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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청제국
마크 C. 엘리엇 지음, 김선민.이훈 옮김 / 푸른역사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처음에 도서관에서 책을 받아 보고 두께에 깜짝 놀랬다.
어렵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막상 열어 보니 난해한 책은 아니었다.
내가 예상했던 내용은, 청의 역사를 지배층인 만주족의 입장에서 기술하는 거였는데 이 책은 통사라기 보다는, 한족의 1/350 에 불과했던 만주족이 어떻게 중국을 268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논리정연한 주장을 펼친 한 편의 논문 같다.
750 여 페이지에 달하지만, 주석이 무려 200 페이지나 돼서 실제 분량은 500 페이지가 조금 넘는다.
훌륭한 책일수록 주석과 출처를 꼼꼼히 밝힌다는 걸 새삼 느꼈다.
사실 처음에는 집중하기가 좀 어려웠다.
익히 알고 있는 군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만주족의 지배를 공고히 했던 제도에 대해 서술을 하니, 지루한 느낌도 들고 잘 모르는 얘기라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뒷쪽으로 갈수록 팔기군에 대한 개념이 잡히고 마치 소설을 읽듯 술술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좋은 책일수록 하나의 주제에 훌륭하게 수렴하기 때문에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의 난이도와는 별개로 쉽게 읽힌다.
흔히 알고 있는 상식은, 만주족이 한화되어 민족 정체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다.
중국을 정복했으나 한족 문화에 압도되어 민족마저 사라져 버렸다고 말이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현대의 중국은 바로 청제국의 유산임을 깨달았고, 만주족은 사라져 버렸다는 섣부른 단정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지함을 보여 주는지 느꼈다.
만주족은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중국 소수민족 중 두 번째 인구 구성을 보인다.
무엇보다 그들은 현대 중국을 만든 근본이다.
내륙 아시아와 만주까지 뻗은 지금의 영토는 청제국 시절 전사였던 만주족에 의해 이루어졌고, 만한일가라는 이념 역시 5족공화로 이어져 내려와 현재의 다민족 국가를 형성하게 됐다.
실로 현대 중국의 영토와 소수민족 통합은 청제국의 유산인 것이다.
청제국은 원나라처럼 유교적 보편주의를 거부하지 않았고, 금나라처럼 완전히 한화 되지도 않았다.
만약 그들이 정복국가로써 유교적 관료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원처럼 100 년 만에 단명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족 문화에 완전히 함몰된 것도 아니다.
왕조가 300 여 년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청제국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한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바로 팔기군에 있다고 단정한다.
팔기군이라면 처음에는 만주족의 전투 집단으로써 훌륭하게 기능을 수행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타락해 무능함의 상징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몰락한 팔기는 만주팔기나 몽골팔기가 아니라 한인팔기였다고 한다.
영국과의 전쟁 때도 만주팔기는 매우 용감하게 싸워 영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서양 제국주의의 재물이 된 것은, 시대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청제국 자체의 내부 붕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팔기군은 일종의 군사 세습직이다.
만주팔기는 만주족만 될 수 있었고 모든 만주족은 팔기에 속한다.
팔기군이 곧 기인이고 나중에는 기인이어야만 만주족이라 분류됐다.
기인은 전투집단인 동시에 국가에서 모든 복지를 제공해 주는 특권 계급이다.
저자는 스파르타의 군사귀족과 비교를 했다.
그들은 만주어를 사용하고, 궁술과 기마술을 연마하며, 검약을 실천했다.
후에 만주어는 구어로써 기능을 많이 상실했지만, 여전히 만주어 구사 능력은 기인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였고 만주문은 한문과 병용되어 사용됐다.
모든 기인은 북경, 곧 경사가 고향이라 지방, 즉 주방에 파견된 주방기인이 사망하면 그 유해는 반드시 북경으로 돌아와 매장돼야 했다.
지배층은 수적으로 열세인 만주족이 지방에 머무르며 한화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이다.
기인은 경사기인과 주방기인으로 나뉜다.
주방기인은 일종의 파견근무로 죽고 나면 유해와 유족들은 북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 때문에 시신 이동에도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고, 북경으로 몰려드는 과부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청제국은 엄청난 재정을 소모했다.
기인들은 한족과의 동화를 막기 위해 만성을 지어 분리거주 했다.
북경의 경우 내성과 외성이 성벽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현재 파괴되어 옛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경사기인은 지배 엘리트들이 있는 수도에 있어 생활이 안정되었으나, 지방에 내려가 수비를 담당했던 주방기인은 상대적으로 빈곤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만성의 거주지가 좁아졌고, 재정이 고갈되어 토지 지급이 중지되었으며, 한족 상인들의 재화와 오락에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채무가 늘어갔다.
기인들은 토지 외에도 은과 곡식을 월급으로 받았고, 혼인과 장례를 치룰 때 보조금을 받았으며, 채무도 일괄 탕감해 주곤 했다.
가만이 살펴보면 현대 복지국가의 이상적인 모델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재정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구가 증가되면서 왕조는 기인들의 복지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전투도 없어져 이들이 활약할 기회도 줄어 들었고 검소함이 민족의 정체성 중 하나였던 기인들은 이제 화려한 한족 문화에 탐닉하여 엄청난 빚을 지게 됐다.
국가가 늘 일괄적으로 갚아 주었기 때문에 빚은 더욱 늘어갔다.
빚을 두려워 할 것 같으면 어찌 기인이라 할 수 있겠냐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제국은 기인들의 복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특권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자민족의 한화를 막는 중요한 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신 지배층은 기인의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여 특권층의 수를 줄여 갔다.
팔기에는 만주팔기, 몽골팔기, 한인팔기가 있는데 한인팔기는 만주족의 양자가 되거나 주인에게 충성하여 독립된 가호를 이룬 노비 출신들이 많았다.
황제는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자금을 조성하여 전당포나 대부 업무를 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인팔기를 버림으로써 (곧 이들은 기인이 아니라 한족이라고 선언함으로써) 특권층을 줄여 갔다.
민족성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아비투스라는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어 설명한다.
아비투스는 의식하기 이전의 관습으로써 민족성을 입증하는 일종의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주족을 한족과 구분짓는 중요한 표지로 여인들의 머리 모양이나, 전족하지 않은 발, 작명관습, 과부의 재가 허용, 샤머니즘, 만주어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점은 제도로써 뒷받침돼야 즉 사회적 정치적 강제가 뒤따라야 비로소 그 차이가 민족성으로 굳어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팔기군의 특권 유지는 민족성 혹은 만주족의 정체성 형성에 가장 중요한 기제였고, 청왕조는 마지막까지 이들의 복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 편의 잘 된 논문을 읽은 기분이다.
하나의 제도가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했는지, 또 왕조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일목요연 하게 잘 보여준다.
만주족의 저력과 팔기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