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간만에 본 정말 재밌는 영화.
초반에는 좀 지루한 느낌도 있었지만 경기 출전하는 장면부터는 정말 재밌었다.
우와, 하면서 감탄하고 봤다.
스키점프대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너무 잘 찍어 영화 보면서도 와~~ 이렇게 함성을 질렀다.
2시간 넘는 영화라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마지막에 엄마와 차헌태가 공항에서 만나는 장면은 솔직히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슈퍼마켓에서 차헌태가 물건을 집어 던지는 주인집 딸에게 영어 공부 똑바로 하라고 소리칠 때가 더 찡했다.
사실 영화 보기 전에는 하정우가 굉장히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스크린에서 보니까 멋지긴 한데 연기를 아주 썩 잘한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약간 어눌한 느낌이랄까?
설경구나 송강호 등의 연기를 볼 때 와, 진짜 잘 한다 이런 느낌은 없었다.
아직 신인이라서 그런가?
오히려 토크쇼 등에서 진지한 모습으로 얘기하는 그 스타일이 매력적이다.
김지석은 꽤 잘 생겼는데 너무 마른 것 같아 안타까웠고 영화에서 비중이 크지 않아 아쉬웠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 출전하라는 불은 켜지고,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스러워 하는 장면이 클라이막스였다.
영어도 못하고 메달 따서 군대 안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대회에 참가한 이 어리숙한 시골 청년은, 시야가 흐릿한 위험한 상황에서 결국 질주하고 만다.
얼마나 고민스럽고 두려웠을까...
스키점프 하다가 경기 중에 목뼈 부러져 사망한 사고를 뉴스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더욱 손에 땀을 쥐고 긴장했었다.
힘이 없으니 조직위원회에 강력하게 항의도 못하는 비인기팀의 설움이 느껴져 정말 많이 울었다. 

스키 활강대가 어찌나 높은지 아래를 비춰 주는데 무서워서 혼났다.
저렇게 높은 곳에서 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용기인 것 같다.
하늘을 날 때 정말 새가 되는 기분일 것 같다.
스키를 탈 때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중심을 잘 잡아 속도를 죽이면서 서서히 내려오는 나로서는 폴대도 없이 거의 일직선으로 하강하는 이 스키점프가 보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난 절대로 못할 것 같다.
차헌태가 김지석 대신 출전하게 된 어린 동생에게 몸을 뒤로 실으면 절대 안 넘어진다, 무서워 할 것 없다 얘기하는 장면에서 너무 슬퍼서 막 울었다.
이제 겨우 열 네 살, 정신 연령은 더욱 떨어지는 소년에게 제대로 연습 한 번 못 해본 순진한 꼬마에게 그 높은 곳에서 질주하라고 가르치는 마음이 어땠을까 싶어 마음이 너무 아팠다.
깁스를 하고 동생 있는 곳으로 껑충껑충 뛰면서 달려오는 김지석.
귀머거리 할머니와 바보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군대에 갈 수 없는 김지석.
자신은 다리가 부러져 뛸래야 뛸 수가 없고 두려워 하는 어린 동생의 등을 밀 수 밖에 없는 형의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정말 명장면이었다.
얼마나 긴장하고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군대에 갈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참 많은데 정작 잘 사는 사람은 빠지고 힘없고 빽없는 사람만 가는, 그리고 안 가는 것이 오히려 자랑이 되버린 대한민국 현실이 정말 서글프고 속상하다.
빨리 통일되서 아무도 안 갔으면 좋겠다.
군대를 안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 엄청난 대회에 참가한 대한민국 선수들과, 희희낙낙 하며 좋아하는 스포츠 경기에 나온 미국 선수들이 너무 극명하게 비교가 돼 정말 속상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슬픈 사연이 너무 많다. 

오랜만에 너무 재밌게 본 영화였고 스키점프라는 비인기 스포츠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됐다.
금메달 따는 효자 종목 외에도 이렇게 재밌고 흥미진진한 스포츠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됐다.
동계 올림픽 열리면 더 재밌게 관람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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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풍경
윤난지 지음 / 한길아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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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왠지 어려워 보여 뒤로 미뤄 놨던 책인데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내친 김에 읽게 됐다.
최근 들어 현대미술에 부쩍 관심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인상처럼 아주 쉽지는 않았다.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과 80년대 이후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어떻게 다른지, 대표 작가들의 작품들의 주제의식은 무엇인지 등을 찬찬히 짚어 준다.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 1부는 개념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마지막 챕터에 실린 구겐하임 미술관 편은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미술관이 미술 사조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페기 구겐하임 개인의 안목과 후원이 잭슨 폴락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를 탄생시켰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대중화되기 이전의 추상주의를 비평가도 아닌 일개 개인이 막대한 돈을 들여 후원했던 걸 보면 (물로 뒤샹 등의 조언이 있었지만) 페기 구겐하임의 안목이나 취향이 참으로 날카롭고 시대를 앞서갈 만큼 진취적이었던 것 같다.
국가 주도의 후원보다 미술관이나 기업 비영리재단 등의 구매와 전시를 통한 후원이 더 큰 영향을 끼친 걸 보면 확실히 미국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들이 예술을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반발심이 생기는 부분도 많았다.
이를테면 미술을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저항이자 이데올로기로 생각하자는 8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 비평가들의 주장은,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여전히 특권화된 엘리트 비평가들이 주도권을 잡아 대중을 이끄는 것일 뿐이고, 실제 미술 시장에서 부호들에 의해 이런 미술품들이 고가에 거래됨으로써 명성을 획득하고 미술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현실을 놓고 보면 자가당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르주아 계급의 작품 구매가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작가주의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 100만 달러에 거래된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지극히 자본주의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주체성을 가지고 어떤 주의나 사조에 함몰되지 않고 나 자신의 욕구를 양식의 구애없이 표현할 수 있다는 점, 얌전하게 기존 체제의 가치관에 순응하지 않고 주류 가치관을 오히려 공격하는 것, 무엇보다 1세계 백인 남성 중심적 관점에서 3세계, 여성, 유색인종과 같은 주변 계층의 입장에 눈을 돌린다는 점 등에서 이러한 독립적, 비판적 흐름은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든다.
요컨대, 근대 이전의 회화는 종교적이고 사회순응적이며 예쁘게 그려야 하고 도덕적이어야 했다.
대중들은 그저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른다, 높으신 분들의 말이 다 맞다, 나는 그림 볼 줄 모른다, 이런 자세로 수동적인 관람객이었다면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관람객의 입장에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는 점, 가치 전복적이고 파격적이고 주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보다 열린 미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적 가치 자체를 상실해 버리고 말을 위한 말이 된 것 같은 억지 평론은 오히려 대중과 미술을 떨어뜨려 놓는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책에 나온 작품들은 내 미적 감수성으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고, 저자의 해설도 너무 억지스럽고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술이란 뭔가 울컥하는 감정의 고양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대상이 아닌 서술을 택한, 작품이 속한 사회의 맥락을 중요시 한 오늘날의 현대 미술은 보편적인 미적 가치에 너무 위배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 <괴물시대>를 보면서 현대미술도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뭔가 생각할 꺼리를 주고 감정의 변화가 있었다.
막연하게 나는 현대미술을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가서 직접 눈으로 보니까 마음을 움직이는 울림이 있기도 했다.
작가의 주제의식과 꼭 맞지 않더라도, 가이드의 해설과는 무관하게 그냥 나만의 감정변화가 있었다.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바도 심지어 작가의 죽음을 선언할 정도로 작가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 관람객 각자의 열린 해석이라고 했으니 그런 면에서는 부담을 좀 벗어 버려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어떤 양식으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든 조형미는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르난도 보테로가 소개됐는데 얼마 전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직접 갔다 와서 굉장히 반가웠다.
더이상 양식의 파괴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으로의 회귀도 하나의 선택으로 보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창의성의 신화를 깨부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입장에 보테로도 해당된다.
전시회에서 그림을 보고, 기존의 명작들을 자기만의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 점이 신선하다 싶으면서도 뭔가 깊이가 없단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봤더니 이게 바로 그가 지향하는 키치적 감각이라고 한다.
강렬한 원색, 단순한 윤곽선, 매끈한 채색, 크기의 확대를 통한 양감 표현이 보테로 예술의 특징이다.
이런 키치적 느낌, 신선하면서도 가볍다는 느낌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보테로처럼 어떤 심상이라도 이끌어 내야 하는데 여기 소개된 설치미술 등은 뒤샹의 변기를 보듯 정말 아무 느낌도 가질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직접 전시장에서 보면 또 다를까?
형상보다는 개념을, 오브제 보다는 아이디어를 선택한 포스트 모더니즘.
서사적 구조를 추구하더라도 미술의 기본은 보편적인 미적 감수성을 건들 수 있는 조형미에 있다는 생각을 아직까지는 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 보편성이라는 것 자체가 신화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이를테면 내가 르네상스 그림들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고 그 문화에 익숙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미적 가치를 내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양화가 서양화에 비해 인정을 덜 받는 것은 서구식으로 세계화가 됐기 때문이란 얘기이기도 하다.
주체적인 관점은 좋은데 너무 나가다 보면 평가 자체가 불가능 하고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으로 바뀌니 어쩌면 평론이라는 것 자체가 불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순수 기하양식의 상징성과 기의를 깨트린 피터 핼리의 주장에 일견 동의하는 바다.
사진을 보니 핸섬하게 생겨 호감이 간다.
예일대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평론가였다는 이력 때문인지 지적으로 보였다.
몬드리안이나 말례비치 등이 주장한 절대적 아름다움, 모든 불합리한 요소를 다 배제한 순수한 미의 원형인 기하학적 형태가 실은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의 공간인 병원, 학교, 관공서 등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므로 기하학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20세기 추상미술 서적들을 읽으면서 말례비치의 절대주의 주장에 정말 동의하기 힘들고 억지스럽다고 느꼈는데 이걸 지적해 주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핼리는 오히려 그러한 모조품으로서의 기하학을 이용해 신화를 깨트린다.
최소한의 조형을 이용한 미니멀리즘적 양식과, 팝아트의 키치적 감각을 더한 혼성미술이 바로 핼리 등이 추구하는 Neo-Geo 즉 모조추상이라고 한다.
일본 여성 작가로 마리코 모리가 소개됐는데 코스튬 플레이 하는 모습이 꼭 낸시 랭이 생각났다.
나는 이 여자를 도저히 예술가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데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역시 내가 현대미술에 무지한 탓인가? 

작품의 해석이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현대미술에 대해 개념을 잡을 수 있게 해 준 괜찮은 책이다.
벌써 나온지 10여 년이 흘렀으니 이 책도 아주 최신 경향은 아닌 셈이다.
현대미술에 관한 책을 좀 더 많이 읽어 보고 무엇보다 직접 전시회장에 가서 눈으로 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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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 까칠한 글쟁이의 달콤쌉싸름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1
빌 브라이슨 지음, 김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사람 책과는 아무래도 안 맞는 모양이다.
<나를 부르는 숲>도 간신히 읽었는데 이 책도 결국 1/3 만 읽고 포기했다.
유머러스 하고 위트있는 문장이 돋보이긴 한데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몰이이 안 된다.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몽땅 다 읽으려고 했는데 그냥 다 포기했다.
뻔한 해외 체류기 말로 진짜 감각있는 에세이스트의 여행기를 기대했는데 도저히 나와 맞지가 않는다.
닉 혼비의 <피버 피치> 읽었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다.
간간히 재밌으면서도 몰입이 안 된다. 

아내를 만나게 된 과정이 짧게 묘사됐지만 인상적이었다.
병원에 잡역부로 취직을 하고 거기서 만난 간호사와 6개월 만에 결혼하다니, 정말 한 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영국인 아내와 미국인 남편.
같은 언어를 쓰지만 문화적 차이도 상당할 것 같은데 아내 이야기는 너무 짧아 아쉬웠다.
장모님 집에 처음 방문했을 때의 어색함과 당혹감도 무척 재밌게 읽었다.
영국에서 장장 20년을 넘게 살았으니 영국 이야기를 쓸 만도 하다.
영국 국민이 공산주의를 했으면 정말 잘 해냈을 거란 말에 푹 하고 웃음이 났다.
아직까지도 착실하게 여왕을 떠받들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complain 이 별로 없는 민족 같기도 하다.
다이애나비가 환하게 웃으며 자기 차를 막은 세발자전거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그 다음부터는 남들이 왕세자빈 얘기를 하면 죄다 무시했다는 말도 무척 재밌었다.
아마 그런 매력 때문에 여러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영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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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18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악 저 표지, 저 표지! 정말 저 표지 좀 어떻게 좀 하고 싶었더랬습니다. 그리고 발칙한 영국산책이라니, 대체 뭐가 발칙한지 궁금할 지경이에요. 편집자들에게 `당신 눈엔 어떤 점이 발칙했습니까?'하고 묻고 싶을 정도로. 책이야 내용만 좋으면 그만인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내용까지도 번역이 괴상하다는 점이에요. 원문을 읽어보면 오역이 상당하다는 편집계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빌 브라이슨이 딱하다는 생각까지.

marine 2009-09-18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와,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네요. 뭔가 어색하고 술술 잘 안 풀린다는 생각을 했는데 번역의 문제였군요...
 
원림 중국문화 1
러우칭씨 지음, 한민영 외 옮김 / 대가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세상에, 이렇게 좋은 책이 벌써 품절이라니...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없어지는 것도 참 빠른 것 같다.
홍보를 안 하면 좋은 책들은 독자의 눈길 한 번 못 주고 조용히 사라져 버린다.
그나마 이런 인터넷 서점의 리뷰란이라도 있어 잊혀진 좋은 책들을 소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이 책은 경기도 관내 도서관의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 빌린 첫 책이다.
전국적인 유통망이 있는 책바다의 경우, 5천원의 택배비를 내야 하는데 경기도 내의 도서관끼리 빌려 주는 경기도 사이버 도서관은 아직은 무료다.
이런 책처럼 서점에서 품절된 경우 소장 도서관을 검색해 가까운 도서관으로 배달해 주는 상호대차 서비스는 정말 훌륭하다.
앞으로 종종 이용할 생각이다.
특히 낙후된 지역의 작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중국 문화에 관심이 생긴 건 순전히 이번 여름 휴가 때 갔던 북경 여행 때문이다.
몇 년 전 휴가 때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 일본에 대해 급관심이 생긴 것처럼 이번에도 북경 여행 후 중국이 너무너무 궁금해졌다.
어떤 분들은 중국이 지저분하고 볼 게 없는 싸구려 여행지라고도 하는데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로써는 유럽이나 일본 등에 비해 값은 매우 저렴하면서도 볼거리는 풍부한 중국이 여행지로 최적처럼 느껴진다.
딱 하나 안 좋았던 건 화장실이 아직도 수세식이라는 거.
이것만 빼면 이번 북경 여행은 정말 환상적이었고 다음에는 천하절경이라과 하는 항주와 소주 등지를 가보고 싶고 또 기회가 된다면 티벳으로 가는 중앙아시아도 가 보고 싶다.
하여튼 중국 여행 후 이화원이나 자금성 등에 대해 관심이 막 생겨 중국 문화 관련 서적들을 뒤적거리다가 어떤 알라디너의 서재에서 이 책을 소개받고 막연히 중국식 정원이나 건축물 아닐까 생각하고 읽게 됐다.
園林 은 뒷뜰 개념인 정원과는 좀 다른데 일단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정원이 잔디를 깍고 조경을 하는 등 인공적이라면 원림은 자연 환경을 이용해 건축물 등을 배치하여 그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든다.
풍경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회랑을 만들어 산책하면서 주변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모양을 낸 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樂山樂水 라는 말이 왠 뜬구름 같은 소리인가 했더니 중국 사람들이 자연 감상을 자기 수양의 덕목으로까지 생각할 만큼 중요시 했다는 의미라는 걸 알았다.
그러므로 모든 원림에는 당연히 산과 호수가 있어야 한다.
가산을 만들 때는 흙으로 쌓거나 (토산) 돌로 쌓는다 (석산)
호수는 보통 1池3山 이라 하여 하나의 호수에 세 개의 인공섬을 만들어 전설적인 신선들의 산인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을 표현한다. 

중국의 원림 전통은 고대 은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 되었다.
국토가 어마어마 했던 만큼 자연의 절경도 엄청났을 것이고 자연히 풍경 좋은 곳에 담을 둘러 주거지와 정원을 만들었을 것이다.
언젠가 소쇄원에 가서 정원이라더니 왠 땅이 이렇게 넓나 싶어 깜짝 놀랜 적이 있다.
담양의 소쇄원도 일종의 원림인 것 같다.
이 원림에서 시와 산수화와 글씨가 나왔다.
그러므로 원림은 중국 문화의 자양분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의 원림도 경제력이 풍부하고 경치가 좋았던 항주나 소주의 경우 규모가 엄청나고 훌륭한데 역시 압권은 황제의 원림이다.
사실 이화원의 경우는, 서태후의 별장으로 알고 갔지만 워낙 규모가 커서 또다른 궁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 이화원이 건륭제의 원림이었던 것이다.
곤명호 앞에 서서 멀리 보이는 만수산을 바라 보는 것도 장관이지만,  온갖 고사와 이야기들로 꾸며진 긴 화랑을 산책하는 게 너무 좋았다.
서태후가 비를 맞지 않고 전각을 이동하기 위해 지었다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이 회랑은 원림의 건축 요소 중 하나다.
대부분 직랑 보다는 곡랑으로 지었다고 한다.
정말 중국인들은 자연을 운치있게 감상할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을 고안해 낸 것 같다.
방에서 바깥 풍경을 볼 때도 창을 훤히 열고 보는 게 아니라 창에 격자 무늬를 수놓은 누창이나 예쁜 모양으로 구멍을 낸 공창 등을 통해 색다르게 즐겼다.
동양 정신은 자연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관조하고 즐기는 것이라는 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사진으로 유명한 승덕의 피서산장은 무려 5백만평이 넘는 대지로, 중국 최고의 원림이다.
강희제 때부터 짓기 시작해 건륭제가 완성하기까지 무려 87년이 걸렸다.
이 곳이 바로 연암 박지원이 황제를 만나기 위해 갔던 열하다.
만리장성 너머에서 목초지를 키우고 군사 훈련을 하기 위해 행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강희제는 4남 옹정제에게 원림을 선물했는데 이게 바로 원명원이다.
황제위에 오른 옹정제는 장춘원과 기춘원을 합하여 원명원의 규모를 넓혔다.
이 엄청난 규모의 원명원은 불행히도 의화단 운동 후 서양 군대가 북경을 장악하면서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말았다.
결국 조상의 문화재가 어떤 대접을 받느냐는 오늘날 후손들의 처지에 달린 것 같다.
해군 증강을 위해 영국으로부터 수백만 냥을 빌려 그 돈으로 자신의 회갑연을 기념하기 위해 이화원 증축에 써 버린 서태후 같은 어처구니 없는 여자가 최고의 권력을 틀어 쥐고 있을 때니 어쩌겠는가.
청나라는 중원을 정복한 후 역대 왕조와는 다르게 새로 궁전을 짓지 않고 기존의 자금성과 원림 등을 이어서 사용했다.
처음으로 지은 원림인 창춘원은 명의 청화원 터였다고 한다.
이 창춘원은 산이 높고 반대쪽의 원명원은 호수가 많은 평지라 산과 호수를 동시에 갖고 싶었던 건륭제는 두 원림 사이에 옹산과 서호가 있는 장소를 골라 청의원을 짓는다.
이게 바로 중국 관광 코스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이화원이다.
중국 영토를 최대로 넓혔던 건륭제는 무려 89세를 사는데 강남을 너무나 사랑해 무려 여섯 번이나 순시를 갔고 특히 항주의 서호를 북경의 원림에 옮기려고 애썼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화려한 중국의 원림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인구는 많고 생산성은 낮은데 전란은 끊이지 않아 끔찍한 기아와 병고의 연속이었다는 역사책의 설명은 한 쪽 면만을 본 게 아닌가 싶다. 
중국 역사책을 읽으면 학정에 시달리고 절대 권력자 황제의 말 한 마디에 수천 명이 죽는 끔찍한 전제주의적 분위기가 풍겨 불행한 느낌이 드는데 이렇게 아름답고 엄청난 문화를 향유했던 중국인들의 생활 수준은 내 생각보다 훨씬 높았을 것 같다.
문제는 일부 계층에게 국한됐다는 거지만 고대 세계로 갈수록 자연을 통제하지 못하고 기계 대신 사람이 식량을 생산해 내야 했으니 어느 나라나 농민의 삶은 다 비슷했을 거다.
이렇게 화려한 정원을 음풍농월 하면서 즐겼을 귀족들과, 인육을 먹어야 할 정도로 끔찍한 기아에 허덕였을 백성이라니, 참 비극적인 대조가 아닐 수 없다.

칼라 사진이 많아 보는 즐거움이 있고 중국 학자가 쓴 글이라 전문성도 있다.
무엇보다 책이 너무 예쁘다.
중국의 정원 문화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였다.
아쉬운 점은 책에 나온 장소들을 본문 내용에 맞게 다 소개해 줬더라면 훨씬 더 많이 즐길 수 있었을텐데 가격 문제 때문에 소략하지 않았나 싶다.
처음 들어 보는 장소를 아무리 멋진 미사여구로 설명을 해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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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열전 2 (반양장) - 고독의 나날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아, 너무 재밌다.
2권은 1권 보다 더 재밌다.
내가 잘 몰랐던 화가들, 이를테면 최북이나 심사정, 이인상 등의 그림을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특히 심사정은 정형적인 남종 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리는 다소 고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의 그림들을 접하니, 이거야 말로 정말 내 스타일이었다.
동양화의 매력은 서양화처럼 정교한 묘사와 화려한 색채에 있는 게 아니라 먹의 맛을 잘 살릴 수 있는 아련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자연의 풍경을 묘사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먹의 농담만으로 약간 심심하다면 담채로 한 두 가지 색을 가미한다면 눈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다.
그런 의미로 남종 문인화는 동양화의 멋과 맛을 잘 살릴 수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김홍도의 맹호도처럼 서양화의 데생 못지 않게 정말 호랑이의 털 하나하나가 솟구칠 것처럼 잘 그리는 화가도 있지만 대부분은 붓으로 사물을 입체감 있게 묘사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오히려 수묵화의 매력은 그런 정교하고 입체적인, 원근법적인 접근 보다는 구도를 넓게 잡아 자연의 풍경을 화선지에 옮겨 아련한 느낌을 주는 것, 정말 이거야 말로 여백의 미가 아닐까 싶다.
현재 심사정은 색을 참 잘 쓴다.
책에서도 그의 명작이라고 극찬한 딱다구리를 보면, 어쩜 그렇게 붉은 색을 잘 썼는지 아! 하고 탄성이 나왔다.
개인 소장이라고 하는데 이걸 갖고 계신 분은 정말 눈이 행복할 것 같다.
고목에 앉아 있는 딱다구리의 묘사도 일품이라 과연 초충도를 특히 잘 그렸다는 말이 실감난다. 

현재 심사정의 삶은 명분론이 우세했던 조선 시대를 살기에는 너무 불운했을 것 같다.
증조부 심지원만 해도 인조반정 때 1등 공신에 책봉되고 그 아들인 심익현이 효종의 둘째 따님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청평위에 봉해졌으니 당대의 명가다.
그런데 심지원의 4남이자 심사정의 직계 할아버지인 심익창의 과거부정 사건으로 도덕성을 최우선시 하는 조선 사회에서 패륜가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과거 부정은 일상적으로 행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데 아마도 그것은 19세기 말 조선 왕조가 무너질 무렵에나 가능했던 얘기가 아닐까 싶다.
이 일로 심사정의 조부는 무려 10년 씩이나 귀양을 갔다.
이런 몰락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너무 과했을까?
불행히도 그는 귀양에서 돌아온 후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 시해 사건에 연루된다.
원래가 소론이었고 이 일을 획책한 김일경과 내시 박상검이 모두 가까운 사이라 그만 함께 모의를 했다고 한다.
당연히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김일경과 함께 처형됐다.
인조반정 1등 공신 자제의 몰락이 참으로 쏜살같다.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과거부정에 왕 시해 사건이라니 그 타격이 얼마나 컸을까!
그 후손인 심사정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물론, 후에 세조 어진 모사에 감동으로 뽑혀 생애 첫 벼슬자리를 얻었으나 역적의 자식이 감히 어진에 손을 댈 수 없다 하여 한 달 만에 파직됐다고 한다.
같이 뽑혔던 관아재 조영석은 사대부를 모욕한다 하여 거부하다가 옥에 갇히기까지 했는데 심사정의 처지로는 감히 거부하고 말 것도 없이 감지덕지 받아들였을 것이고 그것도 벼슬이라고 주변의 손가락질에 다시 떨궈져 나갔으니,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성격에 얼마나 그 상처가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저자의 표현대로 애수가 깃들어 있고 고요한 가운데 쓸쓸함이 묻어난다.
연하게 색을 가미한 담채화를 보면 짙은 서정성이 묻어 난다.
퍽 점잖고 가냘픈 지식인이었을 것 같다.
최북처럼 세상이 나를 인정하든 말든 호탕한 기개로 내 갈 길 간다고 큰소리 칠 성격도 못 되고, 역적의 자식으로 손가락질 받으니 관아재 조영석처럼 선비의 품위 운운하면서 그림 그리기를 거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필 자식복도 없어 사촌 형님의 아들을 입양시킨다.
그렇게 힘든 가운데 이처럼 단아하고 깔끔한 그림들을 많이 남겼으니 그래도 한 세상 헛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이 분의 화풍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기회가 되면 이 분의 그림에 대한 책을 읽어 보고 싶다. 

다음 장에 나온 화가는 최북이다.
솔직히 최북은 기행만 유명했지 그림은 뭐 볼 거 있냐, 이렇게 약간은 무시했었다.
그의 출신이 사대부나 화원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강압적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니까 스스로 자기 눈을 찔러 버렸다는 식의 자극적인 일화만 유명해 왠지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헛된 유명세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그림을 접하니 이게 왠일인가, 이 분의 그림도 완전 내 스타일이다.
나는 수묵화 중에서도 옅은 담채가 들어간 문인화풍을 좋아하는데 이 분 역시 심사정처럼 먹의 농담과 색의 가미를 잘 하셨다.
그 색감이 너무나 마음에 들고 특히 눈바람 몰아치는 겨울에 추위를 이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대자연 아래 그린 <풍설귀인도>나 그에 반대되는 하경산수화 <여름날의 낚시>는 정말 그 날씨나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색감이 너무나 아름답다.
사대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기인으로 떠돌았던 이력과는 다르게 최북은 속화나 진경산수화 보다는 오히려 문인화를 잘 그렸다고 하니 이것도 참 아이러니 하다.
저자는 최북의 그림이 워낙 들쑥날쑥 해 명작이 많지 않다고 하는데 좋은 그림만 소개해서 그런지 책에 실린 그림들은 죄다 마음을 흔든다.
의외로 그림은 화가의 인생과는 달리 파격적이지 않고 단아하고 얌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최북은 중인 출신으로 양반이 아니다 뿐이지 천민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대접을 못 받고 살았나 모르겠다.
이인상도 서출 집안이고 화원들도 중인이 아닌가.
워낙 파격적으로 인생을 살아서 인정을 못 받은 걸까?
아니면 전문적인 화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 통신사 일행에도 끼었던 걸 보면 나름 당대에 유명했을 것 같은데 혹시 지나치게 자극적인 일화만 떠도는 건 아닐까?
하여튼 가족관계도 불분명 하고 추운 겨울날 성 밑에서 얼어 죽었다고 하니 그 삶이 참으로 애잔하다.
추정하기로는 75세 정도 살았다고 하니, 천수는 누린 것 같다. 

다음에 나오는 이인상은 솔직히 감상 포인트를 잘 모르겠다.
나 같은 평범한 독자들의 볼멘 소리를 의식해서인지 저자는 이인상의 문인화가 추구하는 바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진경산수화는 정선, 속화는 김홍도, 문인화는 바로 이인상이라 할 만큼 이인상의 그림은 속기가 없고 그 절개가 빼어나다는데 이걸 즐길 줄 알려면 그림 보는 눈이 보통은 넘어야 한단다.
그러니 이제 겨우 동양화에 맛을 들인 내 수준으로는 아직은 즐길 수준이 못 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소나무 그림은 빼어난 자태가 눈길을 확 끈다.
특히 화면 정중앙을 가로지르면서 뻗어 있는 기상이 과연 문인화의 대가답다.
사실 책에서 설명하는 俗氣 라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막연히 품격이 없고 똑같이만 베끼려는 전형적인 화원풍의 그림을 말하는 건 아닐까 싶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자극적인 그림은 아무래도 백자를 사랑하던 선비 취향에는 맞지 않을 것 같다.
만약 진하게 채색되고 정교하게 묘사된 서양화를 보여 준다면 이야말로 정신이 결여된 속물스러운 그림이라고 평했을 것 같다.
왜 조선 후기에 백자가 유행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
저자가 예로 든 것처럼 문인화는 점잖은 백자와 너무 잘 어울린다.
사실 나는 우봉 조희룡의 매화 그림을 너무 좋아하는데 (특히 고궁박물관에서 본 매화 병풍도는 최고였다) 김정희가 조희룡의 화풍을 두고 잘 그리나 격조가 부족하고 俗氣 가 많다고 해서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능호관 이인상은 당대 명문이었던 전주 이씨 밀성군파로 청에 끌려갔던 백강 이경여의 현손이다.
숭명배청이 기치를 올리던 시절, 청에 반대하는 상소를 써서 심양으로 끌려갔던 이경여의 자손이니 왕세제 시해 미수 사건으로 처형된 역적의 자손인 심사정과는 처지가 하늘과 땅 차이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인상은 남인이 들어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로 완고하고 성품이 추상 같았다고 한다.
지금 보면 지나칠 정도로 편협하고 당파에 함몰된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시대정신이었던 당대 현실에 비춰 보자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선비의 자존심을 꺽지 않았던 그 기개는 높히 살 만 하다.
寫實보다는 寫意를 표현하고자 했던 문인화가들.
대상의 정확한 묘사보다는 그 안에 담고자 하는 뜻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동양화.
러시아 이콘화가 원근법을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그려진 이유가 있듯, 또 이집트 벽화들이 신체 비례 대신 고답적인 비율을 택한 것처럼, 우리 동양화도 서양화와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진짜 참맛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비단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심사정이 최북의 담채화는 동양화에 무지한 서양 사람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인상의 시 중 너무 마음에 드는 시구가 있어 노트에 옮겨 적었다.
夢寢亦淸 (몽침역청) 꿈에도 또다시 맑을지어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한 후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오직 책에만 몰두하고 살겠다는 시의 마지막구절이다.
이인상은 집안의 배경이 뛰어났으나 불행히도 증조부 이민계가 백강 이경여의 서자였다.
한 번 서얼이면 자손대대로 서얼이라는 끔찍한 족쇄가 발목을 잡아 중앙 관계로 진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서 집권 노론측은 서얼허통 방향으로 나아갔고 워낙 유명한 집안이었던 덕에 이인상은 지방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사실 노론하면 왠지 서얼허통 같은 진취적인 정책은 무조건 반대했을 것 같은데 저자에 따르면 서얼 진출을 허용하는 게 노론의 당론이었다고 한다.
그 덕에 이인상 뿐 아니라 그 숙부도 벼슬을 했다.
그렇긴 해도 이인상처럼 대쪽 같은 골수 노론 선비가 신분의 제약 때문에 하급 관리로 머물면서 뜻을 다 펼치지 못했으니 울분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간다.
몸도 약해서 자주 병치레를 했다고 한다.
작자 미상의 초상화가 남아 있는데 체구도 작으시고 단아한 인상이라 꼬장꼬장한 느낌은 없었다.
역시 그림을 그리는 예인이라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주역을 한 괘씩 열 번을 읽었다고 한다.
독서가 끝나면 시를 읊고 손수 지은 정자 주변을 산책하고 또 흥이 나면 그림을 그리고.
이런 고상한 독서인의 삶이야 말로 내가 바래 마지 않던 바로 그 삶이 아닌가.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대신 이런 교양인의 삶을 살았으니, 좋게 보면 조선 양반들의 문화적 감수성이냐 취향이 얼마나 높았을지 짐작이 간다.
아마 나라에서도 이런 유학자이자 문화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지향했기 때문에 군역도 면제해 주소 온갖 특전을 베푼 게 아닐까 싶다.
사대부가 나라의 근간이라는 말이 농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매우 잔인한 말로 들렸는데 일견 이해가는 면도 있다.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시를 지어 가난을 참아 온 빈처의 헌신에 고마움을 표한다.
밥을 굶어도 내 책을 내다 팔지 않고 불쏘시개로 쓰지 않았던 당신에게 늘 감사했다는 시구를 대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왠지 첩도 안 들였을 것 같고 지고지순 하게 아내를 사랑하셨을 것 같다. 

마지막은 가히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라 일컫어지는 단원 김홍도다.
사실 김홍도 하면 씨름이나 서당 같은 풍속화 밖에 몰랐다.
내가 이 분 그림에 눈을 뜬 것은 오주석의 책을 보면서다.
단원 그림을 하나하나 뜯어 보니 정말 구도가 자연스럽고 역동적인 상황을 절묘하게 잘 포착했다.
그런데 좀 더 들어가 봤더니 풍속화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장르에 다 능했다.
과연 천재화가란 말이 허명이 아니다.
특히 신선도를 잘 그렸는데 30 대 때 그린 군선도를 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리는 솜씨가 정말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이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화원 일을 하면서도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이미 21세에 영조의 진연 그림 제작에 참여했고 29세 때는 어진화사가 된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워 일찌기 도화서에 들어갔는데 정조와는 세손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그림은 김홍도에게 맡기라 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강세황은 제자이면서 예술적 동반자로써 단원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여 그림마다 찬을 하고 그 가치를 높히 평가했다.
저자의 말대로 두 사람의 인연이 너무나 보기 좋다.
서양처럼 미술계가 좀 더 상업적으로 활성화 됐더라면 김홍도의 명성은 국제적이지 않았을까? 

표지에 실린 그림은 단원의 자화상으로 생각되고 있다.
생황과 퉁소를 잘 부르고 화가였던 걸 생각하면 꽤 감각적인 사람이었을 것 같다.
어진화사에 참여한 공으로 연풍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정조가 죽고 난 후 아들 월사금을 못 낼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미술 시장이 상업적으로 활성화 되지 않았으니 당대 최고의 화가도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모양이다.
60세에 다시 도화서에 들어가 차비대령화원이 되고 녹취재까지 시기마다 봤다는 게 저자의 표현처럼 제대로 대우를 못 받은 느낌이 들어 왠지 쓸쓸하다.
그 정도 실력에 그 정도 나이면 최고의 원로로 후배들에게 대접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해야 마땅한데 회갑이 다 되서도 여전히 도화서에서 시험을 치고 있어야 하는 당시 화단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개별적인 작품보다 화가에 초점을 맞춰 그림의 변천사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무척 알찬 시간이었다.
유홍준씨가 쓴 김정희 평전도 읽어 볼 생각이다.
더 많은 기록들이 발굴되어 이 위대한 화가들의 명성이 보다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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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9-1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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