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의 삶 - 격동의 시대에 열정적으로 맞섰던 사람들
시어도어 래브 지음, 김일수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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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문의 북리뷰를 보고 신청한 책인데 막상 빌리고 보니, 썩 끌리지가 않았다.
서구의 생활양식, 특히나 르네상스라는 한참 떨어진 시대의 생활양식을 워낙 모르기 때문에 조선 선비들의 일상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고 배경을 워낙 모르기 때문에 쉽게 공감이 안 갔다. 
그래서 처음에는 꽤 지루하게 읽었고 반납 날짜에 쫓겨 그냥 반납해 버릴까 하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 뒤러가 나왔길래 이 부분만 읽자고 손에 잡은 것이, 그제서야 비로소 책의 매력을 발견하고 12시까지 완독했다.
항상 느끼는 바지만, 좋은 책인데 지루함을 느낄 때는 내가 배경지식이 부족하고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려운 책일 경우 일단 초벌독서를 쓱 한 다음에 모르는 단어나 시대배경은 사전과 인터넷을 이용해 찾아 보면서 재독을 하면 책이 주는 매력에 금방 빠져들게 된다.
항상 처음 시작이 문제다.
그래서 어떤 일본의 독서가는, 모든 책은 첫 50페이지가 중요하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열 다섯 명의 르네상스인들을 내세워 저자는 당시 시대상을 구성한다.
14세기 말부터 17세기 중반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는다.
첫 장은 이탈리아 문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페트라르카와 신앙의 독립을 부르짖으며 화형당한 얀 후스의 이야기다.
역사책에서 잠깐 이름만 들었을 뿐이지 실제로 이 사람들이 어디 출신인지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 전혀 몰랐었는데 읽어보니 꽤 흥미롭다.
특히 미사 때 신도들에게 나눠주는 포도주가 얀 후스의 순교가 있고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카톨릭 성당에 가면 성찬식 때 밀병을 포도주에 찍어 준다.
그런데 중세까지만 해도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나눠 주면서 포도주는 사제만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비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빵만 주나 포도주까지 주나 의미만 통하면 됐지 뭔 상관이냐 싶겠으나 이것은 지극히 비성서적인 해석으로 평신도와 사제간의 위계질서를 세우려는 차별적이고 권위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보헤미아 지방의 출중한 학생이었던 후스는 프라하의 대학으로 진출한 뒤 총장까지 지내며 체코 전 지역에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교회 안의 비성서적 관행에 분개하기 시작했고 교황청의 교리에서 벗어나, 지극히 성경적인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이 보장되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 양심에 눈을 뜨면서 불의에 맞서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갈릴레이와는 달리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화형에 처해졌다.
나중에 좀 더 유연한 태도로 적과 타협하면서 개혁의 기치를 올린 사람이 바로 루터다.
박해로부터 일어선 기독교가 이단을 정죄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사람들을 불에 태운다는 것은 참으로 모순적이고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정교하고 세밀한 회화를 선보인 나의 사랑하는 화가 뒤러는, 자신처럼 베네치아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귀족의 영예까지 얻은 티치아노와 함께 실렸다.
저자는 뒤러야 말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화가라고 평한다.
그의 아버지는 뉘른베르크의 부유한 금세공업자였고 처음에 뒤러는 아버지의 공방에서 도제로 일한다.
그러나 곧 아버지보다 더 돈을 많이 벌고 특별한 기술 (판화)을 소유한 사람의 공방으로 옮겨 삽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뒤러는 판화가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유명세를 탄다.
그가 찍어낸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네 명의 기사> 를 보면 정말 생생하고 음울한 종말의 세계를 몸으로 실감할 수 있을만큼 잘 그려냈다.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새로 시작한 인문주의의 영향을 흠뻑 받고 온다.
그의 아내 아그네스도 상업적 감각이 탁월해 남편의 작품들을 잘 관리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기도 없고 심지어 뒤러는 절친이었던 피크르하이머와 동성애 관계라는 소문까지 떠돌았다고 한다.
그가 스케치한 아내의 얼굴을 보면 우아한 귀족 스타일의 뒤러가 좋아하기에는 너무 평범하고 시골 아나처럼 생겼다.
그러나 하여튼 이 부부는 공방을 운영하면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고 뒤에 나오는 티치아노와 더불어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올리는데 큰 일조를 하게 된다. 
심지어 티치아노는 스페인의 카를 5세의 전속화가가 되면서 귀족 작위까지 받게 된다.
사실 티치아노 그림은 좀 전형적이라고 할까? 어쩐지 독창적인 느낌이 부족한 것 같아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데 로마 교황청에서 같이 일한 바 있는 미켈란젤로에 따르면 그의 색채감각에 소묘만 덧붙인다면 최고의 화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천사를 그려도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표현하는 미켈란젤로가 보기에 확실히 티치아노의 그림은 전체적인 색감은 실제의 색감보다 더 아름답고 관능적이었으나 전체를 아우르는 힘은 좀 부족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90 가까이 긴 수명을 누렸던 티치아노의 말년 자화상 등을 보면 단지 예쁘고 곱게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붓으로 쓱쓱 문지르기만 하면서도 멀리서 보면 외형이 제대로 잡힌, 무엇보다 심상을 잡아내는 날카로움과 여유가 느껴진다.
어쩐지 현대적인 느낌이 든다. 

마지막에 나오는 함부르크의 유대인 여성 가장이었던 그뤼켈의 이야기도 재밌었다.
어떻게 해서 유대인이 오늘날 금융업을 장악하게 됐는지 서양의 상업혁명은 어덯게 시작됐는지를 한 여인의 일기를 통해 잘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오히려 기득권층으로서 온갖 도덕적인 칭찬을 다 듣지만 (유대인의 교육법은 남다르다, 그들은 금전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시킨다, 머리가 좋은 민족이다 등등) 기본적으로 유대인은 유럽 세계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었고 스페인의 1490년 집단 학살 때처럼 느닷없는 추방과 몰수에 익숙해져 있었다.
유대인이 돈놀이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땅을 소유할 수 없고 기독교인들처럼 법의 보호를 받지도 못해 언제 모든 것을 내놓고 쫓겨나야 할지 모르므로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현금, 귀금속 등을 거래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세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 에 나오는 샤일록을 돈 밖에 모르는 유대인 상인으로 설정했음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막 태동하기 시작했던 상업혁명의 가장 선두에 유대인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 사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온 유럽을 왕래해야 했고 왕이나 귀족 같은 높으신 채무자들은 대단히 불성실했으며 느닷없는 파산도 흔했다.
오늘날처럼 결코 무너지지 않은 견고한 성을 쌓은 자본주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뤼켈은 남편이 죽은 후 직접 귀금속을 거래하였고 50대 때 재혼하여 금융업도 같이 한다.
수년 후 재혼한 남편마저 파산 후 죽어서 결국 그녀는 사위네 집에 얹혀 사는 신세가 됐으나 여자 혼자의 몸으로 아이들을 키워낼 수 있었던 당시 상업의 활발한 현실을 일기에 잘 그려냈다.
수절이라는 사회적 족쇄에 묶여 평생을 혼자 살아야 했던 조선의 여자들 보다는, 그래도 재혼이 자유로웠던 유럽 여인들이 더 나은 처지였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최초의 에세이스트라고 불리는 몽테뉴나 용병 대장이었던 발렌슈타인, 개인의 자유를 주장한 위대한 시인 밀턴, 천체의 운동을 관측한 갈릴레이 등 흥미로운 위인들이 많이 나왔고 단순히 위대함을 역설하는 게 아니라 당시 시대인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 
사실 여전히 르네상스 시대라는 특정 시기의 가치관이나 사회 모습, 정치체제, 분위기 등을 제대로 모르긴 하지만 이런 책들을 통해 좀 더 흥미를 가지고 더 알아보고 싶다는 호기심은 왕성하게 생긴다.
역사책에서 한 두 줄로 간단한 업적만 듣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이런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훨씬 더 재밌고 즐겁다.
원래 이 책은 미국의 방송국에서 교양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던 것을 책으로 발간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 영상으로 봤다면 훨씬 더 재밌었을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이런 다큐멘터리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역사스페셜 같은 게 재밌긴 하지만 꼭 뭔가 교훈을 주려고 하고 특히 우리 민족은 이렇게 위대했다느니 조상들의 인권의식이 이렇게 성숙했다느니 등 지나치게 과거를 현대의 가치관에 맞춰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어 가끔은 부담스러운데 보다 실제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안 읽고 그냥 반납했으면 무척 서운했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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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 - 찬란한 불교 미술의 세계 테마 한국문화사 7
김정희 지음 / 돌베개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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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는 <고려 불화, 실크로드를 품다> 보다는 훨씬 쉽고 재밌게 읽었다.
불화의 역사적 맥락, 도상의 의미 등에 초점을 맞춰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접근했다.
덜 사변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되어 약간 지루했다.
도판이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아 좋긴 하지만 너무나 똑같은 구도와 도상들이 반복되다 보니 처음 불화를 접했을 때의 신선함이 퇴색되는 느낌이다.
같은 종교화라 할지라도 서양화는 소재가 다양하고 구도나 스타일이 계속 바뀌는데 비해 불화는 정말 너무나 도식적이고 전형적이라 어떻게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러시아의 이콘화도 이런 느낌일까?
요즘 불교문화에 관심이 생겨 이런저런 책들을 읽고 있다.
실제로 절을 방문하여 직접 눈으로 관람한다면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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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불화 -실크로드를 품다 - 우리문화읽기1
김영재 지음 / 운주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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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꽤 어렵게 읽고 있다.
일단 너무 피곤해서 책상에 앉아 한 시간은 꾸벅꾸벅 졸았고 깨서도 정신이 몽롱해 제대로 집중해서 읽은 건 한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피곤이 좀 풀리고 어느 정도 책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갑자기 집중도가 높아지면서 일산천리로 읽어 내려간다.
그런 것도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일종의 flow가 아닐까 싶다.
평론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사변적이고 어쩐지 작위적 해석이라는 거부감이 종종 들어 더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이를테면 산해경을 동이족의 경전이라 단정짓고 또 그 동이족은 한국인의 조상이다 이런 식으로 도식적 틀에 맞춰 무리해서 연관성을 끼워 맞춘다는 느낌이 들어 저자의 해석에 100%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대부분의 역사책에서는 단군 왕검을 고려 시대 대몽항쟁을 겪으면서 생겨난 평양 지역의 전승 설화로 보는데 이 책의 저자는 단군 왕검 신화를 기둥으로 삼아 이런저런 중국과 서역 전설들을 접목시킨다.
그런 점들이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됐다.
또, 미륵이 언제 올지를 두고 태양의 나이가 50억년이니까 이 태양계가 소멸할 때 쯤이라는 식으로,  비유적 표현을 실제적 산술치로 환산하는 유치한 놀이를 하시더니, 서력의 기원이 실제 예수 탄생 보다 4년이나 차이가 나니까 그런 부정확한 연대로 미륵 신화의 시작을 계산할 수 없다면서 BC 대신에 CE를 쓰겠다, 뭐 이런 식이다.
비잔틴 양식의 이콘화는 도상적이고 딱딱해 판에 박은 듯 다 똑같은 반면 고려 불화는 생명력 넘치는 살아있는 그림이다, 이런 식의 자기 중심적 해석도 눈에 거슬렸다.
얼마 전에 읽은 러시아 미술사에 따르면 이콘화야 말로 중생들을 긍휼히 여기는 진정한 자비의 성모상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찬사를 보냈는데 말이다.
책을 쓰다 보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료들을 해석하려는 강렬한 욕구에 빠지는 것 같다.
결론을 내리고 모든 자료를 거기다 끼워 맞추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몇몇 문장들을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기본적인 개념이 생긴 것 같아 기쁘다.
저자의 말대로 불화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창조성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신심을 나타내고 공경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聖畵 다.
이콘화처럼 불화도 숭배의 간접적 표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화가 전형적인 양식을 갖는 건 미술사적 눈으로 보면 태생적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불화가 미학적으로 평가받을 수 없는가, 그것은 절대 아니다.
저자는 오히려 조선의 수묵화를 중국의 아류작으로 치부했고 1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마저도 청나라 실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절하한다.
반면 불화는 중국과 비교했을 때 고려불화만의 독특한 예술성과 미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한국 미술의 독립적인 위상을 가질 만 하다고 주장한다.
일견 동의하는 부분도 있다.
요즘 수묵화에 관심이 많이 생겨 그 맛에 푹 빠져 있긴 하지만 한발짝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과연 평론가들의 주장처럼 조선의 수묵화가 중국의 것과 특별하게 감별될 독특함을 지니고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작품 하나하나가 올바른 평가를 받아야 함은 물론이지만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과연 한국의 수묵화를 중국의 범주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양식으로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저자는 고려불화의 원류를 중국 대신 서역에서 찾는다.
인도에서 돈황 등을 거쳐 중국으로 수입된 불교는, 북위 시대 전성기를 맞아 막고굴 등에 수많은 벽화를 남긴다.
저자는 서역에서 시작된 여러 불교의 도상들이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건너와 어떻게 재창조 됐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선뜻 동의하기 힘든 무리한 해석들도 가끔 보이긴 하지만 고려불화는 화엄종과 선사상이 합쳐진 화엄선에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음은 확실히 이해하겠다.
고려 말 이후는 선종이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한도 등의 수묵화 대신 고려불화의 극채색주의가 유행했던 까닭을, 저자는 선사상이 화엄종과 결합했기 때문으로 본다.
화엄종은 아미타 부처가 있는 서방정토로의 극락왕생을 추구하는 종파다.
한반도에서는 의상을 시초로 한다.
고려불화는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지장보살 이 셋이 주를 이룬다.
저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정교하게 복원한 불화를 보여준다.
과연 색이 바래기 전, 처음 그렸을 때의 모습은 선명하게 윤곽선을 그리고 섬세하게 채색을 했으니 정교하고 화려하기 그지 없었을 것 같다.
맨날 박물관의 어두컴컴한 전시실에서 빛바랜 불화만 보다가 깔끔하게 복원된 확대 사진을 보니 선 하나하나의 묘사가 정말 섬세하고 채색 역시 정교하기 짝이 없다는 감탄이 나온다.
저자가 말하는 고려불화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수월관음도나 아미타삼존여래도처럼 거의 똑같은 도상들이 반복되니 지루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건 좋은데, 전체로 취합해 보면 도상학적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어 매력이 감소하는 느낌이다.
저자는 이러한 극채색주의를 북송의 영향으로 본다. 

불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는 불교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마치 서양의 종교화를 감상하려면 성경을 좀 알아야 하듯 말이다.
이 책 역시 불교의 경전이나 교리 소개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워낙 기초지식이 없어 굉장히 지루하게 어렵게 읽었다.
비슷한 주제를 가진 다른 책으로 한 번 읽고 이 책을 재독한다면 좀 더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관음보살의 여성화라든가, 불교의 밀교화 등은 새롭게 접한 내용들이다.
불교를 모르면 한국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만큼 (특히 신라와 고려 시대는 더더욱) 공부를 좀 해 보고 싶다.
도판이 무척 화려하고 볼만 하다.
다만 불화의 도상들을 친절하게 다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개별적인 불화 보다는, 고려 불화가 갖는 미술사적 의의와 그 뿌리를 밝히는데 역점을 둔, 어찌 보면 일종의 역사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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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9-11-10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군요. 단청에 관한 책을 언뜻보다가 무늬으 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분이 있어, 불화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데, 글을 보니 곁가지는 빼고 말씀하신대로 읽고 싶군요. 따로 챙겨둬야겠네요.

marine 2009-11-1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일독할 만합니다. 도판이 일단 화려해서 보는 즐거움이 있어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Mr. Know 세계문학 31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글 쓰는 스타일이 부드럽다.
어렵지 않고 쉽게 풀어서 마음에 콕콕 박히게 쓴다.
현재형 문장들이 속도감을 주면서도 다소 눈에 거슬리기도 했으나 내 수준에서 음미할 수 있는 편안한 문장들이다.
초등학교 교사와 세일즈맨 등을 전전한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일까?
토마스 만의 소설 읽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편한 느낌이 좋다.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쓴 제임스 존스의 문체를 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감정을 표출해 마음에 콕콕 와 닿는다. 

영화를 먼저 봐서인지 끔찍한 전쟁 장면을 접할 때마다 더 생생하게 와 닿는 느낌이다.
특히 학생들을 선동해 전쟁터로 몰고 간 공명심 많은 선생에 대한 분노라든가, 빵을 먹어 치우는 쥐떼들과의 전쟁, 전투 중에 죽어가는 전우를 데려가지도 포기하지도 못해 안절부절 하는 모습 등은 영화에서도 정말 생생하게 그려진다.
전쟁은 대체 뭐란 말인가.
주인공이 휴가를 나와 선술집에서 만난 교장은, 자네 같은 일개 병사는 주변 밖에 모른다면서 작전과 지령 등을 떠벌린다.
진짜 전투가 뭔지도 모르는 후방의 안전한 민간인 주제에 파리를 점령해 버렸어야 한다느니 하는 몽상 같은 술자리의 객기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인간의 본능상 전쟁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불가능 하겠지만 적어도 전쟁을 결정하는 정치인들을 제일 먼저 전방에 배치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덜 싸우게 될 게 틀림없다.
혹은 싸운다 할지라도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를 내는 이런 끔찍한 전면전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부추기는 입바르고 교활한 정치인들을 먼저 최전방에 배치해야 한다.
히틀러에게 제일 먼저 소총을 주고 부대 최전선에 세워 돌격 앞으로를 외치게 했었어야 하는데! 

저자가 직접 1차 대전을 경험해서인지 포탄 속을 뚫고 나가는 병사들의 심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이다.
젊음의 치기에 몸을 맡겨도 괜찮을 너무 아름다운 나이에, 포탄과 쥐떼와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 속을 헤매어야 하다니!
전쟁은 아무리 미화를 시켜도 끔찍하고 잔인하며 개인의 꿈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대재앙이다.
이런 엄청난 참상을 겪고도 독일이 다시 2차 대전을 일으켰다는 게 정말 신기할 지경이다.
군대에 가면 화장실 욕이 일상화 될 수 밖에 없다는 문장에 공감한다.
가장 본능적인 것, 가장 원초적인 것을 까발려야 조금의 부끄러움과 수치심도 남기지 않고 정말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살고자 하는 본능, 배부르게 먹고 쉬고자 하는 욕구.
이른바 문명이라는 걸 이룬 후부터, 생산력이 높아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를 채운 다음부터 비로소 인간은 사랑이니, 문화니, 자아실현이니 하는 사치스러운 감정에 눈을 뜰 수 있었을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 부모 자식간에 살뜰한 정을 표현할 여유도 없다는 문장이 아프게 와 닿았다.
군대에서는 포만감과 휴식만 있으면 천국이라는 말, 적군의 포화 앞에 노출된 최전방의 병사가 아니라면 제대로 느끼기 힘들 것 같다. 

지하철에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너무 재밌고 또 끔찍하고 안타깝다.
군인들이 이 끔찍한 참상을 겪고 나서 사회에 제대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병명이 정말 이해가 된다.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 같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살아 남은 자의 고통을.
미스터 노 시리즈는 손에 딱 잡히는 핸디형 사이즈에 가벼운 종이, 예쁜 디자인 등 뭐 하나 버릴 게 없는데 왜 벌써 이 책이 절판인지 안타깝다.
레마르크의 다른 소설, 개선문과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도 읽어 봐야겠다. 

 

반납 날짜에 밀려 드디어 다 읽었다.
대출을 하면 밑줄긋기나 메모를 할 수 없어 불편하기도 하지만 대신 언제까지 읽어야 한다는 기한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강제성이 있어 좋기도 하다.
사실 내 책 보다 대출한 책을 항상 먼저 읽는다.
결말은 너무 허무하고 비극적이다.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소설이라 당연히 주인공이 살아 남아 과거를 회상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비극적인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종전 직전 서부전선의 최전방에서 전사하고 만다.
사령부 보고서에는 파울 보이머가 사망한 날, 서부전선 이상없다고 기록된다.
전체로 보면 역사가 흘러가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연속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겪어 내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사의 이런 엄청난 사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모르겠다.
영웅이 시대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같다.
역사책 속에 나오는 1차대전과, 소설 속에서 병사들이 겪어 내는 1차대전은 왜 이렇게 다른 의미를 가지는지!
문장이 쉽고 평이해서, 또 1인칭 시점으로 한 개인의 감정변화를 진솔하게 풀어내서 편하게 읽었다.
레마르크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는 <개선문>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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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릭나르스 흉노무덤
국립중앙박물관 편집부 엮음 / 국립중앙박물관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중앙도서관 서점에서 발견한 책.
도서관에 신간 신청을 했더니 뜻밖에도 구입을 해 줬다.
도록들은 보통 잘 안 사 주는데 희망도서로 구입해 줘서 무척 기쁘다.
그렇지만 내용은 솔직히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도록이라는 게 원래 감상문을 본 후 그 생생한 느낌을 책으로 전해 받기 위해 있는 법인데, 전시를 보지 않고 도록만 보니까 지루한 유물의 나열에 불과했다.
해설도 생각만큼 많이 않아 진짜 수박의 겉만 핥는 기분이 든다.
어떤 도록은 한 권의 책처럼 많은 정보를 주기도 하는데 이번 전시회 도록은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많이 못 미친다. 

흉노라고 하면 한나라를 괴롭혀 만리장성를 쌓게 만들고 서쪽으로 이동해 게르만족을 몰아 내는 바람에 서로마까지 망하게 한 유목민의 대명사로 알고 있다.
흉노가 곧 훈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견해도 있다고 기술된 걸 보니, 100 % 정설은 아닌 모양이다.
한나라의 분열 정책으로 오늘날 내몽골 지역에는 남흉노가 살고, 외몽골에는 북흉노가 터를 잡았는데 이 북흉노가 훈족일 거라 추측한다.
중국에게 복속한 남흉노는 당연히 유목민의 기질을 잃고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민으로 변신해 갔고 북흉노와의 전투에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북흉노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묵특선우 시절에 한 고조를 사로잡을 만큼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으나 (평성의 恥) 그 후 여러 갈래의 세력 타툼으로 와해되어 결국 4~5 세기를 기점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은 중국의 농경민게게 동화되어 흉노라고 지칭할 만한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쪽으로 이동한 훈족 역시 서유럽에 악한으로 명성을 떨친 아틸다 사후 분열하여 사라져 버렸다.
고대 시베리아 문명을 잇는 스키타이의 후예로써 흉노는 북방 유목민의 정체성을 갖고 철제 무기와 금은세공법, 기마술 등을 남겼다.
김해의 고분에는 북방계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직접전래설과 낙랑을 통한 교역설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신라의 금관 같은 경우 出 자 모양의 장식이 북방계 문화라는 설명을 많이 들었는데 정말로 신라인들이 시베리아 벌판으로부터 내려온 유목민들의 자손인지, 아니면 고대 사회에 그만큼 문화 교류가 활발했다는 뜻인지 궁금하다. 

책의 제목이 된 도르릭 나르스라는 뜻은, 둥근 소나무란 뜻으로 칭기스칸이 탄생한 오논 강 근처에 있다고 한다.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몽골인들은 무덤을 평평하게 만들어 위치를 숨겼다는데 흉노족의 매장 양식은 그와 다른 건지 모르겠다.
고분군의 연구이고 보면 무덤이 집단으로 조성된 것 같은데 흉노와 몽골족은 전혀 관련이 없는 종족인가, 아니면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유목민 제국사라는 책이 있던데 한 번 읽어 봐야겠다.
유목민 하면 무식하고 잔인하며 문명을 이루지 못한 야만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그들의 침입을 두려워 한 정착민의 악의어린 편견이라는 사실은 누누히 들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착민들처럼 그럴 듯한 역사서를 남기지 못해서인지 여전히 원시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유목민들의 후예들이 현대 사회에서 제대로 된 위상을 갖기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13세기 몽골 제국이라고 하면 온 유라시아를 벌벌 떨게 한 위대한 나라인데 정작 오늘날 그 후예인 몽골은 가난한 개도국에 지나지 않는다.
중앙아시아의 국가들 역시 소련에 합병되어 나라마저 잃었다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독립이 됐다.
이들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발전한다면 그들의 위대했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연구하고 합당한 대우를 받을 날이 올 거라 믿는다.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나라 역시 일제의 식민지를 극복하고 오늘날 경제대국이 되었으니 망정이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면 혹은 선진국 대열에 끼지 못했다면 중국이라는 거대 문명권 바로 옆에서도 독자성을 지켜 온 한민족의 문화는 역사 속에 묻혀 버렸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내선일체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새삼 느끼겠다. 

흉노라는 민족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 만족한다.
더 많은 교류가 이루어져 몽골의 문화가 한국에 많이 소개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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