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 100년 전 그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승원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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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대했던 것보다는 임팩트가 너무 약하다.
제목이나 주제는 흥미로웠는데 막상 열어보니 별 내용이 없다.
이 주제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는데 원래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로 이어지는 조선 근대화 과정의 외국 기행문이라는 게 단지 기행문에 불과한, 사적인 내용이라서 그런건가 밋밋하고 시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저자의 전문성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소재 자체가 워낙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차라리 외국인이 조선의 풍습에 대해 놀라워 하고 신기해 하는 기록들이 더 흥미롭다.
서구식으로 세계화 된 요즘 사람들은, 100여 년 전의 조상들의 모습을 서구인들을 통해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이미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 난 후라면 조선인의 외국 기행문은 오늘날의 기행문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진다.
조선 보빙사 일행이 고종의 국서를 갖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조선식으로 엎드려 절하는 모습 같은 데서 우리는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미 서양의 악수 예법을 알고 있고 기계문명의 힘을 찬탄하는 수준이 되면 오늘날 사람들의 가치관과 생각체계랑 비슷하게 되버린 것이니 흥미로울 게 뭐가 있겠는가.
시대를 달리하는, 조선 유학자의 모습으로 바라 본 서양 문명의 충격, 그들이 서구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그 과정이 궁금한 것이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구한말에도 벌써 유길준이나 윤치호처럼 미국으로 유학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로 일단 개항이 되고 나서는 서구 문화를 상당 부분 많이 받아들였고 비록 지식인층에 국한된 얘기일지라도 하여튼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구 문명을 무조건 배척하고 두려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따라하고 싶은 모델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메라에 사진이 찍히면 애들 눈을 빼먹는다는 루머 같은 건 지식의 혜택을 거의 못받았던 하층민 계층에서나 유행했었던 것 같고 적어도 조선의 지식인 계층은 서구 문명을 빠른 속도로 받아들였고 고리타분한 유학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더군다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나서는 이미 서구화를 완벽하게 이뤄낸 일본의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식민주의적인 세계관까지 갖추게 된다.
개항 이전에 일본의 통신사로 간 사람들이나, 필리핀 등지의 원주민을 보고서 야만인이라고 했던 기록들에서 조선인들 역시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차별적인 시선을 가지고 남을 바라봤다는 예리한 지적을 한다.
심지어 히틀러나 비스마르크 등을 찬양했던 당시 지식인들과, 베를린 마라톤에서 우승 후 히틀러와 악수하고 독일의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긍정적인 쪽으로 느낀 손기정에 대한 글까지 쓴 걸 보면 우리 사회도 이제 민족주의라는 자아비판을 할 수 있는 성숙한 경지에 오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놀라운 문명의 이기를 만난 구한말 조선인들의 충격은, 드라마 제중원에서 보여 주는 딱 그 시기까지인 것 같다.
좀 더 아래 계층 사람들을 조명하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제일 인상깊었던 구절은, 만주를 회복해야 할 우리의 고토라 여기는 민족주의에 대한 일침이었다.
일본의 만주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덩달아 조선인들도 만주로 많이 건너갔다.
때마침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되면서 옛 고구려땅 만주는 우리가 되찾아야 될 우리의 영토다, 라는 분위기가 조선 사회에 팽배한다.
아들 장수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의 발로라는 본질적인 측면은 무시한 채 만주 땅을 호령하던 우리 선조들! 언젠가는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땅! 이런 식의 정복주의적 욕구야 말로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야망과 일치한다는 저자의 지적이 날카롭다.
만주에 이미 살고 있는 선주민들의 존재는 싸그리 무시한 채 꾸역꾸역 넘어가서 땅을 차지하는 조선의 이민 물결이 실은 일본의 만주 진출을 배경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중국인은 불결하고 더럽다는 인식도 결국 서구인 혹은 일본인의 시각을 동일시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청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면서 더이상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알고 대신 일본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중국인에 대한 비하의식이 자리잡은 건 아닌가 모르겠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중국인에 대한 우월감이 존재한다.
2천 여년 동안 중국의 문화권에서 성장해 온 역사가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이게 다 해방 이후 경제성장 덕분일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근대화에 실패한 청 제국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단 잘 살고 봐야 한다는 것도 진리 같다.
식민지 현실에 신음하는 조선 지식인들이 비스마르크나 히틀러 같은 강력한 지도자에 목말랐던 점도 일견 이해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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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몽골 제국과 고려 1
이승한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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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년 200권의 책을 읽자고 거창한 결심을 하고 시작했건만, 연초부터 대학원 영어 시험의 압박감에 발목이 잡혀 영어 공부는 하지도 않으면서 부담감만 엄청나게 느끼고 있다.
당근, 책은 한 자락도 못 읽고 있다.
일도 안 하면서 책도 못 읽고 있는 이 짜증스러운 상태!
마음이 울적할 때 책을 읽는 게 아니라 행복하고 기분이 좋을 때 책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이상하게 마음이 우울하면 책은 눈에 안 들어오고 TV만 줄창 보게 된다.
이게 능동적 독서와 수동적 시청의 극명한 대비란 말인가.  

하여튼, 이번 주에는 책을 하나도 못 읽고 밀린 감상문이나 쓰려고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역사저술가 임용한씨에 이어, 또 한 사람의 팬이 되야 할 것 같다.
이승한씨.
고려무인이야기에서 약간 감을 잡긴 했지만 무려 4권 씩이나 되는 바람에 대충 훑어 보고 말았는데 아무래도 다시 정독을 해야 할 것 같다.
글을 비교적 잘 쓰실 뿐더러 사서에 숨겨져 있는 행간의 의미까지 꼼꼼하게 잘 분석하신다.
논리의 비약도 적고 역사학도답게 근거가 분명하며 무리한 의견 개진도 하지 않는다.
마치 소설을 쓰듯 하나의 사건에 대해 기승전결 식으로 서술해 나가는 솜씨가 대단하다.
이런 책이 좀 많이 팔려야 하는데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는 있는지도 몰랐고 리뷰도 하나 없다.
왜 대중들은 이덕일류의 자극적인 소재에 관심이 많을까?
출판사의 홍보 부족인가?
역사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물론 근거와 상식적인 선의 논리 전개이지만, 책의 가장 기본 조건은 바로 문장력인데 이 책은 두 가지 조건을 잘 만족시킨다.
특히 주제를 충렬왕 시대의 몽골 원정이라고 좁게 잡았기 때문에 더욱 분석적인 글쓰기가 가능했다.
시리즈로 계속 나올 생각인 것 같은데 앞으로 쭉 읽어야겠다. 

사실 고려 시대는 조선에 비해 덜 알려졌고 게다가 원 간섭기는 부마국이라는 다소 부끄러운 지위 때문에 더더욱 외면당하고 있는데 얼마 전 손창민이 주연한 신돈이라는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조명됐다.
나도 그 드라마 보면서 처음으로 忠자 돌림의 왕들을 비로소 인식하게 됐다.
이 책의 주인공은 처음으로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는 충렬왕이다.
아버지 원종도 충경왕으로 불렸다고도 한다.
재밌는 것은,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이라는 책과 이 책의 시각차다.
최씨 정권이 망한 뒤 고려 왕실은 환도를 결심하고 몽골에 가서 항복을 하려고 한다.
당시 원종은 60이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대신 세자 충렬왕이 중국으로 떠난다.
원은 아직 남송을 정복하기 전으로 3대 헌종 뭉케가 친정을 나가는 바람에 충렬왕 일행은 북경에서 황제를 만나지 못한다.
이들은 황제가 사천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떠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황제가 붕어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는다.
먼 이역땅에 좋은 일도 아니고 항복하려고 몇 달을 걸려 왔건만 황제가 사망했으니 누구를 만나야 한단 말인가.
이 때 원에서는 황제의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과연 충렬왕은 누구에게로 갔을까?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에서는 충렬왕이 상황 판단을 잘해 쿠빌라이에게 찾아가 항복을 했고 그 덕분에 고려는 부마국으로 위상이 높아지고 독자적인 정치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충렬왕으로써는 당시 정세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고 쿠빌라이에게 항복한 것은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며 쿠빌라이가 고려를 무너뜨리지 않고 유지시킨 것은 칸국의 독립을 인정한 자신이 정치 철학 때문이지 결코 고려에 대한 일방적인 호의 때문이 아니라고 분석한다.
내가 생각해도 후자 쪽이 좀 더 자연스럽다.
마치 한상기씨 책에서 후금이 인조반정 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온 까닭이 조선 정부의 외교 정책 변화 때문이 아니라, 명을 복속시킨 이상 더이상 청으로써는 조선과 화친을 맺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다.
즉, 형제국에서 주종관계로 청의 외교 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의 외교 정책은 인조반정 전후로 전혀 바뀐 것이 없고 광해군이 계속 왕위에 있었다 할지라도 청은 군신관계를 요구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저자는 쿠빌라이를 전투가라기 보다는 외교정책가로 본다.
쿠빌라이의 가장 큰 업적은 남송 정복인데 형 몽케 시절에도 시원찮아 직접 황제가 친정에 나섰고 황제의 위에 오른 후에도 남송 정벌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아릭 부케가 칸국을 억압했던 반면 쿠빌라이는 독립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갔기 때문에 각 칸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쿠빌라이는 끝없는 영토확장을 꾀하는 유목민에서 벗어나 중원에 정주하는 정착민이 됐고 원을 건설했다.
고려 역시 직접 지배보다는 간접 지배를 택했다.
60년 대몽 항쟁 덕분에 자주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평가에 대해 저자는 반대하는데 다른 책을 참조하고 싶다.
마찬가지로 부마국이 된 후 팍스 몽골리나 하는 표현에 대해서도 저자는 부정적이다.
원의 부마국이 된 후 고려가 감수해야 할 피해가 너무나 엄청났고 내정간섭이 심해 독립국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났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평화가 오긴 왔는데 고려 왕실이 무인 정권 이후 독자적인 위상보다는 원 황실의 비호 아래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100년도 못 돼서 조선이 세워질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읽게 된다.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은 원 제국의 존속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만약 성공했다면 원은 보다 장기적인 제국 유지가 가능했을 것이고 동아시아 역사를 다시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번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고 그 후에도 일본 원정을 명분으로 고려에 엄청난 짐을 지우게 된다.
일본 원정이 남송 정복처럼 반드시 해야 할 필생의 업은 아니었던 탓에 내부의 반대도 많았고 쿠빌라이 역시 항복한 남송 군대와 고려인 위주로 원정군을 편성했기 때문에 태풍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승패 여부는 불확실 했다고 본다.
요컨대 1차는 규모가 너무 작았고 2차는 무리하게 인원을 모으다 보니 군량미 조달 등의 문제로 8월 태풍철에 출전하게 되서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하늘의 도움으로 국난을 극복한 것이니 막부 정권의 위상은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고 2차 대전 당시의 가미가제 특공대까지 이어지는 일본 정신의 상징이 된다.
아무래도 바다 건너 떨어져 있는 지정학적 이득을 많이 본 경우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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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호리 갈대밭 속의 나라 (대도록) - 그 발굴과 기록,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국립중앙박물관 엮음 / 국립중앙박물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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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박물관에서 다호리 유적 특별전 봤던 기억이 난다.
대도록은 비싸서 못 사고 마침 소도록이 있길래 구입했다.
그런데 이 대도록이 올해 도서관 신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의외로 도서관에 가보면 전시회 도록이 나중에 구비되는 경우가 많아 가끔씩 놀라곤 한다.
전시회를 보고 나서 도록으로 다시 감상하는 것만큼 재밌는 것도 없을 것이다.
도록은 사진이 많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지만 전시회 관람 후 바로 봐야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가능하면 구입을 하고 있다. 
이 전시회는 유적지를 어떻게 발굴하는지, 보존 처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고대의 매장 풍습은 어땠는지, 유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잘 설명해서 인상깊었다.
지난 번 큐레이터와의 대화에서 다호리 유적에서 발굴된 손칼과 붓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막연히 원삼국 시대 때도 문자 생활을 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적인 증거가 없었는데 다호리에서 붓과 손칼이 발견되면서 구체적인 증거물로써 입증이 된 것이다. 

다호리는 습지이기 때문에 갈대 등을 이용해 바구니 같은 저장 용기를 많이 만들었고 철이 풍부해 물길을 통해 낙랑과 왜 등과 교류를 했다.
창원 지역이 바로 변한이라고 한다.
습지라는 자연환경 때문에 유적의 보호도 잘 되어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 곳 역시 도굴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도굴이 성행하는 것은 그만큼 유물에 대한 경제적 가치가 높기 때문일테지만, 한 번 무덤에서 나가고 나면 유물과 관련된 시대 연구가 불가능 하다는 점에서 매우 안타깝다.
당장 이 다호리 유적만 해도 10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여기서 나온 관 모양과 토기, 유물 등을 통해 원삼국 시대의 사회상에 대해 엄청난 정보를 준다.
전시회 때 그림으로 잘 설명된 장제를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호리의 목관은 중국 북부에서 시행된 판제 기법이 아니라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시신과 부장품을 넣는 구유식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판제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부장품으로는 청동기와 철기 등이 있고 철광석이 매장되어 화폐로 쓰였다는 걸 알 수 있고, 옻칠한 목공예품도 많이 나왔다.
또 한나라 때의 오수전이나 중국식 거울이 나와 낙랑을 통한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 준다.
다호리에서 발결된 토기는 붉은색의 무문토기가 아니라 회색의 연질토기다. 

한 가지 의문점은 다호리 유적의 배경인 원삼국 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까지를 대략 일컫는데, 로마나 한나라 때가 아닌가.
로마는 이미 이집트 원정도 이루어지고 카르타고나 갈리아 정복도 이루어져 이미 팍스 로마나를 구축할 때인데 한반도는 국가 형태가 아직 갖춰지지 않고 심지어 내려오는 문서 같은 것도 없다는 게 의아하다.
역사의 발전이 지중해나 중국 대륙에서 먼저 시작되어 파급되었다는 증거인가?
그렇다면 아메리카에 철기 문화가 대항해 시대 이후라는 것도 문명의 전파 면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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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輝 2010-02-12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으로 마린님 블로그에 글을 남겨보네요. ^^ 우연히 들렸다가 댓글 하나 달고 갑니다. 창원 다호리 집단(저는 이렇게 부릅니다. 뭐 수준높은 철기문화를 보유하고 활발한 해상교류를 하던 집단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을 저는 가야의 전신이 되는 선주민 세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를 로마나 한나라와 비교하면 미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보세요~그 당시 전세계적으로 로마나 한나라가 굉장히 특수한 경우의 문명국가였다는 것을 말이죠. 제가 볼때 창원 다호리 집단은 동시기 그리스와 비교해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생태학적인 측면에서 어떤 문명은 주변 환경이 결정짓는다고 하죠. 저도 이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창원 다호리 집단의 고고학적 측면이 동시기 로마나 한나라보다 수량면에서 적다고 하여, 혹은 문헌이 없다고 하여 거기에 살던 사람들의 문화적 수준까지 낮다고 보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과거 과대전파론자들의 생각과 비슷한 마린님의 걱정섞인 우려 역시 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 음...그냥 몇자 적어봤습니다...명절 잘 보내세요~

marine 2010-02-13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물이나 문헌 자료가 적다는 점 부터가 문명 발달에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화란 다양성이 생명이니 높고 낮음을 따진다는 게 의미가 없겠으나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문명이 발달해 왔다는 전제를 두고 생각해 본다면 중심지로부터 주변부로 기술이나 고급문화가 (이를테면 문자나 화폐 같은 것) 전파되어 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 않을까 싶네요. 제가 싫어하는 건 우리 민족이 최고다, 우리는 중국과 "비슷하게" 교류하면서 "한 수 아래인" 일본에게 문화를 전파시켰다는 식의 과도한 민족주의지 특별히 중국의 고대 문명에 대한 동경 같은 건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표정있는 역사 3
이한수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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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보고 읽었던 책인데 충자 돌림 고려 왕들이 등장하는 역사책에서 다시 이들 계보가 헷갈려 재독하게 됐다.
여전히 고려 후기 왕들은 개별적으로 인식되지 않고 뭉뜽그려져 보인다.
조선의 왕은 개개인이 모두 분명하게 인식되기 때문에 굳이 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왕의 계보를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최근 사극 열풍에 힘입어 고려사도 많이 조명되고 있는 만큼 좀 더 고려사에 대한 대중과 학계의 관심이 커지길 바란다.
200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분량이라 읽기도 편하고 저자 나름의 역사적 식견도 분명해 신뢰가 간다. 

최근까지는 원간섭기를 부끄러운 역사로 가능하면 의미를 축소시키려 했으나 요즘 들어 슬슬 긍정적인 눈으로 시대를 조명하는 느낌이 든다.
팍스 몽골리나라는 표현이 작위적이라고 들리기는 하지만 동서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만큼 고려 역시 오랜 항쟁을 끝내고 원의 부마국이 되어 그 체제 안에 편입됐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할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혼인 정책이야 말로 양국의 통합을 추구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닌가.
문득 알렉산더 대왕이 생각난다. 

최씨 정권이 망한 다음에 고종은 몽골의 요구대로 원에 가서 친조를 하고 항복하려고 한다.
당시 고종은 68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대신 40대의 장년인 세자 원종이 북경으로 떠난다.
그런데 북경에 도착해 보니 당시 원의 황제였던 헌종(뭉케)은 남송 정벌을 위해 사천성으로 떠난 상태였다.
다시 사천성을 향해 황하강을 건너는 세자 일행.
이번에는 고국에서 아버지 고종이 임종했다는 비보가 들려온다.
한 술 더 떠 헌종마저 갑자기 사망한다.
이제 이 가엾은 소국의 왕자 일행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넓은 중원 땅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셔 왕위는 비었지 황제도 죽어서 항복할래야 누구에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지 참으로 난감했을 것 같다.
당시 원은 다음 황제위를 놓고 뭉케의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부 부케가 다투는 형상이었는데 과감하게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베팅을 걸어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공식적으로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처지에서 항복하려고 1년 여를 걸려 자신에게 찾아 온 원종이 쿠빌라이로써는 무척이나 고맙고 행운의 징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에게 하가시킨다.
이렇게 고려는 부마국이 된 것이다. 

책에서는 원이 고려를 직접 통치할 수도 있었으나 부마국으로 삼은 것에 대해 고려의 끈질긴 저항과 함께 쿠빌라이와 원종의 이런 특이한 인연을 배경으로 든다.
확실히 고려는 부마국이 된 후 원 황실에서 발언권을 높이게 되고 심지어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인 충선왕은 원에 만권당을 지어 근거지를 둔 후 외국에서 고려를 통치하기까지 한다.
충렬왕부터 공민왕에 이르리까지 여덟 명의 몽골 공주들이 시집을 왔고 노국공주를 제외하고는 사이가 나빠 이 때문에 왕이 폐위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충선왕은 어머니가 몽골 사람이고 보위를 이은 충숙왕 역시 몽골 여인 야속진의 아들이니 후대 왕들은 상당 부분 몽골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략 결혼이라 낯선 고려 땅에 시집와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몽골 공주들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 소외감을 친정의 권력에 기대어 잘못된 방법으로 푼 점도 안타깝다.
그러고 보면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은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는 놀라운 로맨스가 아닐 수 없다.
노국공주가 후계자를 일찍 낳고 오래 살았다면 고려의 운명은 조금 더 연장되지 않았을까... 

재밌게 읽은 책이고 무엇보다 고려 후기 왕들이 하나의 역사가 아닌 개인으로써 인식됐다는 점이 큰 소득이다.
MBC에서 만든 <신돈>이라는 드라마가 실패해서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얼핏 본 캐릭터들을 역사책에 대입하니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다.
사극이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도 많지만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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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캄보디아, 불멸의 앙코르와트
이지상 지음 / 북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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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에 다녀와서 캄보디아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었고 역시 읽다 보니 비슷한 얘기의 반복이구나 싶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끝내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인문학적 지식을 주는 책 위주로 봤는데 본격적인 여행기도 궁금해서 선택했다.
결과는 그런대로 만족스럽다.
지하철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사진도 퍽 잘 찍는 것 같다.
캄보디아의 순박한 어린이들 모습이 눈에 밟힌다. 

킬링 필드에 관한 저자의 시각에 동의한다.
미국인이 메콩 강에 폭탄 투하해 놓고 죄다 폴 포트 책임이라고 떠넘기네 어쩌네 하면서 미국 탓이다 이런 내용의 글을 도올 선생의 책에서도 봤고 가이드도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었다.
그러나 저자의 말마따나 200만이면 안 되고 20만은 괜찮단 말인가?
여전히 혁명의 이상 어쩌고 하면서 뜻은 좋았으나 방법상의 문제였다는 식으로 넘어가려는 태도는 4년 동안 학살당한 희생자들을 우롱하는 매우 질이 나쁜 뻔뻔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미국대로 비판하면 될 것이고 크메르 루즈의 잔혹한 학살은 또 그대로 분명히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캄보디아의 현대사를 들으면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껴진다.
한 때 6.25 동란을 겪은 한국을 원조하기까지 했던 이 나라의 몰락이 안타깝다.
여전히 캄보디아에는 관광객들에게 1달러를 외치는 가엾은 아이들이 많다.
그러나 또 발전의 기운도 활발하게 느껴진다.
한국이 산업화에 성공했던 것처럼 이 나라도 국력을 모아 성장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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