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셔윈 B. 뉴랜드 지음, 명희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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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죽음에 대한 에세이라고 할까? 
죽음의 진행 과정에 대한 의학적인 분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의학적인 내용도 있지만 그보다는 에세이 성격이 강하다.
가끔 이런 학자들을 볼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전문적으로 글쓰는 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닌데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문장과 전개를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에세이는 아무나 쓸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한데 하는 일이 특이하다고 해서 자기 일과 관련된 일을 휘갈겨 쓰는 게 에세이는 아니다.
자기 개인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일을 용감하게 출판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대학병원 의사로 활동하다가 은퇴 후 의학사를 가르치는 저자의 약력답게 그는 의학적인 면과 그 안에서 실제로 병과 싸우는 환자의 이야기를 잘 조화시켜 담았다.
동유럽 유대인 이민자의 자손이었던 저자는 96세까지 살다 간 할머니의 죽음을 옆에서 목격하면서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의사가 된 것도 그 때의 경험이 컸다고 한다.
의사들은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죽음 앞에서 선 환자들을 한 개인으로 대한다기 보다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하는 전문가이기 일쑤다.
알고자 하는 욕구, 병과 인체의 메커니즘을 풀고자 하는 의도가 오늘날의 의학 발전을 이뤘으나 그만큼 환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는 멀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인적 치료라는 슬로건이 등장한 배경에는 환자를 일종의 실험 대상으로 삼는 오늘날의 의학 풍토가 한 몫 했을 것이다.
한 때 의사도 직업인에 불과하므로 지나치게 높은 사명감과 연민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매일 죽어 나가는 환자들에게 지나치게 애정을 품다 보면 곧 지쳐 나가 떨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TV에 나오는 허준 같은 스타일의 의사는 일단 그가 명의냐 아니냐를 떠나서 모든 환자를 하나의 개인으로 대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여러 경험을 하면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비단 의사 뿐 아니라 모든 직업이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학교 선생님도 그렇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도 그렇고 사람을 대하는 직업인은 누구나 일 그 자체만이 아니라 상대하는 사람과의 관계맺음이 풍성할수록 직업으로서의 완성도도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전문화로 흐르는 의학계에 대한 대안으로 가정의 제도를 활성화시키자고 제안한다.
큰 병원, 최첨단 시스템을 원하는 환자들이 과연 일반의나 가정의를 얼마나 신뢰하고 자신의 몸을 맡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정의의 장점은 환자와 오랫동안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오기 때문에 큰 병원에서 그저 며칠 얼굴 잠깐 본 전문의와의 직업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환자 입장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마치 내 친척 누구가 아플 때 조언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항암치료처럼 치료 자체가 생명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경우 끝까지 치료를 할 것인지 아니면 존엄한 죽음을 맞을 것인지에 대해 현명한 조언을 할 수 있다.
사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환자에게 선택을 하라는 것은 (그것도 목숨이 달린 선택을!) 비현실적이고 잔인하지 않나 싶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중요시 되고 있으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 온 주치의가 있다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누구나처럼 나 역시 죽음이 두렵고 종교나 장례 문화가 발달한 이유도 바로 그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내세가 있을 거라는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생명의 끈을 놓겠는가?
그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고 저자의 말대로 자연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우리는 생명의 순환 고리 속에 놓여 있다.
앞의 생명들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날 수 있었고 생로병사라는 자연적인 과정을 거쳐 다시 사라져 줘야 또다른 생명이 태어나지 않겠는가?
몽테뉴처럼 끊임없이 죽음을 의식하고 사색하고 연습한다면 불시에 찾아오는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생명 연장에 대한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지만 한계가 있고 노화는 생명이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몇몇 환자들의 끔찍한 임종을 접하면서는 너무 무서워 가슴이 떨리기도 했다.
협십증으로 가슴이 옭죄어 오는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 뇌혈관이 터져 죽는 사람들, 칼에 찔려 저혈량 쇽으로 죽은 사람들 등등 병마에 의한 죽음은 어떤 죽음이든 평온하지 못하다.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갖고 평온한 죽음을 맞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할 최후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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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따뚜이 - 할인행사
브래드 버드 감독, 피터 오툴 외 목소리 / 브에나비스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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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 영화는 언제나 기대를 품게 한다.
애니메이션은 애들 영화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빠져 들게 됐다.
나는 기본적으로 픽사나 디즈니 영화처럼 정교한 애니메이션이 좋은데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다.
하여튼 이 영화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니모를 찾아서, 는 굉장히 재밌게 봤지만 사실 인크레더블은 DVD 로 봐서 그런지 집중을 못해서 별로였다.
이번 라따뚜이 역시 자전거 타면서 본 영화라 그 맛을 100% 다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사실 나는 쥐를 너무 싫어해서 쥐를 생각한다는 것만으로 끔찍하다. 
하지만 영화 속의 이 귀여운 생쥐를 누가 혐오하겠는가?
미키 마우스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요리에도 별 관심이 없다.
음식이란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하지 맛 그 자체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믿는 쪽이라 음식맛 보다는 차라리 식당의 분위기를 더 많이 따진다.
편안하게 앉아서 우아하게 식사할 수 있는 분위기, 친절한 써비스, 멋진 테이블 셋팅 이런 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요리하는 것도 안 좋아한다.
하지만 블로그에 올라오는 요리 과정이나 요리 관련 영화를 보면 그것 역시 하나의 예술임을 느끼게 된다.
특히 드라마 식객을 볼 때 김래원이 열연한 그 요리사 캐릭터에 완전 반했다.
최고의 맛을 찾아 자신의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고 아름답게 데코레이션을 하고 맛보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정성!
정말 진정한 요리사란 무엇인가를 보여 준 드라마였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 속의 귀여운 래미 역시 음식을 즐길 줄 알고 놀라운 미각을 가진 훌륭한 요리사다.
무엇이든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아, 갑자기 요리가 먹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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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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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소설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작년 10월 쯤에 읽고 다시 꺼내든 책이다.
<프라하의 봄>으로 번역된 영화를 먼저 봤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쉬가 너무 인상적이라 읽게 됐던 책이다.
그런데 정작 책은, 영화의 분위기와 다소 달랐고 몰입하기 힘들어 대충 보고 말았는데 이번에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워낙 인상깊게 읽어 현대 소설에 대한 애정이 무한히 생겨 다시 꺼내들었다.
그러나 솔직히 이번에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지난 번 보다 더 몰입이 안 됐다.
나는 아무래도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기법 보다는, 정밀한 심리 묘사나 상황 설명에 더 끌리는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토마스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기 힘들다.
내가 여자인 탓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사랑에 관해서라면 한 사람에게 성실한 테레사 타입이다.
토마스는 섹스를 가벼운 게임 정도로 생각한다.
테레사를 사랑하고 그녀와 잠드는 것을 좋아하고 인생의 반려자로 결혼까지 했으면서도 여전히 매일밤 다른 여자를 찾아 다닌다.
사랑과 섹스는 정말로 별개일 수 있을까?
혹은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서 다른 여자와 별 부담없이 섹스라는 게임을 즐길 수 있을까?
성적 묘사들이 가끔 등장하는데 에로틱 하다기 보다는, 토마스라는 남자의 심리 구조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고 바람 피우는 남자들의 뻔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역겨웠다.
다만 그가 신문에 기고한 공산주의 비판에는 동의하는 바며, 그것을 철회하지 않고 유명한 외과의에서 유리창 닦이로 전락하는 고통을 감수한다는 설정에서는 깊이 감동받았다.
어쩌면 그는 세상의 모든 억압에 저항하는 진정한 개인이고 자유인인지도 모르겠다.
일회성 섹스들은 일부일처제라는 제도에 저항하는 것인가?.
의사라는 직업이 당에 대한 충성도로 결정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현실이다.
토마스는 유명 정치인도 아니고 다만 이름이 좀 알려진 의사일 따름이다.
소련군이 프라하로 진군하기 전 독자 투고란에 작게 썼던 칼럼 하나가 병원에서의 근무를 막을 만큼 대단한 영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닐텐데 그로부터 천직을 뺏을 만큼 공산주의 사회는 경직되어 있다는 말인가!
모든 시위와 단체 행동을 거부하는 사비나의 자유주의도 이해된다.
늘 배반을 꿈꾸는 사비나의 사고방식도 이해하기 쉬운 건 아니지만 공산주의 사회의 획일성과 집단성은 모든 인간이 하나의 개인으로 우뚝 서야 한다는 현대적 가치관과는 매우 대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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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Slumdog Millionair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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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독특한 영화.
인도 빈민가가 배경이다.
책으로 이미 유명했던 영화이고 워낙 상을 많이 받아 기대를 했었다.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구성이나 편집이 개성적이고 신선했다.
마지막에 출연진들이 기차역에 나와 춤추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빈민가의 가난한 청년이 그제서야 멋진 배우로 보였다.
인도 영화는 발리우드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작품을 쏟아낸다던데 과연 그 저력을 실감했다.
헐리우드 영화와는 차별되는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서 좋았다.
스토리 자체는 엉성한 부분도 보이고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의도가 너무 뻔해 식상하긴 했지만 그 과정이 개성적이었다.
음악이나 장면 편집 등이 신선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인도라고 했던 빈민가 아이들의 외침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눈 가리고 안 보려고 했던 가난의 진짜 현실.
힌두교도들에게 맞아 죽은 어머니의 시체.
가난, 비위생, 폭력, 잔인함.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외의 모든 가치들은 모두 부차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도 빈민가가 너무 실감나게 그려져 처음에는 몇 번이나 눈을 가렸다.
미국인 관광객들을 빨래터로 안내하고 돌아오자 아이들이 차의 부속품들을 훔쳐 도망갔다.
운전사는 주인공 아이에게 같은 패거리지 하면서 무자비하게 때린다.
정작 차를 도둑맞은 미국인 부부는 제발 그만하라고 운전사에게 소리친다.
폭력이 가난과 동반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장님은 구걸하기 쉽다는 이유로 조직폭력배들이 아이들의 눈을 파내는 장면이 나온다.
너무 끔찍하고 무서워 심장이 다 떨렸다.
문득 생각나는 장면이 서편제의 소화였다.
그녀 역시 한을 품어야 소리가 잘 나온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맹인이 된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 확실히 전근대 사회는 인간의 신체나 인권, 혹은 자율성에 대해 더 적은 가치를 부여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너무 똘망똘망 하게 연기를 잘해서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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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1disc) - 할인행사
마크 로렌스 감독, 드류 배리모어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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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살짝 질리기까지 하는 휴 그랜트의 로맨틱 영화.
<노팅 힐>과 <어바웃 어 보이>가 절정이었던 것 같다.
<투 윅스 노티스> 나 <브리짓 존스의 일기 2> 등에서는 좀 지겨웠었다.
너무 뻔한 스토리, 뻔한 역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을 혹하게 만드는 어눌하면서도 세련된 유머와 제스쳐는 여전해서, 휴 그랜트라는 이름만 들어도 어쩔 수 없이 또 영화를 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도 그의 매력이 한껏 발산된다. 
이제는 눈가에 주름살도 자글자글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 매력적이다!
정말 완벽한 여성들의 이상형이 아닐 수 없다.
같이 출연한 드류 베리모어도 따뜻하고 매력적이다.
한국인의 표준 체형과 똑같다던데 마르지 않아도 아름답다는 걸 보여준다.
자극적인 내용이 없어서 보기는 편했다.
음악도 영화와 잘 어울리고 가사도 예쁘다.
부처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헐리우드 스타 시스템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이건 아니잖아 싶다.
그 놈의 구루라는 것도 너무 상업적이다. 

영화 속의 알렉스는 80년대 팝 스타인데 50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혼자 사는 걸로 나오고 소피 역시 적어도 30은 넘었을 것 같은데 솔로다.
대체 이들은 그 때까지 배우자도 없이 어떻게 혼자 버텨왔단 말인가?
둘 다 이렇게 매력적인데 말이다!
그래서 영화인 것 같다.
현실에서라면 벌써 누군가 짝을 만나지 않았을까?
이렇게 매력적인 남녀를 그 나이 될 때까지 주변에서 그냥 놔둘 리 없지.
영화에서는 서로 만나는 딱 그 순간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시점, 바로 그 순간을 위해!
비슷한 포맷의 <라디오 스타> 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따뜻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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