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열전 1 (반양장)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다른 책을 고르려다가 자꾸 눈에 밟혀 집어든 책인데 결과적으로 만족스럽다.
안휘준씨의 <한국 미술의 美>를 읽을 때처럼 문장이 고풍스럽고 전문성이 녹아 있으며 우리 화가들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앞의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안휘준이라는 사람이 누군가 했는데 유홍준씨의 지도 교수였다는 걸로 봐서 꽤 나이가 있고 이 분야에서는 대표적인 학자로 존중받는 것 같다.
2권은 혹시 1권에 실망할까 봐 일단 읽어 보고 빌리려고 같이 안 빌렸는데 뜻밖에 너무 재밌어 2권을 빌리러 갔더니 그새 누가 대출해 가버렸다.
아쉽지만 며칠 기다려야지. 

여러 점의 그림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딱 네 명의 화가들을 소개하고 있어 책의 밀도가 높다.
저자는 총 여덟 명의 화가들을 10년에 걸쳐 역사비평에 연재했다고 한다.
그 긴 세월이 놀랍고 연재물이라고 보기에는 완결성이 뛰어나다.
특히 책의 1/3을 차지하는 겸재 정선 편은 저자가 공을 들인 만큼 화가의 높은 격조와 뛰어난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도판이 작아 큰 산 밑의 선비나 나귀 같은 작은 형상들이 잘 안 보인다는 점이다.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도 전체를 보여줄 때 보다, 클로즈 업 하여 부분을 확대시켜 놓으니 그 생생한 붓맛이 훨씬 더 실감나게 느껴졌다.
진품을 보지 못하는 이상, 또 설사 본다 해도 잠깐이니 기왕이면 저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확대해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첫 등장인물은 인조 시대 화가인 연담 김명국이다.
사실 이 분의 그림은 달마도 밖에 몰라서 대체 왜 유명한지 의아했었다.
그런데 여기 소개된 <심산행려도>나 <설중귀려도>를 보니 과연 신필이구나, 무릎을 탁 쳤다.
눈 오는 산 속에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의 모습은 비록 큰 산에 가려 아주 작게 그려졌지만 그 필선이 자못 정교하여 거대한 자연 속의 인간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
그는 취기가 있어야 그림을 그리고 꼼꼼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일필휘지로 단번에 쓱 그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도를 보인다기 보다는, 천재성이 돋보이고 奇格이 느껴진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 일행에 두 번이나 참여할 정도로 일본에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일본인이 달마도 같은 속필화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나도 들은 것 같다.
또 분청사기에도 열광한다는데 왠지 둘 다 비슷한 느낌이 든다.
도화서의 화원이었고 전설만 많을 뿐 실제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다음은 유명한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다.
이 분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고, 처외증조부가 이수광이며, 성호 이익과 그 형 이우가 친구이고, 다산 정약용이 외증손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약용의 전기에서 윤두서 이야기를 읽었던 것 같다.
윤두서의 그림으로는 그 자화상이 매우 유명하다.
수염 한 올 한 올을 꼼꼼히 그린 걸 보면 과연 전신을 그리는 최고의 초상화가라는 생각이 들고, 그 형형한 눈빛을 보면 얼마나 기개와 자부심이 높았을지 성격됨도 짐작이 간다.
잠깐 생애를 훑어 보면 15세의 나이에 혼인하여 18세에 첫 아들을 두고 아내와 사별한 후 다시 장가들었는데 평생 9남 3녀를 뒀을 만큼 부인과 사이도 좋고, 다복했다.
아들을 이렇게 많이 뒀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큰 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산 윤선도가 해남으로 유배된 후 남인 계열은 정치에서 소외되어 진사 합격 후 평생 벼슬길이 막혔고 겨우 48세에 졸하고 말았으니 어찌 보면 불행한 삶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48세에 열 두 아이의 아버지라니, 좀 놀랍기는 하다.
15세에 장가든 걸 보면 2차 성징이 시작하자마자 곧 결혼을 했던 모양이다.
그 아들 중 윤덕희가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나물 캐는 여인>과 같은 비슷한 주제의 그림을 남겼다. 

윤두수의 또다른 명작으로는 친구 심득경의 초상화가 있다.
이 그림은 전문 화원들의 천편일률적인 초상화와 달라 개성적이고 신선했다.
일반적인 초상화가 채색을 진하게 하여 좀 부담스럽다면, 심득경의 초상화는 은은한 맛이 있고 담백하다.
정말 전문화원과 선비화가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말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는데 솔직히 내가 보기엔 데생 실력이 썩 좋지는 않다.
말의 움직임을 세밀히 관찰해 관념적인 그림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역동적인 그림을 시도했다는 점은 알겠지만 먹의 한계라고 할까? 서양화가들의 놀라운 묘사력에는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말의 움직임이 어색하고 비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수묵화의 멋은 정밀한 묘사보다는 아련한 분위기와 잡힐 듯 말 듯한 정서에 있다고 생각한다.
청록산수화 중 하나인 낙마도가 나오는데 다른 책에서 이에 관한 중국 고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단지 유머러스 하다고만 되어 있어 관련 고사를 모르는 건지 그냥 넘어간 건지 의아하다.
자긍심이 높아 주문을 받았던 겸재와는 달리 평생 몇 점 그리지 않았고 대작보다는 인물 표정을 주로 묘사하는 소품에 능했다고 한다.
또 백성들의 삶에도 관심이 많아 실제적인 학문을 추구하고 그들을 직접 관찰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저자는 이런 공재의 노력이 다음 세대의 진경산수화를 낳았다고 평한다.
요켠대 숙종대의 이런 문화적 바탕 위에서 영정조대의 문예부흥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는 관아재 조영석이다.
이 분의 그림은 얼마 전에 다녀온 경기도립박물관에서 봤다.
형 조영복의 초상화였는데 엷은 분홍색으로 도포를 칠하고, 얼굴 표정을 너무나 생생하게 잡아내어 일반적인 초상화와 다르다 싶었는데 이 작가가 바로 조영석이었다.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처럼 조영석의 초상화도 전문화원들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굉장히 다르다.
또 이 초상화는 손이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보통 손을 생략하는데 자연스럽게 무릎에 놓여 있어 더욱 눈에 띄었다.
열 네 살에 부모를 잃고 평생 의지했던 맏형 조영복이 신임사화로 유배가 있을 때 직접 찾아 뵙고 그린 초상화라고 한다.
유배지에서 그린 초상화이니 무척이나 애틋했을 것 같고 형제지간에 우애도 깊이 배어 있을 것 같다.
이 조영석네 집안은 노론의 명문으로 조부대부터 김상헌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 손자인 김창협에게 다시 아들이 배우는 등 노론 거족 안동 김씨와 인연이 깊다.
조영석은 김창협의 처남인 이희조에게 배웠는데 마침 부모가 일찍 죽은 조카가 있어 역시 고아가 된 제자와 결혼시켰다.
그 역시 공재처럼 15세에 혼인하였다.
그의 친구로는 시로 유명한 사천 이병연이 있고, 그림으로 유명한 10세 연상의 겸재 정선이 있다.
이들의 교유는 평생을 두고 예술적 빛을 발하였다.
기록이 없는 겸재의 경우, 그나마 조영석의 찬문이나 애도문 등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관아재는 워낙 인물화를 잘 그려, 형 조영복의 초상화를 직접 본 영조가 감탄하여 그를 어진화사로 지목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양반 사회에서 그림이란 환쟁이나 그리는 매우 천한 기예였기 때문에 선비가 붓을 잡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라 여겨졌다.
겸재의 경우 주문까지 받아 그림을 그렸으나 (그래서 중인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고) 명문 노론 거족인 관아재로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임금이 직접 명하는 일이니 못 이기는 척 그 재주를 발하면 좋았으련만, 왕명을 어겨가면서까지 거부하여 파직됐다.
왕이 위급할 때 양반도 약방문을 지을 수 있지 않냐는 말에, 그림 그리는 일은 위급한 일도 아닐 뿐더러, 약방문은 지을 수 있으되 직접 붓을 쥐는 것은 임금의 치질을 핥으라는 것과 같다고까지 했으니, 그의 거부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다.
예술이 이처럼 천시받을 수 밖에 없었던 조선 시대 현실이 안타깝고, 재능있는 선비화가들도 전문적인 화가의 길을 가지 못하고 문인화에서 멈췄어야 함이 아쉽다.
배우지 않고 독학으로 이만큼의 성취를 얻은 걸 보면 타고난 화가임이 분명한데 좁은 문인화의 폭에 안주해야 했던 현실이 안타깝다.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더래도 충분히 서양 화가들과 대적이 되지 않았을까?
대과에 급제하지 못해 평생 외관 말직으로 떠돌았으나 말년에는 당상관까지 올랐다고 한다. 

마지막은 겸재 정선이다.
이 분의 위대함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 많은 그림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정말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를 꼽는다면 단원 김홍도와 함께 이 분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사실 인물화는 썩 잘 그린다는 생각이 안 든다.
이 분의 장기는 바로 산수화에 있다.
특히 말년에 그린 <인왕제색도>와 <박연폭포>는 그 대담한 구성과 웅활한 필선에 전율하게 된다.
정말 최고의 명작답다.
특히 바위 그림이 예술이다.
양감과 날카로운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런 진경산수화가 숭명배청 분위기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더 이상 중국을 받들지 않게 된다.
이제 중원 대륙에 중화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에서 중화사상을 이어가자.
이른바 소중화주의 때문에 중국의 모방 풍조를 버리고 우리 것에 눈을 뜬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위기가 민족주의와는 다른 양상임을 설명한다.
내 민족의 것을 사랑하고 자부심이 높아졌다기 보다는,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워 망해가는 명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나, 어쨌든 이제 중국 대신 우리 자신의 것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게 됐다.
확실히 화보를 보고 베낀 그림은 엇비슷하고 활기가 부족하다.
대신 직접 풍경을 보고 그린 그림은 생생한 현장감이 있다.
금강산을 그린 금강전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한강변을 그린 <경고명승첩>이나 임진강변을 그린 <연강임술첩> 등은 그 풍경이 정말로 생생하다.
특히 <연강임술첩>은 경기도립박물관에서 임진강 특별전을 할 때 사진으로나마 감상을 하여 더욱 반가웠다.
경기 관찰사 홍경보가 삭령을 순시한 후 연천으로 가기 위해 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웅연에 도착했는데, 이 때가 마침 임술년 시월 보름이나 소동파가 뱃놀이 하면서 읊은 <후적벽부>를 따라 하려고 시로 유명한 연천군수 신유한을 불러 문장을 짓게 하고, 그림은 양천현령인 정선에게 맡겼다.
과연 양반의 품격있는 놀이문화답다. 

겸재는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연줄을 통해 김창집의 빽으로 벼슬길에 오른 만큼, 큰 직책은 못 맡고 외지를 떠돌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비록 명예직이나 당상관에 올라 삼대가 추증되는 영광을 누린다.
현재 심사정이 그의 제자다.
70이 되어서는 벼슬을 내놓고 백악 밑에 인곡정사라는 번듯한 기와집을 지어 관아재와 사천 이병연 등과 교류하면서 말년의 예술혼을 불사른다.
<박연폭포>와 같은 힘이 넘치는 대작이 80이 넘어 완성됐으니 과연 이 화가의 정력이 놀랍다.
그는 84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뜬다.
손자 정황이 화가로 이름을 얻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중국과 일본, 베트남 등을 포함하여 동양권에서 수묵화로 우열을 가린다면 과연 우리 화가들의 작품은 몇 점이나 들어갈까?
조선 화단에만 그칠 게 아니라 한자 문화권 전체를 대상으로 품격있는 그림을 가린다면 흥미로울 것 같다.
지역 안배 이런 거 말고, 정말 역대 화가들끼리 진검승부를 겨뤄 봤으면 좋겠다.
겸재 정선이라면 중국 유명 화가들의 명성과도 당당히 겨룰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에는 이 책에서 많이 인용된 남태응의 <청죽화사>가 실려 있다.
당대의 화가를 논하는 책으로 냉철한 지적이 간담 서늘하다.
김명국과 윤두서, 이징을 비교한 화론에서는 이징을 가차없이 비판하여 김명국과 윤두서가 더욱 돋보였다.
2권에도 네 명의 화가들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내가 좋아하는 표암 강세황은 없다.
그렇지만 단원 김홍도가 포진하고 있으니 어서 빨리 읽어봐야겠다.
이제 우리나라도 먹고 살만해졌으니 우리 전통 문화에도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우리 옛 화가들의 걸작들이 새롭게 평가받길 바란다.
물론 중요한 것은 어떤 사상에도 이용되지 않고 (이를테면 민족주의, "우리 것이 최고여' 주의) 작품 그 자체만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한국화에 지식이 좀 생기면 중국화와 일본화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싶다.
마침 중앙박물관에서 겸재 정선展이 열리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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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아몬드꽃 표지) - 그림과 편지로 읽는 고독한 예술가의 초상
빈센트 반 고흐 지음, H. 안나 수 엮음, 이창실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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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고흐는 너무 흔한 화가가 돼버려 좋아하는 화가 이름으로 꼽기가 좀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너무 유명하달까?
왠지 좋아하는 책 이름 물어볼 때 베스트셀러 대답하는 그런 평범한 독자가 된 것 같아, 좀 더 있어 보이려면, 그림에 대해 좀 안다 싶은 인상을 주려면 고흐보다는 차라리 에드워드 호퍼요, 이러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보면서 고흐는 아무리 많이 언급되고 대중에게 노출되도 여전히 너무나 매혹적인 화가이고 그 그림은 절대로 질릴 수 없는 명작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도판이 정말 너무 섬세하다.
이렇게 큰 도판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그림마다 어쩜 그렇게 감정이 절절이 배어 나오는지, 나도 모르게 도판을 쓰다듬었다.
표지로 실린 아몬드꽃도 좋고, 오베르 교회의 그 코발트색 색감도 너무 아름답고, 론 강 위로 쏟아지는 별이 빛나는 밤도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보라색 붓꽃이 피어있는 들판, 밤의 카페 테라스, 까마귀가 날아가는 밀밭...
아, 모든 게 정말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나는 유난히 색채에 민감해서 고흐가 노란색과 파란색, 초록색 등의 원색을 두터운 붓질로 캔버스를 메꿔 가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자신은 색채를 추구하고 그 색으로 인물의 표정과 기품을 추구하며 여러 감정을 표현한다고 밝혔다.
고흐가 겨우 37세의 젊은 나이로 권총 자살한 후 테오 역시 그 해에 죽고 만다.
둘이 나이 차가 다섯 살 정도 나니까 테오는 그보다 훨씬 젊은 나이였을 것이다.
결혼한지 딱 1년 지났고 아들이 막 태어났을 때였다.
테오는 아파서 죽은 걸로 나오는데 무슨 병으로 젊은 사람이 갑자기 죽었는지 궁금하다.
고흐가 좋은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면 그의 삶이 권총 자살로 끝나지는 않았을까?
시엔이라는 매춘부 여자가 나오던데 그녀와 결혼 생활이 행복했다면 그는 좀 더 넉넉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당시 화단에 알려진 화가도 아니고 그림도 못 팔고 그저 동생에 보내 준 돈으로 연명하는 이 가난한 화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헌신적인 뮤즈는 진정 없었단 말인가?
피카소는 화단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젊은 뮤즈들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일까?
고흐의 강팍한 삶이 안타깝다.
오베르의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회복되는 것 같더니 결국은 자살하고 만 불멸의 화가.
요즘처럼 정신병이 하나의 질병으로 인식되고 관리됐더라면 그는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까?
모든 가정들이 다 부질없지만 사후에 이렇게도 높이 숭앙되는 화가가 그토록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동생 테오에게 600 여 통의 편지를 보낸 걸 보면 감수성도 무척이나 풍부했던 것 같다.
테오는 고흐의 후원자이고 예술적 동지였으며 유일한 친구가 아니었을까 싶다. 

언제쯤 고흐의 그림을 눈 앞에서 직접 볼 수 있을까?
지난 번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고흐전은 소품 위주라 그림의 진짜 맛을 느끼기는 좀 어려웠다.
(그런데도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기회가 된다면 유럽과 미국을 돌면서 그 강렬한 색의 향연을 만끽하고 싶다.
역시 창의적인 게 훨씬 마음을 끈다.
들라크루아나 밀레를 모사한 그림보다는 자신의 그림이 훨씬 와 닿고,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려고 했던 젊은 시절의 데생보다는 색으로 표현한 후기 그림이 더 마음에 든다.
처음에는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어두운 색조로 그리더니 프랑스로 이주하면서는 색이 점점 밝아지고 원색적으로 변하는데 그의 화풍 변화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봐야겠다.
하여튼 이 책, 도판이 너무 마음에 들어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우울할 때 가끔씩 꺼내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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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9-09-14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죠. 다시 보는 듯 기억이나 색감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marine 2009-09-15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너무 훌륭해요. 이렇게 큰 도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한국의 사찰 현판 1 한국의 사찰 현판 1
신대현 지음 / 혜안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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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불교 관련 서적을 찾다가 우연히 제목을 보고 특별히 보관함에 넣지는 않았는데 오늘 도서관에서 역시나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읽으려고 제목을 적어 놓은 책이 아니다 보니 이번에 지나치면 평생 못 보고 말 것 같아 이 책을 먼저 꺼내 들었다.
대출 가능 권수는 딱 한 권뿐이라 다른 책을 빌릴 예정이어서 이 책은 자료실 문 닫기 전까지만 읽다 보니 1/3 정도는 못 보고 반납했다.
집에서 편하게 인터넷 검색하면서 한자도 찾아보고 차분이 봤더라면 훨씬 더 유용했을텐데 아쉽다.
현판의 한문을 전부 번역하지 않고 적당히 취사선택 해서 알려 주는 방법이 지식이 짧은 나에게는 무척 좋았다.
어려운 한자가 많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쉽고 재밌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기왕이면 칼라로 절과 현판 사진을 싣고, 절이 위치한 지도도 실었으면 입체적인 책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1권은 2002년도에 나왔고 2권은 2005년도에 나왔던데 혹시 2권은 칼라가 아닐까 기대해 본다.
알라딘에서 확인하려고 했더니, 안 유명해서인지 미리보기가 안 되고 리뷰도 하나도 없어 아쉽다.
한국의 전통 미학은 불교를 모르고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불교문화가 왜 이렇게 대중에게서 멀어졌는지 안타깝다.
심지어 불교박물관의 해설사에게서는 관람객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불교문화를 배척한다는 말도 들었다.
서양문화를 알려면 기독교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왜 우리 전통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불교문화는 배척하는지 모르겠다.
문화와 종교는 엄연히 다른 문제가 아닐까?
조선시대 성리학 교조주의 때문에 천 년의 세월을 이어온 불교 문화가 쇠락하고 고급화를 이루지 못한 점도 안타까운데 이제는 미국의 힘을 업고 한국사회의 주류가 된 기독교도들 때문에 그 중요성이 여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 같아 정말 속상하다.
박물관에서 불교 관련 문화재는 이단 꺼라고 안 본다는 어떤 관람객이 생각난다. 
한숨 나온다. 

해남에 있을 때 아빠랑 같이 드라이브 갔던 미황사가 황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뜻한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분명히 안내판에 써 있었을텐데 단순히 절은 가볍게 산책하러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주의깊게 보질 않았었다.
소가 불경을 지고 가다가 쓰러진 곳에 통교사와 미황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전설인지.
제일 재밌었던 건 영주 부석사의 전설이다.
이 곳은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가 세운 곳으로, 당나라 유학갈 때 묵은 집의 딸 선묘가 의상을 유혹했으나 분연히 뿌리치고 떠난다.
돌아오는 길에 그 곳에 들러 가족을 감화시키고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그녀가 선물을 주려 하지만 이미 배는 떠나 버린다.
여인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져 선물이 바다를 건너 대사에게 무사히 도착하고 선묘는 대사를 지키기 위해 물에 뛰어들어 용왕이 된다.
대사가 법회를 베풀 때 온갖 잡귀들을 물리치게 한 용왕이 바위로 변한 곳에 세워진 절이 바로 부석사다.
뜰 浮 돌 石 을 쓴다.
대사를 사랑한 여인이 용이 되어 대사를 지키고 다시 바위로 변하여 그 곳이 절이 되다니, 정말 환상적인 고대의 로맨스가 아닌가!
또 재밌는 것은 비록 불교가 조선시대에 탄압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사적으로는 유학자들도 불교를 숭앙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시주도 많이 했으며 현판의 글도 많이 지어줬다는 것이다.
일종의 조상숭배교인 유교만으로는 삶과 죽음를 해결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왕실에서도 원찰을 세우고 안녕과 평안을 빌었다.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군의 원찰인 흥국사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원찰인 보광사 등은 중수 때 왕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시대처럼 권력이나 재물을 모으기는 어려운 실정있었으므로 절을 중건하려고 할 때 스님들이 마을에 내려가 시주를 받느라 애쓰는 장면들이 나와 마음이 짠했다.
종교가 권력을 갖고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도 혐오스럽지만 (이를테면 김정한의 소설 사하촌에서처럼) 세상에서 배척되어 힘들게 신앙을 지켜가는 모습도 안타깝다.
예전에는 가끔 스님들이 목탁 두드리면서 시주하라고 할 때 항상 외면했는데 한 번쯤 뒤돌아 봐야겠다. 

언젠가 읽었던 조용헌의 사찰 기행보다 훨씬 성실하고 글솜씨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그 절이 간직한 역사와 향기를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 준다는 점에서 정말 마음에 든다.
한자를 좀 더 알았더라면 더 재밌게 읽었을텐데 그게 아쉽다.
2권은 칼라로 나왔으면 좋겠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의 품격이 나온다는 말이 생각나는 책이다.
저자가 점잖고 교양있는 분이며 무엇보다 우리 절을 문화재로써 (그리고 신앙으로써) 얼마나 사랑하는지 많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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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펭귄이? 허풍도 심하시네 - 르 피가로 기자가 쓴 지구온난화 뒤집기
장 폴 크루아제 지음, 문신원 옮김 / 앨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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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좀 조잡스럽다.
디자인은 괜찮은데 말이다.
비교적 쉽게 쓰여진 지구 온난화 반대론이다.
얼마 전에 읽은 <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 가 학자가 쓴 다소 전문적인 책이라면 (근거를 많이 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프랑스의 환경 에세이스트가 가볍게 쓴 대중적인 책이다.
그래서 근거로 제시한 점들이 다소 빈약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해하기는 쉽다.
오히려 일반인이기 때문에 더욱 통렬하게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각 단체들의 이익 싸움을 비판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제일 시원했던 말이 맨 뒤에 실려 있다.
미국이 교토 의정서에 서명하지 않고, 유럽 국가들 역시 말로만 온실 효과 감축을 논의할 뿐이지 실제적인 행동에 돌입하지 않은 걸 보면 아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라는 거다.
촌철살인이다. 

사실 이 책은 오래 전에 직접 구입해서 읽었던 책이다.
알라딘에 들어와 보니 벌써 품절이다.
2005년도 출간된 책이니까 겨우 4년이 지났을 뿐인데 말이다.
아주 유명하지 않은 책이면 서점에서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이 책이야 없어져도 딱히 아쉬울 게 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정말 공들여 만든 인문학 서적들이 쉽게 사라져 버리는 현실을 보면 도서관이 더욱 열심히 신간들을 구입해야 할 것 같고 헌책방 문화도 보다 활성화돼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세월의 압박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가지고 읽히는 고전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이런 품절, 절판 도서들을 볼 때마다 더욱 고전을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나는 이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지막에 대안 에너지로 바이오 연료를 언급한 부분은 이미 그 폐해가 심해 축소하는 실정이므로 시의차가 있어 보이지만 환경론자들이 그렇게 무서워 하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고 알려진 이산화탄소 배출이 전혀 없는 가장 대중적인 에너지의 대안을 원자력으로 꼽은 점은 정말 현실적이고 탁월하다.
핵 폐기물 처리라는 중요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막연하게 온실효과 생기니까 화석 연료 사용 자제해라,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하는 일부 환경 단체들 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저자의 모국인 프랑스는 전체 에너지의 80%를 원자력이 담당한다고 한다.
차라리 핵 폐기물을 어떻게 해야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를 토론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으로 보인다.
친환경 에너지라고 각광받는 풍력이나 태양열 에너지의 비효율성과 어마어마한 가격은 이제 환상을 버려야 할 것 같다.
화석 연료는 온실효과 일으키는 탄소 배출하니까 안 되고, 원자력은 방사능 노출 위험 있으니까 안 되고 자연 에너지는 효율성이 낮으니 지금의 편리한 생활을 포기하라고 하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미 먹고 살 만해진 선진국은 조금 불편을 감수하면 된다 치자.
정말로 생존 문제가 해결이 안 된 개발도상국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개발도상국들의 공업화 정책을 환경오염 시킨다고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처럼 보인다. 

기후는 지구의 역사가 시작된 날로부터 끊임없이 변해 왔고 아직까지도 인류는 그 원동력과 변화 양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먼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 시간에 어떻게 하면 기근을 뿌리뽑을 것인가와 같은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했으면 좋겠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계속 반복해 왔다는 사실은 지구의 오랜 역사다.
지구의 기온이 높아지고 있음이 과연 인류를 멸망시킬 최악의 시나리오인가, 또 그 원인이 전적으로 인간의 화석연료 사용 때문인지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오히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주장으로 반사 이익을 보는 집단은 없는지 먼저 살필 일이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설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서 그렇다면 당신은 환경오염이 계속 되도 상관없다는 소리냐, 이런 식으로 확대하여 공격하는 명분론자들도 경계해야 한다.
자기가 아는 것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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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 발굴로 풀어본 살아 있는 우리 역사 이야기
조유전 이기환 지음 / 황금부엉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쟁하다가 못 버티고 항복한 것을 두고 청 태종이 함락하지 못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기술한 것은 과연 "민족정기"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것은 마치, 역사스페셜에서 가야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순장자의 시신을 소중하게 매장했다면서 강압적으로 매장한 중국과 달리 자발적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크고, 인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전통이 빛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다.
난공불락의 요새면 대체 왜 인조가 겨우 한 달 반 만에 나와서 항복 문서를 바쳤겠는가?
혹시 인조가 백성을 너무 사랑해서 고려 때 무신정권처럼 수 십년을 항전할 수 있었는데도 애민정신 때문에 스스로 항복한 걸까? 설마, 인조가?
몽골군이 수전 경험이 없어 강화도를 건너지 못했다는 해석과도 비슷하다.
이런 자민족중심주의적인 역사 해석이야 말로 우리 선조들이 걸어 온 길을 밝히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까 싶다.
정말 우리 사학계가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것은, 식민사관 보다는 오히려 한국인 우월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에서는 이제 자국의 역사를 해체하는 작업도 한다던데, 냉정하게 실체를 분석할 만큼 베짱과 자신감이 생기려면 우리는 아직도 멀었구나 싶다. 
무령왕이 양 무제로부터 하사받은 영동대장군이라는 직위를 두고 요즘으로 치면 외국 대학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에 불과하다고 애써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대 세계에서 사대주의가 큰 나라 옆에서 독자적으로 문화를 발전시키고 생존해 가는 훌륭한 외교술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을, 명백하게 중국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신하로서 조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걸 인정하면 백제의 자주성에 (혹은 대한민국의 자주성에) 큰 해라고 되는 양, 요즘의 명예학위 따위에 불과하다고 깍아 내리는 건 정말 비겁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학자들이 한중일 세 나라에 널려 있으니 아직도 동북공정이니, 임나일본부설이니 하는 게 자국에서 힘을 얻고 있지 않겠는가.
전방후원분이 일본의 무덤 양식이고 한반도에서 그것이 발견됐다면 양국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 아닌가?
이것을 두고 부득불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근거로 삼으려는 일본이나, 그럴 위험이 있어 절대 그런 무덤 형태가 아니라고 부인하여 아예 조사도 안 하려는 한국이나 정말 한심스럽다.
얼마 전에 고종석의 칼럼에서도 읽은 바대로, 좀 더 세계시민적인 인식을 갖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진시황릉, 일본의 금각사 등을 이해 관계 없이 편안하게 즐기며 자랑스러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고구려가 남진하였을 때 거점성만 정복하고 주변까지 통치하지 않은 것을 두고 고구려는 마치 제후국에 조공을 받는 천자국을 자쳐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정말 억지스럽다.
주변까지 직접 통치할 수 있을 만큼의 국력이 안 됐기 때문에 선적으로 중요성들만 점령하고 지나갔다는 게 합리적인 해석이지, 이걸 두고 천자국 운운하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식민 사관의 정반대말은 혹시 민족사관이 아닐까?
칠지도 얘기도 해야 할 것 같다.
백제왕이 하사를 했는지 아니면 신공황후에게 헌상을 했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어떤 나라든 자기 나라 위주로 역사서를 해석하려고 하는 법이니 적당한 선에서 이해하면 될 일을, 그 칼을 처음 발견한 일본인의 출신 배경을 근거로 일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고 훼손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건 정말 코메디다.
어렸을 때 봤던 만화에서도 일본인이 칠지도를 훼손하는 장면을 보고 이런 나쁜 놈들! 하고 부르르 떨었는데 정작 나쁜 사람은 아무 근거도 없이 막연한 추측만 가지고 훼손했네 어쩌네 하는 사람이 아닐까?
오히려 일본 입장에서 보면 명백히 자기네 역사책에 칠지도를 백제에서 바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 그나마 주장할 근거라도 있다.
일본서기 기록은 믿을 수 없다, 이러다가도 백제에 유리한 기록이 나오면 얼른 인용하는 아전인수, 견강부회의 태도는 이제 지양해야 할 것이다.
또 광개토대왕비는 일본 장교에 의해 발견되기 전에도 수없이 탁본이 떠졌기 때문에 훼손 운운하는 게 난센스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부득불 책에 훼손 가능성을 싣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언젠가 읽었던 책인데 이상하게 감상문이 없어서 읽었나 안 읽었나 헷갈렸지만, 예성 동호회의 중원 고구려비 발굴기를 읽으니 한 번 봤던 책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때도 아마 신문상에 연재된 글을 모으다 보니 깊이가 부족하고 에피소드 위주였다고 비판했던 기억이 난다. 
본격적인 학술서라고 보기에는 너무 잡다한 내용이 많지만 그래도 필자가 직접 참여한 발굴 뒷얘기를 듣는 건 흥미롭다.
광주의 신창동 유적지에서 발견된 옹관묘가 마한 시대 것이라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막연히 청동기 시대 유물이겠거니 했는데 마한이라는 국가와 연결되니 굉장한 유적지처럼 느껴진다.
삼국 시대 외에는 고대 국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신선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 고대의 역사는 참 기록이 없다.
창원 다호리 유적지에서 붓도 발견되고 오래 전부터 한자를 써 왔던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렇게 남은 기록들이 없을까?
조선왕조의 그 엄청난 실록만 생각해도 기록하길 좋아하는 민족이 분명한데 말이다.
제대로 된 역사 정립도 안 되어 있는 기원전후 시기에 이미 로마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 이집트는 무려 5000년 전의 왕조까지 복원된 걸 보면 기록 문화가 부재된 우리의 고대사 복원 현실이 참 아쉽다.
결국 열심히 고고학적 발굴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밀양 송은 박익묘의 벽화는 고려 시대에도 여전히 벽화 전통이 남아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해 줬다.
나는 벽화라고 하면 고구려 시대에나 있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여말선초에 죽은 박익묘를 우연히 발굴하게 됐는데 그 안에 벽화가 그려졌다고 하는 걸 보면,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벽화 전통이 존재했었던 모양이다.
박씨 문중에서는 유골에 손도 못 대게 해서 그저 눈으로 부패되지 않은 시신을 관찰하기만 했다고 하는데, 달리 생각하면 제대로 된 조사를 통해 조상이 널리 알려지면 그것도 그 분이나 문중을 위해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
족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조상의 무덤을 오늘날까지 잘 관리해 온 것은 조상의 묘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전환을 통해 과학적인 발굴과 연구야 말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좀 더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 준다면 고고학 발전에 큰 힘이 될 것 같다.
천마총을 발굴했을 때도 경주 김씨 일문에서 왕릉이 분명한데 마치 말 무덤인 것처럼 천마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며 국회에 제소하기에 이르렀다는데 우리나라의 조상 숭배 전통이 대견하기도 하면서도 이렇게 고루하고 인습적인 장면을 접할 때면 한숨이 나온다.
서구 문명이 온 나라를 뒤덮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대의명분과 "정신적인" 것에 집착하는데 성리학 교조주의 일색이었던 조선 시대는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고대사에 대한 미스테리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흥미로운 발굴 경험과 관련 지식을 가볍게 풀어 쓴 대중을 위한 발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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