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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2 - '인물'로 만나는 또 하나의 역사 ㅣ 한국사傳 2
KBS 한국사傳 제작팀 엮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5월
평점 :
역사 스페셜의 후속편으로 두 명의 MC가 나와서 진행하는 <한국사전>이라는 프로그램을 가끔 본 적이 있다.
영상을 통해 역사를 접하게 되면 보다 입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는 점에서 좋기도 하지만 비전문가들의 한계라고 할까? 혹은 시청률 때문에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것 같아 가끔 거부감이 들 때가 있어 특별히 챙겨 보지는 않았다.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박물관에서 삼국 시대의 묘지 조성법을 영상으로 본 후부터다.
책에서 문자나 그림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만큼 머리에 각인이 됐다.
페르시아전에서도 고대 유적들을 화려한 영상으로 복원시켜 놨는데 정말 페르시아가 얼마나 위대한 왕국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그 전에는 기껏해야 민주정인 그리스에 패한 바보같은 독재가 다리우스의 나라, 이 정도로 밖에 몰랐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역사 스페셜이나 한국사전을 DVD로 관람할까 하고 마침 책이 나왔길래 읽게 됐다.
사건이 아닌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했다는 게 특징이다.
덜 알려진 인물들을 발굴해 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 같고 빈약한 자료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해 역사적 진실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은 늘 경계해야 할 것 같다.
무인의 이미지를 가진 정조는 새로운 시각이라 흥미로웠다.
사실 그는 책에 나온대로 암살의 위협에 시달린 만큼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립했고 무예도보통지 같은 병법서를 편찬했으니 충분히 무술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도장을 새길만큼 신하들을 압도하는 전인적인 군주가 되고자 했으니 유학 뿐 아니라 군사력 장악에도 힘을 썼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노론 벽파의 암살 위협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으니 아들 정조의 복수는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과연 영조가 올바른 판단을 한 것인지 의심스럽고 만약 사도세자 외의 다른 왕자가 있었으면 왕위를 잇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이복형이었던 죽은 효장세자에게 양자로 입적한 것은 영조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조완벽이라는 사람이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가 베트남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주인이 베트남과도 무역을 했는데 조완벽이 한자에 밝은 유생이었기 때문에 쓸모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이 얼마나 국제적인 무역 루트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가 된다.
확실히 일본은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과는 사회 체제가 판이했을 것 같다.
조완벽은 놀랍게도 베트남에서 이수광의 시가 유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비록 그는 스무 살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이수광의 명성을 알지 못했으나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된 후 그 에피소드를 들려 주고 덕분에 이수광이 직접 조완벽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
이수광이 연경에 갔을 때 베트남 사신을 만나 한자로 문답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의 시를 베트남에 가져갔는데 그게 거기서 유명세를 탔던 것이다.
어쩌면 고대 세계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교류가 빈번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 베트남 역시 유교 문화권임을 확인했다.
한 가지 재밌는 시각의 차이는, 조완벽이 조선 정부의 포로 석방 노력으로 풀려난 것을 높이 샀는데 내가 읽은 어떤 책에서는 당시 정부가 포로 석방에 별로 뜻이 없어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고 도망쳐 온 사람들도 정부를 비방할까 봐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노비는 본래 주인에게 돌려 보내고 심지어 양민도 노비로 귀속시켰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시각의 차이일 수 있겠으나 내가 보기에는 제작팀에서 단지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우리 선조들은 역시 인간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볍게 결론을 내린 게 아닐까 싶다.
세자빈 강빈과 소현세자의 죽음은 아직까지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아 사건의 극적인 성격에 비하면 덜 알려진 것 같다.
아들을 죽인 영조나, 혹은 아들을 의심한 선조 못지 않게 인조 역시 볼모로 끌려간 아들에게 극단적인 경계심을 품었으니 과연 권력 앞에서는 부자간의 천륜도 소용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정조의 죽음을 실록에 나온대로 혹은 박현모씨의 의견대로 당연히 과로사로 생각하고 있는데 과연 소현세자의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하다.
이덕일 같은 대중용 사학자 말고 제대로 된 학자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풀어 줬으면 좋겠다.
시신이 검게 변하고 온 구멍에서 피가 흘렀다고 하는데 이것이 당시 죽음을 기록하는 일반적인 서술이었는지 혹은 당시에 사람을 즉사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이 존재했는지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아버지가 아들을 몰래 죽일 만큼 극단적으로 악화됐는지 역사적인 의견을 듣고 싶다.
며느리와 손자들까지 죽인 걸 보면 확실히 인조는 아들에게 굉장한 분노와 의심을 샀던 것 같기는 하다.
척화비를 쓴 사람이 이경석이라는 인물인지도 처음 알았다.
이 사람은 그 비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송시열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는데 저자의 말대로 명분론자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자행한 만행을 생각하면 충분히 분노하고 망하게 됐을 때 오히려 잘 됐다고 원군 요청 따위는 무시했어야 할 일이지만 성리학이 지배하는 대의명분의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인식의 전환이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니고 당시 성리학의 교조주의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방증한다.
그런데 그 당시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침범한 오랑캐들, 그것도 자신들이 우습게 보던 짐승같은 여진족들에게 머리를 조아린 일이 엄청난 상처가 됐을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에게 이경석은 요즘으로 치자면 을사오적처럼 청에 아부하고 영의정까지 되서 현종에게 궤장을 하사받은 한 마디로 사리사욕만 채우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효종 대신 청에게 죄를 지고 귀양을 갔다고 했으니 자기 욕심만 챙기는 뻔뻔한 탐욕주의자는 아니었을 것 같다.
그리고 군중들이 화가 나서 쓰러뜨린 삼전도비를 일제가 다시 세웠다고 조선을 짖밟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비난하는데, 일제가 조선을 생각해서 세웠리는 없겠지만 삼전도비 역시 역사적 유물이 아닌가.
당시 정부였던 일제로서는 세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대체 왜 이런 간단한 행정상의 절차를 놓고도 쓸데없는 분노를 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최근에 삼전도비에 페인트로 <철>이라고 써 놓은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더 비난해야 하지 않을까?
한자도 아니고 붉은 페인트로 한글로 철, 이라고 크게 낙서를 하다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마치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다고 그 엄청난 석굴을 파괴시킨 탈레반을 보는 것 같다.
이 밖에도 단원 김홍도나 몽골 장수 살리타를 활로 쏘아 죽인 김윤후, 사대주의자로 비난받는 김춘추, 과학적 수사를 했다는 흠흠신서의 저자 정약용 등이 등장한다.
김춘추의 외교술이야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탁월한 전술이었으니 사대주의자라는 비난은 지극히 오늘날의 말도 안 되는 시선에 불과한 것이고, 오히려 책에 나온대로 신라 귀족들이 백제의 침략에 손놓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정말 영웅적이다라고 할 만큼 고구려, 당나라, 심지어 일본까지 다녀왔으니 신라로서는 김춘추야 말로 나라를 살린 최고의 영웅이었을 것이다.
신라 입장으로서는 당연히 왕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행동하는 지도자였을 것이다.
흠흠신서에 나온 정약용의 판결은 다른 책에서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칼로 장난을 치다가 하필 종기 부위를 맞아서 고름이 터지는 바람에 한 달 만에 죽어 버린 사건이 생긴다.
죽은 사람의 미망인이 복수를 하기 위해 찌른 사람의 집에 찾아가 그 아들 부부를 묶고 방망이로 때려 죽인다.
정말 무시무시한 복수극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흉기가 있었다고 하나 여자가 남자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정말 대단한 여장부다.
사건과는 별개로 아내라면 이 정도는 해야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도덕 관념으로 보면 복수극은 의리로써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내의 행동은 마땅이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칼에 맞은지 한 달이나 지나서 사망을 했기 때문에 칼에 의해 죽은 게 아니라 종기가 터진 걸 제대로 치료를 못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친절하게 법의학자의 설명이 이어진다.
직접사인은 패혈증, 중간 선행사인은 세균 감염, 선행사인이 바로 칼에 의한 상처니 남편은 살해당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아내의 살인은 복수로 인정받을 수 없게 돼 버렸다.
그리하여 아내는 옥에 갇히고, 아내를 도와 죽은 자의 아들 부부를 감금했던 이들도 살인 동조죄로 갇힌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정약용은 황당하게도 아들 부부마저 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했다고 체포한다.
이 점은 현대인인 나로서는 동의하기 힘든 부분인데, 아들 부부 역시 자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겠는가?
오히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위로해야 정상이지 않을까?
아버지가 방망이에 맞아 죽었는데 (그것도 억울하게!)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 본 아들 부부마저 살인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효했다고 체포되는 건 이치에 맞지가 않다.
저자는 정약용의 이 판결을 과학적 수사의 표본이라고 하는데 어쩐지 인용이 잘못된 느낌이 든다.
흠흠신서 등을 써서 법률적 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당시 관료들을 각성시킨 점은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위인은 무조건 훌륭하다는 대전제는 왠지 교조주의의 냄새가 난다.
전기를 쓸 때 항상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하여튼 비교적 재밌게 읽은 책이고 역사적으로 덜 유명한 사람들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다.
나머지 책도 읽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