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로마, 비잔틴제국 - 변화와 혁신의 천 년 역사
이노우에 고이치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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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천 년이나 지속된 제국이다 보니 꽤 방대한 분량일 줄 알았는데 막상 받아 놓고 보니 겨우 250여 페이지에 불과하다.
글자 사이 간격도 꽤 넓은 것 같아 혹시 일본에서 출간될 때는 문고본 형태의 가벼운 분량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적은 분량의 책은 기왕이면 문고본 형태로 싸게 출판해 주면 참 좋을텐데...
내용은 이해하기 쉬웠다.
비잔틴 제국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상당히 긴장을 하고 시작했지만, 저자는 천 년의 역사를 한 권의 책에 무리하게 담으려 하지 않고 이 제국이 어떻게 시작해서 발전하고 다시 쇠퇴하게 됐는지 핵심 사항을 짚어가며 간략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설명한다.
우리와 같은 동양인의 관점이라 그런지 더 친숙한 느낌이 든다. 

제일 인상깊었던 분석은, 대체 왜 비잔틴 제국에서 기독교를 받아 들였냐는 것이다.
당시 기독교가 제국 내에 워낙 많이 퍼져 기독교인들과의 제휴를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용인했다는 말은 그저 일설에 불과하다고 한다.
실제로 기독교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할 때까지 국교이면서도 다른 종교와 공존했고 이교도적인 관습법도 많이 용인됐다고 한다.
저자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런지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날카로운 관점을 유지하는데, 비잔틴 제국이 진정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가 실은 황제의 전제 정치에 적합한 이념이 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가 박해받고 순교한 전적이 있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면 여러 구절에서 현재 권력을 가진 자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민주정 전통에서 전제정으로 넘어 오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황제가 전권을 갖는 전제정의 이념적 기반으로 재탄생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굉장히 새로운 측면 같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법 대전을 만들고 정복 사업을 펼친 위대한 황제이면서도, 니카 반란을 계기로 전제 정권을 성립한다.
터키에 가서 이 학살이 일어났던 경마장 터를 직접 봤었다.
가이드가 여기서 3만명의 시민이 죽었다고 하는데도 잘 실감이 안 났는데 책을 보니 꽤나 심각했던 일종의 시민 봉기였던 것 같다. 
로마 제국이 빵과 서커스를 계속 공급할 수 있었던 까닭은, 속주 이집트에서 건너 오는 식량 탓이었는데 제국이 이슬람의 침입을 받아 식민지를 잃자 더 이상 시민 계급은 제국에 기생해서 살 수 없었다.
비잔틴 제국이 강했던 까닭은 일종의 병농일치제로, 농민이 스스로 무장을 해서 싸우러 나갔기 때문인데 농촌이 피폐화되면서 군역과 조세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토지를 팔고 노예가 되어 의무로부터 벗어난다.
농촌 사회의 붕괴는 필연적으로 군사력 약화를 불러 일으켰고 이 틈사이로 성장한 것이 귀족 계층이었다.
13세기 초에 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나서도 여전히 지방에서 비잔틴 제국이 명맥을 이어가고 결국은 수도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귀족들의 힘이라고 본다.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대로 만약 비잔틴 제국이 과거의 강력한 전제정이었다면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는 순간, 귀족들도 모두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이미 황제 한 사람에게만 모든 권력이 쏠려 있는 황재 독재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도 결국은 지방 귀족들의 반란을 제압하지 못하고 반 세기만에 쫓겨나고 만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 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왕은 귀족에게 농사지을 땅을 주고, 귀족은 왕에게 군사를 빌려 준다.
봉건제가 시작된 것이다.
놀랍게도 황제 역시 직할지를 가지고 직접 농장을 경영해서 소득을 올린다.
황제가 직접 운영하는 농장에서 판매한 달걀로 왕비의 금관을 만들어 선물했기 때문에 달걀보관이라 불리는 유물도 있다고 하니, 황제의 위상 변화를 알 만 하다. 

한 때 10세기 무렵은 다시 세력을 넓혀 가기도 했으나 결국은 상승하는 투르크 세력에 밀려 15세기 초, 이 천 년 제국은 문을 닫고 만다.
중세에는 대포가 없기 때문에 성벽이 높으면 절대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도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비잔틴 제국 역시 두껍고 높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건설했던 모양이다.
이 강력한 성벽은 수많은 외침을 이겨냈으나 결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대포에 무너지고 만다.
지난 번 터키에 다녀와서 이스탄불을 둘러 봤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동안 비잔틴 제국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저자의 말대로 천 년을 유지했다는 것부터가 너무나 경이롭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 위대한 제국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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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역사 3 - 전란의 시대 : 고려후기편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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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 시리즈로 나온 세 번째 책을 읽었다.
2권보다는 가독성이 약간 떨어졌지만 재밌게 읽었다.
어찌 보면 도둑떼에 불과한 홍건적의 잔당이나 망한 나라의 유민격인 거란의 후예들이 재차 침공하여 국왕이 피난을 떠날 정도로 큰 타격을 줬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하긴, 왜구 역시 단지 해적떼에 불과한데 심지어 개경을 침범하기까지 했으니...
고려라는 나라가 후기로 갈수록 무신정권 등에 의해 군대가 사병화 되고 국가 체계가 일당 독재로 변해 정상적인 기능을 하기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으로 미뤄 보자면, 무신정권을 기득권층 대신 새로운 계층의 유입으로 사회에 변혁을 꾀했다는 평가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저자의 말대로 사회안정은 특권층의 양산이나 출신 성분의 변화가 아닌, 국가 체계를 통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니까.
묘청의 서경천도 때 김부식과, 윤관의 아들인 윤이언의 활약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고 칭제건원이 얼마나 허망한 얘기인지 새삼 느꼈다.
저자의 평가대로 신채호의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은 그야말로 본인이 살았던 당대에 의미가 있던 얘기 같다.
몽골에 대항하여 30년을 싸웠다는 것도 대몽항쟁의 측면에서 평가받을 점이 분명히 있긴 하겠으나 궁극적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최씨 일가의 매우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일방적 정권유지용 천도였음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지배층은 바다로 둘러싸였으나 수로를 통해 세금은 꼬박꼬박 받을 수 있는 강화도로 숨어 버리고, 나머지 백성들은 몽골이 침입하면 산으로 들어가 숨으라는데 대체 몇 개월씩 식량 가지고 전 국민이 숨어 있을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너희 알아서 해라는 나 모르겠다, 정책의 대표적 표상이다.
지역을 수비하는 향촌 조직마저 무너져 한 번씩 몽골이 침입하면 수 개월 동안 그 침략을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어야 할 고려 백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이 눈에 밟힌다.
삼별초 역시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자주적인 독립 운동을 했다고 평가하기에는, 무신 정권 기간 동안 권력을 담당했던 태생적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고 심지어 제주도로 들어간 후 동녕부나 쌍성총관부처럼 고려에서 떨어져 나가 일종의 직할지가 되게 해달라는 화친 문서까지 보낼 정도였으니 과연 그 성격이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고려 정부에 대한 반란이었는지 정말로 공격의 목표가 몽골이라는 외세였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뒷편에 나온 왜구와의 전쟁은 최영과 이성계 등이 등장해 무척 재밌게 읽었다.
1250년에 갑자기 수가 불어나 내륙까지 침범하게 된 왜구를 가리켜 경인의 왜구라고 하는데, 전국 시대의 혼란기 후 일본 사회가 팽창하면서 왜구 세력도 단순한 노략질을 넘어 마치 북방의 유목 국가들처럼 주변 국가를 뒤흔들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집단으로 성장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고려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신흥 무인 계층들이 정권을 잡게 되고 결국 이성계에 의한 혁명이 이루어졌으니 조선의 개국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 같다.
또 왜구를 소탕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수군을 창설하고 화약을 개발한 고려 말기의 노력이, 후에 임진왜란 때 수군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평가는 무척 신선했다.
지금까지 주적은 언제나 북방이었지 바다 건너 왜구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수군을 운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세종 때 쓰시마 섬 정벌을 계기로 왜구 문제를 완전히 잠재운 점은, 평가받아야 할 부분 같다. 

굵직굵직한 외침들이 자세히 정리되어 당시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고 특히, 지도가 상세하게 첨부되어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사는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공성전이나 군대의 운영 같은 기본틀을 어느 정도 숙지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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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역사 2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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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고려, 북진을 꿈꾸다> 때문에 다시 읽게 된 책이다.
막 출간됐을 때도 굉장히 재밌게 읽었는데 사실 상세한 전투 설명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충 이런 전투가 중요했구나 하는 정도로 감만 잡았다고 할까?
다른 책으로 당시 전투 상황을 소략해서 읽다 보니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겨 재독하게 됐는데 역시 두 번째 읽으니 이해가 빠르고 무척 재밌었다. 
임용한씨는 참 글을 맛깔스럽게 잘 쓴다.
특히 현장답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게 장기인 듯 하다.
그의 일본 여행기도 무척 재밌게 읽었는데 고려 시대 전투 이야기도 정말 흥미롭다. 

사실 고려시대 하면 아직 왕의 계보도 제대로 못 외울 정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사극으로 고려시대가 조명되면서 친숙한 등장인물들 때문에 역사책에서도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게 됐다.
이런 걸 보면 사극이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덜 알려진 시대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장점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특히 고려 초의 복잡한 왕위 계승과 외척 관계는 전혀 감이 안 잡혔는데 이번에 <천추태후>를 보면서 기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예전에 잠깐 봤던 <제국의 아침>이나 <신돈> 같은 드라마도 당시 고려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천추태후>는 보다 말다 한 드라마라 성종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국사인물열전>에서 다뤄진 천추태후를 보면, 한화정책을 추진한 성종이 전통문화를 억압하고 고려의 위상을 중국에 비해 낮추려 했기 때문에 관료와 신민들이 반발했고 그래서 후에 목종이 즉위하면서 천추태후가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는 식으로 해설했다.
대표적인 예로 팔관회 폐지나 관직과 복식 제도 정비 등을 중국식으로 바꾼 걸 들었다.
그 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는데, 이 책을 읽어 보면 PD 들의 이런 소견이 얼마나 단견인지 금방 드러난다.
저자는 흔히 호족 세력의 규합을 통해 왕실의 안정을 추구했다는 왕건의 혼인정책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는데, 사회안정이란 특권층의 양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도를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왕건은 스물 아홉 명의 부인을 뒀고 덕분에 호족 세력을 일시적으로 규합했을지는 모르나 당장 그의 사후 왕권은 외척들에 의해 흔들렸고 혜종은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다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저자는 왕건의 혼인정책이 무장 출신으로 국가를 세운 창업 군주의 대표적 단견이라고 비판한다.
스물 아홉 명의 부인을 뒀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개인적인 욕망이었던 셈.
성종의 중국화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미 고려가 건국한지 백 여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지방관조차 제대로 파견을 못하고 국가 정비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제도에 의해 운행되는 정상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과도기적인 상태였던 셈이다.
성종의 업적은 이런 국가를 행정적으로 안정시키고 지방에 그나마 12목을 세우고 대읍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조세를 거두고 지방행정을 장악하고 교육 기관을 건립하며 군사 제도를 정비했다.
말하자면 국가 제도의 기반을 닦은 셈인데 이런 과정에서 터져 나온 기득권층의 불만을, 단지 우리 것을 버리고 중국을 쫓아 사대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비판한다는 건 너무 짧은 소견이다.
이래서 TV 에서 보여 주는 역사 의식은 언제나 표면적이고 즉흥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11세기 북중국의 강자로 떠오른 거란의 침입은, 당시 고려 조정 입장에서는 엄청난 국난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1차 침입 때 소손녕은 본격적으로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 출병했다기 보다는 중원 진출을 앞두고 후방을 다지기 위한 무력행사 수준이었기 때문에 서희와의 강화 회담이 성립되어 순순히 물러가게 된다.
당시 고려의 국경선은 청천강 이남이었기 때문에 거란의 국경선인 압록강부터 청천강까지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서희는 이 빈 공간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거란과의 화의를 다지겠다고 제안한다.
이 때 세워진 강동 6주의 성들은 후에 거란이 재침했을 때 훌륭한 방어막으로 작용한다.
시간이 흘러 고려는 다시 송과 외교를 재개하고 거란과의 관계는 악화된다.
연운 16주를 획득하고 송으로부터 엄청난 세폐를 받던 거란은 이번에는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친정한다.
양규 등이 흥화진에서 버티자 이 곳을 우회하여 통주로 진격한다.
거란의 장점이 초원 유목민의 특징인 기동 작전이다.
굳이 성을 정복하려고 애쓰지 않고 과감하게 건너 뛰어 개경 쪽으로 진군해 버린 셈이다.
자칫 보급로가 끊길 위험이 있으나 거란군의 편제를 보면 기병 하나에 말 세 필과 보급 군사 둘이 붙어 시종하는 형상으로 보병처럼 자기 식량을 스스로 지고 가는 게 아니라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훨씬 더 빠르게 진격할 수 있다.
통주성에는 성종의 친정 명분이었던 정란의 주인공 강조가 버티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는 한 번의 성공에 자만하여 수성을 포기하고 30만 대군을 이끌고 성을 나와 공격하다가 군사를 셋으로 나눠 공격하는 양동 작접에 걸려 들어 천혜의 수비 요건을 갖춘 통주성 밖에서 몰살당하고 만다.
끝까지 복속을 거부하고 처형당했던 걸 보면 강조가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나름대로 신념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통주성 전투에 승리한 거란군은 그 아래 곽주성으로 내려가 공격했으나 이 때 흥화진을 수비한 양규가 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곽주로 내려와 동북면의 군사들과 합류하면서 막아낸다.
양규의 활약은 참으로 놀라운데 불행히도 거란군의 퇴각시 포로들을 구출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거란은 이번에도 곽주성을 포기하고 바로 서경으로 진격한다.
코앞에 있던 개경에서 정변으로 막 왕이 되어 떨고 있던 현종은 결국 나주까지 피난을 떠나는데 지방행정을 중앙에서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던 때라 곳곳에서 폭도들의 침입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의주까지 피난을 떠났던 임진왜란의 선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몽진길이었을 것이다.
왕이 떠나버린 개경을 점령하긴 했으나 진격하는 동안 제대로 된 중간기지 하나 만들지 못했던 거란군은 결국 고려 정부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퇴각하는 과정에서 고려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완전히 전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고 계속 국지전이 국경 부근에서 지지부진하게 지속되면서 결국 소배압이 이끄는 3차 침입이 시도된다.
이 때도 강동 6주의 성을 모두 우회하여 직접 개경으로 진격하는데 이번에는 현종도 피난을 떠나지 않고 개경을 사수하고 그 과정에서 유명한 귀주대첩을 거두기도 한다.
무려 30여년에 걸친 지리한 싸움이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현종은 그 후 개경 방어를 위해 나성을 축조하고 거란은 허망하게도 몇 년 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망하고 만다.
고려로서는 북방의 위협을 잘 이겨낸 셈이다.
12세기는 여진의 시대다.
한낱 부락에 지나지 않았던 여진이 부족을 통일하고 고려를 위협하자 거란전의 교훈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고려 조정에서도 선수를 치게 된다.
1차 충돌 때의 패배를 교훈삼아 공격부대인 별무반을 편성하여 전시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이를 주도한 것은 조선의 세조처럼 조카의 왕위를 뺏은 숙종인데 출전 직전 사망하고 아들인 예종이 2차 원정을 준비하게 된다.
이 때 윤관을 중심으로 한 원정군의 규모는 17만.
당시 고려로서는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군사 정벌이었을 것이다.
이 원정에서 승리하여 동북면에 9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켜 방어를 하나 결국 지키지 못하고 4년만에 9성은 여진족에게 돌려 주고 만다.
역사책을 보면 전쟁에는 나가지도 않은 문신들이 조정에 앉아 9성을 환원하고 전쟁을 끝내자고 떠벌린다는 식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지는데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면 당시 고려로서는 이 동북면 지역을 제대로 지키기에는 희생이 너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조선의 세종이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가혹하게 주민이주정책을 실시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국경선 부근을 완전히 행정 구역에 편입시켜 방어를 튼튼히 하고 농경민을 정착시킨다는 게 단시간에 이뤄질 수 있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애써 지은 9성을 돌려주긴 했으나 그 후 6년 만에 금을 건국하고 거란과 송나라를 멸망시킬 만큼 국력이 팽창했으나 고려를 다시 침입하지는 않았다.
당시 고려 조정의 원정이 헛되지 않았던 셈이다.
12세기의 평화는 이 때의 노력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고려 전기의 국가 존망을 흔들었던 두 번의 전쟁을 입체적으로 상세히 서술하여 당시 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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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미국 미술관 - 문화저널리스트 박진현의
박진현 지음 / 예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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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서가에 꽂힌 걸 보고 즉흥적으로 읽게 된 책.
서구의 미술관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기 때문에 미술관 소개책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더군다나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미국 미술관이라니, 흥미가 생겨 당장 집어 들었다.
반갑게도 저자는 내 고향인 광주의 신문 기자였다.
지방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런 책을 내는구나 하는 약간의 문화적 충격도 있었다.
이름만 보고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여기자라 더 반가웠다.
400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인데 사진이 많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미국 미술관 하면 뉴욕의 유명한 미술관들, 메트로폴리탄이나 MoMA 정도가 전부였는데 살펴 보니 도시마다 미술관들이 참 많다.
미술관이라는 제도 자체가 서양에서 시작해서인지 또 현재의 문화 흐름을 서양이 주도해서인지 미술관 문화는 아직 우리가 따라 갈 수 없는 것 같다.
제일 부러웠던 점은, 도시마다 대표 미술관이 있고 규모나 컬렉션의 질 면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으며 무엇보다 지역사회와의 연계가 잘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저자도 이 점에 초점을 맞춰 지역사회의 문화 향유와 교육을 위해 미술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하는 글을 따로 실었다.
문화나 여가생활 하면 기껏해야 영화 보고 외식하고 헬스 클럽 가는 정도 생각하기 쉬운데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자연스러진다면 삶이 훨씬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특히 은퇴한 노인들을 중심으로 엘더 호스텔 같은 프로그램을 운여하는 점이 부러웠다.
4박 5일 코스로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을 방문하면서 문화 강좌나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가끔 중앙박물관에 가 보면 연세 지긋하신 노인 분들이 해설사로 자원봉사 하시기도 하고 큐레이터 강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노인들도 이제 손자 손녀 보는 노동에서 벗어나 은퇴 이후의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미국 미술관과 관련하여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억만장자들의 기부 문화다.
저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측면에서 큰손들의 기부 문화를 칭찬했지만, 약간의 어두운 면도 보인다.
시민 사회에 받은 것을 돌려준다는 의미는 충분히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라는 게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엄청난 부를 한꺼번에 몰아주는 시스템이라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엄청난 돈을 순식간에 벌 수 있단 말일까?
탈세, 불법 합병 같은 걸 저지르면서 법의 수사망을 교묘히 빠져 나가다가 큰 돈을 모으면 나중에 사회 환원한다고 해서 끝은 아닌 것 같다.
일례로 삼성의 리움 미술관도 불법 비자금으로 작품 구입했다고 수사에 오르지 않았는가.
기부 문화와 기업의 투명성은 반드시 별개로 치부되야 한다.
경매 시장에서 거래되는 미술품의 천문학적 액수를 보면 억소리가 나면서 대체 저런 엄청난 돈들이 어떻게 한 개인에게 쏠릴 수 있단 말인가 의문스럽다. 

우리에게 덜 알려진 미국 미술관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기회가 되면 뉴욕으로 미술관 투어를 꼭 다녀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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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는 언제 치나요?
다니엘 호프 외 지음, 김진아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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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항상 가까이 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무엇보다 즐기고 싶지만 일종의 벽 같은 게 느껴지는 어려운 분야.
관심은 있는데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수준이 안 된다고 해야 할까?
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나에게는 무척 어려운 분야다.
그렇지만 가끔 차를 타고 갈 때 듣게 되는 베토벤이나 모짜르트의 교향곡이 나오면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흥분과 격정을 느낄 때가 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곡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클래식이 죽긴 왜 죽어, 이렇게 사람을 흥분시키는데 이러면서 터질 것 같은 격렬함을 혼자 삭일 때가 있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이런 감정을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겠지?
책은 쉽다.
어떤 책이 됐든 호기심이 넘쳐 나고 신간이 나오면 그 즉시 읽어 줘야 할 것 같고, 힘들고 지칠 때 위로가 되고 하여튼 언제라도 내가 가까이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만만한 매체다.
그런데 음악은 그렇지가 않다.
미술보다 더 어렵고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금방 흥미를 잃고 나가 떨어진다.
그래서 직접 음악회에도 가 보고 MP3로 듣기도 하는데 역시 내가 가장 친숙한 분야, 책을 통해 음악을 알려는 시도를 자주 한다.
박종호씨처럼 매끄러운 문장으로 클래식을 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업 연주자가 들려주는 무대 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사실 아주 재밌지는 않았다.
콘서트에 문외한인 친구 부부를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회에 초대하여 감상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본 골자로 하여, 콘서트 관람 전 과정을 설명하는 식이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개인적인 감상이 많아 살짝 지루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직접 연주하는 솔리스트로서의 생생한 경험이 녹아 있어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엄청나게 몰입해서 봤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를 떠올리며 혼자 웃기도 했다.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조율해야 하는 지휘자라는 역할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한 때는 지휘자가 무슨 필요가 있어, 이런 생각도 했는데 혼자 하는 연주가 아니니 전체를 이끌고 갈 리더는 분명히 필요하고 또 전반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리라.
이런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솔리스트의 조화는 여러 번 연주해서 좋은 음만 뽑아 녹음한 CD 로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저자의 충고대로 콘서트홀에 가서 단 한 번 뿐인 바로 그 연주를 들을 때, 그 때 느끼는 감정은 집에서 듣는 CD와는 또다른 경험일 것 같다.
저자는 21세기에도 과연 클래식이 살아 있는 음악으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는데, 정답은 저자의 처방대로 콘서트가 보다 활성화 되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극장가는 것처럼 친구를 만나 가벼운 마음으로 음악회에 가는 것은 어려울까?
일단 클래식 자체가 갖는 예술적 수준이 벽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누구나 볼 수 있지만, 클래식은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정말 명곡은 누가 들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을 주지만 대체적으로 클래식은 대중문화 보다는 약간의 수준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즐거움은 진지한 즐거움이다, 라는 격언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클래식이 대중매체나 학교 교육 등을 통해 보다 널리 알려져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저자도 지적한 바대로 비싼 입장료다.
아마 저자 역시 꽤 비싼 출연료를 받는 것 같은데, 플라시도 도밍고가 하소연 한 것처럼 헐리우드 스타들은 몇 백억을 버는데 그에 비하면 유명 음악가의 출연료는 문제삼을 만한 게 못 될 수도 있다.
영화는 전 세계 수십 억이 단 한 번의 촬영으로 한꺼번에 즐길 수 있지만, 음악회는 기껏해야 수 천 명이 한 두 번 들을 수 있는 것이니 따지고 보면 음악회의 입장료가 아주 비싼 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관객 입장에서는 유명 음악가가 내한하면 기본이 십 만원인 현실은 확실히 부담이 된다.
저자의 말대로 시즌 티켓을 구매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꾸준히 음악회에 가는 계기도 되고 유명 연주회를 할인받을 수도 있으니까.
사실 저자 역시 스타 음악가들의 비싼 출연료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스타의 존재는 대중의 관심 환기라는 측면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니 너무 배아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항상 클래식은 멀게만 느껴졌는데 집에서나 길가다가 잠깐씩 들을 게 아니라 콘서트홀에 가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직접 체험해 보는 기회를 늘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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