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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과 백제부흥운동 엿보기 -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연구총 제5집
양종국 지음 / 서경문화사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주제가 특별해서 기대를 많이 했던 책인데 실망스럽다.
워낙 자료가 적어서일까?
내용이 너무 단편적이고 전체적인 짜임새도 약하다.
공주대학교 교수라면 백제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너무 그 쪽으로 orientation 되서 그런가?
삼국사기 기록 중 의자왕에게 불리하게 쓰여진 건 신라 입장에서 중상 모력한 거고, 좋은 쪽으로 쓰여진 기록은 받아들이는 이중적인 해석은 문제가 있다.
망국의 왕이라면 역사의 준엄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왕의 개인적인 탐욕이나 무절제한 향락, 즉 지극히 도덕적인 부분의 몰락만이 국가의 멸망을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역사서들이 대부분 그 쪽에 초점을 맞추긴 하지만) 왜 한 국가가 사라지게 됐는지 그 배경과 당시 상황을 분석해야지 무조건 승자 쪽의 악의적인 기록이다, 왕은 똑똑하게 잘 했는데 모함에 걸려 무너지고 말았다 이런 식의 해석은 너무 유치하다.
차라리 삼국 시대 관련 책이라면 임용한씨나 이희진씨 책이 훨씬 더 생생하고 주제에도 잘 부합한다.
성실하게 이것저것 기록들을 뒤지긴 했는지 모르겠으나 지나치게 기록의 행간을 의자왕 쪽으로 치우쳐 읽었고 (그것도 입체적인 분석이라기 보다는 아주 단편적으로 우상화 하기) 중구난방 식으로 백제 부흥 운동 등의 과정을 이것저것 끼워 넣어 도무지 주제에 대한 통일성이 안 보인다.
내가 아무래도 이 책을 잘못 이해한 것 같다.
대충 훑어 보고 편견에 가득찬 책이라고 오해를 했던 것 같다.
테마 한국사 시리즈인 무령왕릉 편을 읽은 후 사비 시대 백제에 관심이 생겨 다시 읽으니 오독했음을 알게 됐다.
부여와 공주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백제 관련 기사들을 성실하게 분석한 좋은 책이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삼국사기 기록에 대해 편견과 악의에 찬 기록이라고 평가절하한 점이다.
이를테면 의자왕의 태자를 처음에는 부여륭으로 했다가 나중에 부여효로 기록하는데 다른 역사서나 비문 등에서는 모두 부여륭으로 기록됐다는 점을 들어, 백제 멸망 후 신라계 후손인 김부식이 일부러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인 부여륭 대신 부여효로 바꿔 썼다는 것이다.
백제 멸망 당시인 신라 시대에 기록된 책도 아니고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12세기에 고려 시대 사람이 쓴 역사서라고 보면 다른 정황 증거 없이 무조건 다른 사서와 기록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라 후손 김부식의 악의적인 가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왜 삼국사기에서는 태자를 다르게 기록했는지 그 상황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의자왕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횡음을 일삼은 게 아니라 당과 대항하여 자주외교노선을 취했다고 본 점은 사료비판을 통한 나름의 역사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과거 역사 기록들은 왕조가 멸망한 것을 왕의 문란함, 기강 해이 등에서 찾는 등 도식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천명이 떠났다거나 하는 식으로) 왕 개인의 사생활을 문제로 삼는 것 보다는 보다 입체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소정방이 김유신 부대가 하루 늦게 도착했다고 하여 그 부장을 참하러 한 사건을 두고, 소정방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설명한 점도 무조건 우리 편에서 보지 않고 나름대로 당시 정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김유신 장군이 소정방에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고 신라군의 위용을 지킨 점은, 이 책에서 인용된 기사로 보아도 너무 당당하게 느껴지는데 이것을 굳이 신라계 후손인 김부식의 윤색이라는 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오히려 저자가 자신의 연구분야인 백제 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된 것으로 보인다.
또 계백 장군이 처자를 몰살하고 황산벌 전투에 임한 것을 두고, 당시 백제 상황이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았다면서 역시 계백의 잔혹함을 강조하려고 김부식이 나중에 삽입한 기사로 보는데 이런 식으로 따지면 역사서에 나온 모든 기사들을 죄다 의심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결전에 임하기 전 처자를 스스로 죽인 점을 두고 잔혹하네 어쩌네 하는 것 자체가 현대의 시각으로 고대를 해석하려는 잘못된 시각이 아닌가 싶다.
이런 한 두 군데의 극단적인 해석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백제 멸망 당시의 상황을 여러가지 정황 증거와 문서 기록, 전설 등을 종합해 입체적으로 재현해 놨다.
제일 인상깊게 본 부분은 백제 멸망 이후 태자 부여륭에 의해 재건된 웅진도독부이다.
솔직히 이 웅진도독부는 여태까지 당에 의해 다스려진, 있는지도 몰랐던 부분이다.
막연하게 당이 백제를 관할하기 위해 세운 기구이고 신라에 의해 혁파된 후 제대로 된 삼국통일이 이뤄졌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보니 아버지 의자왕이 낙양 땅에서 죽은 후 부여륭은 사대 외교 노선을 취해 고종으로부터 웅진도독부 대방군왕이라는 직책까지 하사받아 백제의 옛 영토를 총괄했기 때문에 백제 재건이라 봐도 무방하다고 한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록 부여륭이 조공을 바쳤고 당의 군사에 의해 유지되긴 했으나, 조공 체제 자체가 독립국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신라 역시 당에 의해 계림도독부라 칭해진 만큼 중국 역사서에서 웅진 도독부를 당의 군현이라 표기한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이런 서술은 지나치게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으로 보이고 계림도독부와 웅진도독부는 그 위상이 절대 같을 수 없다고 본다.
원래 웅진도독부는 백제 옛 땅에 세워졌는데 신라와 영토 분쟁이 잦았다.
그러던 차에 고종이 토번과의 전쟁 때문에 군사를 철수시키자, 문무왕이 이 곳을 공격해 671년에 나당 전쟁이 일어났고 이 때의 승리로 비로소 신라는 백제를 완전히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자 당 고종은 웅진도독부를 만주 건안 땅으로 옮기고 부여륭에게는 대방군왕이라는 칭호도 하사해 백제 유민을 다스리게 한다.
678년에 고종은 부여륭을 위하여 다시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저지로 무산되고 측천무후는 나중에 륭의 손자 부여경에게 이 직책을 넘겨 준다.
그러고 보면 웅진도독부는 후에 신라와 발해가 이 곳을 점령하기 전까지 상당 부분 백제인의 역사가 쓰여진 곳이니 역사적 관심이 좀 더 필요하다고 하겠다.
백제인들은 백촌강 전투 패배 후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왕씨 성을 하사받고 나중에 삼송씨로 바꾼다.
광인천황이 의자왕 아들인 선광의 후손 신립과 혼인하여 환무천황을 낳았기 때문에 천황이 백제왕씨를 자신의 외척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성시의 <만들어진 고대>에 따르면 천황가의 백제계 혈통은 과장이라는 식으로 설명되는데 정확한 근거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재독해 봐야 할 것 같다.
<역사스폐설>에서 예식이 공주로 피난 온 의자왕 부자를 잡아서 당군에게 넘겼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중국에서 발견된 예식진 묘지명을 근거로 예식과 예식진을 동일 인물로 간주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예식과 예식진은 다른 인물이고 (발음상의 차이가 크다고 본다), 의자왕은 당의 침략 원인이 자신이 자주외교노선에 있었던 만큼 백제의 존립을 위해 스스로 항복했다고 본다.
둘 다 정황 증거를 토대로 한 만큼 어떤 부분이 맞는지 확실하게 판단이 안 선다.
그러나 중국의 광시성 장족 자치구에 있는 백제향 백제허의 지명을 토대로 백제의 22담로 중 하나였다는 역사스페셜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이 책에 소개된 대로 장족 언어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마치 만주족 성인 애신각라를 가지고 신라와 연관짓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백제부흥운동을 펼쳤던 부여풍이 고구려로 망명한 뒤 당에 포로로 잡혀 이 곳으로 귀양간 것을 백제향과 연관지어 생각하는데 백제라는 한자 지명이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그 백제인지 아니면 그 지역 사람들의 말대로 전혀 상관없는 장족어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또 저자는 나이가 많은 부여풍 대신 셋째인 부여륭이 태자가 된 것을 두고 풍을 서자로, 륭을 적자로 보는데 기록에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저자의 추측인지 궁금하다.
당군이 주력군이고 신라는 보급 부대였던 만큼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끈 군사는 생각만큼 많지 않았을 것이고, 나중에 계백보다 지위가 높은 장군들이 포로로 잡힌 점을 들어 그들 역시 계백만큼 수 천의 군사를 지휘했을 것이므로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은 생각만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참신했다.
또 성충이 의자왕과 대립한 점을 단순히 충언을 무시한 의자왕의 어리석음이라 보지 않고, 당에 대항해 자주외교노선을 취했다고 해석한 점이나, 흥수가 탄현을 지키라고 간언했으나 조정 대신들이 오히려 신라의 부대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공격하므로 탄현만 지키고 앉아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했다고 이해한 점 등은 당시 상황을 단순히 개개인의 도덕성 등에 의존하지 않고 사료를 보다 입체적으로 분석한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의자왕이나 조정 대신들이 사리사욕에 어두워 충신들의 간언을 무시하다가 망했다는 역사서의 기록은 당시 필법을 감안할 때 여러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주의해야 할 점은, 당시 기록을 무조건 승자 쪽의 편파적 기록이다, 정황으로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확대 해석해서도 안 될 것이다.
백제 멸망 당시와 부흥 운동, 그리고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의 발자취에 대해 성실하게 흥미롭게 기록한 책이고 이해하기도 쉽다.
저자가 쓴 다른 책을 읽어 볼 생각이다.
아쉬웠던 점은 책에 실린 사진들이 너무 작다는 것과 내 한자 실력이 딸려서 정확한 이해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확실히 역사서를 읽으려면 한자와 유교, 불교에 대한 지식은 필수다.
좀 더 공부를 해서 보다 깊은 독서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