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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 - 러시아 예술기행 2 ㅣ 이상의 도서관 24
이병훈 지음 / 한길사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신문의 북리류를 보고 도서관에 신청했던 책인데 이제서야 받아 봤다.
전작,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을 읽고나서부터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 했기 때문에 속편격인 이 책에 대한 기대도 컸다.
그러나 역시 전작만한 속편은 없다고, 같은 내용의 반복이고 보니 전작이 주는 신선함이 사라져 맥이 빠진 기분이다.
언제나 늘 하는 말이지만, 학자가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가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다.
에세이는 전문 에세이스트가 써야 문장의 맛이 산다.
문장력은 평이하고 엊그제 읽은 고종희씨의 책과 대동소이한 느낌이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살인을 저지르던 상황을 직접 러시아에 가서 그 거리를 둘러 보며 상상하는 식으로 서술한 부분은 저자 개인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웠겠으나 솔직히 읽는 사람은 전혀 공감이 안 되고 지루했다.
아마 직접 그 장소를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상상이 안 되는 것이리라.
글 읽는 맛은 그저 그런, 심심한 책이지만 대신 덜 알려진 북구의 문화강국 러시아의 이 곳 저 곳을 소개해 준다는 장점이 있다.
제국의 수도였던 뻬쩨르부르크의 도시 구석구석을 걸으며 소개한다.
사진이 많이 실려 있어 보는 재미도 있다.
한길사에서 나온 <이상의 도서관> 시리즈는 디자인이나 편집이 참 잘 된 것 같다.
내용까지 만족시킨 적은 아직 없었지만.
뻬제르부르크는 18세기 유럽을 따라잡겠다고 야심찬 계획을 세운 뾰뜨르 1세가 늪지를 메워 건설한 도시다.
프랑스의 건축가 몽페랑이 설계한, 무려 100 미터에 달하는 이삭 대성당이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고종희씨 책에서 본 밀라노 대성당의 고딕식 건물도 정말 웅장하고 우와, 소리가 나오던데 사진으로 보는 이 건축물도 무척이나 규모가 크다.
그렇게 높은 돔의 천정에 그려진 이 화려한 천정화는 또 얼마나 놀라운가.
그러고 보면 인간의 능력은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다.
대체 이렇게 거대한 건물은 어떻게 지었으며 또 그 꼭대기에 그림은 어떻게 그렸단 말인가.
하긴 에르미따쥐 박물관의 동선은 무려 20km에 달한다고 하니, 과연 러시아는 거대한 나라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멘쉬꼬프 궁전도 바로 앞에 놓여진 파란 네바 강과 잘 어울어져 우아함을 자랑한다.
우리와 전혀 다른 양식이라 그런지 서구의 이런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들을 보면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역시 제일 기대가 큰 곳은 18세기에 지어진 겨울궁전, 에르미따쥐 미술관이다.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프라도 등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규모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이 미술관의 백미는 빛의 화가 렘브란트와 루벤스라고 한다.
<십자가를 벗다> 라는 같은 제목의 두 화가 그림이 나란히 실렸는데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역시 렘브란트는 주위를 어둡게 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빛의 초점을 맞춰 경건하고 강렬한 느낌을 준 반면 (마치 연극 무대에서 한 사람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것처럼) 루벤스는 예의 그 화려하고 역동적인 움직임과 색체로 화면 전체를 환하게 묘사한다.
같은 바로크 시대 화가라 해도 스타일이 정말 다른 화가들이다.
이런 엄청난 그림들을 분리대도 없이 바로 코 앞에서 보고 있는 사진 속 관람객들이 정말 부럽다.
이런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들도 좋지만 역시 내 마음을 끄는 건 고흐의 두터운 붓터치와 환상적인 색체들이다.
책에 실린 <시골집들> 이라는 그림은 고흐가 죽기 직전에 그렸다고 하는데 처음 봤지만 역시 내 마음을 확 끈다.
솔직히 그 뒤에 나온 세잔의 <생 빅뚜아르 산> 이나 마티스의 <춤>은 유명세에 비해 별 감흥은 없다.
에르미따쥐가 외국 그림들을 모아 놓은 반면, 자국의 회화를 전시한 곳은 미하일로프스끼 궁전으로 현재는 러시아박물관이라 불린다.
이 곳은 빠벨1세라는 황제가 아들 미하일 대공을 위해 기금을 모았고 형 알렉산드르 1세가 제위에 오른 후 지어준 궁전이라고 한다.
그랬던 곳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민족적 자부심이 고조되면서 수도에 제대로 된 미술관 하나 없어야 되겠냐는 말이 나오면서 니콜라이 2세가 결단을 내려 미술관으로 변모했다.
모스끄바에는 뜨레찌야코프스끼 미술관이 자국의 회화를 전시하고 있다.
18세기 화가 로꼬또프가 그린 <황갈색 부인복을 입은 어느 부인의 초상화>를 보면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의 정교한 묘사, 사실적인 색체 감각, 입체적 표정, 모델의 성격을 드러내는 놀라운 감정 처리 등 당시 조선의 초상화와는 전혀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예전에는 서구에 비해 수묵화는 한 단계 아래의 그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재료의 차이 혹은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로 다른 양식의 그림이 발전한 것이므로 비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를 산 관아재 조영석 등이 그린 초상화 등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먹으로 그린 그림은 입체감과 정교한 묘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양식 같다.
예까쩨리나 2세이 초상화로 흔히 등장하는 그림은 레비쯔끼의 작품이었다.
남편을 밀어내고 근위대의 지지를 받아 여제 자리에 오른 독일인 황후의 정치 비결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다.
마치 루이 16세처럼도도하고 거침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러시아 풍경화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쉬쉬낀의 작품도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다.
사진 같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데, 사진이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부드러운 서정성이나 주변의 청아한 공기가 느껴진다.
꾸인쥐의 <드네쁘르 강의 달밤>도 어두운 밤 달에 비친 물가 풍경을 굉장히 고혹적인 색감으로 그려내 당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역시 러시아 미술의 백미라면 일리야 레삔을 들고 싶다.
러시아 미술사를 소개하는 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위대한 화가에게 푹 빠져 화집도 구해 보고 서간모음집도 읽었었다.
나는 레삔의 그 인물묘사가 마음에 쏙 든다.
니콜라이 2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듯한 초상화도 멋지지만 무엇보다 노동자나 카자크 같은 하류 계층의 살아있는 표정을 정말 잘 잡아낸다.
완전히 마음을 뺏긴 그림,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을 보면 바지선을 어깨에 매고 뭍으로 날라야 하는 인부들의 고단하고 신산한 표정이 너무나 잘 그려져 있다.
지난 번에 한국에 온 <러시아 거장전> 에서 이 작품은 못 오고 대신 습작들이 왔는데 얼마나 수많은 스케치를 하고 습작을 했는지 그 작업의 방대함에 깜짝 놀랬다.
피카소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여 준 어떤 영화에서는 정말 쓱쓱 몇 시간 만에 그려내던데 레삔은 3년을 붙잡고 있었고,<자뽀로쥐예의 까자끄인들> 같은 경우는 무려 12년을 그렸다고 한다.
직접 볼가강에 나가 인부들의 표정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까자크인들의 생활을 연구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후에 제자 세로프의 <이다 루빈쉬쩨인의 초상화> 같은 현대적인 그림은 묘사력도 형편없고 죽어 있는 그림이라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굉장히 모더니즘적이고 세련된 그림인데 말이다.
20세기로 넘어오면 알리뜨만이 그린 <안나 아흐마또바의 초상화>도 인상적이다.
기하학적인 화면 구성에 파란 원피스를 입고 앉아 있는 러시아의 위대한 여류 시인의 매혹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어쩐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이 나서, 굉장히 독창적으로 보인다.
책 한 권을 가지면 뻬쩨르부르크라는 도시를 탐방하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구석구석 세심하게 소개한다.
덕분에 분량이 500 여 페이지에 달하지만 사진이 많고 내용도 평이해서 쉽게 잘 넘어간다.
맛깔스런 문장력이 아쉽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은 상상력 부족으로 쉽게 몰입이 안 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매우 성실한 기행문이라고 생각한다.
책 표지의 디자인이나 편집도 괜찮고 무엇보다 덜 알려진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흥미를 유발시켰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덕분에 오래 전에 읽은 다른 러시아 미술사 책들을 몇 권 빌려 왔다.
간만에 러시아 문화에 푹 빠져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