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안식처, 이집트로 가는 길
정규영 지음 / 르네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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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집트 역사 다이제스트 100>을 빌릴 계획이었는데 바로 옆에 꽂아진 이 책이 눈에 띄어 먼저 읽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은 제목을 기억하기 힘들어 나중에 읽어야지 하면 결국 못 읽고 말 때가 많아 가능하면 우선 대출을 한다.
이 때 위험성은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에 과연 내가 원하는 내용인지 장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원래 읽으려고 했던 책 위주로 빌리려고 하지만 유난히 눈에 꽂히는 책들이 있어 그냥 지나치기 힘들 때가 많다.
이 책은 다행스럽게도 비교적 내용도 괜찮고 재미도 있고 책 수준도 평이해서 한 번에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은 다음에 이집트 역사를 읽으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이집트 역사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저자가 카이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만큼 일단 저자에 대한 신뢰도가 생겼다.
이 시리즈의 제목인 <세계 문명사 산책> 에 걸맞게 이집트의 문명을 소개하는 일종의 기행문 혹은 안내서 같다.
사진이 많이 실려 있어 보는 재미도 있고 정말 기행문이라면 이 정도 수준은 되야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서점에 난무하는 온갖 잡다한, 좀 심하게 말하자면 출판 공해 내지는 쓰레기 같은 책들이 버젓이 기행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독자를 유혹한다는 점에서 더욱 이 책의 성실함은 빛이 난다.
저자의 개인적인 소회는 가급적 삼가하고 이집트의 유적지와 관련 역사를 쉬운 문체로 편안하게 서술한 점이 책의 장점이다.
이집트를 가 보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들고 비행기를 타도 좋을 것 같다. 

사실 이집트는 워낙 역사가 오래 되고 먼 옛날의 문명이라 구체적으로 감이 안 잡혔다.
막연히 피라미드의 나라라고만 생각했지 왕조의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없었다.
모든 왕조를 숫자로 부른 점도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되지 못하는데 일조를 했다.
하지만 관련 책들을 몇 권 보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5000천 여 년 전에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구기 시작한 이 위대한 조상들은 피라미드와 상형문자 등을 비롯하여 고대 문명사에 엄청난 족적을 남겼다.
우리가 단군 신화를 근거로 고조선 건국 연도인 기원전 2333년부터 지금까지를 반만년의 역사라고 말하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이 비해, 이집트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하게 진정으로 반만면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할 수 있겠다.
5천 년 전의 왕조 연대표가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는 것도 신기하고, 그 먼 옛날에 피라미드와 같은 엄청난 건축물을 세웠다는 점도 경이롭다.
책에는 전문가답지 않게 화성인이 세웠을 수도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학설까지 소개하고 있지만 학자들이 피라미드 건축을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겠다.
오늘날 수십 층의 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게 된 시작이 바로 고대의 피라미드 건축에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피라미드는 얼마나 단단한 곳에 부지를 선정했는지 지진 때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밑으로 침강한 깊이도 불과 2~3cm 라고 한다.
그 거대한 화강암들은 대체 어떻게 옮겨 왔고 또 철기구도 없이 청동 연장을 가지고 어떻게 다루었으며 어떤 식으로 쌓아 올렸는지 여전히 의문점이 많다고 한다.
<피라미드의 과학>이라는 책을 읽어봐야겠다. 

이집트는 국토의 95%가 사막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고대부터 이 놀라운 문명이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나일강 덕분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 정도가 아니라 나일강 그 자체다.
이집트 국토를 종단하는 이 긴 강 덕분에 풍부한 수확이 가능했고 그 풍요로움 덕분에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로마의 속주가 된 이래 무려 2000년의 세월 동안 외국의 지배를 받다 보니 이집트 고유의 언어와 문자가 사라져 고대 문명과 단절됐다는 점이다.
샹폴리옹에 의해 상형문자가 해독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고대의 문명을 찬란하게 밝혀줬던 이 위대한 글자가 그저 장식용으로만 여겨졌단다는 사실이 기막히다.
상형문자는 표음문자의 기능도 하고 민용문자로 변형되어 일상생활에서도 널리 쓰였다고 하는데 무려 3천년을 이어오다가 사라져 버렸다는 게 너무나 의아하다.
문자는 그렇다 쳐도 왜 언어까지 아랍어로 바뀌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도 한자를 쓰는 중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다.
중국 같은 거대한 나라가 수천 년 동안 단일한 문화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 같다. 

현재 이집트는 이슬람화 되어 있지만 국민의 10%는 기독교의 변형인 콥트교라고 한다.
모세가 파라오로부터 백성들을 이끌고 탈출했다거나, 요셉과 마리아가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수년간 피난해 왔다는 전설도 있는 만큼 이집트는 기독교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 같다.
나는 최소주의자의 학설을 신봉하는 만큼, 모세의 출애굽 자체를 믿지 않지만 전설과 관련된 장소들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들이고 있다.
특히 모세가 야훼를 만났다는 호렙산에는 카트린 수도원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이 곳에 올라가서 아침을 맞으면 과연 신을 만날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영성이 깊어진다고 하니 자연 풍광이 얼마나 장관일지 짐작이 간다.
기회가 되면 꼭 가 보고 싶다. 
콥트교와 관련된 유적지나 문화재도 꽤 많은 것 같은데 이집트 문화의 다양함에 일조한다는 생각이 든다. 

수에즈 운하는 그냥 운하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면 사막 한 가운데 배가 지나가는 장면이 압권이라고 한다.
사진을 보니까 정말로 모래둑 사이로 배가 유유히 지나가고 있다.
역시 말로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본질 파악에 유익하다.
사진이 없었다면 아마 난 대체 뭐가 장관이라는 거야, 하고 툴툴거렸을 거다.
그 동안 이집트 하면 피라미드 밖에 몰랐는데 여행을 하게 된다면 이런 곳들도 꼭 가 보고 싶다. 

인류 문화의 시작인 유구한 역사의 나라 이집트에 대해 소개한 재밌는 책이다.
간략하나마 이집트 역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됐고 이집트 문화를 이루는 다양한 측면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정말 꼭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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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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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을 별로 안 읽는 편이라 그래도 고전은 읽자,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는데 이 책은 교수님이 너무 재밌다고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됐다.
시사주간지에서도 이슈를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워낙 유명해서 도서관에서 항상 대출 중이라 빌리는데도 정말 오래 걸렸다.
리뷰를 보니 무려 200여개가 붙어 있다.
과연 인기를 실감하겠다.
절반 정도를 읽고 있는데 솔직히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이런 식의 건조한 문장을 안 좋아한다.
나는 사람의 심리 묘사를 섬세하게 풀어내고, 사건 위주로 속도감 있게 전개하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이를테면 은희경처럼 인간의 위선을 까발린다거나, 얼마 전에 완전 감탄하면서 읽은 <지상에서 영원으로>처럼 외부 환경과 투쟁하는 나약한 인간의 심리 변화 같은 소설에 열광한다.
이 소설은 맞는 비교인지 모르겠으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서술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제는 전혀 다르지만 문체나 풀어가는 스타일이 얼추 비슷해 보인다.
그 책도 참 힘들게 읽었는데 이 책도 빠져들기가 쉽지는 않다. 

다만 설정은 충격적이다.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지구에 큰 재앙이 생기고 이제 인간은 석기 시대처럼 먹을 것을 찾아 끝없이 방랑해야 한다.
온 세상은 눈에 덮혀 추위와 싸워야 하고 식량 따위는 없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심지어 인육을 먹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길가다 사람을 발견하면 그를 죽이던지 죽어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다.
주인공 남자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따뜻한 남쪽을 찾아 기약없는 방랑을 하고 있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살해 위협, 배고픔, 추위...
아들은 혹시 아버지가 사람을 죽여서 먹을까 봐 두려워 한다.
보통 한국적 정서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희생적인 아버지상이 대부분인데 대체적으로 서구 소설들은 일방적인 희생이나 끈끈한 정이 부족한 느낌이 든다.
좋게 말하면 쿨 하고 좀 밋밋하다고 해야 할까?
이 소설에서도 아버지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내 자식은 꼭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기 보다는, 그냥 보호해 줘야 하는 연약한 존재, 그러다 죽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약간 체념 비슷한 허무감을 느꼈다.
평론에서는 그런 부모 자식 관계가 이 소설의 포인트라고 읽었던 것 같기도 한데 하여튼 굉장히 건조하다. 

이들의 여정을 읽으면서 문명 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들을 생각해 봤다.
대체 그들은 그 추운 빙하기를 어떻게 견뎌 냈을까?
제대로 된 옷도 없고 신발도 없고 (오늘 기사를 보니 구석기 초기에 이미 신발을 신었다는 증거가 나왔다고 하지만) 추위를 가릴만한 집도 없고 비축해 놓은 곡식도 없고 그저 사냥을 하면서, 그것도 어설픈 돌맹이 몇 개로 덩치 큰 짐승들과 싸우면서 대체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새삼 인간의 진화 과정이 놀랍고 감탄스럽다.
어쩌면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끈질지게 살아남아 결국은 온 지구를 생존의 패러다이스로 만들고야 만 인간의 이 놀라운 업적이야 말로 신의 섭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면서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나는 걸핏하면 죽어 버릴까,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먹고 사는 게 왜 이리 비루하냐, 이런 식으로 도무지 적극적인 생의 의지라고는 없는데 어른들 말씀대로 정말 배가 불러서 온갖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석기 시대 원시인들은 그 험한 환경에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살아 남았을까?
이 책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힘든데 왜 기어이 살겠다고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걸어간다는 말인가?
죽느니 보다 못한 상황이니 차라리 죽어 버리지.
정말 자살은 지극히 문명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감나게 묘사된 자연 상태의 벌거벗겨진 인간의 삶을 읽으면서 생존 의지야 말로 인간의 본능이고 자살 충동이 우울증에 따라오는 확실한 정신병이구나 싶다.
이런 결론을 내는 게 좀 우습기도 하지만, 새삼 빙하기를 견뎌 내고 문명 사회를 이룩한 우리 조상들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또 스스로 먹이를 구해야 하는 야생동물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 알 것 같고, 갇혀 있는 삶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불행하다, 이런 식의 감상은 진짜로 먹고 사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문명화 사회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언어 유희가 아닐까 싶다.
아직 절반 밖에 못 읽었는데 나머지도 열심히 읽어봐야겠다. 

 

드디어 다 읽었다.
충격적인 장면이 나왔다.
아버지와 아들은 불을 피우면서 뭔가를 구워 먹으려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총을 든 남자를 피해 그들이 도망가자 부자는 기대를 품고 장작더미로 간다.
그런데 꼬치에 꽂혀 있는 고기는 이럴 수가, 짐승이 아니라 머리가 잘린 아기였다!
지하철에서 이 부분 읽다가 토할 뻔 했다.
전국 시대에 인육이 성행했다는 중국 사서의 기록이 정말로 실감나는 순간이다.
그 후 아들은 우리는 사람을 안 먹을 거죠? 하면서 자주 확답을 받는다.
얼마나 충격적이고 무서웠을지 상상이 간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던데 과연 이 장면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된다. 

불행히도 아버지는 객혈을 하다가 죽고 만다.
피를 쏟으며 기침을 하다가 결국 다음 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아버지 곁을, 소년은 떠나지 못한다.
길을 떠돌아 하는 만큼 담요는 추위를 막기 위해 필수인데도 아버지의 시신에 담요를 덮어 두고 떠난다.
마지막에 다른 일행에 합류하는 걸로 나오는데 소년이 늘 꿈꾸던 바로 그 착한 사람들일지 궁금하다.
단순히 자연과의 투쟁이 아니라 나 외의 다른 존재가 내 생명을 위협하는 적이 되는 진정한 만인에 의한 투쟁 상태, 아, 정말 문명화 이전의 원시 사회는 무서웠겠구나.
오늘날 이 만큼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인권과 생명 존중의 풍조가 자리잡은 것도 기나긴 진화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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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개정판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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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오래된 책으로 알고 있는데 중앙박물관에 갔다가 뮤지엄샵에서 새로 나온 개정판을 발견하고 도서관에 신간 신청을 했었다.
옛날 책에는 사진이 모두 흑백인데 개정판은 올컬러라 보는 완전히 다른 책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신청을 해 놓고도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1년이 다 되도록 빌리지를 못해 이 책에 대한 기대가 날로 커져 가던 차에 드디어 대출을 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책의 도판은 정말 화려하고 편집이 굉장히 잘 된 책이며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무척 가벼운 편이다.
개정판은 대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책도 다시 편집을 해서 새로 출간하면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낀 책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느낌은 너무 기대를 많이 해서인지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워낙 유명한 분이시니 문화재에 대한 식견이 쥐뿔도 없는 내가 감히 이러네 저러네 평을 할 처지는 못 되지만서도, 독자의 입장에서 느낀 점을 말하자면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일견 국수주의적인 느낌이 난다.
문장이 너무 화려해 끝없는 찬사를 늘어 놓다 보면, 나중에는 문화재 자체의 아름다움 보다는, 말을 위한 말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너무 현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어설픈 미학 에세이나 여행기 보다는 월등한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민족 문화는 그 민족의 성장 환경과 맞물려 오랜 전통을 갖고 가꿔져 왔기 때문에 우월의 차이를 논한다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화든 그것을 직접 겪어 온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고 그저 겉만 보는 외국인의 눈에는 그 깊은 속내까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문화재는 한국인이 가장 잘 느끼고 감탄할 수 있기 때문에 외국인의 평가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특별히 남의 문화와 비교할 것은 더더욱 없으며 그저 행복한 마음으로 즐기면 되지 않을까?
각 문화의 특징을 비교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꼭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 문화의 숨막히는 권위주의라느니, 일본 문화는 한국의 아류라느니 이런 식의 기술은 정말 오버 같다.
내가 이원복씨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겸손하면서도 부드러운 문장의 힘을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타 문화에 대해서도 똑같은 애정을 갖고 절대 우월을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랄까 그 정신과 스타일이 내 마음에 꼭 든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전반부에 한국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에세이는 사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오히려 뒷쪽에 각 문화재에 대한 설명들이 훨씬 와 닿았다.
이 분의 장점은 어려운 설명 보다는 그 문화재가 갖는 매력을 쉬운 언어로 일상화 시켜 묘사하듯 풀어 쓰기 때문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는 점이다.
어떤 글에서는 6.25 사변 이야기도 나오고, 심지어 지게에 땔감 이고 가는 소년들의 애잔함도 등장해 시대가 정말 옛날이구나 실감을 한다.
아마 전쟁의 상흔과 식민지 치하의 아픔을 떨쳐 내기 위해 민족의 자부심을 한껏 높혔어야 하던 시대정신이 글에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국력이 신장하고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확실하다면 배포크게 남의 문화에 대해서도 그 위대함을 침이 마르게 칭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도 등장하지만, 한국 자기의 우수함에 감탄하고 솔직하게 평할 수 있는 일본인의 모습이 오히려 성숙해 보인다. 

건축물은 직접 가 보지 않으면 그 맛을 제대로 알기 힘든 것 같다.
책에 소개된 건축물 중 직접 가서 그 아름다움에 경탄했던 불국사나 창덕궁의 부용정을 제외하고는 솔직히 통도사나 무량수전 같은 곳은 사진만 봐 가지고는 저자가 기술하는 매력이 뭔지 잘 모르겠다.
불국사는 너무 유명해 오히려 찬사가 전형적이고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 친구들과 답사 여행을 다녀온 후 신라인의 불국토라는 말을 실감했었다.
창덕궁 역시 그냥 옛 궁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을 내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찬찬히 관람하니, 조선 궁궐 건축의 미학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목공예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이 목공예품은 너무 투박하고 소박하다고만 생각했었다. 
말하자면 그냥 옛날 고리타분한 가구라고만 여겼었다. 
그런데 중앙박물관에 재현해 놓은 선비들의 사랑방을 보니 그렇게 정갈하고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또 수집해 놓은 목공예품, 이를테면 사방탁자나 문갑, 서안, 장농 이런 옛 가구들이 나무결 특유의 깊은 맛을 내면서 요즘의 화려한 가구들과는 전혀 다른 청아함과 세련미를 선사했다.
대체 왜 우리 목공예가 사라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고 좀 더 사람들이 전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면 얼마든지 현대식 가구들과 경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장 나전칠기만 해도 얼마나 화려한가.
자개로 장식된 장농이나 옻칠한 탁자들은 문외한인 내가 봐도 예쁘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고 보면 조선 시대의 문화가 선비들에 의해 이끌어졌기 때문에 화려하고 자극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사랑방 풍경에서 보여지는 점잖고 정갈한, 담백한 담채 같은 문화가 주를 이뤘던 것 같다.
귀족문화라고 일컫어지는 고려 시대나 불교문화가 성행하던 통일 신라 시대, 자유로운 연애가 성행했다는 그 이전의 고대 문화는 지금의 한국 문화와는 또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이 선비 문화의 또다른 정점이 바로 문인화가 아닐까 싶다.
회화는 다른 문화재 보다 더 쉽게 즐길 수 있어서 좋다.
따지고 보면 조선 시대 선비들은 글씨도 잘 쓰고 학문의 경지도 높고 시도 잘 지으며 심지어 그림마저 잘 그렸다.
전문 화가가 아닌데도 취미삼아 먹으로 이만큼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는 걸 보면 당시 선비들의 교양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간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조선 시대는 그저 당파 싸움이나 일삼고 명분론에 집착한 위선적인 계층으로 비판받고 있으나 격조높은 선비 문화는 적어도 문화 면에서는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아무리 선비들이 그림을 잘 그려도 역시 전문 화가와는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취미로 그리는 사람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까?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보면 아, 정말 이 사람들은 직업적인 화가구나 실감이 난다.
김홍도 그림의 위대함이야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신윤복 그림의 미학은 이번에 새롭게 발견했다.
아름다운 여인들을 주로 그렸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그림을 직접 대하니 색을 어쩜 그렇게 적재적소에 잘 썼는지 감탄했다.
수묵화다 보니 색감 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한계가 제한되기 마련인데 신윤복의 그림은 색이 포인트가 된다.
이를테면 여인의 풍성한 치마에만 파란색을 칠해서 전체적으로 화사한 색감을 살리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는 내용도 보면 볼수록 파격적이다.
문인화가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못 그릴 내용들이다.
이렇게 세련되고 개성있는 그림을 많이 남긴 화가에 대한 기록이 그저 아버지 이름 하나 뿐이라니, 저자의 한탄대로 당시 예술가에 대한 처우가 얼마나 각박했는지 짐작이 간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표정이 살아 있다.
작정하고 그린 신선도 같은 경우는 캐리커쳐처름 특징을 잡아낸 풍속화와는 다른, 정밀하고 엄숙한 필선이 느껴진다.
연한 푸른색으로 물들인 냇가 풍경은 또 얼마나 상큼하고 발랄한지!
각 장르마다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자유자재로 그린 김홍도의 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정조 임금이 군수 자리를 내줄 만 했겠다 싶다. 

겸재 정선은 선비화가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 분의 산수화를 보면 힘이 넘치고 이게 바로 중국의 관념산수화와는 전혀 다른 진경산수화구나 싶다.
다른 문인화처럼 취미삼아 그렸다기 보다는, 전문성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그렸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는 매화도를 잘 그린 조자룡이다.
이 분은 여항문인이었고 김정희 문하에서 배웠는데 문기가 부족하다고 하여 선생으로부터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매화꽃 핀 봄날의 화려한 정취는 내 마음을 흔들고, 특히 중앙박물관에 가서 본 매화병풍도는 그 웅장한 기세와 화사한 색감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다.
또 비슷한 시대를 산 전기의 매화 그림도 마음에 든다.
이 책에는 안 나오지만 전문 화가들에 필적하는 이가 표암 강세황이 아닐까 싶다.
선비들이 교양삼아 붓을 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본격적인 화가의 force 가 느껴진다.
화론도 많이 쓰셨다고 하는데 이 분의 그림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 

500 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책이지만 사진도 훌륭하고 글솜씨도 유려하여 술술 잘 넘어간다.
워낙 쉽게 쓰셔서 지하철에서 야금야금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서양화에 빠져서 여러 권을 탐독하다 보니 맨날 소개되는 그림이 그게 그거인 것 같아 한동안 지루한 느낌을 받았는데 요즘은 우리 옛 그림과 도자기의 매력을 발견하고 정말 즐겁게 책을 읽고 있다. 
어쩌면 이런 즐거움은 직접 박물관에 가서 진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야나 루벤스 같은 (아,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뛴다!)  대화가들의 위대한 명작들을 아무 때나 가서 볼 수 있는 파리나 런던, 뉴욕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웠는데 이제 나도 누구 부럽지 않을 즐거움이 생겼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더 열심히 가서 더 많이 느끼고 싶고 이런 문화야 말로 절대 질리지 않을 최고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선천적인 컬렉터란 말이 생각난다.
이렇게 눈이 호사하다 보면 다음 단계로 수집의 욕구가 생길 것 같기도 하다.
아, 정말 돈 많이 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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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0-07-18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 일본과 중국의 비교하는 기술은 좀 그랬습니다;;; 집에 이전판이 있는데, 새로 개정판으로 살까 고민중이였는데요...

어느새 30%할인이 되네요;;;

marine 2010-07-18 23:27   좋아요 0 | URL
개정판은 도판이 참 좋아요.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을까요?

김ㅇㅇ 2011-11-2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

눈보리 2011-11-2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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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 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빛 테마 한국문화사 4
권오영 지음 / 돌베개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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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풍부하고 도판도 훌륭한 예쁜 책이다.
테마 한국사 시리즈는 서문에 나온 저자들의 각오만큼이나 우리 역사를 사진과 함께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획물 같다.
이번에 불화 편도 나왔던데 가능하면 전부 읽어 보고 싶다. 

무령왕릉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공주에 다녀온 다음부터다.
분명하게 누구의 묘인지 밝혀진 곳은 이 곳 뿐이라는 설명이 내 관심을 확 끌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벽돌묘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 책에 따르면 무령왕릉은 6세기 중국의 남조 양나라와 일본의 아스카 시대를 연결하는 동아시아 교역의 상징이라고 한다.
저자는 무령왕릉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보다, 남조 시대의 무덤 연구를 토대로 무령왕릉이 얼마나 양나라와 비슷한지를 설명하고 이것을 활발한 교역의 증거로 삼는다.
심지어 최고의 백제 보물로 일컫어지는 백제금동대향로마저도 중국에서 건너온 수입품일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시한다.
실물이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국내에서는 당연히 백제에서 제작됐다고 보나 중국의 여러 벽화나 화상전 등을 보면 이것과 똑같은 모양의 향로들이 많이 존재하므로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중국에서 수입됐던지 아니면 중국 수입산을 바탕으로 백제에서 제작됐다는 것이다.
어떻든지 이 대향로 역시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교역의 증거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나 역시 중국 문화재를 소개하는 책에서 이 향로와 거의 비슷한 박산향로를 보고 깜짝 놀랬던 적이 있다.
그 전까지는 막연하게 우리나라의 독특한 향로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중국에도 비슷한 향로들이 있었던 것이다.
역시 일본에도 백제와 비슷한 양식의 부장품들이 많이 나와 저자는 양나라에서 수입한 문물을 백제가 주체적으로 왜에 전한 것으로 본다.
중국 영향은 축소화 시키고 일본에 전해준 것만 극대화 시키는 민족주의적인 시각보다는 훨씬 성숙한 태도로 보이나, 부득불 중국과 일본의 가교 역할을 강조한 것도 썩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것과 똑같은 태도가 한반도를 뛰어넘어 직접 중국과 교류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민족주의 학자들의 주장이 아닌가.
고대사를 현대와 연관지어 특히 민족의 자부심 등과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시각의 한계 같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저자의 최종적인 주장대로 6세기 동아시아는 무덤 양식이나 부장품 등이 즉시 수입될 만큼 활발하게 서로 교역하였고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무령왕릉이라는 것이다. 

1971년에 우연히 송산리 6호분의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무령왕릉은 도굴된 적이 없는 처녀분인 만큼 엄청난 양의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고 지나친 취재 열기 때문에 단 하루 만에 발굴이 끝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언제 누가 묻혔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유일한 왕릉이 겨우 하루 만에 수습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장마가 지고 엄청난 취재 열기 때문에 도굴이나 훼손 위험이 커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당시의 발굴 태도는 이해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기자가 밀치다가 청동제 부장품을 부러뜨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걸 보면 차라리 잘 보존되다가 후대에 발굴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무수한 도굴과 훼손의 위험 속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문화 유산들이 얼마나 긴 인고의 세월을 이겨냈는지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무령왕은 사망 후 27개월 동안 정지산에 빈전이 차려져 임시로 모셔졌고 그 기간 동안 왕릉을 지어 옮겨졌다고 한다.
요즘 장례가 3일장이던 것에 비하면 이 3년상은 확실히 고대에 조상 숭배가 일종의 종교였음을 보여 준다.
능에 매장한 지 한 해도 되지 않아 또 다시 왕비가 사망하여 다시 3년상을 지내니 당시 이런 장례 풍습이 얼마나 일상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지 이해가 된다.
무령왕은 일본서기에 사마왕으로 등장하는데 개로왕의 아들로 나와 있고 동생인 곤지가 임신한 개로왕의 처를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던 중 섬에서 낳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저자는 나이와 정황 등을 고려해 봤을 때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로 봐야 하고 암살로 얼룩진 선대왕들 대신, 개로왕과의 직계 혈통임을 강조하기 위해 아들로 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다른 저자들의 의견을 참조해야 할 것 같다.
무령왕은 앞의 왕들이 암살당했던 것에 비해 당시로서는 환갑을 지낼 만큼 장수했고 (62세) 웅진 시기의 혼란기를 정비해 지방 호족들을 제압했으며 양나라와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영동대장군의 칭호를 하사받는 등 백제의 위상을 높힌 중흥의 군주로 나온다.
왕릉의 발굴 때문에 갑자기 위상이 업그레이드 된 느낌도 들지만 사료에 부족한 부분을 발굴을 통해 재정립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사진과 도판이 풍부해 읽는 내내 눈이 즐거웠고 서술 또한 작은 주제에 압축되어 그 밀도가 높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좋은 기획들이 많이 나오길 바라면서 역사서에서 비교적 소략된 백제사가 다시금 그 중요성을 갖게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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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과 백제부흥운동 엿보기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연구총 제5집
양종국 지음 / 서경문화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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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특별해서 기대를 많이 했던 책인데 실망스럽다.
워낙 자료가 적어서일까?
내용이 너무 단편적이고 전체적인 짜임새도 약하다.
공주대학교 교수라면 백제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너무 그 쪽으로 orientation 되서 그런가?
삼국사기 기록 중 의자왕에게 불리하게 쓰여진 건 신라 입장에서 중상 모력한 거고, 좋은 쪽으로 쓰여진 기록은 받아들이는 이중적인 해석은 문제가 있다.
망국의 왕이라면 역사의 준엄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왕의 개인적인 탐욕이나 무절제한 향락, 즉 지극히 도덕적인 부분의 몰락만이 국가의 멸망을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역사서들이 대부분 그 쪽에 초점을 맞추긴 하지만) 왜 한 국가가 사라지게 됐는지 그 배경과 당시 상황을 분석해야지 무조건 승자 쪽의 악의적인 기록이다, 왕은 똑똑하게 잘 했는데 모함에 걸려 무너지고 말았다 이런 식의 해석은 너무 유치하다.
차라리 삼국 시대 관련 책이라면 임용한씨나 이희진씨 책이 훨씬 더 생생하고 주제에도 잘 부합한다.
성실하게 이것저것 기록들을 뒤지긴 했는지 모르겠으나 지나치게 기록의 행간을 의자왕 쪽으로 치우쳐 읽었고 (그것도 입체적인 분석이라기 보다는 아주 단편적으로 우상화 하기) 중구난방 식으로 백제 부흥 운동 등의 과정을 이것저것 끼워 넣어 도무지 주제에 대한 통일성이 안 보인다. 

 

내가 아무래도 이 책을 잘못 이해한 것 같다.
대충 훑어 보고 편견에 가득찬 책이라고 오해를 했던 것 같다.
테마 한국사 시리즈인 무령왕릉 편을 읽은 후 사비 시대 백제에 관심이 생겨 다시 읽으니 오독했음을 알게 됐다.
부여와 공주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백제 관련 기사들을 성실하게 분석한 좋은 책이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삼국사기 기록에 대해 편견과 악의에 찬 기록이라고 평가절하한 점이다.
이를테면 의자왕의 태자를 처음에는 부여륭으로 했다가 나중에 부여효로 기록하는데 다른 역사서나 비문 등에서는 모두 부여륭으로 기록됐다는 점을 들어, 백제 멸망 후 신라계 후손인 김부식이 일부러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인 부여륭 대신 부여효로 바꿔 썼다는 것이다.
백제 멸망 당시인 신라 시대에 기록된 책도 아니고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12세기에 고려 시대 사람이 쓴 역사서라고 보면 다른 정황 증거 없이 무조건 다른 사서와 기록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라 후손 김부식의 악의적인 가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왜 삼국사기에서는 태자를 다르게 기록했는지 그 상황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의자왕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횡음을 일삼은 게 아니라 당과 대항하여 자주외교노선을 취했다고 본 점은 사료비판을 통한 나름의 역사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과거 역사 기록들은 왕조가 멸망한 것을 왕의 문란함, 기강 해이 등에서 찾는 등 도식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천명이 떠났다거나 하는 식으로) 왕 개인의 사생활을 문제로 삼는 것 보다는 보다 입체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소정방이 김유신 부대가 하루 늦게 도착했다고 하여 그 부장을 참하러 한 사건을 두고, 소정방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설명한 점도 무조건 우리 편에서 보지 않고 나름대로 당시 정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김유신 장군이 소정방에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고 신라군의 위용을 지킨 점은, 이 책에서 인용된 기사로 보아도 너무 당당하게 느껴지는데 이것을 굳이 신라계 후손인 김부식의 윤색이라는 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오히려 저자가 자신의 연구분야인 백제 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된 것으로 보인다.
또 계백 장군이 처자를 몰살하고 황산벌 전투에 임한 것을 두고, 당시 백제 상황이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았다면서 역시 계백의 잔혹함을 강조하려고 김부식이 나중에 삽입한 기사로 보는데 이런 식으로 따지면 역사서에 나온 모든 기사들을 죄다 의심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결전에 임하기 전 처자를 스스로 죽인 점을 두고 잔혹하네 어쩌네 하는 것 자체가 현대의 시각으로 고대를 해석하려는 잘못된 시각이 아닌가 싶다.
이런 한 두 군데의 극단적인 해석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백제 멸망 당시의 상황을 여러가지 정황 증거와 문서 기록, 전설 등을 종합해 입체적으로 재현해 놨다. 

제일 인상깊게 본 부분은 백제 멸망 이후 태자 부여륭에 의해 재건된 웅진도독부이다.
솔직히 이 웅진도독부는 여태까지 당에 의해 다스려진, 있는지도 몰랐던 부분이다.
막연하게 당이 백제를 관할하기 위해 세운 기구이고 신라에 의해 혁파된 후 제대로 된 삼국통일이 이뤄졌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보니 아버지 의자왕이 낙양 땅에서 죽은 후 부여륭은 사대 외교 노선을 취해 고종으로부터 웅진도독부 대방군왕이라는 직책까지 하사받아 백제의 옛 영토를 총괄했기 때문에 백제 재건이라 봐도 무방하다고 한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록 부여륭이 조공을 바쳤고 당의 군사에 의해 유지되긴 했으나, 조공 체제 자체가 독립국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신라 역시 당에 의해 계림도독부라 칭해진 만큼 중국 역사서에서 웅진 도독부를 당의 군현이라 표기한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이런 서술은 지나치게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으로 보이고 계림도독부와 웅진도독부는 그 위상이 절대 같을 수 없다고 본다.
원래 웅진도독부는 백제 옛 땅에 세워졌는데 신라와 영토 분쟁이 잦았다.
그러던 차에 고종이 토번과의 전쟁 때문에 군사를 철수시키자, 문무왕이 이 곳을 공격해 671년에 나당 전쟁이 일어났고 이 때의 승리로 비로소 신라는 백제를 완전히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자 당 고종은 웅진도독부를 만주 건안 땅으로 옮기고 부여륭에게는 대방군왕이라는 칭호도 하사해 백제 유민을 다스리게 한다.
678년에 고종은 부여륭을 위하여 다시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저지로 무산되고 측천무후는 나중에 륭의 손자 부여경에게 이 직책을 넘겨 준다.
그러고 보면 웅진도독부는 후에 신라와 발해가 이 곳을 점령하기 전까지 상당 부분 백제인의 역사가 쓰여진 곳이니 역사적 관심이 좀 더 필요하다고 하겠다.
백제인들은 백촌강 전투 패배 후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왕씨 성을 하사받고 나중에 삼송씨로 바꾼다.
광인천황이 의자왕 아들인 선광의 후손 신립과 혼인하여 환무천황을 낳았기 때문에 천황이 백제왕씨를 자신의 외척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성시의 <만들어진 고대>에 따르면 천황가의 백제계 혈통은 과장이라는 식으로 설명되는데 정확한 근거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재독해 봐야 할 것 같다. 

<역사스폐설>에서 예식이 공주로 피난 온 의자왕 부자를 잡아서 당군에게 넘겼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중국에서 발견된 예식진 묘지명을 근거로 예식과 예식진을 동일 인물로 간주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예식과 예식진은 다른 인물이고 (발음상의 차이가 크다고 본다), 의자왕은 당의 침략 원인이 자신이 자주외교노선에 있었던 만큼 백제의 존립을 위해 스스로 항복했다고 본다.
둘 다 정황 증거를 토대로 한 만큼 어떤 부분이 맞는지 확실하게 판단이 안 선다.
그러나 중국의 광시성 장족 자치구에 있는 백제향 백제허의 지명을 토대로 백제의 22담로 중 하나였다는 역사스페셜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이 책에 소개된 대로 장족 언어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마치 만주족 성인 애신각라를 가지고 신라와 연관짓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백제부흥운동을 펼쳤던 부여풍이 고구려로 망명한 뒤 당에 포로로 잡혀 이 곳으로 귀양간 것을 백제향과 연관지어 생각하는데 백제라는 한자 지명이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그 백제인지 아니면 그 지역 사람들의 말대로 전혀 상관없는 장족어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또 저자는 나이가 많은 부여풍 대신 셋째인 부여륭이 태자가 된 것을 두고 풍을 서자로, 륭을 적자로 보는데 기록에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저자의 추측인지 궁금하다. 

당군이 주력군이고 신라는 보급 부대였던 만큼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끈 군사는 생각만큼 많지 않았을 것이고, 나중에 계백보다 지위가 높은 장군들이 포로로 잡힌 점을 들어 그들 역시 계백만큼 수 천의 군사를 지휘했을 것이므로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은 생각만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참신했다.
또 성충이 의자왕과 대립한 점을 단순히 충언을 무시한 의자왕의 어리석음이라 보지 않고, 당에 대항해 자주외교노선을 취했다고 해석한 점이나, 흥수가 탄현을 지키라고 간언했으나 조정 대신들이 오히려 신라의 부대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공격하므로 탄현만 지키고 앉아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했다고 이해한 점 등은 당시 상황을 단순히 개개인의 도덕성 등에 의존하지 않고 사료를 보다 입체적으로 분석한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의자왕이나 조정 대신들이 사리사욕에 어두워 충신들의 간언을 무시하다가 망했다는 역사서의 기록은 당시 필법을 감안할 때 여러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주의해야 할 점은, 당시 기록을 무조건 승자 쪽의 편파적 기록이다, 정황으로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확대 해석해서도 안 될 것이다.  

백제 멸망 당시와 부흥 운동, 그리고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의 발자취에 대해 성실하게 흥미롭게 기록한 책이고 이해하기도 쉽다.
저자가 쓴 다른 책을 읽어 볼 생각이다. 
아쉬웠던 점은 책에 실린 사진들이 너무 작다는 것과 내 한자 실력이 딸려서 정확한 이해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확실히 역사서를 읽으려면 한자와 유교, 불교에 대한 지식은 필수다.
좀 더 공부를 해서 보다 깊은 독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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