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서유기 - 중국 역사학자가 파헤친 1400여 년 전 진짜 서유기!
첸원중 지음, 임홍빈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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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서관에서 처음 받아 보고 두께에 살짝 기가 질렸던 책이다. 
660페이지의 두꺼운 책은 근래 들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여행을 다녀오는 바람에 계속 못 읽고 있다가 오늘이 반납 마감일이라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읽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쉬워서 한 번에 쭉 읽게 됐다.
역시 TV 방송물을 책으로 옮겨서인지 내용이 상당히 평이하다.
마치 TV 속의 이미지를 글로 설명한다고 해야 할까?
약간 중언부언 하는 점도 없지 않아 조금 더 압축해서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현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다소 불만스러운 점을 먼저 말하자면, 현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방대한 책을 쓰다 보니 너무 이상화시켜 정말 그랬을까?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구글을 검색하면서 읽었는데 신동아에 기고된 어떤 글에 따르면 현장이 당 태종의 지원 아래 서역 기행을 떠났기 때문에 대당서역기에 여러 나라의 정보들이 자세히 기록됐다고 되어 있었다.
마치 한 무제 때의 장건이나 명의 영락제 때 정화처럼 말이다.
그런 거창한 국가적 지원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쨌든 완전히 순수하게 불경만을 구하러 간 건 아니었다는 뉘앙스였다.
이 책의 여러 정황 증거들로 봐서는 정말 개인적인 바램 때문에 중앙 아시아를 넘어 인도로 간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 설명하는 대로 현장 개인의 힘으로 인도와 중국 간의 교역과 외교 관계가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서역 경영에 관심이 많던 당 태종이 19년을 서역에서 보내고 온 현장의 중요함을 인식하고 그에게 관심을 보인 게 아닐까 싶다.
책에서는 모든 게 다 현장의 높은 학식과 고결한 인품 때문에 온 인도 국왕들과 당 태종까지 감복해 두 지역간의 사절이 오고가고 대승불교가 전 인도에 퍼졌다는 식으로 너무 미화시켜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당시 중국과 인도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교류하고 있었고, 중국에서 온 승려라는 이유로 대우를 받을 만큼 대당제국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이다.
개인 자격으로 외국에서 온 유학생에 불과한 스님이 서역의 여러 왕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 가지 반성했던 것은 내가 불교에 대해 너무 무식했다는 점이다.
막연히 불교는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자기 수양의 종교가 아닐까,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비하면 교리가 약하고 미신적 요소가 많은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정말 그야말로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책에 소개된 수많은 불교 이론과 경전, 고승들에 대해 읽으면서 새삼 불교 사상에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역시 개창자인 붓다가 인도 사람인 만큼 인도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서유기의 손오공이라는 캐릭터만 해도 인도의 유명한 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원숭이 하누만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저팔계의 팔계는 승려로 출가하기 전의 사미나 거사 같은 사람들이 받는 여덟 가지의 계율이라고 한다.
현장은 미륵불을 추종하는 유식종의 창설자인데 이 유식론을 배우기 위해 날란다 서원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지식이 얕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론이라고 한다.
불교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 

현장은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하고 유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유교 경전에도 소양이 있어 인도의 불경 번역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다.
그는 흔히 동진의 구마라습에 비교된다.
이 분 역시 불경의 한화 작업에 큰 업적을 남기신 인도의 승려인데 유교적 교육은 받지 못해 비교적 쉬운 말로 번역했는데 현장이 이런 약점을 극복했다고 한다.
그는 태종의 명으로 대당서역기를 쓰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인도에서 돌아온 40대 후반부터 20여 년 동안 불경 번역에 매달여 2000 여 권에 달하는 엄청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한가지 슬픈 에피소드는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가 당 황실의 공주와 사통하는 바람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현장은 중국의 도덕경 같은 것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해 인도에 전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그의 산스크리트어 번역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장이 사막을 건너 북인도까지 이르렀던 여정을 살펴 보면 상당 부분은 지금의 신강 위구르 자치 구역이다.
거기에 수많은 나라들이 존재했음을 대당서역기를 통해 알게 됐다.
얼마 전에 위구르족과 한족의 유혈 충돌도 있었는데 위구르 민족에게는 아픈 역사라는 생각도 든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금방 사그라든 줄 알았는데 상당 시간 동안 여러 왕국에서 신봉되고 경전과 여러 교리들이 완성됐음을 알게 됐다.
이슬람 세력이 몰려 오면서 점점 밖으로 쫓겨 가게 됐으나 고타마 싯다르타의 열반 이후 유명한 아쇼카 왕이나 카나슈카 왕 치세에 구전되던 부처님의 말씀이 하나의 경전으로 정착하면서 안정화를 거친다.
현장이 유학했던 날란다 사원은 유명한 학승들이 유학하던 곳으로 이슬람의 침입 후 폐허가 됐으나 1980년대에 대당서역기를 토대로 중국의 지원 아래 현장을 발굴하여 복원했다는 미담도 전하고 있다.
저자는 그만큼 대당서역기가 믿을 만한 자료임을 강조한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명칭이다.
사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본다는 표현이 비유적이면 몰라도 말이 안 되긴 하다.
소리를 들어야지 어떻게 본단 말인가?
예전에도 의문을 품었던 부분이다.
그런데 현장의 책에 왜 이런 오해가 일어났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관세음보살은 세상을 자유자재로 본다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로써 관자재보살이라 번역해야 맞다.
그런데 두 단어가 합성되는 과정에서 최초 번역한 사람이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세상의 소리를 본다도 해석하는 바람에 관세음보살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원뜻을 살려 관자재보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발음이 좀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관세음 보다는 관자재보살이 훨씬 이치에 맞는 표현 같다.
또 현장은 인도라는 말의 어원을, 산스크리트어로 달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는데 후대 승려는 다른 책에서 이것은 현장이 좋은 뜻으로 해석한 것이고 원래 인도를 가리키는 인디카라는 말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말의 어원을 추적한다는 게 무척 흥미롭다. 

분량에 비해 너무 쉽고 재밌게 읽은 책이다.
항상 모호하기만 했던 서역의 이미지가 좀 더 생생하게 다가오고 불교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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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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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 표지가 떨어져 나가기 직전의 책을 조심스레 넘기며 읽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꽤 방대한 분량인데 소설이라 그런지 쉽게 술술 넘어갔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봐야지 벼르고만 있었는데 역시 이번 터키 여행 때 비행기 안에서 읽게 됐다.
그러고 보면 비행기는 꽤나 좋은 독서 장소다.
흔들림이 없고 조용하니까 집중도 잘 된다. 

막연히 인권에 대한 책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 보니 <호밀밭의 파수꾼>과 매우 유사한 필체였고 저자도 이 작품 하나를 쓰고 절필했다고 한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일곱 살의 여자아이 눈으로 본 세상의 편견, 인종차별, 불의에 관한 내용인데 화자가 일곱 살이라 그런지 내용이 어렵지는 않았다.
심오한 개념보다는 직설적인 어법이 많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소 지루하기도 했다.
진정한 영웅은 주인공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의 변호사인데 아내가 일찍 죽어 어린 젬과 스카웃 남매를 키우고 있다.
흑인 가정부 칼퍼니아가 집안 살림을 맡아 한다.
시대적 배경은 흑인 차별이 한창 심했던 1930년대의 남부 앨라배마 주.
변호사 하면 어쩐지 소송 일삼으면서 돈이나 버는 악덕 이미지가 강해서 전반부에서는 애티커스의 역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애티커스가 보여주는 그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흑인의 애인이라는 (동성애자 의미) 모욕적인 언사까지 들으면서도 마을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끝까지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
어떤 면에서는 흑인이라고 차별하고 폭행하는 마을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을 비난하고 대립할 수 있는데도 당시 시대적 배경과 한계를 이해하는 애티커스의 포용력이 놀랍다.
그는 매우 조화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애티커스의 인격은 듀보스 할머니라는 괴팍한 노인네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애티커스가 흑인의 강간 사건을 맡게 되자 마을에는 그를 비난하는 여론이 쫙 퍼지고 옆집에 사는 듀보스 할머니는 애티커스의 아들 젬에게 아버지 욕을 한다.
그러나 애티커스는 화가 나서 할머니의 꽃밭을 망쳐 버린 젬을 타이르면서 사과하라고 시킨다.
할머니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고 지금도 통증을 잊기 위해 몰핀 주사를 맞을 만큼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환자였던 것이다.
그는 약자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감쌀 줄 아는 놀라운 포용력을 보인다.
그리고 몰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고통을 참는 할머니를 위해 아들에게 매일 책을 읽어 주도록 시킨다.
자신에게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아들에게 자신을 욕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한 달씩이나 아들을 그 집으로 보내 침상을 지키게 한다는 것, 과연 보통 인격으로 가능한 일일까?
강간 사건의 변호도 그렇지만 이 에피소드에서도 애티커스의 놀라운 인격과 포용력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톰 로빈슨은 스물 다섯의 흑인으로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마을의 허드렛일을 해 준다.
마을에는 밥 이웰 일가가 외딴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데 술주정뱅이에 최하층 백인으로 묘사된다.
그는 아이들을 때리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다.
큰 딸 마옐라는 가끔 톰에게 집안일을 거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톰은 이웃과 전혀 교류가 없는 거의 갇혀지내는 이 불쌍한 백인 아가씨를 위해 기꺼이 봉사한다.
그러던 어느 날, 놀랍게도 이 아가씨는 욕정이 발동해 톰을 집으로 끌어 들여 자신의 몸을 더듬게 한다.
두려움에 떨던 톰은 도망가려 하고 그것을 발견한 아버지 밥이 달려와 딸을 폭행한 후 톰을 강간범으로 기소한다.
이 사건의 국선 변호사로 애티커스가 선임되어 재판이 진행된다.
흑인은 백인에게 존댓말을 쓰고, 백인이 버스에 타면 자리도 양보해야 하던 시절이니 (그것도 미국의 최남부 앨라배마 주) 마을 사람들은 밥 이웰이 평소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흑인이 백인을 강간했다고 분노한다.
결과는 사형!
아마 오늘날의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약자인 여자 쪽의 말에 더 무게가 실릴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차별이 될 수도 있는 문제 같다.
심지어 재판 중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톰을 폭행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감옥으로 몰려 오고 그 곳을 지키던 애티커스까지도 폭행당할 위협에 놓인다.
화자 스카웃은 겨우 7~8세의 어린 나이로 이러한 처지에 빠진 아버지를 목격한다.
그런데도 아버지 애티커스는 마을 사람들의 무지함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돌아갔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둔다.
근본이 나쁜 사람은 없다, 그들의 마음 속에도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 역시 인종차별이나 근거없는 대중의 편견에 분노하고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을 이렇게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변호사는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지 모르겠다. 

마옐라는 뻔뻔하게도 자신이 유혹해 놓고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 놓고서도, 톰을 강간범으로 고소하고 그에게 맞았다고 주장한다.
톰은 외롭게 갇혀 지내는 마옐라에게 유일한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겨우 열 아홉 살 밖에 안 된, 어찌 보면 사회의 최하층민인 (흑인을 제외하고) 약자인데도 어찌나 뻔뻔하고 역겨운지 전혀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그 아버지 밥 이웰은 워낙 형편없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에 더 분노하고 말 것도 없었다.
미국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흑인들이 아니라, 백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최하층의 백인들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모든 울분과 분노를 가장 아랫계층인 흑인에게 쏟아 붓는다.
그들의 유일한 자긍심은 바로 피부색이 희다는 단 한 가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온 서구 사회가 아직도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입장이면서 수 백년 동안 지속되어 온 흑인 차별에 대해서는 어쩌면 저렇게도 당당할 수 있는지, 정의나 평등은 과연 기득권층에게만 해당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배심원들에게 톰은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확정을 받는다.
항소를 준비하던 중 톰은 기다리라는 애티커스를 믿지 못하고 탈옥하려다 경비병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이미 톰이 죽었는데도 밥 이웰은 원한을 품고 홀로 남은 세 아이의 어머니인 톰의 아내를 괴롭히고 심지어 애티커스의 아들 젬과 스카웃을 공격해 팔을 부러뜨리기까지 한다.
이 때 남매를 도와 준 사람이 바로 마을의 또다른 이방인 부 래들리.
그도 역시 백인인데 미치광이란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감금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고 평생 갇혀 산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도 온갖 소문을 만들어 내고 악인이자 미치광이로 묘사된다.
사실 밥 이웰은 공공연히 애티커스를 죽이겠다고 설치고 다녔으나 실제로 어른인 애티커스 앞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힘이 약한 아이들을 죽이려고 노렸던 것이다.
얼마나 비겁하고 못난 놈인가.
직접 본인에게는 덤비지도 못하고 약자인 아이들을 뒤에서 노리다니.
결국 그는 댓가를 치뤄 아이들을 죽이려고 한 그 칼에 자신이 찔려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런데도 애티커스는 혹시 다투는 와중에 아들 젬이 밥 이웰을 찌른 건 아닌지 조사하려고 한다.
아들이 뒤에서 살인자라는 수근거림을 듣고 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목격자인 부 래들리가 있고, 보안관의 강력한 변론에 힘입어 사건은 종결된다. 
마을의 기피 인물이었던 부 래들리도 사실은 착한 마음씨를 지닌 선량한 인물이었음이 밝혀진다.
가엾은 희생양 톰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1930년대의 상황에서 그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한 가지 또 특기할 만한 것은, 말괄량이 스카웃이 단지 얌전하고 바느질을 잘 하는 겉모습만의 숙녀가 아니라 활발하게 뛰어놀고 거칠게 자랄지라도 편견이 없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진정한 숙녀로 커가는 과정이다.
고모 알렉산드라는 엄마 없이 자란 스카웃이 남자처럼 함부로 자란다고 오빠 애티커스에게 잔소리를 하고 직접 스카웃을 감독하려고 든다.
그러나 진짜 숙녀는 겉모양만 얌전한 게 아니다.
그거야 말로 속물적인 게 아닌가.
진짜 숙녀는 아버지 애티커스가 보여준 것처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편견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게 많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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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2010-08-2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의 제국 - 소설로 읽는 아메리카의 초상' 김욱동 교수님 강좌
http://blog.daum.net/pangloss/6940330

영탁 2010-09-0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절한 자상한 독후감 감사드립니다.
책을 사놓고.외국어로된)..읽지못해서...
덕분에 이제는 제대로 읽게 되었습니다.
 
아웃라이어 -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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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읽어야겠다 맘만 먹다가 드디어 읽게 된 책이다.
그렇고 그런 뻔한 자기 계발서 같아서 안 보려고 했는데 교수님이 추천하시길래 관심이 갔다.
독특한 구석이 있긴 하다.
성공이 자기가 잘나서만 되는 게 아니라 시대적 상황이 맞물려야 큰 성공을 할 수 있다는,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본인의 노력도 가미되야 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과 일맥상통 한달까?
제일 인상깊었던 대목은 집중양육이라는 개념이었다.
한국의 엄청난 교육열은 서구의 창의적 교육과 비교되어 항상 비난의 대상이었는데 비교적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아마 저자도 한국에 부는 이 미친 사교육 열풍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킨 것 같다.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교육이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하고, 특히 아시아 이민자들은 자식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기 때문에 미국 사회의 엘리트 계층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벼농사가 밀농사에 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한다는 점도 문화적 배경으로 꼽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이나 중국의 농부들은 이른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논바닥에 엎드려 벼와 씨름을 해 왔던 것 같다.
나는 그게 키우는 작물의 문제라기 보다는 우리나라의 농지가 워낙 적어 단위 집약적 농업을 하기 때문에 노동량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밀농사에 비해 손이 많이 간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쌀농사 보다는 밀농사가 더 많이 행해지는 걸까? 

나는 지금까지 유전자 결정론을 믿었다.
양육이냐 본성이냐는 논쟁에서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의 결론은 유전자가 대부분을 결정한다고 했다.
간단히 말해 될 놈은 어떤 환경에서도 다 된다는 것.
그래서 사교육을 아무리 많이 시켜도 근본적인 차이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확실히 집중양육의 이점이 있긴 한 것 같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바보도 아닌데 그 엄청난 돈을 교육에 쏟아 붓겠는가.
적어도 언어 교육 같은 경우는 어려서부터 외국어에 노출되는 빈도가 늘수록 유리한 건 사실이니까.
(결국은 영어 유치원을 보내야 한다는 얘긴가?)
방학 때 아이를 혼자 알아서 놀도록 방치하는 것과 엄마가 끼고 돌면서 다양한 교육을 시키는 것의 차이는 확실히 크다고 한다.
많은 경험을 할수록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면에서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히고 자기 의견을 다른 사람 앞에서 분명히 밝힐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 남과 협상하는 법을 배우는 것 등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영재교육의 효과는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경험의 폭을 넓힌다는 점에서는 나도 집중양육에 어느 정도 찬성하는 바다.
이러니 갈수록 아이에게 드는 교육비가 올라가고 저출산은 피할 수 없는 문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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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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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힘들게 읽은 책.
이번에 터키 여행 가서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지난 번 스페인에서도 읽으려고 했다가 못 읽고 반납했는데 이번에는 드디어 읽었다.
300 페이지 정도로 분량이 많지는 않은데, 소설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전쟁 체험록이라 해야 할까?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가 아니라 다소 지루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지 오웰 특유의 위트있고 콕 꼬집는 문장력은 잘 살아 있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마 스페인 내전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해 독서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읽기 전에는 프랑코의 쿠데타에 맞서 싸운 전세계 지식인들의 자유를 향한 투쟁, 동지애 이런 격한 감정적 서술을 기대했는데 막상 내용은 트로츠키파로 몰여 투옥되고 살해당한 의용군들의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묘사했다.
처음에는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한 마음으로 싸웠으나 시간이 갈수록 소련의 지령을 받는 공산당에 의해 오히려 파시스트로 몰려 인민정부 시절 어처구니 없이 투옥되고 재판도 없이 사형당한 동지들에 대한 세상의 오해가 너무나 억울했던 오웰은, 그들을 위한 긴긴 해명의 글을 쓴다.
그러니까 이 글은, 프랑코가 완전히 스페인의 정권을 쥐기 전인, 인민정부 시절의 기록인 셈이다.
왜 그가 자신과 하등 관계도 없는 스페인까지 날아가 전쟁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서술은 오히려 거의 없는 편이다.
그래서 내용이 다소 건조하고 어떤 면에서는 감정의 과잉이나 자의식이 적어 읽기 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예로 거칠게 비유하자면,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하는 건국 직후의 풍경이라고 할까?
프랑코는 당시 식민지였던 모로코의 사령관이었다고 한다.
프랑코의 군사 쿠데타에 맞서 용감하게 일어선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혁명은 스페인에 투자한 영국, 러시아 등의 외부 세력에 의해 계급 투쟁이라는 혁명적 성격은 묻혀지고 일종의 폭도로 그려진다.
지주 자본주의 계급에 의해 나라가 안정되어야 투자금을 거둘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누가 됐든 (파시즘이든 구세력이든) 현 상태만 안정화 시키면 됐던 것이다.
외세의 신문 보도에 오웰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이해가 된다.
마치 한국의 5.18이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됐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스페인의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모여든 이 의용군의 실태는, 일종의 오합지졸이라고 할까?
군기나 훈련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보급품과 무기마저 턱없이 부족한. 심지어 배급을 준다고 하니까 모여든 열 대여섯 살의 어린 꼬마애들까지 끼어 파시스트들에 의해 부상을 입는 것 보다 총을 잘못 다뤄 스스로 상처를 입는 경우가 훨씬 많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어찌나 잘 묘사하는지 읽는 내내 서글픈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 했던 것은, 적군이 아니라 추위와 졸음이었다는 한 문장으로도 당시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형편없는 상황 속에서도 의용군들은 전선을 이탈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고 계급을 떠나 모두가 주체성을 가지고 진정으로 평등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었던 그 잠깐의 시간이 작가에게 얼마나 소중한 체험이었는지도 절절하게 묘사한다.
이런 솔직하고 섬세한 서술이야 말로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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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사의 백신 영어 - 내 생애 마지막 영어 공부법
고수민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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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서 가끔 봤던 분인데 책으로 엮었나 보다.
사실 블로그에서는 아주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다.
뭐랄까, 좀 어설픈 느낌이 많았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보니 꽤 성실하게 자신의 영어 공부법을 피력하고 있었다.
아마도 오랜 시간 영어 공부를 했고 미국 사회에서 그 영어로 생활하고 있는 생활인의 입장에서 기술한 거라 더 와 닿는 것 같다.
제목은 좀 자극적이지만 내용은 아주 평범하고 그래서 더 신뢰가 간다.
한마디로 비법 같은 건 없으니 성실하게 꾸준히 반복하라는 것.
안 그래도 스크린 영어를 해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이 책에서도 추천을 해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볼까 싶다.
제일 인상깊었던 충고는, 듣기만 해서는 절대 잘 들을 수 없고 말하기와 읽기, 쓰기 등이 다 결합돼야 잘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쉬운 영어책을 입으로 소리내서 읽으라고 한다.
익숙해지면 테이프를 따라 읽어 본다.
굳이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반복하다 보면 외워진다는 것.
영어 일기를 쓰면 새로 배운 표현을 써먹게 되니까 익숙해지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간단한 문장을 써 보는 건 확실히 구문 익히는데 좋은 것 같다.
전공책은 좀 보지만 그 외에 신문이나 책, 영화 등은 여전히 어려운 나에게 좋은 충고가 됐다.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영어 공부를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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