는 사람들이 상상 외로 많았고 그마저도 안 되면 노숙자로 떠돌이 신세가 된다고 한다.
쪽방촌은 가 본 일은 없지만, 서울 시내에 널려 있는 열악한 환경의 고시촌은 나도 한 달 정도 살아본 적이 있다.
시험 준비할 일이 있어서 지방에서 올라와 잠깐 기거했는데 남녀 분리도 안 되어 있고 불나면 딱 타 죽겠다 싶을 만큼 열악한 환경 그 자체였다.
또 놀라웠던 게 나처럼 수험생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부분이 직장인들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보증금도 없고 월세 아끼기 위해 고시원에 거주하는 것이다.
서울의 주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새삼 느꼈다.
서울로 서울로만 외치고 있으니 살만한 집을 찾는다는 건, 어찌 보면 일생의 가장 큰 목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에서도 복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주택 정책을 들었다.
북유럽 같은 경우, 공공임대주택이 굉장히 많아 집을 사기 위해 전재산을 쏟아 붓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없다고 한다.
스웨덴의 복지 정책을 자세히 연구한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북유럽은 워낙 인구 밀도가 낮은 곳이기 때문에 서울 같은 대도시의 주택 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일례로 영국 역시 공공주택을 많이 만들어 보급했다고 하지만, 런던 집값이 너무 비싸 보트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는 기사를 읽었었다.
한국 같은 수도 중심 국가에서는 인구의 과밀을 해결한다는 게 참 어려운 문제 같다.
캐나다나 미국 등지에서도 땅은 넓지만 도시가 슬럼화 되어 살만한 환경을 찾아 교외로 나가기 때문에 출근할 때 도심으로 진입하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라고 한다.
교통체증이 주거문제 만큼 심각하게 떠오른 것이다.
어쨌든 정부 차원에서 공공주택 사업에 더욱 매진해야 그나마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싶다.
요즘 보금자리 주택 때문에 집값이 떨어졌다는 얘기도 들리지만 여전히 유럽의 복지국가에 비해 공공주택 비율은 턱없이 낮다. 
영국에서는 빈민촌을 정비하는 방법으로 지역 사회에 복지시설을 짓는 정책을 시행한다고 한다.
강제 철거나 도시 정비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이고 실제 거주민을 배려하는 정책 같다.
북유럽에서 흔히 시행되는 주택 정책으로는, 주거비 보조 정책이 있다.
중산층 거주 지역에 서민층이 살 수 있도록 임대료를 지원해 주는 것이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여러 계층이 섞이게 된다.
부자 동네, 가난한 동네의 뚜렷한 구분선을 흐릿하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 같다.
어떤 방법을 쓰든 결국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조세 저항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날카롭게 지적한 바대로, 서민층의 가용소득이 높아져야 소비가 진작되고 내수 산업이 활성화 될 것이다.
유효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공공사업을 벌이는 것처럼, 사람들이 돈을 쓰게 만드려면 생활에 꼭 필수적인 비용들을 최대한 줄여서 여유돈으로 소비를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업들의 규제를 풀고 세금을 감면하라는 기업 쪽 주장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들린다.
남는 돈이 있어야 쓸 돈도 생길 게 아닌가. 

사실 나는 대한민국 의료 정책이 잘 되어 있고 전국민 의료 보험 제도가 상당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쪽인데 책을 읽으면서 무상의료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실감했다.
사회적 계층이 하락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질병이라고 한다.
실직이나 가정해체 보다도 질병이 훨씬 더 가혹하게 작용한다.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도 의료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반드시 직장에 나가야 한다고 한다.
완전한 무상의료는 불가능 하겠지만 의료비 지원은 생활 안정을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다.
같은 맥락으로 교육비 무상 지원도 중요하다.
사립 대학의 등록금이 천 만원대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고등교육이 상류층으로 가는 첩경인 우리나라의 경우 돈 없어 대학 못 가고 다시 가난해지는 빈곤의 악순환이 되풀이 될 수 밖에 없다.
벌써 공교육만으로는 좋은 대학에 못 가기 때문에 엄청난 사교육비를 쏟아 붓고 덕분에 부모의 경제력이 뒷받침 되야 명문대에 진학하는 어처구니 없는 풍경이 일상화 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부당하고 기막힌 일인가.
대학까지 무상교육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공교육 강화를 통해 사교육비를 줄이는 시도라도 활기차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교육(특히 명문대 진학)과 부의 세습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공교육 강화는 필수적인 정책이라 하겠다. 

그 외에도 결혼이주민이나 탈북자, 외국인 근로자 등의 문제들도 거론됐는데 다들 너무 중요한 사안들이라 잘 해결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엊그제 읽은 <십자가 초승달 동맹>에 나온대로 테러 위협 이런 문제들은 얼마나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소재인가?
한국의 가난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비하면 말이다.
정작 관심을 기울여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제쳐두고 집권층의 국민 관심 돌리기용의 화제거리에 이용되고 있지는 않는지 감시의 눈을 부릅뜰 때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 현실을 정확히 짚어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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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초승달 동맹 -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독교 이슬람 연합 전쟁사
이언 아몬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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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처음에는 복잡다단한 11세기 에스파냐 소왕국들이 등장해 지루하고 맥을 못 잡았는데 뒤로 갈수록 책에 빠져들어 유럽과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어제 읽었던 비잔틴 제국에 관한 책에서 봤던 인물들이 다시 등장해 이해를 도왔다.
역시 배경지식이 있어야 쉽게 이해가 간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이제는 어쩐지 한물 간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그의 책을 읽었을 때 흔히들 하는 비판처럼 무조건 종교가 모든 대립의 원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었다.
오래 전에 읽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서구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대립 관계를 역사,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 매우 섬세하게 분석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미디어에서 하기 쉬운 말로, 대중을 자극하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헌팅턴을 써먹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든다.
어쨌든 종교라는 이름으로 표면화 되고 있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집단끼리의 갈등은 오랜 전통이자 역사이고 단지 신앙 하나만이 유일한 결정의 기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어떻게 동맹을 맺었는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세세하게 파헤친다.
사실 이 책의 주제는 동맹 그 자체보다도, 유럽이 단일 기독교 문명권이라기 보다는 이슬람과 오랜 세월을 공존해 왔고 이슬람 역시 유럽 문명의 주된 요소임을 보여 주고자 한다.
당장 4백여 년에 걸친 에스파냐의 이슬람 지배를 봐도 그렇고,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 지배 역사도 그렇다.
19세기 이후 완전히 역전되긴 했으나 유럽과 이슬람 세계와의 공존은, 동아시아와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역자가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 그런지 각주가 매우 꼼꼼하다.
성실한 번역자를 만난 덕분에 더 재밌게 읽었다.
특히 후기에서, 이슬람이 유럽 문화에 자양분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유럽 문화의 본질적인 요소인가는 다른 문제라는 지적이 날카롭다.
또 흔히 거론되는 관용이라는 것도, 다수 지배 집단이 소수집단에게 일정 부분을 허용해 준다는 의미이지, 결코 이것이 완벽한 공존이나 교류로 이해되서는 안 된다는 한계를 설정한 점도 인상깊다.
저자 역시 이슬람과 기독교의 공존 사례들이 여러 이해관계 속에 얽힌 결과이지, 상이한 두 문화의 완벽한 조화로 이해되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결국 인간이란 개인적으로는 신념과 우정, 믿음 등등 가치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익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역사가 명백히 보여준다.
특히 역사에서 한 집단의 선택을 보면 더더욱 말이다.
개인과 전체는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
개인의 가치와 집단의 가치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독실한 신앙인이 공적으로 반드시 성경에 나온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로 경제적 이권 뿐 아니라 국내의 정권 다툼을 위해 외세를 불러 일으키는 고전적인 동기도 있지만 무엇보다 용병과 농노라는 측면에서의 접근이 신선했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역사는 병농일치제를 통해 농민이 나가서 병사가 되는 시스템이라 그런지 용병 제도를 보기 힘들다.
그런데 유럽 역사에서는 이 용병 제도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여러 민족과 정치 집단들이 뒤섞여 살아온 역사를 반영하는 듯 하다.
제국의 지배자는 농노들을 수탈하기 때문에 전쟁이 터졌을 때 함부로 농민에게 무기를 맡기지 못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비잔틴 제국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반란의 위험 때문에 선뜻 그들을 군사로 만들지 못하고 실제로 압제에 시달리는 농민층은 지배자가 바뀌는 것을 환영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지배자는 돈을 주고 용병을 불러 오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종교와 민족 집단들이 출신 성분이나 신앙에 관계없이 싸우게 되는 것이다.
속국이라는 종속 관계 때문에 원하지 않아도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공격해야 할 때도 있고, 프로테스탄트를 압박하는 가톨릭 세력에 맞서 오스만 투르크 쪽에 협력하여 싸우는 경우도 흔했다.
크림 전쟁의 경우는 언제나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투르크 편에서 싸우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현실정치는 개인의 신앙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분명한 논거를 대고, 물 흐르듯이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해 나가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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