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
국립부여박물관 / 통천문화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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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3000원 밖에 안 되는 아주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정말 알차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했는데 알라딘에서 리뷰를 쓸 수 있어서 기쁘다.
이런 책까지 구비해 놓은 걸 보면 인터넷 서점의 위력이라는 게 정말 대단하다.
이런 가볍고 저렴한 양질의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사진도 훌륭하고 내용은 더더욱 훌륭하다.
집필자들은 아마 박물관의 학예사들일 것 같은데 박물관에서 출간된 책을 보면 대학교수 못지 않게 전문성이 느껴져 읽을 때마다 흐뭇하다.
얼마 전에 딱 한 번 수요일에 하는 큐레이터와의 대화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확실히 전문가는 설명의 깊이가 차원이 다르다는 걸 느끼고 감탄했다.
내가 중국 산수화에 관한 책 몇 권을 혼자 읽는 것보다 그 날 30분 정도 학예사에게 서서 설명을 들은 게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가능하면 매주 가고 싶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부여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충분히 느꼈다.
심지어 설명하던 안내원은 이 향로를 볼 때마다 오줌을 지린다고까지 과장어린 감상을 토로했었다.
나 역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굉장히 특이하고 섬세한 이 향로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졌고 무척 감탄했었다.
그렇지만 사실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독특하고 아름답긴 한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꽤 이상한 조합 같았다.
그런데 이런 디자인의 향로를 중국 박물관에서 보고 하나의 패턴화 된 양식이라는 걸 알게 됐다.
박산 향로라는 것인데 얼핏 보기에 중국에서 내가 본 디자인과 백제금동대향로가 거의 똑같았다.
그래서 대체 이 박산 향로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고 어디서 유래됐는지 더욱 궁금증이 일었고 이번에 박물관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구입하게 됐다. 

박산 향로는 세 부분으로 구성이 된다.
바다를 상징하는 바닥과 용의 형태를 갖춘 몸체 부분, 그리고 삼신산을 표현한 산봉우리 모양의 덮개다.
책에서 부분 사진을 찍어서 각 모형들과 새겨져 있는 인물들을 자세히 보여준다.
다섯 명의 악사들이 다섯 개의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모습도 사진을 보고 비로소 구분했다.
한나라 때 유행했던 도교풍의 신선 사상이 불교와 조화를 이룬 형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백제향로 외에는 이런 디자인의 향로는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이국적이고 독특한 매력이 느껴진다.
이 향로는 부여의 백제왕 고분군이 있던 능사리 절터에서 발견됐다.
같이 발견된 창왕명석조사리함은 역사 스페셜 같은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정확하게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해 준 유물이기고 하다고 한다.
왕릉을 지키고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왕과 누이가 시주한 기원 사찰로 보고 있다.
백제가 망하면서 급하게 이 향로를 묻은 것이 90년대 발굴 조사를 통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완벽한 형태로 발굴됐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는 얘기를 학예사에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올 봄에 부여에 놀러 가서 박물관도 보고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부소산성 등을 둘러 봤던 게 큰 도움이 됐다.
역시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보는 게 현장감이 있다.
책으로 보는 것과는 또다른 강렬한 느낌을 준다.
능사리 절터에서 발견된 두 유물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박물관에서 나오는 다른 책들도 많이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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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 그 위대한 도전의 역사 - 노벨 생리.의학상으로 보는 질병과 의학의 투쟁사 메디컬 사이언스 4
예병일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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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내용이 너무 평이하다.
약간의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이런 과학 서적은 국내 필자의 책보다 번역책의 수준이 훨씬 높다.
당장 의학의 역사만 해도 캐나다 사람이 집필한 <의학의 역사>가 훨씬 낫다.
검증된 책만 번역이 되기 때문일까?
무시무시한 표지나 위압감을 주는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무척 평이하고, 의학적인 사실 외에 저자가 문제제기를 하거나 논평한 부분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볍게 화두를 던지는 정도지 책으로 엮기에는 수준이 너무 낮다.
국내에서는 드물게 의학사를 연구하는 분이라고 하는데 전문적인 필력을 갖기에는 아직은 내공이 더 많이 쌓여야 할 것 같다. 

부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 책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노벨상의 교양을 읽는다>라는 책에서 보면 부적절하게 수여되서 상의 권위를 깍아먹는 경우가 많이 등장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적어도 생리의학상 부분에서는 의학 발전에 공헌한 이들에게 적절하게 수여되어 훌륭한 촉매제가 됐던 것 같다.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볼 생각이다.
어떤 업적이 몇 년도에 노벨상을 받았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서 현대 의학에 획을 그은 훌륭한 발견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런 과학적 발견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세계적인 과학자들은 범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머리를 가진 천재들이자 놀랄 만큼 창의적이고 성실한 사람들 같다.
교과서에 나올 정도의,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정립한 왓슨이나 크릭 등의 업적을 접할 때면 그저 감탄하는 수 밖에 없다.
이들이 발견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있는 나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그들이 밝히고자 했던 진리보다도 누가 스승보다 먼저 상읕 탔다더라, 누구는 운이 좋아서 발견을 했다더라 같은 가쉽거리가 흥미로우니, 약간의 자괴감마저 든다.
정말 세상은 평범한 이들이 그럭저럭 꾸려 가고 있지만 혁신과 창조, 진보는 소수의 천재들에 의해 이끌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교과서에서 무조건 암기하던 다양한 질병과 근본원리들이 일화들과 더불어 쉽게 설명돼서 신선하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쉬웠다.
이를테면 말라리아가 이탈리아어로 나쁜 공기라는 뜻이라는 걸 알게 되면 병에 대해 더 친근감을 갖고 접할 수 있다.
과거에는 공기에 의해 감염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미생물의 발견은 19세기 파스퇴르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으니 당연한 발상이다.
지금도 완치는 어렵고 열대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인 만큼 약이 발견되기 전에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학질로 알려졌다는 걸 보면 과거에도 풍토병처럼 있었던 모양이다.
뉴스후 같은 프로그램에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모기장이 없어 말라리아에 걸리고 또 치료제가 없어서 죽어간다는 슬픈 소식을 자주 접하는데 이렇게 질환의 생활사와 치료약이 나왔는데도 돈이 없어 죽어 간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깝다.
천연두나 홍역 같은 바이러스 질환들은 예방접종으로 유아기 사망률을 극적으로 낮출 수 있게 됐다.
결핵 예방접종을 왜 BCG 라고 하는 줄도 알게 됐다. 
발견자 두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같은 예로 나병도 환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 위해 균을 발견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 부른다고 한다.
교과서가 아닌 인문학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잔잔한 재미들이다. 

뒷부분은 생명 복제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이미 인간 유전자를 박테리아 등에 삽입하여 인슐린을 만들어 내는 만큼 실제 환자들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는데도 무조건 윤리적인 측면에서 거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시험관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신에 대한 도전 운운하면서 시끄러웠지만 지금은 불임 부부에게 희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아직은 생명복제 기술이 완벽한 개체를 만들어 낼 만큼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고 당연히 윤리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유전병이나 불치병에 걸린 불행한 환자들을 생각한다면 배아 세포나 줄기 세포에 대한 연구는 더 개방적인 쪽으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팔이 잘라지면 복제 인간을 만들어 내서 팔만 이식하는 식의 공상과학적인 얘기는 현재 기술로는 황당무계한 일이니 지나친 경계는 기술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
하여튼 유전 기술은 과거에 비하면 깜짝 놀랄 만큼 극적인 발전을 계속 하고 있어서 생명에 대한 이 놀라운 신비가 과연 얼마나 밝혀지게 될지 흥미진진 하다.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 차이가 겨우 1.3% 에 불과하다던가, 인간 유전자 일부를 선충 유전자에 삽입하여 세포 분열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등의 이야기를 보면 결국 생명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는 동일하고 인간이 모든 자연계의 최고 지배자가 아니라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 자체가 하나의 형제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도킨스의 말대로 우리가 선충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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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생활사 1 조선시대 생활사 1
한국고문서학회 지음 / 역사비평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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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우연히 서가를 뒤지다가 발견한 책이다.
고문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생활사를 재현했다는 점에서 일단 믿음이 갔다.
여러 필자들이 나눠서 작업을 한 탓에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성은 부족하지만 자료가 믿음직해서인지 신뢰가 갔다.
기왕이면 여태까지의 성과물을 가지고 한 두 사람의 필자가 전체를 조망하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알라딘에서 검색을 해 봤더니 2권도 나왔다.
집집마다 전해져 오는 고문서들이 많이 번역되서 보다 구체적인 조선시대 일상이 재현되길 기대한다. 

여러 책에서 확인한 바지만, 아무래도 내가 여자이다 보니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가 가장 궁금하다.
익히 알려진대로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게 완전히 종속된 시기는 유교 규범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내제화된 18세기 무렵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명나라가 망한 후 소중화 의식이 하늘을 찌르면서 삼종지도 등의 유교적 여성 덕목이 사회 전체에 퍼졌던 것 같다.
신사임당이 친정에서 율곡 이이를 낳고 일곱 살 때까지 강릉에서 아이를 키웠다는 게 옛날에는 잘 믿기지 않았는데 이 때만 해도 임진왜란 전이니 남귀여가혼이라는 풍습이 남아 있을 때가 아닌가.
노동력이 중요한 사회였던 만큼 신부를 맞이하려면 사위가 처가에서 어느 정도 일을 해 줘야 했을 것이다.
김유정의 <봄봄>에 잘 묘사된 것처럼 말이다.
사위 역시 처가에서 첫 아이를 키울 동안 봉사하는 대신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었을 것 같다.
당연히 아들이 없더라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혈연 관계를 더 중시하여 딸의 자손인 외손자가 제사를 받들고 재산도 물려받았다.
아들이 없을 경우 문중에서 양자를 들이는 게 아니라, 직계 혈통인 외손자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이니 어찌 보면 이게 훨씬 더 합리적이고 정리에도 맞다.
고려 시대만 해도 아들딸 구분 없이 출생 순서에 따라 족보에 기재하고 재산도 당연히 균등상속 됐으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적장자에게 모든 권한이 상속됐다.
이 점은 후기로 갈수록 재산 증식이 어려웠기 때문에 큰아들에게 밀어 줌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부모가 공양받을 수 있었다는 해석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 나온 바대로 규범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또 바뀐 사회 환경에 문화나 예의범절도 적응해 나가야 하니 여성의 지위 역시 과거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평등한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글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평민이나 노비층의 생활상도 흥미로웠다.
한문을 알지 못했던 일반 백성들로써는 복잡다단한 법률이나 규범 등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고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더더욱 한글이 널리 쓰이지 못했을 것 같다.
한문을 아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기 때문에 양반층으로서는 굳이 한글을 보급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에게까지 문자를 깨우치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발상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혁명적일 뿐더러, 양반들과 특권을 다툴 필요가 없는, 양반이든 평민이든 다 내 백성이라고 생각한 절대 군주의 넓은 포용력이 느껴진다.
이두가 오랜 세월 동안 한문과 더불어 우리말과 한자의 조화를 도운 만큼 시간이 갈수록 한문화 되어 한글이 발명된 이후에도 굳이 한글로 대치될 필요없이 계속해서 한자와 함께 쓰였다고 한다.
단순히 글자만 만들면 끝이 아니라 사용 환경을 조성하려면 많은 사회적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노비의 경우 一賤卽賤 이라는 법에 따라 한쪽만 천민이어도 자손은 무조건 천민이 된다.
사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신분 내에서만 혼인을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이 점이 이해가 잘 안 갔다.
여종이 양반의 첩이 되는 경우 그 자식은 노비가 된다는 종모법 정도만 이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 따르면 노비와 양민간의 결혼도 흔했다고 한다.
특히 권세있는 양반의 노비 같은 경우 혼인을 하면 자손이 곧 노비가 되서 재산이 증식하기 때문에 일반 양민과 결혼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신분내 혼인은 특권을 지켜야 하는 양반층에서만 폐쇄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외의 계층은 반드시 족내혼을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노비와 결혼한 양민의 경우 주인집에 경제력을 의존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더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아 호적도 주인에게 편재되고 결과적으로 주인의 세력 범위를 넓히는데 이용됐다.
또 주인의 임의대로 처분됐기 때문에 한 가족을 이루고 살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임란 당시의 기록을 남긴 오희문의 쇄미록을 보면 70이 넘어서 죽은 여종 이야기가 나온다.
전란 중이라 주인집도 먹을 게 없어서 늙어가는 여종을 병구완 하기 힘든 게 당연했겠지만 식량 축내기 전에 빨리 죽어야 한다는 주인의 일기는 한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한 당시 노비 계층의 비참함이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나 씁쓸했다.
70이 넘게 집에서 부렸던 노비의 죽음에 대한 상념이 애완견의 죽음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대출을 못하고 종합자료실에서 읽은 책이라 꼼꼼하게 보지는 못했다.
2권은 정식으로 대출을 해서 제대로 읽어 보고 싶다.
더불어 느낀 점은 역시 한자에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틈틈히 책에 나온 한자들을 정리하면서 그래도 기본적인 글자는 익히고 있지만 이런 옛 기록들을 보기에는 아직은 너무 일천하다.
책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한자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중국에서도 구어체를 글자로 쉽게 표현하기 위해 백화체를 쓴다고 하니 한문을 자유롭게 구사했던 조선시대 양반층의 문자 생활 수준은 정말 상당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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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 선생님들의 이유 있는 도서관 여행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 지음 / 우리교육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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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나 디자인, 사진 등은 무척 잘 구성되어 있다.
특히 사진은 전문 사진 작가가 아닌, 함께 간 교사가 찍었다고 하는데 색감이나 구도 등이 참 괜찮다.
반면 글 수준은 아무래도 전공자도 아니고 직업적인 에세이스트도 아닌 만큼, 기대치에 많이 못 미치는 편이다.
특히 유럽 도서관의 시스템이나 운영 실태 등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었던 독자로서는 많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이건 차라리 유럽 도서관 기행, 혹은 그냥 여행기 정도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도서관 사서들이 맘먹고 유럽 도서관 시찰을 한 거라 기대한다면 얻는 정보가 너무 피상적이고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정부에서 도서관 연수를 보낸 것도 아니고 개인들이 알음알음 얻은 정보로 자기 돈 들여서 여행간 것인만큼 고급 정보를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을 것이다.
사서들이 직접 가서 본 유럽 도서관, 이런 식으로 홍보하기엔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또 필자들의 문장력이나 주제에 대한 이해 정도도 상당히 피상적이라 기대에 못 미친다.
사진이 많이 실려 있어 300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이지만 한 시간 만에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것에 비하면 스웨덴 복지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냈던 <스웨덴 사회 복지의 실제>는 얼마나 전문적이고 훌륭한가!
그 책 역시 공무원 몇 명이 스웨덴 구청 등을 방문해 복지 정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견학한 기록인데 정부의 지원을 받아 협력 요청이 되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필자들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기왕이면 도서관에 대해서도 유럽 도서관과 한국 도서관의 운영 실태를 비교 분석한 제대로 된 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책 내용에 대해 잠깐 얘기하자면...
미국 도서관은 맥도널드 체인점 보다 더 많다고 한다.
숫자만 가지고는 인구나 국토 면적 등이 다르니 단순 비교가 어려울텐데, 맥도널드 체인점 보다 많다고 하니까 딱 감이 온다.
주위를 둘러보면 맥도널드 체인점은 동네마다 하나씩 있다.
여기보다 많다면 이건 정말 많은 거다.
한 동에 하나씩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내가 거주하는 안산시에는 도서관이 다섯 군데 있고 있고 대부분의 도시도 비슷할 것 같다.
한 구에 하나 정도?
예전에 읽었던 <우리야스 도서관 이야기>에서도 일본 도서관 역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마다 하나씩 분포하도록 분관들을 많이 만든다고 들었다.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거리마다 도서관이 하나씩 있다면!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도서관의 열혈 애용자인 내 입장에서 보면 한국 도서관도 정말 많이 발전하고 있고, 서비스도 잘 되어 있다.
어지간한 신간은 거의 실시간으로 구입해 주고 장서 분량도 상당히 다양해서 원하는 책을 못 찾은 적은 거의 없다.
또 요즘에는 대출 가능 시간을 밤 10시까지 늘려서 직장인도 퇴근 후에 빌릴 수 있게끔 배려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에 나온 것처럼 도서관 수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다.
다른 책에서 본 것처럼 대학 도서관을 지역 주민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요즘은 그래도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도서관은 책 읽는 곳이라기 보다는, 공부하는 독서실이다.
열람실이 시험 준비생들에게 점령당한지 오래다.
새벽부터 줄서기를 하지 않으면 열람실에서 책 읽기란 불가능하다.
다행히 요즘에는 종합자료실에서는 개인 공부를 금지하는 곳이 늘어서 적어도 자료실에서 만큼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 과천에 있는 정보과학도서관의 경우는 아예 열람실을 없애고 외국 도서관처럼 종합자료실에서 편안하게 책을 볼 수 있도록 쇼파 같은 편의시설들을 들여 놨다.
사진에서만 보던 환상적인 독서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같은 취업 전쟁터에서 수험생들 보고 시험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결국은 도서관 수를 늘려서 공간을 확보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책에 나온 도서관 사진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단순히 책을 서가에 배치하는 게 아니라 마치 서점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는 욕구가 생기도록 진열해 놨다.
철제 책꽂이 등을 이용해 사방에서 전시된 책을 볼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도서관이 서점처럼 책의 배치나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쓴다면 이용객들이 훨씬 늘 것 같다.
또 독서공간도 지금처럼 단순히 책상과 의자만 있는 게 아니라 푹신한 소파나 독서등 같은 걸 구비해 놓으면 더 많은 사람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전문 사서들을 늘리는 것도 중요한 문제 같다. 
외국 도서관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부러웠던 게 바로 이 사서들의 역할이다.
우리나라 도서관에서 사서는 단순히 책을 빌려 주고 반납하는 단순 업무가 주를 이룬다.
아르바이트생이 해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수가 너무 부족해서 단순 대출 업무를 하기에도 바쁘다고 하는데 사서 인력들이 늘어나서 이용객이 원하는 주제를 말했을 때 추천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 사서들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자면, 책을 추천해 주기는 커녕, 책 이름과 대출 기호까지 말하고 찾아 달라고 해도 자리에 없으면 없는 거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책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학교 과제를 도서관에서 사서의 도움을 받아 해결한다고 한다.
방과 후 학습이 학원이 아닌 도서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내용은 미국 도서관 책에서 여러 번 봤었다.
이래서 선진국에는 학원이 한국처럼 기승을 부리지 않는 건가?
아이들이 학교가 파한 후 학원 대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또 도서관에서 얼마든지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 과제를 사서들의 도움을 받아 멋지게 해낼 수 있다면!
사교육 대신 공교육이 신뢰받을 수 있는 사회야 말로 진짜 경쟁력 있는 보다 평등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정보 이용의 공평성이야 말로 평등한 사회의 척도가 될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접근성이 향상되긴 했지만 고급 정보는 아무래도 책에서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이 시민들의 정보 이용 장소가 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획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국 도서관에 대한 책에서 아주 인상적인 예를 본 적이 있다.
9.11 테러가 났을 때 뉴욕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기획을 통해 지역 주민들에게 여러가지 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라 지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서관은 나날히 발전하고 있고 시민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에서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을 더 자주, 더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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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 우리의 두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외 지음, 신상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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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요즘의 화제는 두뇌인 것 같다.
쏟아져 나오는 심리학 책들도 결론적으로는 인간의 의식 상태를 인문학적으로 탐구한 것이고 신경학이나 뇌과학에 관한 책도 많이 나온다.
21세기의 화두가 아닐까 싶다.
오스트리아 출신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에릭 켄델의 자서전에서 라마찬드란이 언급된 걸 보고 이 책을 고르게 됐다.
기억이라는 이 놀라운 정신 활동이 추상적인 연역이 아닌, 세포 수준에서 완벽하게 설명되어짐을 보고 무척 흥분했고 인간의 두뇌로 그 관심이 확장되어 관련 서적을 읽어 보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저자는 임상의인 만큼 올리버 색스처럼 특별한 사례를 들어 전체를 설명하려고 하지, 켄델처럼 환원주의적으로 전체를 일관하는 일반론을 제시하지 못한다.
아마 두뇌 연구는 타 분야에 비하면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 켄델의 기억 연구처럼 모든 기능을 섬세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사례들로부터 일반론을 조심스럽게 추론하는 수준이라 가설이 많고 이 책 역시 사유실험이 많으며 저자 개인의 의견이 많이 담겨져 있다.
켄델의 책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학구적이고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객관적인 서술 위주였던 데 비해 이 책은 앞으로의 연구 방향이나 현재까지의 성과에 대해 저자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지루한 부분도 있었고 의문스러운 부분도 많지만 뇌과학이 좀 더 발달한다면 내가 70대 노인이 될 때 쯤이면 두뇌의 여러 작용들, 특히 의식마저도 세포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정말 그 때에도 여전히 우리는 육체와 분리된 인간만의 특별한 비물질적 실체 영혼을 믿으며 죽고 나면 그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 영원한 삶을 산다는 허구적인 교리를 믿고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종교적 심성은 측두엽에 배선된 일종의 본능이기 때문에 종교가 없어질 날은 아마 오지 않겠으나 두뇌 과학이 지금보다 더 많이 진보한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형태로 절대자와 피조물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까?
과학에 대해 알면 알수록, 특히 이런 신경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록 기독교적인 설명 체계는 너무나 편협하고 지엽적이며 진부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 능력과 역할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힘을 얻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강한 반발 때문에 더더욱 과학과 배치되는 교리에 대해 거부감을 깊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지만.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를 읽고 나서 대뇌에 표상된 신체 이미지가 영원 불변하지 않고 변화가 생기면 48시간 내에 급격하게 수정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므로 요즘에는 부러진 다리를 즉시 수술하고 최대한 빨리 운동을 시킨다고 한다.
고정된 상태로 시간이 오래 되면 대뇌는 금방 다리에 대한 생각을 잊어 버리고 없는 걸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다리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다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환상 사지통이라는 게 있다.
워낙 신기한 현상이라 다른 책에서도 많이 언급이 됐었다.
솔직히 내 주변에서 접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실재적인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분명히 사지가 절단됐는데도 여전히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통증을 느낀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저자는 이것을 단순히 절단 부위 근처에 신경종 등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환상사지통을 없애기 위해서 계속 그 위로 절단을 해 가야 할 것이다) 뇌의 배선 시스템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아다시피 뇌에는 신체의 여러 부분이 배선되어 있다.
입과 손, 특히 엄지는 크게, 발과 몸통 등은 작게 할당된 우스꽝스러운 머리 지도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팔이 잘리면 팔을 담당하던 영역은 기능을 못하니까 주변에 있던 얼굴 영역이 침범한다.
그래서 얼굴을 자극하면 팔이 아프게 된다는 이론이다.
저자는 실제 환자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얼굴의 특정 부위에 환자의 잘려진 손가락들이 배선되어 턱을 만지면 둘째 손가락이 아프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재밌는 것은 이들의 팔다리가 멀쩡한 상태에서 갑자기 잘려 나가는 게 아니라 서서히 고통을 겪다가 마지막에 절단을 하기 때문에 절단 직전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고 한다.
저자는 가짜 손을 이용해 환자의 환지통을 없애 줬는데 일반적인 치료법은 아닌 것 같고 여전히 설명을 요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애착의 감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내 머리에서 저 사람이 나와 같다고 인지를 하면 즉 머리의 배선 시스템이 바뀌면 그의 고통이 실제로 내 고통처럼 느껴질만큼 신체가 반응한다.
허수아비 인형을 찌르는데 내가 통증을 느끼는 것도 다 이런 애착, 사랑 등의 감정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고대의 이런 저주들은 무슨 신령한 기운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그 인형이 나와 같다는 것을 내가 눈으로 봐고 인지를 해야 바늘이 인형을 찌르면 내가 통증을 느낄 것이다.
만약 내가 저주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즉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장희빈처럼 몰래 한다면 당사자에게 아무 영향도 못 미치지 않겠는가.
내가 눈으로 보고 저 대상물이 나라고 머리에서 인식을 해야 감정도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저주는 뇌 시스템과는 좀 다른 맥락이다.
심신 치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고전적 조건화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카린과 cyclophosphamide를 동시에 먹은 쥐는 부작용으로 구토를 한다.
쥐는 둘을 연관시켜 다음에는 사카린만 줘도 구토할까 봐 거부한다.
그런데 이 cyclophosphamide는 면역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감염을 잘 일으킨다.
사카린만 먹어도 이미 머리 속 회로에 입력이 되어 있는 쥐의 면역 시스템은 기능이 저하되어 쉽게 감염된다.
사카린은 전혀 신체에 무해한데도 단지 기존의 경험 때문에 면역 시스템이 스스로 손상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설명하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신에 의지한다거나 하면 즉 심리치료를 하면 면역력이 상승되어 병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논리대로 한다면 환자는 기존에 심리적 의존물과 면역 체계에 대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조건화가 일어날 것이다.
또 무엇보다 단지 마음을 편하게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악성 종양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고 정말 이것이 그 효과를 인정받으려면 수많은 다른 환자들에게서도 똑같은 치유력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저자도 강조한 바지만 근본적으로는 심신치료가 약리작용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도나 민간요법, 무슨 기 치료니 이런 것들이 보편성을 획득하려면 지금처럼 개인적인 체험담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엄격한 실험을 거쳐 그 객관성을 증명해야 할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을 섬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체계가 정립되야 할 것이다. 

역시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의식이었다.
나는 늘 죽음이 두렵고 죽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가 큰 고민거리였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그렇다면 잠자는 것은?
잘 때도 생각을 못하지 않는가.
혼수 상태에 빠진 사람은?
의식이 없는데 즉 나를 스스로 인지할 수 없는데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죽은 후처럼 존재하지 않았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죽음도 전생처럼 그저 의식이 사라지고 나면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그런 無의 상태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의식은 두뇌의 고급스런 작용 중 하나이고 생명이 다하면 즉 내 몸의 생명 활동이 멈추게 되면 마찬가지로 뇌의 기능도 정지되므로 의식 작용도 사라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워낙 근본적인 문제이므로 앞으로 더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하여튼 지금까지는 내가 나라는 인식을 가지려면 (그것이 곧 의식인데) 저자의 말대로 세 가지 조선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입력의 비가역성.
저자는 이 책에서 누누히 두뇌의 인지 기능이 절대적이고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매우 가변적이고 수많은 정보를 통합해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고 설명했다.
즉 내가 책을 보는 것도 단지 글씨가 내 머릿속에 투영되어 카메라처럼 인식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감각 정보들을 수용해 무려 30여 가지의 시각 영역들을 통과한 후 하나의 글씨로 인식하고 보게 된다.
이 때 한 번 인식이 되면 글씨가 될 수도 있고 지렁이가 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그 다음부터는 계속 글씨로 확실하게 인식을 하여 개체의 삶에 안정성을 기한다.
둘째 출력의 유연성.
이것은 일종의 자유의지와도 같은데 나는 자동 기계가 아니라 정보를 입수하여 판단한 후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저자는 그 반증으로 벌의 8자춤을 든다.
벌은 먹이 있는 곳을 알려 주기 위해 8자 춤을 추면서 이동하는데 벌에게 다른 선택을 할 능력이 없다.
오직 벌은 단 한가지 행동, 8자 춤만 출 수 있다.
벌의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을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역시 무언가가 몸에 닿으면 일단 잎을 닫아 버린다.
끈끈기주걱은 닫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생존 본능에 의한 여러 생명체들의 행위는 의식 활동이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단기 기억이 가능해야 한다.
어쩌면 기억이야 말로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일텐데 기억이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 정체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을 잃은 신경병 환자들의 예는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인격의 황폐화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의식이란 혹은 자아란 수많은 정보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일관된 통합체를 만들려는 고도의 두뇌 기능이라 정의하겠고 육체가 죽는다면 마찬가지로 의식 기능도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아직까지는 창조주나 절대자에 대해 단정을 내릴 수 없으나 적어도 인간이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이고 육체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기능을 갖는 비물질적인 영혼이 있으며 그것이 구원을 얻어 영생을 산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사변적인 얘기들이 많아 지루할 때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재밌게 읽었고 두뇌 과학이 좀 더 발전해 이 신비스러운 영역이 많이 알려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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