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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주실록 - 화려한 이름 아래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신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왕비를 넘어서 이제는 공주 시대로!
새로운 소재는 발굴하기 나름인가 보다.
이덕일씨처럼 지나치게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워낙 사료가 적다 보니 아무래도 상상력을 가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사료가 남아있는 일곱 명의 대표 공주를 선별해 많은 추론을 거쳐 글을 풀어 나간다.
실록에 실린 기사들이다 보니 불행한 삶을 산 공주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효명옹주 이야기는 저주 사건과 얽혀서 상당히 의아하고 미심쩍었다.
조귀인은 나중에 사사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단순히 저주를 했다는 이유로 죽었단 말인가?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 더 친절하게 설명해 줬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운 부분이다.
인조가 병이 많아서 강빈이 저주하고 인목대비가 저주하고 이래저래 다른 사람들한테 저주받아서 그렇다고 덮어 씌운 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지나치게 예민해졌던 건 아닐까?
인목대비가 쓴 민우시라는 시와 글씨를 봤는데 정자체로 아주 힘있게 바르게 쓰여진 글씨라 보기 좋았다.
서궁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쓴 글씨라 더 애잔한 것 같다.
딸인 정명공주도 어머니를 닮아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남이 장군의 할머니인 태종의 막내딸 정선공주도 나온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국상이 연이어 나는 바람에 몇 년 간 부부관계를 못하고 그 사이에 남편의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옮겨 갔다고 설명하는데 조선 시대 양반가의 분위기를 알 만 하다.
스물 한 살의 너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 세종마저 매부의 무심함을 탓해 귀양을 보냈다고 하니, 결혼생활이 얼마나 불행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사극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화완옹주 이야기도 나온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있었기 때문에 왕실의 이야기가 훨씬 더 인간적이고 풍부해지는 것 같다.
보통 사도세자와 정조의 입장에서 혜경궁 홍씨나 화완옹주 등을 적대적으로 서술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옹주가 주인공이서인지 20대 청상과부가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지낸 남다른 이력의 옹주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특히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 세손은 조정의 일을 알 필요가 없다고 한 홍인한의 삼불가지론에 대해 혜경궁 홍씨의 입장에 서서 영조의 화를 무마하기 위한 소리였다고 변명을 해 준 점이 의외였다.
요즘 나온 정조의 편지 때문에 분위기가 반전됐나?
아니면 이덕일 류의 음모설이 판을 칠 때 분위기 탓에 말을 못하다가 이제서야 제 목소리를 내는 건가?
하여튼 화완옹주의 입장에서 보면 젊은 나이에 남편 잃고 아버지가 하나 남은 딸이라고 금이야 옥이야 하는데 오빠 사도세자는 미움을 받으니 그 질투심을 받을까 봐 마음 졸이며 살았을 것이다.
오빠 비위 맞추느라 임금에게 대궐도 이어하게 만들고 온양 행궁도 성사시키며 한중록에 나온대로 나름 애를 쓰고 숨죽이며 살았고 나중에는 조카 정조에게도 공을 들였는데 결과는 귀양에다 작호도 삭탈당해 정처라 불리운 걸 보면 어찌 보면 안타깝다.
마지막에는 비운의 마지막 황실 여인인 덕혜옹주가 등장한다.
좀 아이러니 한 것은 늘그막에 정비 대신 마음을 의지하고 궁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한 엄귀비가 죽었는데 바로 그 때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하여 죽은지 열 달 만에 덕혜옹주가 태어났다는 게 참 그렇다.
책에서는 고종이 허한 마음을 다른 여인에게서 달랬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는데 앞서 나온 태종의 딸 정선공주는 아버지 어머니 3년상을 연달아 치루느라 몇 년을 부부관계를 못하고 덕분에 남편이 첩까지 얻는 게 유교에서 말하는 효이자 예라면 왕은 부인이 죽은 날에 아이를 얻은 것도 경사라 표현하는 걸 보면 확실히 유교의 인의는 차별적이고 이런 걸 두고 왕은 무치라고 하는 모양이다.
귀인 엄씨가 죽은 후로 덕혜옹주의 어머니인 복녕당 이씨를 비롯해 삼축당 김씨, 광화당 이씨, 보현당 등등 여러 궁녀들이 고종과 관계를 하고 아이를 낳는다.
망국의 왕이 60 넘어서 한 일 치고는 과히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너무 요즘적인 시각인가?
순치제의 섭정인 도르곤에게 시집간 효종의 양녀 의순공주에 관한 얘기는 상당히 슬프다.
청에서 공녀를 바치라고 하자 사대부들은 모두 딸을 숨기기에 여념이 없는데 청에서는 조선의 복종하는 태도를 보기 위해 더욱 강압적으로 나오고 심지어 공주를 시집 보내라고 한다.
도르곤이라면 당시 13세의 순치제를 대신하여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1인자인데 그가 아내가 죽자 조선에서 비를 들이려고 한다.
어찌 보면 원나라 때 기황후처럼 출세의 찬스가 될 수도 있는데 모두들 거부하는 걸 보면 당시 조선에서 청에 대한 생각이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고 의순공주가 과부가 되어 돌아왔을 때 화냥년으로 손가락질 받았을 뿐더러 그 아버지까지 딸을 팔아 먹었다고 비난받을 걸 보면 왜 그렇게 청에 가길 꺼려 했는지 이해가 된다.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딸을 시집 보낸다 할지라도 이미 조선사회에서는 정절을 잃은 것으로 간주되고 명분을 잃은 것이니 모든 사회적 위치마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청의 통역관으로 들어가 온갖 권세를 휘두르는 조선인에게 내가 섭정왕의 부인이 되어 청에 가면 너는 죽은 목숨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는 일화로 보면 이 여인의 베짱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 같고 얼굴 역시 실록에 나온대로 자못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녀도 혜경궁처럼 기구한 자신의 일생을 글로 남기면 보다 풍부한 역사를 얻을 수 있었을텐데!
도르곤은 조선인 왕비를 맞은지 5개월 만에 죽어 버리고 사후에는 모든 작호가 취소되는 바람에 그녀 역시 부하에게 다시 시집보내지나 그 역시 죽고 나자 청에서는 사신으로 온 아버지가 간청하자 고국으로 돌려 보내 준다.
황제가 죽자 따라 죽으라고 한 명나라 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다.
7년간 타국에서 마음 고생을 한 의순공주는 돌아와서도 화냥년으로 손가락질 받아가 스물 여덟의 젊은 나이로 자식 없이 세상을 떴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생이다.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이야깃거리가 풍부할 것 같다.
비교적 덜 알려진 공주들 이야기를 발굴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이제 사극도 한중록이나 장희빈 소재를 넘어서 보다 다양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