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 Mr. Know 세계문학 3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중학교 때인가? 
소년소녀 주니어 세계명작전집에 있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굉장히 이상한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전혀 감동을 받지 못했으며 제목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포로를 심문했는데 이미 그 전에 잡혀서 혀가 잘렸던 터에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던 장면이다.
그 때는 그 장면이 꽤나 공포스러워 혀를 자르다니, 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제대로 읽지 못해 늘 미진한 기분이었는데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예쁜 디자인과 가지고 다니기 쉬운 핸디형 사이즈로 출간되어 벼르고 있다가 읽게 됐다. 
이 책 역시 옆 도서관에서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 이미 품절된 책이지만 빌릴 수 있었다. 
번역자가 얼마 전 재밌게 읽은 <러시아정교>의 저자 석영중씨라는 점이 더 믿음이 갔다.
처음에는 발음하기 힘든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입에 익숙치가 않아 속도가 안 났는데 금방 소설에 빠져 들어 초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성공할 것 같은,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다.
늘 놀라는 바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순조 시대 사람인데 대체 어쩜 이렇게 현대적인 구성과 문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춘향전 같은 우리 옛 소설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다. 
김만중이 쓴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등을 보면 인물의 심리나 사건의 묘사 등이 뛰어나긴 하지만 어쨌든 고전 소설의 기본틀, 이를테면 권선징악적 구조나 상투적인 문체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유럽 소설들을 읽으면 우리 옛 소설들에 비해 굉장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받는다.
심리 묘사라든가 사건의 전개, 플롯 같은 면에서 말이다. 

푸슈킨의 아름다운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다.
과연 그녀를 위해 결투를 벌이다 죽을 만 하군, 고개를 끄덕일 만큼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뒷쪽에 실린 해설을 보니 나탈리아는 미모 외에는 별로 건질 게 없는, 낭비벽도 심하고 허영심이 많은, 거기다가 지참금마저 한 푼도 없는 빈털털이 아가씨였다고 한다.
나탈리아의 장모 역시 푸슈킨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지참금을 한 푼도 줄 수 없는 상황이라 달리 대안이 없어 시집을 보내고 사위와 갈등이 심각했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문호로 추앙받고 있는 푸슈킨의 비사들이 흥미롭다.
하여튼 이 소설은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체 소설이다.
마치 재밌는 헐리우드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는 기분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것 같아 찾아 봐야겠다. 

뾰뜨르 안드레이치 그라뇨프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지에서 주정뱅이 프랑스 가정교사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다가 먼 변방의 요새로 초급장교가 되어 떠난다.
그를 따라간 충실한 하인의 이름은 사벨리치.
어린 시절부터 그를 돌봐온 노인인데 이 사람은 뾰뜨르를 지키고 시중드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한다.
황제가 지배하던 시절과 현대대중사회의 괴리감이 이런 데서 온다.
우리가 인권이나 자유, 시민의 권리, 애국심, 정의 등을 논할 때 그 당시 제정 러시아 사람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신앙심 등을 이야기했다.
시대적 배경의 한계란 바로 이런 점을 말하는 것 같다.
뾰뜨르에 대한 사벨리치의 복종과 절대적 헌신은 지극히 자발적이고, 복종이 곧 그 노인의 양심이자 가치관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개인에게도 이런 종류의 복종을 바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무형의 가치, 이를테면 인권, 자유, 평등 이런 것들에 목숨을 바친다.
하여튼 이 노인네 캐릭터는 극의 긴장감을 완화시키면서 잔재미를 준다.
특히 주인을 아버님이라 부르는 장면은, 노예제도가 얼마나 강력하게 한 개인을 휘감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뾰뜨르는 벨로고르스끄 요새에 파견되어 그 곳 사령관인 미로노프 대위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을 방해하는 인물은 그녀에게 대쉬했다가 차인 같은 장교, 쉬바브린.
뾰뜨르가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허락은 커녕 오히려 다른 부대로 떠나게 되었을 판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뿌가쵸프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 요새로 쳐들어 온 것이다.
이 사람은 실존 인물인 것 같다.
까자끄인의 반란을 주도한 인물인데 러시아 역사를 잘 몰라 그냥 짐작만 하고 넘어갔다.
나중에 역사책에서 보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레핀의 그림으로 다소 야만적이고 호전적으로 표현된 이 까자끄인들을 만났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뾰뜨르는 요새로 발령받아 오던 중,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어떤 안내자의 도움으로 헤쳐 나간 후 고마움의 표시로 털외투를 선물한 적이 있고 바로 그 인물이 후에 반란을 일으킨 뿌가쵸프였다.
뿌가쵸프는 요새를 점령한 직후 장교인 뾰뜨르를 교수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눈밝은 하인 사벨리치가 뿌가쵸프를 알아채고 옛 인연을 기억해내 극적으로 살아난다.
흥미진진한 플롯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의 귀족이자 군인이며 또 기독교도인 뾰뜨르는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줬어도 반란자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명예를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변절자 쉬바브린과는 다르게 뾰뜨르는 여제 폐하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남자로 나온다.
마치 사벨리치가 그 주인인 뾰뜨르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처럼 말이다.
통 큰 뿌가쵸프는 죽이려면 단칼에, 살리려면 확실하게, 라는 평소 신조대로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뾰뜨르를 구해 주고 심지어 쉬바브린에게 납치된 마리야 이바노브나까지 그의 품으로 돌려 준다.
이런 부분들은 어쩐지 아기자기한하며 민속적인 느낌을 주고 그래서 소설이 무겁지 않고 흉악한 반란군 우두머리 뿌가쵸프에게도 동정심이 느껴진다.
또 한 가지 특이할 점은, 예카테리나 여제에 대한 러시아 귀족들이 절대적 복종이다.
비록 서구 역시 최근까지도 여성차별이 있어 왔고 여성은 집에만 있는 종속적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자 군주들이 (그것도 매우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걸 보면, 유교 사회의 남녀차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서 러시아 귀족들이 러시아인 황제를 암살하고 그의 배우자인 독일인 황후를 여제로 옹립하게 됐는지 그 과정이 무척 궁금하다.
조선 사회에라면 정말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인데 말이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만큼이나 대단한 철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뾰뜨르는 군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마리야를 자신의 영지로 피난시키고 다시 여제의 군대로 돌아가 싸운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반란이 진압된 후 뿌가쵸프와 한통속이었다는 쉬바브린의 증언에 따라 그는 스파이로 오인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뿌가쵸프에 의해 요새 사령관인 미노로프 대위 부부가 살해당하고 그들의 딸인 마리야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뿌가쵸프와 협상을 벌였던 사정은, 여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밝히지 못한다.
마리야는 직접 여제에게 탄원하기 위해 황궁으로 올라가고 우연히 만난 귀부인이 그녀의 진정서를 보게 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귀부인이 바로 여제였다.
물론 여제는 단번에 사건을 해결해 준다.
이 결말은 우연성에 기댄 고전적 요소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에 너무 싱겁게 일이 해결되어 (절대자의 등장) 좀 시시했지만 하여튼 그 과정까지 어찌나 흥미롭게 읽었던지 지하철에서 조금씩 읽는데 마치 일일연속극의 다음 편을 기다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러시아인들은 아마도 중간 이름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중간 이름까지 꼬박꼬박 언급해서 읽기가 어려웠다.  
이를테면 이반 꾸즈미치 미노로프 대위는 그냥 이반이 아니라 이반 꾸즈미치, 이렇게 불리고 주인공 역시 뾰뜨르 안드레이치 그리뇨프도 뾰뜨르 대신, 꼬박꼬박 뾰뜨르 안드레이치, 라고 불린다.
귀족만 그런건가 싶기도 한데 러시아 풍속이나 역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 

너무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미스터 노> 시리즈가 무척 마음에 든다.
다른 소설도 이 시리즈로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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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11-0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 미스터 노 시리즈 책들 중 일부를 반값(?)에 팔던데, 품절이 왜 이렇게 많이 뜨는지 모르겠어요.ㅡ.ㅡ;;;

marine 2009-11-0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품절이 많아서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봐요. 상호대차 서비스, 정말 좋더라구요. 경기도내 도서관끼리 택배료도 안 받고 진짜 좋은 써비스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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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내 곁에 - Closer to Heav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김명민 나온다고 해서 본 영화.
역시 내 스타일 아님.
<너는 내 운명>도 사실 별 감동이 없었는데 같은 감독이 만든 영화라 그런지 느낌도 그저 그렇다.
홍보는 김명민 위주로 했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면 하지원이 주인공이다.
오히려 하지원의 연기력이 돋보이고 예쁘게 잘 그려진다.
김명민은 살 뺐다고 영화사에서 홍보 엄청 하던데 물론 빼기 힘들긴 했겠지만 영화 상에서 그렇게 큰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감동 포인트를 잘 잡아 내지 못한 느낌이랄까?
김명민은 처음에 착한 역할은 그저 그렇다가 나중에 까칠해지면서 빛이 나는 느낌이었다.
배우가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시나리오의 구조상 한계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해바라기> 라는 안재욱 나오는 메디컬 드라마에서 신경외과 4년차 전공의가 루게릭 병 걸려서 병원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사귀던 간호사에게 병명을 숨기고 헤어지자고 말한 뒤 병원을 떠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국으로 떠나 치료받는 걸로 나오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기막힌 스토리였나 싶다.
영화 속의 백종우 역시 변호사를 꿈꾸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는데 불치의 병에 걸려 결국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점점 몸이 굳어가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게 얼마나 끔찍할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를 것 같다.
옆에 있어 주는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비참하고 그로써는 차라리 화를 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원을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장례식장에서 만난 하지원에게 프로포즈까지 할 정도였으나 결국 그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에 절망하여 서서히 무너져 간다.
마지막까지 존엄성을 유지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결국 그는 혀를 깨물고 자살을 기도하고, 죽는 대신 인공호흡기를 단다.
그리고 결국은 뇌사 상태에 빠지고 사망한다.
당연한 병의 수순이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속상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떤 기적도 기대할 수 없는,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은 영화의 구조상 한계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얼마 전에 병원에서 운동기구에서 떨어져 췌장이 파열된 정말 운이 없는 열 살짜리 꼬마를 봤는데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이 났다.
지금 건강한 것도 얼마나 큰 행운인가.
또 언제 병마의 불행이 우리에게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카리스마 있는 의사역의 김여진도 인상적이었다.
"박사님" 이라는 호칭은 좀 오버 같았다.
교수님이나 과장님 뭐 이 정도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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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유럽 현대미술관 기행 - 현대미술을 보는 눈 1 현대미술을 보는 눈 1
이은화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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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력은 화려한데 내용은 평범하다.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저자의 전문성 여부와는 또다른 문제 같다.
이를테면 박종호씨의 경우, 오페라에 대해 전문가인가 아닌가와는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글을 잘 쓰는 편이다.
반면 아무리 그 분야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글솜씨가 떨어지는 필자들이 있다.
개인의 기본 역량의 문제라고 할까?
책이 쉽고 다양한 미술관을 소개해 준다는 점에서 재밌게 읽고 있긴 하지만 이주헌씨 책에서 보여 주는 문장 읽는 재미는 별로 없는 편이다.
저자는 일부러 쉽게 썼다고 하는데 쉬운 책과 재밌는 책은 다른 개념이다.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 쓰는 게 독자의 눈높이를 맞추는 게 아니라, 어려운 내용을 재밌게 써야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현대 미술 전문가의 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범하고 깊이가 얕다.
전체적인 수준이나 문장력이 아쉽긴 하지만 말 그대로 워낙 쉽게 가볍게 쓰여져 지하철 안에서 부담없이 읽고 있다. 

솔직히 아직은 현대 미술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겠다.
즐기는 수준의 한계라고 할까?
다만 미술 전시회에 가서 직접 작품을 보고 제목을 들었을 때 작가가 환기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공감할 때가 있긴 하다.
마음의 동요을 일으키는 작품들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현대 미술이, 발칙한 상상력을 제도권 안에서 보호해 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 소개된 트레이시 에민 같은 작가는, 낸시 랭과 차이가 뭔지 모르겠고 솔직히 말하면 상상력을 제외한, 미학적 가치가 있기는 한건지 모르겠다.
자본주의와의 영합, 대중매체의 기삿거리, 자극적인 소재, 그런 부정적인 생각만 든다.
루벤스나 뒤러 등도 당시 권력자에게 봉사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 주고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명성이 남았으니 아직 평가가 끝나지 않은 현대 미술을 어떻게 평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지금의 내 심정은 모든 작품들을 예술로 받아들이기는 상당히 어렵다.
데미안 허스트의 경우, 해부학 실습책에서 보는 인체 모형이 <찬가>라는 작품으로 버젓이 전시됐으니 과연 공구사와 저작권 싸움이 벌어질만 하다.
상어를 포르말린에 박제시켜 전시한 작품 등은 기발하다.
그러고 보면 현대미술은 미학적 쾌감 보다는 발랄한 상상력을 주제로 한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이런 다양한 시도들을 제도권 안에서 받아 들여 주고, 상상과 표현의 자유를 확보해 주는 미술계의 넓은 포용력이 부럽긴 하다.
정말 한계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현대 미술관이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아직 루브르나 프라도 같은 대표적인 미술관도 제대로 못 돌아 봤는데 어느 세월에 이런 곳을 다 방문해 볼지 모르겠다.
문화가 주는 이 엄청난 즐거움을 생각하면 정말 한 500년은 살아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정말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해 보고 싶다.
요즘 제일 관심이 가는 직업이 학예사이고, 저자처럼 미술 평론을 전공해도 좋을 것 같다.
박종호씨처럼 진로를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고...
하여튼 나는 영원한 딜레탕트가 운명인 것 같다.
현대 미술에 대해 궁금하다면 조각가가 쓴 유럽 현대 미술 전시회 관람기인 <그림 없는 미술관> 도 추천한다.
실제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이 본 날카로운 감식안과 미의식이 돋보이는 책으로, 사진이 많아 볼거리가 화려한 이 책과는 다르게 정말 글자 뿐이지만 현대 미술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다.
이주헌씨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이 분이 책을 너무 많이 내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만큼 글을 잘 쓰는 분도 드물다는 걸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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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길 차마고도 : 극장판 SE (2DISC)
서용하 외 감독, 이규화 목소리 / 엔터라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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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차마고도 전시회를 보고 처음으로 이 말의 뜻을 알게 됐다. 
DVD는 꽤 유명했던 것 같은데 왠지 안 끌려 외면하고 있던 터에 마침 전시회가 열렸길래 둘러 보고 도록을 구입해서 나왔다.
그런데 이 도록을 분실해서 제대로 못 본 게 아쉬웠는데 도서관에서 이 dvd 가 대출이 되는 거다.
반가운 마음에 빌려서 보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치마고도인 줄 알고 티벳어인가, 이랬다.
알고 봤더니 차와 말이 다니는 험한 길이라는 교역로를 뜻하는 말이었다.
실크로드처럼 말이다.
전시회에서서는 티벳의 문화나 분위기가 너무 낯설어 흔히 언론에서 접하는 라싸 궁전만이 전부가 아니다는 걸 느꼈는데 이 영상물을 보니 문화의 다양함에 새삼 놀랬다.
이렇게 험난한 곳에도 인간이 살고 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티벳 남자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형제끼리 아내를 공유하다는 말이 무척 슬펐다.
해설하는 사람이 말했으면 일종의 편견이다, 여성차별, 뭐 이런 느낌이 들었을텐데 인터뷰한 사람이 직접 그 사정을 설명하니까 마음이 아팠다.
그러고 보면 종족 번식의 욕구는 본능적인 것이고 한 남자에 한 여자도 어찌 보면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남자의 말로는 형제 중 한 명이 장사를 떠나면 다른 형제는 남아서 농사를 지어야 하기 때문에 아내를 공유하면 믿을 수 있고 가계에도 큰 절약이 된다고 했다.
삼형제가 한 아내를 갖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페미니즘에 상당히 경도됐는데 나이가 들수록 한 사회가 발전해 오면서 가지게 된 여러 제도들에 대해 좀 더 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이슬람의 여성차별도 언젠가는 이렇게 이해할 날이 오려나? 

말을 타고 길을 떠나는 과정은 정말 눈물겹고 또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먼 옛날 길이 없을 때 산을 타고 강을 건너 이렇게도 먼 여정을 말에 의존해 물건을 운반했던 사람들.
비록 시대의 발전상에 뒤처진 사람들이 되고 말았지만 이 사람들이 있었기에 교통이 불편한 시절에도 교역이 이루어지고 오늘날 발전된 사회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말을 줄에 묶어 강을 건너는 모습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 험한 산길을 대체 어떻게 건널 생각을 했을까?
마방들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신작로가 생기고 여기저기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장면을 멍하게 쳐다 보는 마지막 마방들.
그들은 더 이상 말을 타고 곡식과 차를 운반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제 마방들은 트럭 운전수로 취직해야 할까?
선조들로부터 배운 기술을 더 이상 써먹지 못하게 된 마지막 세대.
사라져 버린 산길을 멍하게 쳐다 보는 마방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잊혀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하고 슬픈 일인지. 

 다음은 티벳 불교도의 오체투지 순례길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과 무신론에 경도된 요즘의 심정 때문인지 순례자들의 경건함 보다는 종교가 갖는 억압성에 더 먼저 눈길이 갔다.
활불이라는 사람의 축복을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정작 그 활불은 자동차 타고 산마을에 와서 한 시간 만에 휙 가버리는데 마을 사람들은 마치 축제라도 되는 양 모여서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냥 괜히 화가 났다.
종교가 권력의 모습을 띄면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로 느껴진다.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들의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에는 감동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오체투지라는 수행법과 교리가 과연 얼마나 인간에게 의미가 있을지 회의가 든다.
중세 기독교도들도 죄를 씻는다면서 스스로를 채찍질 했다.
육체에 대한 혹사, 고행, 멸시.
오체투지 하는 신도들의 수레를 끄는 노인이 숨이 가빠 계속 헉헉대는데 정말로 죽음을 무릅쓰고 그 먼 길을 떠나야 종교적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답답했다.
아들을 잃은 가족이 순례의 길을 떠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는 말은 감동적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평안을 얻는 것 이상의 종교적 강제는 정말로 혐오스럽고 그것을 마치 구원 운운하면서 도그마로 휘두르는 이른바 성직자들의 모습은 더더욱 역겹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문화가 있고 여러 가치관이 존재하므로 보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편견에서 벗어나야 함을 새삼 느꼈다.
티벳 문화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생긴다.
관련 서적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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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댄스 댄스 2부 - 그림자와 춤추는 공백지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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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와 그의 에세이를 워낙 재밌게 읽은 나로서는 솔직히 이 책은 실망스럽다.
아마도 내가 이런 비현실적인 설정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이 생각난다.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죽음, 방 안에 잘 모셔진 여섯 구의 백골... 익숙치 않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다.
나 하루키 좋아하는 거 맞아?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
1권에서는 고혼다라고 번역하더니 2권에서는 느닷없이 고탄다로 바뀌는 건 또 뭐냐.
번역 어설프다.
개정판으로 봤으면 좀 나았으려나?
아니면 양사나이를 찾는 앞권을 미리 읽었어야 연결이 되려나.  

다만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이런 위안은 받는다.
그의 주인공들은 죄다 고독하고 도시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러나 많이 외로워 하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지키면서 쿨하게 산다.
남들과 엮이지 않고 다른 이의 호의에 기대지 않고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감정의 벽을 친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고립되지 않는다. 
나는 사람과의 그 적당한 거리감이 좋다.
한국처럼 가족주의, 온정주의, 지연, 학연 등으로 엮인 나라에서 하루키가 보여주는 인간 군상은 어쩐지 상쾌하고 가벼운 느낌이 든다.
왠지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황량한 도시에 혼자 버려져 있어도 그다지 외롭지가 않다.
마치 내가 쿨한 사람이 된 것 같고, 원래 인생은 그런 거야,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아, 이렇게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요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독신 남자가 말이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면 나는 주구장창 커피만 마시는 독신 여성이 등장할 것 같다. 

잘 생긴 남자, 배우 고혼다의 자살은 다소 충격이었다.
앞부분 설명에서 고혼다가 키키의 살해자라고 나오고, 뒷쪽으로 가면 국제 콜걸 조직이 등장하길래 난 무슨 스릴러인 줄 알았네.
소설 분위기로 봤을 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지.
고혼다는 일종의 정신분열증 같다.
현실과 꿈의 세계가 오락가락 하고 인격이 순간순간 변하는 남자.
어쩌면 정말로 연예계를 떠났어야 죽음을 혹은 살인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혼다가 자동차를 몰고 바다로 뛰어 들어간 걸 보면서 자살한 연예인들도 그런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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