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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한 권의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겨우 150여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이 얇은 분량의 책조차 겨우 절반이나, 혹은 1/3이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내 감상문이 진정한 리뷰가 아닌, 인상스케치에 지나지 않는 것도, 결국은 나의 조급함, 책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 때문일 것이고 필연적으로 나는 어설픈 딜레탕트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얇은 책이지만 비교적 만족스럽게 읽었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여기 언급된 참고도서들 중 몇 권은 읽은 책들이라 무척 반가웠다.
<신구약 중간사> <중세의 기술과 사회 변화> <성경 왜곡의 역사>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등이 읽은 책이다.
다시 읽고 싶은 책 목록에 몇 권은 끼워 넣었다.
그래도 언급할 가치가 있는 책을 읽고 있다는 위안을 받았다.
원전은 사실 거의 읽은 게 없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내 독서는, 관심사에 대해 개론서 수준으로 읽기 편하게 쓰여진 책 위주인 것 같다.
좀 더 진지하고 원전에 가까운, 본격적인 책은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편역자들의 말대로 단지 읽기만 하면 제대로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말할 수 없고, 노트에 정리하고 더 나아가 내 생각을 밝힌 한 편의 글을 (감상문이 아닌 소논문 수준으로) 쓸 때 비로소 제대로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데 나는 아직도 그저 인문학에 좀 관심이 있는 얼치기 독자가 아닌가 싶어 한숨이 나온다.
<지적 즐거움> 에서도 저자가 강조한 바지만, 여러 분야를 맛보기만 하려다 보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는 그저 어설픈 아마추어 혹은 딜레탕트에 불과하다고 했다.
진정한 교양인이 아닌 "어설픈" 교양인, 그저 지적 허영심에 찌들어 교양인 흉내만 내는 얼치기!
아, 정말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나 본격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면 그 때부터는 노력과 집중을 요하기 때문에 흥미가 반감되고 특히 어떤 성과물을 내려고 하면 부담이 되서 대체 내가 전공도 아니고 직업도 아닌 이런 일을 왜 하나 싶은 회의감에 사로잡힌다.
내 한계는, 그저 좋아서, 재미로, 취미삼아 관심분야 서적들을 들춰 보는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정말 직업적으로 인문학 전공 안 하길 다행이다.
나는 진정으로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얼치기 흉내쟁이 교양인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책 읽는 게 너무 좋기 때문에 내 수준에 맞춰 독서 생활은 계속 하고자 한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친구, 부잣집에 시집간 친구, 뚜껑 열린 차를 타고 다니는 동료 등을 보면 배가 아프고 자괴감에 빠지고 급 우울해지다가도 책을 읽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고요해지며 심지어 돈이나 사치스러움, 사회적 인정, 지위 이런 게 없다 할지라도 남들이 인정하든 말든 나는 한없이 행복하고 부자가 된 것 같은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책이 주는 완벽한 행복, 잠깐이지만 완전히 충족된 일체감, 포만감 같은 그런 느낌이 너무 좋다.
왠지 인생의 본질을 찾은 것 같은 그런 완벽감은, 비록 항구적이지 않고 너무나 잠깐이긴 하지만 인생을 버텨 나가는데 가장 큰 힘 같다.
마치 종교인이 신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나는 좀 다른 범주이긴 하지만 책을 읽을 때 세상에서 가장 큰 위안을 얻는다.
이 책은 인문학을 크게 네 범주로 구분했다.
흔히 얘기하는 문.사.철 에다가 신학을 더했다.
문학에는 예술이 들어가고 철학에는 법학이나 국가론 같은 분야도 포함된다.
신학의 경우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중세 격언이 정말 실감나게 설명됐다.
<성경 왜곡의 역사> 등을 통해 성경은 절대적인 경전이 아님을 이해했으나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신학은 근본주의자들이 일획일점도 틀리지 않은 완벽한 경전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천지만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어찌 보면 우주의 본질을, 그 시작과 끝을 논하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철학적이며 사유적인 위대한 사고체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역사비평가, 혹은 해체주의자들에 의해 성경은 그 권위가 떨어지다 못해 심지어 다빈치 코드 등에서 보여준 코메디 수준까지 내려왔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와이프라는!) 인간의 기원과 한계, 죽음, 우주의 생성원리, 본질 등을 설명하는 이 위대한 사유의 체계를 더욱 진지하게 본질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성경이 서구 문화의 근본임을 인식하고 있고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열심히 읽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온 과학에 대한 상대주의 관점에는 분명하게 반대한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이룩한 업적과 승리를 부정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지극히 온건한 어투로 과학의 한계를 규명하고 있으나, 과학은 명백히 인문학과는 다른 분야라고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역사학적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을까?
과학이 말하는 진리와 기타 다른 인문학이 말하는 진리는 전혀 다르고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오류가 생긴다고 본다.
과학사와 과학은 명백히 다르다.
과학과 비과학의 차이를 단순히 패러다임의 선택 유무, 해석의 차이 정도로 본다면 과학만능주의니, 모든 걸 과학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느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주장이 나온다.
과학은 사물의 본질을 밝혀가는 진정한 의미의 "진리" 혹은 "사실" 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인문학에서 말하는 도덕, 자유나 평등 등으 가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학이라는 말도 코메디에 불과하고 오히려 성경은 철학이다, 등으로 말한다면 인간의 가치체계, 사유방식, 인식의 과정 등을 보여주는 놀라운 역작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참고도서들 중 좀 쉬운 것부터 읽어 볼 생각이다.
대충 관심있는 몇 권만 적었는데도 벌써 70 권이 넘는다.
항상 관심과 의욕은 앞서고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누구말처럼 한 500년 정도 살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 죽어 버릴까 싶다가도, 못 읽은 책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어 힘이 불끈 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