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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서 - 노벨상을 수상한 위대한 천재 과학자 에릭 캔델의 삶을 통해 보는 뇌와 기억의 과학
에릭 R. 캔델 지음, 전대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재밌게 읽고 있는 책이다.
500페이지 정도 되는데 앞부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소설처럼 기술해서 정말 재밌게 읽었고 수정의 밤에 가해진 나치의 테러 부분에서는 눈시울을 붉혔다.
자서전과 전공 내용이 잘 어울어진 책이다.
2000년도에 기억의 과정을 세포 수준으로 밝혀 내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유대인이라는 민족성과 문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는 워낙 유대인들이 큰 권력을 갖고 있고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유대인을 대단시 하고 부러워 하지만 유럽에서 유대인의 위상은 상당히 낮을 뿐더러 일종의 집단적인 시기 질투를 받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자의 표현대로 세계의 수도와도 같았던 최고의 지성과 문화를 자랑하던 빈의 시민들이 어떻게 한 순간에 한 미치광이 독재자의 충동질에 놀아나 끔찍한 집단 폭력자로 바뀌었겠는가.
그러고 보면 미국은 이민자들에게 비교적 많은 기회를 주고 열려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신생 국가였는데도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다.
제국의 수도였던 빈에 대한 향수는 오늘날의 몰락과 비교되어 안타깝고 애잔했다.
또 우상시 했던 형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어려워진 가정 경제를 돕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인쇄공으로 진로를 바꾼 점도 엄청난 저자의 성공과 대비되어 무척이나 슬펐다.
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장남 컴플렉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막내였던 저자는 쉬는 날 하루 없이 칫솔 공장과 좌판대에서 일한 부모와,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형의 희생 덕분에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고, 뉴욕대에서 의학 공부를 마친다.
거기서 만난 드니스와 결혼하여 정신과 수련을 받는데 돈 보다는 지적 성취를 격려하는 아내의 후원에 힘입어 진료소를 여는 대신 실험실에 들어가 기억의 과정을 세포 수준에서 밝히는 연구에 돌입한다.
마치 하나의 잘 쓰여진 자서전 같으면서도 중간 중간에 자신의 연구 과정과 성과를 생물학 교과서처럼 논리정연 하게 밝힌다.
어찌 보면 학습이란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하느냐의 문제인 만큼 나도 기억에 대해 관심이 많다.
특히 어빙하우스가 제시한 망각 곡선을 실제 학습에 이용해 효율성을 높힐 수 있을지 궁금하다.
간단히 말해서 시간차를 두고 반복할수록 장기 기억으로 저장이 된다는 논리인데 저자는 이것을 세포 수준에서 증명해 낸다.
단순히 그럴 것이다라고 관념적으로 추론하는 게 아니라 에너지 대사 과정을 분자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듯 단기 기억이 어떻게 장기 기억으로 변하게 되는지를 이온 채널과 cAMP 등의 분자를 가지고 설명한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상당히 지루하고 조금은 어려웠다.
맨 처음 시작 단계에서 이온 채널이나 활동 전위 같은 얘기는 학교 다닐 때 워낙 많이 들었던 얘기라 쉽게 이해가 갔는데 기억이라는 세부적인 단계로 들어가니 상당히 복잡하고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았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단기 기억은 시냅스의 세기가 증가하는 것이고 장기 기억은 구조 변화가 생겨 시냅스 말단이 늘어나는 것이다.
또 이 때 늘어난 말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CPEB라는 단백질이 prion처럼 DNA의 전사가 없이도 혼자서 자가증식을 한다.
단기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바뀔 때 신호가 되는 전달 물질이 바로 serotonin 이다.
한 권의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논리정연하게 쓰여진 기억의 과정을 읽으면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오랜 관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고 인간이 영혼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는 것도 그저 인간 위주의 자아도취에 불과함을 느꼈다.
정말 생물학에 대해 더 많은 진보가 이뤄진다면 기억을 강화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물질을 집어 넣는 시술도 이뤄지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머리 좋아지는 약이라고 ADHD 때 쓰는 dopamin을 먹이는 강남 엄마들도 있다고 하는데 당뇨 환자에게 인슐린을 투여하듯 모든 기억의 메커니즘이 밝혀져서 실제로 우리가 학습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인슐인 얘기가 잠깐 나오는데 요즘처럼 대량 생산이 가능한 이유는, DNA 재조합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인슐린을 생산하는 유전자를 박테리아처럼 분열이 빠른 균류의 핵에 끼워 넣고 배양하면 무한한 양의 인슐린을 얻을 수 있다.
정말 놀라운 생명공학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워낙 인슐린이 보편화 되서 아무 생각없이 쓰고 있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소름끼칠 정도로 대단한 혁명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몸에서 만들어 내는 호르몬을 인간이 직접 생산해 낸다는 말인가?
이렇게 최첨단의 과학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신을 찾고 정신이나 관념 운운하면서 음양오행설, 기 같은 말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게 통한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칼 세이건이 한탄한 대로 우리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너무나 많이 누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현대의 과학 연구가 한 사람의 독자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함을 새삼 느낀 것이, 책에 굉장히 많은 동료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노벨상을 받은 사람도 많아 미국이 얼마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 과학적 발전이 단지 알고자 하는 욕구, 궁금해 하는 호기심 같은 순수한 동기 뿐 아니라, 동료 집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남보다 잘나고 싶은 욕망 등이 합쳐져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수한 집단에 속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자극받는 것은 창의적인 연구 수행에 필수인 것 같다.
때이른 죽음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절절히 묻어난다.
천상 과학자일 수 밖에 없는 저자의 우직함과 성실함도 잘 묘사되어 있다.
기억이 단순히 외우는 어떤 과정이 아니라 뇌에서 일어나는 정교한 작업 시스템임을 새롭게 배웠고 내 학습에 적용해 보고 싶다.
노벨상에 대한 목마름이 워낙 큰 사회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반작용으로 거부감마저 들었는데 역시 세계적인 석학이나 대가는 일반인과는 다른 위대함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더불어 워낙 글을 잘 써서 과학자란 단순히 실험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 결과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남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문주의자 못지 않게 글 솜씨가 훌륭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너무 재밌게 보고 있어서 다음에 노벨상 관련 서적을 추가로 읽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