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쇼핑 2 - 나만의 컬렉션을 위한 첫 걸음
이규현 지음 / 앨리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 쇼핑 1권을 읽을 때만 해도 막연히 저자가 남자라고만 생각했다.
이규현이라는 중성적 느낌 때문에 그랬나 보다.
2권의 책날개에 실린 귀여운 얼굴을 보고 그제서야 작가의 성별을 알게 됐다.
어느새 조선 일보를 그만두고 뉴욕의 예술 대학원을 졸업하여 아트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어쩐지 저자의 성장을 지켜 보는 것 같아 약간의 흐뭇함이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나만의 컬렉션을 위한 첫 걸음>이라는 부제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나만의 컬렉션을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나는 책도 마찬가지지만 그림 역시 뭘 꼭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서 사는 것 자체는 큰 관심이 없다.
늘 새로운 것을 탐하는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아무대로 나에게는 컬렉터 기질은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물건들도 잘 버린다.
그렇지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천성적인 컬렉터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어린 시절 우표 수집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뭔가를 모으고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속성이 오늘날 문화를 만든 밑걸음이 됐을 것이다.
미술 작품의 경우 워낙 고가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세계 억만장자들의 새로운 투자 놀이 같아서 도저히 따라할 엄두가 안 나지만, 100만원 미만의 소품에서 시작해 점점 안목을 키우고 여유가 생기면 조금씩 투자액을 늘려 보라는 조언을 따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패션도 마찬가지지만 일단 돈을 좀 써 봐야 (그리고 몇 번의 실패를 거쳐야) 자기만의 감각이 생기는 법이니까.
나만의 컬렉션을 갖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테마를 정하라는 것이다.
무조건 감각적으로 사는 것보다는 (사실 너무 비싸서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아이에 관련된 그림만 모으겠다든지, 도자기만 수집하겠다든지 이런 주제를 정하면 나름대로 작품 보는 안목도 생기고 흥미도 배가된다고 한다.
알맞은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낙숫물에 구멍 뚫어진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큰 돈을 들여 사려면 일단 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 갤러리나 아트 페어 같은 곳에 자주 참석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미술관은 워낙 규모가 크기 때문에 한 번에 다 볼 수도 없으나 작은 갤러리들은 한 시간이면 휙 돌아 볼 수 있으니 나들이 겸해서 구경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돈 받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말이다.
다만 저자의 말처럼 괜한 심리적 장벽 때문에 선뜻 들어서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아트 페어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야인데 다양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구경할 수 있다는 점도 무척 매력적으로 들린다.
사실 나도 그림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대학교 때 유럽 배낭 여행을 가서 미술관을 관람하다가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감동적인 명화등를 접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잘 모르기 때문에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기회가 되면 갤러리나 아트 페어 등을 자주 가 봐야겠다.
아직은 외국에서 오는 대형 전시회 밖에는 못 가는데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접해 보는 것도 새로운 시도가 될 것 같다. 

책의 대부분은 매번 갈아치워지는 엄청난 경매 기록 경신에 맞춰져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다 보니 예술의 가치를 논하는 것보다는 (사실 동시대 작가들의 경우 아직 평가가 다 끝난 것도 아니니 섣불리 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 작품이 얼마에 팔렸냐가 가장 궁금할 것이다.
지금까지 최고의 경매액수는 자코메티의 조각상 <걷는 남자 1>인데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을 누르고 무려 1,430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워낙 엄청난 금액이라 쉽게 감이 잘 안 온다.
1억원이 넘는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을 보고 집 한 채 값의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뭐가 좀 다른가? 이런 반발심이 생기곤 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단지 감상용 미술 작품 하나에 천 억원이 넘는 돈을 쓰다니, 부자들의 생활 방식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우선 든다.
그러나 워낙에 돈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또 그 돈이 한 푼 두 푼 고생해서 모은 돈이 아니라 (그렇게 소박한 방식으로는 억만장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외환시장의 환투기나 주식 등을 이용해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거라면 물질적인 안락함과 쾌락으로는 더 이상 돈을 쓸 곳이 없으니 다음 단계로 정신적 만족감을 위해 미술품을 수집하고 싶기도 할 것 같다.
더군다나 경매 기록을 경신하면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만큼 돈이 많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는 셈이니 과시욕을 만족시키는 데도 그만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단지 집에 모셔다 놓고 감상만 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수 십배의 수익을 낼 수도 있다고 하니 투자 품목으로서도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미술품 투자 시장은 해마다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금융 경제로 벼락부자가 되는 시스템이 계속될수록 경매 시장의 최고가액 경신은 역시 계속될 것이다.
미술 관련 에세이를 읽으면서 신기하게도 미술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니는 금융권 출신 작가들이 많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투자로서의 미술품 수집에 이보다 적합한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또 작품을 살 만큼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부유층의 그림 수집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앞서 읽은 K 옥션 사장의 에세이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생소하지 않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 책을 읽는 것은, 같은 책을 반복하는 것보다 더 재밌고 유익할 때가 많다.
작품을 직접 구입할 날은 아마도 조만간은 오지 않을 듯 싶으나 일반인의 그림 수집에 관한 에세이는 꽤 흥미로워 다른 경매 관련 책들도 읽어 볼 생각이다.
모처럼 집에서 뒹굴거리며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을 다시 생각한다 - 인간, 돈, 빚에 대한 다섯 강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공진호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이 너무 특이해서 읽게 된 책인데 생각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빗대어 인간은 모두 지구의 환경에 빚지고 있으니 자원을 아껴 써야 한다는 식의 패러디는 생뚱맞기까지 했다.
빅토리아 소설의 주제를 사랑 대신, 돈 더 노골적으로 빚으로 보는, 즉 돈이 없으면서도 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포커스를 맞춘 시도 자체는 신선했다.
자기 능력 밖의 풍요로움과 사회적 위세를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속물적 근성을 가장 리얼하게 보여 준 소설이 바로 <오만과 편견> 같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고상한 주제도 없고 노골적으로 돈과 명예, 지위 등을 따지는 등장 인물들의 태도에 굉장히 화가 났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인 오스틴의 날카로운 안목이 놀랍기만 하다.
빚 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빼 놓을 수 없는데 빅토리아 소설이 주제라 그런지 대신 찰스 디킨스가 자주 등장한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지고 간다는 기독교의 보속 교리를 감히 빚에 비유한 저자의 담대함이 신선했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자연에, 혹은 절대자에게 일종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 자연에게 보답하기 위해 희생양을 바쳐 왔다고 한다.
그게 자기 자신이 아닌 힘없는 어린 아이나 여자, 혹은 노예여서 문제지만 하여튼 자연의 준 풍요로움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인신 공양 등의 풍속이 있었고 좀 더 순화된 것이 양이나 소 등의 희생제의였다고 한다.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께 생명이라는 빚을 졌으니 순종으로 갚아야 하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가 대신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탕감했다는 것이다.
보속이나 구원의 논리를 영적인 빚의 탕감으로 보는 게 신선하다.
기왕이면 인간 생활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빚, 더 근본적인 의미로 통제하기 힘든 욕망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혹은 컨트롤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운 부분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이카 2010-10-2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좀 제안? 좀 드리고 갈까 합니다만. 전 기독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그러니, 개신교에서 부르는 "하나님"의 명칭은 천주교에서 "하느님"과 같은 신이라고 본다면, 기독교를 통칭해서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건 좀 그렇네요. 쫌스럽게 따지는 거 같아서 죄송하지만요. 혹시, 옮긴이가 그 문장을 책속에서 썼고, 님께서 인용을 하셨다면 제 말은 그냥 넘어가시구요.
 
아랍인의 역사
앨버트 후라니 지음, 김정명.홍미정 옮김 / 심산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관에서 책을 받아 보고 두께에 일단 기가 질렸다.
8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이라 계속 미뤄 왔는데 막상 읽어 보니 상당히 쉽게 쓰여 있고 이슬람의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쭉 기술해 이야기책 읽듯 편하게 넘길 수 있었다.
이슬람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어서인지 아주 생소하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역시 독서의 가장 중요한 힘은 배경지식과 호기심인 것 같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주석을 매우 성실하게 달아 놔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번역도 무척 매끄럽다. 

이슬람 하면 막연히 동질된 세계라고 인식했는데 발전 과정을 살펴 보니 상당히 이질적인 세계가 이슬람교라는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정체성을 갖고 모인 다양한 집단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Maghreb 이라고 불리는 북아프리카는 서아프리카 등과는 상당히 구별되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교가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를 거쳐 오스만 제국에 이르는 동안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등으로 뻗어갔고 이 오스만 제국이 19세기 들어 유럽 열강에 먹히면서 북아프리카 지역은 아프리카 내에서 더욱 유럽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됐다.
이 책이 두꺼워진 이유가 단순히 역사적 사건만을 나열한 게 아니라 이슬람교의 교리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수피즘은 당시 유행하던 동방 정교회의 수도원 제도 등에 영향을 받은 신비주의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크게 보면 이슬람은 정통 율법주의인 순니파와 수피즘에 영향을 받은 쉬아파로 나뉠 수 있는데 수피즘은 춤과 음악, 시 낭송, 집회 등을 통해 알라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일종의 영지주의라 할 수 있겠다.
눈에 보이지 않고 느낄 수도 없는 절대자와의 정신적 일치를 위해 몰아지경의 세계로 가려는 인간의 종교성에 항상 놀라곤 한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겠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종교인들이 느끼는 희열은 집단 환상에 의해 스스로 창조해 내는 상상의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알라라는 절대자와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무슬림들의 욕구는 하나님을 찾는 기독교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은 혁명 - 자유와 평등을 향하여, 쿤타 킨테에서 버락 오바마까지
정상환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도서관 반납 일자에 쫓겨 한 번에 다 못 읽고 나눠서 읽은지라 연속성이 끊긴 책이다.
한국인이 쓴 미국 흑인 민권 운동사라는 다소 특이한 주제의 책이다.
대의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히 모든 인류의 완전한 평등이라는 명제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미국 사회의 흑인 지위라든가 권리 등에 대해서는 사실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워낙 나와 관계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피부로 느끼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인권의 발전이라는 큰 명제에서 생각해 보면 노예로 끌려 온 흑인들의 권리 쟁취 과정은 확실히 타문화권인 나 같은 독자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고 아마도 저자 역시 외국인이면서도 그런 의미로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법률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현직 검사라는 신분에 맞게 흑인 권리 획득의 법률적 해석과 과정을 상세히 기술해 도움이 됐다.
오바마의 당선이 흑인 사회에서는 엄청난 진보로 평가되고 있는 만큼, 향후 흑인들의 지위 변화가 궁금해진다.
단 한 명의 개인적 출세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될지는 약간은 회의적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도 할 수 있다, 혹은 우리도 열등하지 않다는 상징적인 의미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흑인 젊은이들이 폭력 문화에 기대어 학업을 일찍 마친다거나 아시아계 이민자들과는 달리 교육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생활보조금에 의존하는 흑인 미혼모다 많다, 도덕적으로 더 각성해야 한다는 식의 교훈적 충고는 약간 거북스럽기도 했다.
결국은 시스템의 문제인데 윤리적 차원의 당위성 강조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노예제로부터 시작해 2010년도의 오바마 당선까지 과정을 시간적으로 쉽게 기술한 책이고, 흑인 민권 운동사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자의 역사 - 목소리의 그림은 문자가 당신에게 말을 걸다
스티븐 로져 피셔 지음, 박수철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사실 좀 지루하기도 하고 어려웠다.
주제는 무척 흥미로운데 구체적인 사항으로 들어가면 음운론 같은 어려운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저자 서문에 나온 것처럼 가벼운 예습거리로 읽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도서관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읽다가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모르는 단어나 개념이 나오면 검색하면서 재독했더니 조금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한 번에 쭉 읽었어야 하는데 조금씩 끊어 읽다 보니 아무래도 연속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어렵고 지루한 책은, 내 배경지식이 적기 때문에 개념이 익숙치 않아 흥미가 떨어지게 된다.
이런 책의 경우, 비슷한 주제의 좀 더 쉬운 책을 읽은 다음에 다시 읽거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관련 자료를 찾으면서 읽으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책 한 권에 담겨진 지식은 참으로 광범위 하고 넓은 것 같다.
단 한 번의 가벼운 일독으로 책에 담긴 전체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정확한 이해 보다는 대략적인 느낌의 스케치를 하는 듯 하다.
본격적으로 전문가의 길로 들어설 것도 아니니 그나마 약간의 개요라도 그릴 수 있는 게 어디냐 하는 심정으로 읽곤 한다. 

가장 인상깊었던 개념은 모든 문자는 창조가 아니라 차용과 변형이라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소리를 시각적인 기호로 표기한다는 문자의 기본적 아이디어가 수메르 문자에서 시작됐고 지구상의 모든 문자는 바로 이 수메르 문자의 차용과 변형이라고 여긴다.
흔히 독립적인 창조로 알려져 온 한자나 중앙 아메리카의 문자마저도 기본 아이디어는 기존의 문자 사회에서 빌려온 것으로 생각한다.
중앙 아메리카의 경우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확실한 근거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한자와의 여러 유사성을 고려할 때 한자에서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중국의 한자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메소포타미아에서 문자의 원리가 건너 왔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상나라 때의 갑골문은 이미 완벽한 문자의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기억 부호에서 음성을 기록하는 완전한 문자로의 진행 과정이 없는 이상, 고립된 지역의 전혀 새로운 창조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중국 학자들은 반발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한글 역시 불교 경전을 통해 인도의 문자체계를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개발한 것으로 본다.
언젠가 TV에서 일본의 신대문자나 인도의 어떤 글자 체계와 한글이 매우 닮은 꼴이라 세종대왕이 그런 문자들을 참조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보고 베꼈다 이런 식의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여러 문자 체계에서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와 한글을 창제했다는 입장이다.
심지어 고대 중국의 한자와 중앙 아메리카의 마야 문자 등도 다른 곳에서 건너 온 것으로 보는 이상, 한글 역시 인류의 전혀 새로운 창조물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 전에는 한글이라는 발명품이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워 한국인이야 말로 엄청난 창의력을 가진 민족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을 사회에서 조장하기도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각 민족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기호로 표기하기 적합한 문자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해 왔고, 한글 같은 자민족의 문자 대신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것이, 문자를 발명하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알파벳의 변용과 차용을 통해 충분히 자국어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간단히 말해 라틴 알파벳의 확산은 다양한 언어를 표기하기에 적당할 만큼 알파벳의 유연성과 가변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컴퓨터의 보급으로 알파벳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심지어 오랜 문자 전통을 지닌 중국마저도 병음표기법을 통해 한자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다.
영어의 확산이 단순히 영미 국가들의 국력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적어도 알파벳의 확산은, 멀리 수메르 문자에서 시작된 표음문자의 아이디어를 통해 이집트의 표어문자가 원형을 확립했고 시나이 원문자와 페니키가 알파벳 등을 통해 그리스와 로마로 전해지면서 가다듬게 된 놀라운 가소성과 안정성 덕분임을 이해하게 됐다.
그러니 단순히 알파벳을 서양 문화의 확산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