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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역사 2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4년 10월
평점 :
얼마 전에 읽은 <고려, 북진을 꿈꾸다> 때문에 다시 읽게 된 책이다.
막 출간됐을 때도 굉장히 재밌게 읽었는데 사실 상세한 전투 설명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충 이런 전투가 중요했구나 하는 정도로 감만 잡았다고 할까?
다른 책으로 당시 전투 상황을 소략해서 읽다 보니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겨 재독하게 됐는데 역시 두 번째 읽으니 이해가 빠르고 무척 재밌었다.
임용한씨는 참 글을 맛깔스럽게 잘 쓴다.
특히 현장답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게 장기인 듯 하다.
그의 일본 여행기도 무척 재밌게 읽었는데 고려 시대 전투 이야기도 정말 흥미롭다.
사실 고려시대 하면 아직 왕의 계보도 제대로 못 외울 정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사극으로 고려시대가 조명되면서 친숙한 등장인물들 때문에 역사책에서도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게 됐다.
이런 걸 보면 사극이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덜 알려진 시대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장점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특히 고려 초의 복잡한 왕위 계승과 외척 관계는 전혀 감이 안 잡혔는데 이번에 <천추태후>를 보면서 기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예전에 잠깐 봤던 <제국의 아침>이나 <신돈> 같은 드라마도 당시 고려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천추태후>는 보다 말다 한 드라마라 성종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국사인물열전>에서 다뤄진 천추태후를 보면, 한화정책을 추진한 성종이 전통문화를 억압하고 고려의 위상을 중국에 비해 낮추려 했기 때문에 관료와 신민들이 반발했고 그래서 후에 목종이 즉위하면서 천추태후가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는 식으로 해설했다.
대표적인 예로 팔관회 폐지나 관직과 복식 제도 정비 등을 중국식으로 바꾼 걸 들었다.
그 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는데, 이 책을 읽어 보면 PD 들의 이런 소견이 얼마나 단견인지 금방 드러난다.
저자는 흔히 호족 세력의 규합을 통해 왕실의 안정을 추구했다는 왕건의 혼인정책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는데, 사회안정이란 특권층의 양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도를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왕건은 스물 아홉 명의 부인을 뒀고 덕분에 호족 세력을 일시적으로 규합했을지는 모르나 당장 그의 사후 왕권은 외척들에 의해 흔들렸고 혜종은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다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저자는 왕건의 혼인정책이 무장 출신으로 국가를 세운 창업 군주의 대표적 단견이라고 비판한다.
스물 아홉 명의 부인을 뒀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개인적인 욕망이었던 셈.
성종의 중국화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미 고려가 건국한지 백 여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지방관조차 제대로 파견을 못하고 국가 정비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제도에 의해 운행되는 정상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과도기적인 상태였던 셈이다.
성종의 업적은 이런 국가를 행정적으로 안정시키고 지방에 그나마 12목을 세우고 대읍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조세를 거두고 지방행정을 장악하고 교육 기관을 건립하며 군사 제도를 정비했다.
말하자면 국가 제도의 기반을 닦은 셈인데 이런 과정에서 터져 나온 기득권층의 불만을, 단지 우리 것을 버리고 중국을 쫓아 사대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비판한다는 건 너무 짧은 소견이다.
이래서 TV 에서 보여 주는 역사 의식은 언제나 표면적이고 즉흥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11세기 북중국의 강자로 떠오른 거란의 침입은, 당시 고려 조정 입장에서는 엄청난 국난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1차 침입 때 소손녕은 본격적으로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 출병했다기 보다는 중원 진출을 앞두고 후방을 다지기 위한 무력행사 수준이었기 때문에 서희와의 강화 회담이 성립되어 순순히 물러가게 된다.
당시 고려의 국경선은 청천강 이남이었기 때문에 거란의 국경선인 압록강부터 청천강까지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서희는 이 빈 공간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거란과의 화의를 다지겠다고 제안한다.
이 때 세워진 강동 6주의 성들은 후에 거란이 재침했을 때 훌륭한 방어막으로 작용한다.
시간이 흘러 고려는 다시 송과 외교를 재개하고 거란과의 관계는 악화된다.
연운 16주를 획득하고 송으로부터 엄청난 세폐를 받던 거란은 이번에는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친정한다.
양규 등이 흥화진에서 버티자 이 곳을 우회하여 통주로 진격한다.
거란의 장점이 초원 유목민의 특징인 기동 작전이다.
굳이 성을 정복하려고 애쓰지 않고 과감하게 건너 뛰어 개경 쪽으로 진군해 버린 셈이다.
자칫 보급로가 끊길 위험이 있으나 거란군의 편제를 보면 기병 하나에 말 세 필과 보급 군사 둘이 붙어 시종하는 형상으로 보병처럼 자기 식량을 스스로 지고 가는 게 아니라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훨씬 더 빠르게 진격할 수 있다.
통주성에는 성종의 친정 명분이었던 정란의 주인공 강조가 버티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는 한 번의 성공에 자만하여 수성을 포기하고 30만 대군을 이끌고 성을 나와 공격하다가 군사를 셋으로 나눠 공격하는 양동 작접에 걸려 들어 천혜의 수비 요건을 갖춘 통주성 밖에서 몰살당하고 만다.
끝까지 복속을 거부하고 처형당했던 걸 보면 강조가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나름대로 신념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통주성 전투에 승리한 거란군은 그 아래 곽주성으로 내려가 공격했으나 이 때 흥화진을 수비한 양규가 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곽주로 내려와 동북면의 군사들과 합류하면서 막아낸다.
양규의 활약은 참으로 놀라운데 불행히도 거란군의 퇴각시 포로들을 구출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거란은 이번에도 곽주성을 포기하고 바로 서경으로 진격한다.
코앞에 있던 개경에서 정변으로 막 왕이 되어 떨고 있던 현종은 결국 나주까지 피난을 떠나는데 지방행정을 중앙에서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던 때라 곳곳에서 폭도들의 침입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의주까지 피난을 떠났던 임진왜란의 선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몽진길이었을 것이다.
왕이 떠나버린 개경을 점령하긴 했으나 진격하는 동안 제대로 된 중간기지 하나 만들지 못했던 거란군은 결국 고려 정부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퇴각하는 과정에서 고려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완전히 전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고 계속 국지전이 국경 부근에서 지지부진하게 지속되면서 결국 소배압이 이끄는 3차 침입이 시도된다.
이 때도 강동 6주의 성을 모두 우회하여 직접 개경으로 진격하는데 이번에는 현종도 피난을 떠나지 않고 개경을 사수하고 그 과정에서 유명한 귀주대첩을 거두기도 한다.
무려 30여년에 걸친 지리한 싸움이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현종은 그 후 개경 방어를 위해 나성을 축조하고 거란은 허망하게도 몇 년 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망하고 만다.
고려로서는 북방의 위협을 잘 이겨낸 셈이다.
12세기는 여진의 시대다.
한낱 부락에 지나지 않았던 여진이 부족을 통일하고 고려를 위협하자 거란전의 교훈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고려 조정에서도 선수를 치게 된다.
1차 충돌 때의 패배를 교훈삼아 공격부대인 별무반을 편성하여 전시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이를 주도한 것은 조선의 세조처럼 조카의 왕위를 뺏은 숙종인데 출전 직전 사망하고 아들인 예종이 2차 원정을 준비하게 된다.
이 때 윤관을 중심으로 한 원정군의 규모는 17만.
당시 고려로서는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군사 정벌이었을 것이다.
이 원정에서 승리하여 동북면에 9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켜 방어를 하나 결국 지키지 못하고 4년만에 9성은 여진족에게 돌려 주고 만다.
역사책을 보면 전쟁에는 나가지도 않은 문신들이 조정에 앉아 9성을 환원하고 전쟁을 끝내자고 떠벌린다는 식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지는데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면 당시 고려로서는 이 동북면 지역을 제대로 지키기에는 희생이 너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조선의 세종이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가혹하게 주민이주정책을 실시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국경선 부근을 완전히 행정 구역에 편입시켜 방어를 튼튼히 하고 농경민을 정착시킨다는 게 단시간에 이뤄질 수 있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애써 지은 9성을 돌려주긴 했으나 그 후 6년 만에 금을 건국하고 거란과 송나라를 멸망시킬 만큼 국력이 팽창했으나 고려를 다시 침입하지는 않았다.
당시 고려 조정의 원정이 헛되지 않았던 셈이다.
12세기의 평화는 이 때의 노력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고려 전기의 국가 존망을 흔들었던 두 번의 전쟁을 입체적으로 상세히 서술하여 당시 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