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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ㅣ 표정있는 역사 3
이한수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작년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보고 읽었던 책인데 충자 돌림 고려 왕들이 등장하는 역사책에서 다시 이들 계보가 헷갈려 재독하게 됐다.
여전히 고려 후기 왕들은 개별적으로 인식되지 않고 뭉뜽그려져 보인다.
조선의 왕은 개개인이 모두 분명하게 인식되기 때문에 굳이 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왕의 계보를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최근 사극 열풍에 힘입어 고려사도 많이 조명되고 있는 만큼 좀 더 고려사에 대한 대중과 학계의 관심이 커지길 바란다.
200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분량이라 읽기도 편하고 저자 나름의 역사적 식견도 분명해 신뢰가 간다.
최근까지는 원간섭기를 부끄러운 역사로 가능하면 의미를 축소시키려 했으나 요즘 들어 슬슬 긍정적인 눈으로 시대를 조명하는 느낌이 든다.
팍스 몽골리나라는 표현이 작위적이라고 들리기는 하지만 동서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만큼 고려 역시 오랜 항쟁을 끝내고 원의 부마국이 되어 그 체제 안에 편입됐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할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혼인 정책이야 말로 양국의 통합을 추구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닌가.
문득 알렉산더 대왕이 생각난다.
최씨 정권이 망한 다음에 고종은 몽골의 요구대로 원에 가서 친조를 하고 항복하려고 한다.
당시 고종은 68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대신 40대의 장년인 세자 원종이 북경으로 떠난다.
그런데 북경에 도착해 보니 당시 원의 황제였던 헌종(뭉케)은 남송 정벌을 위해 사천성으로 떠난 상태였다.
다시 사천성을 향해 황하강을 건너는 세자 일행.
이번에는 고국에서 아버지 고종이 임종했다는 비보가 들려온다.
한 술 더 떠 헌종마저 갑자기 사망한다.
이제 이 가엾은 소국의 왕자 일행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넓은 중원 땅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셔 왕위는 비었지 황제도 죽어서 항복할래야 누구에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지 참으로 난감했을 것 같다.
당시 원은 다음 황제위를 놓고 뭉케의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부 부케가 다투는 형상이었는데 과감하게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베팅을 걸어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공식적으로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처지에서 항복하려고 1년 여를 걸려 자신에게 찾아 온 원종이 쿠빌라이로써는 무척이나 고맙고 행운의 징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에게 하가시킨다.
이렇게 고려는 부마국이 된 것이다.
책에서는 원이 고려를 직접 통치할 수도 있었으나 부마국으로 삼은 것에 대해 고려의 끈질긴 저항과 함께 쿠빌라이와 원종의 이런 특이한 인연을 배경으로 든다.
확실히 고려는 부마국이 된 후 원 황실에서 발언권을 높이게 되고 심지어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인 충선왕은 원에 만권당을 지어 근거지를 둔 후 외국에서 고려를 통치하기까지 한다.
충렬왕부터 공민왕에 이르리까지 여덟 명의 몽골 공주들이 시집을 왔고 노국공주를 제외하고는 사이가 나빠 이 때문에 왕이 폐위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충선왕은 어머니가 몽골 사람이고 보위를 이은 충숙왕 역시 몽골 여인 야속진의 아들이니 후대 왕들은 상당 부분 몽골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략 결혼이라 낯선 고려 땅에 시집와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몽골 공주들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 소외감을 친정의 권력에 기대어 잘못된 방법으로 푼 점도 안타깝다.
그러고 보면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은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는 놀라운 로맨스가 아닐 수 없다.
노국공주가 후계자를 일찍 낳고 오래 살았다면 고려의 운명은 조금 더 연장되지 않았을까...
재밌게 읽은 책이고 무엇보다 고려 후기 왕들이 하나의 역사가 아닌 개인으로써 인식됐다는 점이 큰 소득이다.
MBC에서 만든 <신돈>이라는 드라마가 실패해서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얼핏 본 캐릭터들을 역사책에 대입하니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다.
사극이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도 많지만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