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의 즐거움 - 아버지들의 도시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이바르 리스너 지음, 최영인.이승구 옮김 / 살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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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발굴을 다룬 책인데 집중하기가 좀 어려웠다.
발굴 과정을 다룬 책은 대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이 들고 문화권이 달라서 그런지 발굴 뒷얘기 같은 게 재밌다기 보다는 생소한 느낌을 준다.
그래도 이 책은 비교적 쉽게 잘 쓰여진 편이다.
시대가 좀 뒤떨어진 느낌이 들지만 그런대로 흥미롭게 읽었고 이런 책도 반복해서 읽다 보니 비슷한 내용이 겹쳐지면서 어느 정도 윤곽이 그려지는 느낌이다.

1. 베링 해협을 건너 온 아메리카 인디언의 후손은 몽골리안이라기 보다는 코카서스 인종의 특징을 더 많이 갖고 있다.
당연히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시베리아를 건너 왔으니 코카서스인과 비슷한 게 당연할 것 같다.
오히려 몽골리안들은 베링 해협이 열린 후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훨씬 많이 건너 왔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책을 읽어 봐야 할 듯.

2. 폴로네시아인들의 조상이 인디언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인이었음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완전 흑인인 뉴기니의 멜로네시아인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한다.
오히려 폴로네시아인들은 곱슬머리가 없고 피부도 밝은 편이라 중국인과 비슷하다고 한다.
멜로네시아에는 머리 사냥 풍속이 있었는데 사람의 머리를 먹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힘, 즉 마나가 옮겨 온다고 믿었다.
식인 풍속도 단백질 섭취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이런 의식적인 행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함.
이런 점에서 저자는 문화나 정신적인 관념들의 근원을 종교에서 찾았다.
따지고 보면 모든 문화권에서 종교가 사회의 중심이 되고 거기서 비로소 문화와 전통이 생겨난다.

3. 크레타인들과 미케네인들은 도리스인이 건너 오기 전 그리스 본토를 차지했던 에게해인들인데 크레타에서 맨 먼저 생긴 문자가 선상문자 A 이고, 이것이 선상문자 B로 바뀌었는데 미케네인들이 이를 가져다 썼다.
그러므로 선상문자 B는 고대 그리스어의 구어체인 셈.
해독하기 어려웠던 까닭은 문장으로 쓰여진 게 아니라 회계용으로 기록한 기호 비슷한 걸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함.
크레타는 지진이나 화산 폭발 때문에 멸망했는데 기원전 1400년 경 미케네인들의 공격으로 최종적으로 망하고 만다.
호메로스가 노래한 아가멤논 등은 모두 역사 속의 인물들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4. 마야 문명은 과테말라 부근의 열대 우림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사바나 기후였다가 강수량이 많아지면서 점점 정글로 변해가 결국 10세기 경 마야인들은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보통 이 때 유카탄 반도로 넘어가서 세운 문명이 아즈텍으로 알려졌는데 저자는 유카탄 문화가 마야와 동시에 번성했다는 점을 들어 이 가설을 부인했다.
다른 책으로 확인해 봐야겠다.

5. 저자는 성경의 기록들을 모두 사실로 받아 들인다.
솔로몬의 화려한 궁전이나 모세의 이집트 탈출을 전부 역사적 기록으로 가정한 후 얘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내 입장은 최소주의자이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함락했다느니 이집트 탈출 당시 파라오가 람세스 2세라느니 하는 말은 확실한 근거를 대지 않는 이상 단지 성경에 나왔다는 말만으로 증거를 갖다 붙이는 식의 전개는 받아들이 힘들다.
최근의 연구 성과가 수록되지 않아 아쉬운 대목이다.
더군다나 짐바브웨 유적이 이미 동아프리카인들에 의한 독립적인 문화임이 드러난 마당에 여전히 솔로몬의 오빌 운운 하는 건 시의에 뒤떨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고대 세계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대 문명의 교류라는 책도 읽긴 했지만 하여튼 정말 오래 전부터, 문명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인간은 땅 위를 걷고 혹은 바다를 건너 교류해 왔다.
또 그런 교류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렇게도 구석구석까지 퍼지지도 못했을 것이고 균질적인 문화를 이뤄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동이야 말로 인간의 본성 같다.
세계 각국의 신화를 뜯어 보면 겹치는 구석이 참 많다.
읽으면 읽을수록 기독교가 헤브라이 민족의 독창적인 발명품이 아님을 확실히 느끼게 된다.
대홍수의 기억, 신전을 세우는 인간의 본연의 심성, 조상에 대항 숭배 의식, 비슷한 문화의 원형을 너무나 많이 발견한다.
굴드의 말대로 정말 우리는 최고의 안정성을 이룬, 매우 균질한 종인 것 같다.

고대 문화가 사라졌다고 해서 정말로 흔적도 없이 없어진 것은 아님을 저자는 강조한다.
사실 책의 서문과 에피소드 부분이 가장 감명깊었다.
우리가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조상들이 남긴 문화가 바탕이 되어 현재의 우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리라.
정신적인 것, 믿음과 전통을 잃어 버릴 때 물질적인 박탈보다 더욱 피폐해지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으리라는 말이 너무나 와 닿는다.
왜냐면 고대인들 보다 편한 삶을 살고 있다 해서 현대인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거나 행복한 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인간은 매우 정신적이고 의식적인 존재임이 틀림없다.
왜 고고학이 소중한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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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가 조개화석을 주운 날 - 고생물학자 굴드 박사의 자연사 에세이
스티븐 J. 굴드 지음, 김동광.손향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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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학자가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유명 과학자들, 이를테면 칼 세이건이나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거, 마빈 해리스 등의 책을 읽을 때마다 놀라는 일이지만 학문적으로도 훌륭한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글을 잘 쓰는지 그들의 문학적 소양과 문장력에 감탄하게 된다.
번역문인데도 불구하고 비문이 없고 비유나 유기적인 구성 등이 마치 유명 소설가의 잘 쓰여진 소설처럼 한 편의 탁월한 글이 된다.
역시 세계적인 사람들은 다르구나 감탄하게 된다.
스티블 제이 굴드 역시 참 글을 잘 쓴다.
이런 훌륭한 문장들을 직접 원서로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60대면 아직은 이른 나이 같은데 그의 빠른 죽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추럴 히스토리> 라는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책이라고 하는데 이런 훌륭한 글이 실리는 잡지를 나도 구독하고 싶다.

그가 고생물학자이기 때문에 다윈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유전학을 봐도 그렇고 현대 의학이나 생물학은 다윈이 없다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
이번 주제도 역시 다윈의 진화론이다.
특히 가톨릭 교회가 비오 12세의 어설픈 가능성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완벽한 승인으로 진화론을 받아들였다는 점이 제일 큰 소득이었다.
이제 가톨릭 교회는 갈릴레오를 파문하려 했던 과거의 잘못을 씻고 생명 창조의 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진보하는 면모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을 거부하고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교파가 일부 근본주의에 국한된 것임을, 또 미국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임을 명백히 밝힌 굴드의 글을 시원하게 읽었다.
미국의 영향으로 한국의 기독교인들 역시 진화론 거부를 마치 신앙심의 한 표현인양 착각하고 있지만, 그래서 마치 무슨 순교라도 하듯이 진화론을 비난하고 있지만, 굴드의 말대로 교권과 과학은 겹치지 않는다.
과학이, 혹은 진화론이 우주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생명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밝히는 학문인데 반해 종교는 어떻게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분야다.
설마 그 하늘나라가 정말 지구 밖에 있는 물리적인 어떤 곳이라고 믿지는 않겠지?
그런데 이른바 근본주의자들을 보면 정말로 성경에 나온 하늘나라가 대기권 밖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떠들어 댄다.
굴드의 표현대로 종교가 소중한 것은 그들이 물리적인 세상의 비밀을 성경에 근거하여 밝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고결한 정신, 배려심, 희망, 연민, 애민 정신 등등 우리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방향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해 주고 우리가 모여 사는 이 공동체를 보다 아름답게 이끌어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독특한 의식의 세계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관찰력에 깜짝 놀랬다.
과거에는 그저 유명한 화가일 뿐, 과장된 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남긴 노트를 보면 그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논리적인 연결 체계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역시 그도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관찰력으로 세상의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했던 천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유명한 <모나리자>에는 신비한 미소도 매력적이지만 그 배경은 그가 평생 연구한 지질학의 성과를 살펴 볼 수 있는 그림이다.
구석기 시대 벽화에 대해서도 굴드는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보통 크로마뇽인은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진 인종이므로 그들의 예술적 재능에 깜짝 놀래게 되고 거칠게 표현될수록 시대가 앞선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 탄소 방사능 검사를 해 보면 마치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이 르네상스 시대의 정교한 그림보다 뒤떨어진 게 아니듯 기교와 시대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또 한 집단의 유전적 동질성은 10만 년 정도 유지되기 때문에 구석기 시대인들의 예술적 재능은 현대인에 비해 떨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의 벽화 그림에 우리가 탄복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저자는 그런 관점에서 선형 진보 이론을 거부한다.
무척추 동물에서 척추 동물로, 어류와 양서류, 파충류를 거쳐 조류 그리고 포유류까지, 심지어 영장류의 정점에 바로 인간이 서있다는 관념은 전적으로 인간의 착각이라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각자 처한 환경에 적응한 것이기 때문에 진화가 진보가 될 수는 없다.
의식이 인간의 독특한 특성일 수 있으나, 의식이 반드시 우월한 것, 진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의 재치있는 지적처럼 어쩌면 우주인은 지구를 박테리아의 세상으로 볼지도 모른다.
놀라운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호모 사피엔스로 일직선 진화한 게 아니라 곁가지인 인간유사종들이 많이 있었는데 최종 승리자가 되어 현재까지 남은 종이 바로 지금의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발전은 모든 종이 그렇듯 일직선 상으로 쭉 올라온 게 아니다.
우리는 최소 여섯 종의 인간유사종이 있었고 특히 아프리카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출현한 이래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로 각자 발전한 호모 에렉투스가 진출했으며 그들은 네안데르탈인이나 크로마뇽인들과 같이 살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가 최종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사피엔스들을 물리치고 현재의 안정적인 집단을 이루었다.
옛날에는 네안데르탈인에서 크로마뇽인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른 계통수를 가진 곁가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말 인간은 고생대의 삼엽충, 중생대의 공룡처럼 그저 신생대의 짧은 시기 동안 지구에 많은 후손들을 퍼뜨린 포유류의 한 종에 지나지 않는 걸까?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이래 이처럼 충격적인 혁명도 없을 듯 하다.

번역본이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읽은 책이고 다양한 관점에서 자연사를 들여다 본 좋은 책이다.
이렇게 훌륭한 과학자이자 저술가가 일찍 세상과 작별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굴드의 다른 책들도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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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사 - 7년 전쟁, 바다에서 거둔 승리의 기록
이민웅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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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해군이 임진왜란 중 해전만을 분석한 글이다.
논문을 수정해서 썼기 때문에 출처도 분명하고 비약이 많지 않아 읽기 편했다.
임진왜란과 이순신은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지나치게 영웅시 되어 오히려 전쟁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는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이순신은 미화시키기 않아도 충분히 뛰어난 위인이고 매력적이며 무엇보다 인간적이기 그지 없는 인물이다.
오히려 이순신의 성인화 작업이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감소시키고 박제화 된 위인으로 격하시킨다는 느낌마저 든다.

앞서 읽은 <이순신의 두 얼굴>이라는 책에서는, 이순신의 실각을 그의 판단착오로 봤다.
반간계에 정부가 속았다기 보다는,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기회를 놓친 이순신을 정부가 경질한 것으로 판단했다.
어쨌든 가토가 도해하여 정유재란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니까.
그 전에 이순신이 광해군의 과거 시험을 거부했다거나, 왜영 방화 사건의 공적을 가로챘다고 오해를 산 일 등 전쟁 중 군부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조정 분위기가 있었음을 중요하게 다뤘다.
반면 이 책에서는 널리 알려진 평가대로 조선 정부가 일본의 반간계에 당했다고 판단한다.
그 근거로 일본 측에서 발간된 임진란 관련 서적에서 반간계의 성공을 거론했다는 점을 든다.
어떤 게 진실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요한 점은, 어쨌든 전쟁 중에 가장 뛰어난 업적을 거두고 있던 최고 지휘자를 경질한 것은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선조의 완전한 패착이었고 그 결과가 참담한 조선 수군의 전멸인 칠천량 해전으로 나타났으니, 이 사건을 계기로 이순신의 위대함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겠다.
비단 이 책 뿐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등을 봐도 그렇고 실제 난중일기를 읽어 봐도 이순신은 꽤나 강직하고 자기확신이 강하며 주관이 뚜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꼿꼿한 조선 선비의 면모가 무장의 강인함과 더불어 유감없이 발휘되는 느낌이다.
결정을 내릴 때는 최대한 신중하게, 한 번 내린 결정은 어떤 난관이 있어도 밀고 나가는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정치력은 부족했기 때문에 난중이 아니었다면 그의 진면모가 드러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명량해전을 분석한 글이 흥미로웠다.
물밑에 철쇠를 걸었다는 의견은 전설로 치부하고 그보다는 협수로를 이용한 작전과, 일본의 큰 함대인 아다케 대신 규모가 작은 세키부네만 상대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 전쟁에 참가한 전선은 총 133척, 뒷쪽에 늘어선 배까지 합하면 300여 척인데 명량이 워낙 해협이 좁고 물살이 가팔랐기 때문에 칠천량 해전과는 달리 큰 군선인 아다케가 투입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순신은 판옥선 열 세 척으로 해협을 가로막고서 일본군을 맞아 세키부네 31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올린다.
극도로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지형을 이용하여 믿기 어려운 승리를 거둔 그의 지략이 돋보이는 해전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감동적인 부분은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전멸하자 정부에서는 교전 자체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순신에게 해전을 포기하고 육군을 도와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유명한 상소,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있다는 상소를 올리고 군사들에게도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고 격려한다.
그 용기와 기개, 배짱이 놀라울 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고, 그는 또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어 자만심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실제로 이순신은 군기를 엄격하게 잡는다.
조선 수군은 백성들이 기피하는 천역이었는데 전염병에 기아까지 겹치자 도망자가 속출한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한 것도 도망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탈영병은 전부 처형함으로써 군기를 잡고 부족한 병력은 친족에게라도 군역을 지움으로써 반드시 채워 넣었다.
또 기아가 속출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휴전 기간 내내 군선을 목표량 만큼 만들어 냈고 실제 그 목표를 달성한 곳은 그가 지휘한 전라좌수영 뿐이었다고 한다.
무서운 집념과 엄격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런 지휘자였기 때문에 그의 군영으로 백성들이 모여 들어 명량 해전 때 군민들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특히 안정적인 식량 확보를 위해 둔전을 성공적으로 경영함으로써 오직 수군만이 군량 공급을 할 수 있어 감찰하러 나온 이원익이 탄복했다고 하니, 과연 명장이 아닐 수 없다.

원균과의 불화는 이 책에도 자세히 나온다.
아마도 그는 신중하고 엄격한 이순신과는 반대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기생을 불러 들여 물의를 일으키고 부하들에게도 잔혹했으며 신의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을 보여 선조의 신임을 얻는다.
그는 윤두수 등과 인척 관계였다고 한다.
꼿꼿한 선비 타입인 이순신과는 반대되는, 전형적인 무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도 그런 단순하고 우직한 점이 선조로 하여금, 복잡다단한 이순신 보다 더 상대하기 쉽고 편하게 신뢰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영웅적인 면모를 보인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신임은 부족한 점이 큰데 여러 정황을 보더라도 선조는 전쟁을 이끌 지도자감은 아니었던 것 같다.
특히 신뢰했던 원균에게 지휘권을 맡겨 놓고서도 현지의 판단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수군 진격을 명령한 점은, 결국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이어져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고 만다.
저자는 일선 지휘자의 판단을 무시한 조정의 지휘 계통 혼란도 중요한 패전의 원인으로 꼽는다.
한마디로 정부는 조선 수군의 전반적인 상황을 너무 낙관한 통에 이순신에게도 그렇고 원균에게도 무조건적인 수군 단독 저지를 주장했던 것이다.
반면 일선에서 전선을 책임진 지휘관들은 이순신 뿐 아니라 원균마저도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막기는 역부족이므로 육군과 함께 싸울 것을 주장하지만, 이순신은 실각하고 원균은 빨리 나가지 않는다고 도원수 권율에게 끌려가 곤장을 맞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무신을 우대하지 않는 조선의 전통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타고난 무인들이었던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가 지략적인 면에서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한 가지 간과했던 점은 일본 역시 수군이 주력 부대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근대 이전에 해전이 주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이 육지를 코 앞에 둔 해안가에서 벌어진 해전이기도 하다.
일본은 해적질의 역사가 깊어서 얼핏 생각하면 수군도 강력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작고 빠른 배를 타고 돌진해 상대의 배에 올라타 일대일 격파를 벌이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큰 군선인 판옥선과 화포에 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오히려 조선 수군은 일본 해적들의 오랜 침략 때문에 군선을 만들고 화포를 개발해 왔다.
태종 때 거북선이 개발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그들은 수군을 보급선으로 이용했는데 이순신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끊겨 육지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맞기도 한다.

임진왜란은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세 나라가 참전한 국제전이었고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연구가 더 활발하게 전개되어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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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댓 클래식 - 교양인을 위한 클래식 음악 감상
이동활 지음 / 두리미디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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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은 많지만, 가볍게 일독할 수 있는 책이다.
먼저 읽은 책,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나> 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살짝 지루하기도 했지만 다시 확인한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래서 겹치는 독서가 좋다.
<유럽 클래식 산책>은 서점에서 대충 훑어 보기만 했는데 그 책의 저자라고 한다.
원래 성악을 전공한 사람인데 칼럼니스트로 돌아선 모양이다.
글쓰는 수준은 평이하다.
박종호씨의 글에 비하면 문체도 평범하고 특별한 개성이 있는 건 아닌데 무난하게 읽을 만 하다.
비문이 없는 편이라 읽기 편했다.

좋은 곡을 많이 소개받았다.
듣고 싶은 곡을 뽑아 보니 대충 60여곡 정도 된다.
클래식을 감상해 보고 싶어도 뭐가 좋은 곡인지 알 수가 없어 다양하게 듣기가 어려웠는데 책에서 소개받은 곡들을 위주로 먼저 들어볼 생각이다.
특히 근현대 음악은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당시 시대적 배경과 해설을 곁들이니 좀 더 친숙하게 쉽게 다가오는 기분이다.
교향곡도 좋은데 서너 명이서 연주한느 실내악도 참 듣기 편하고 좋은 것 같다.
마지막에 저자의 충고대로 그냥 막 듣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시대 배경도 알고 곡의 구성도 알면 더 많이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박물관이나 유적지 관람할 때 아무 것도 모르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 더 재밌게 관람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림처럼 음악은 굳이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감동스럽고 행복해질 수 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제일 유익했던 충고는 연주회나 dvd를 볼 때 지휘자를 유심히 보라는 말이었다.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면서도 느낀 바지만, 지휘자의 연주 스타일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연주 내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지휘자를 보는 것도 영상으로 접하는 음악의 즐거움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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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화 이야기 - DNA와 진화의 확고한 증거들
션 B. 캐럴 지음, 김명주 옮김 / 지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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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디보, 생명의 블랙박스를 열다> 의 저자가 쓴 책.
유전학 교수라고 한다.
앞의 책도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올라와 있는데 기회가 안 돼서 못 읽었다.
이 책으로 미루어 보아, 이보디보 역시 상당히 어려울 것 같다.
아무래도 내 수준은 마이클 셔머의 <왜 다윈이 중요한가> 가 적당한 것 같다.
불행히도 말이다.
나는 대학에서 유전학을 배웠고 지금도 학문적으로는 아니지만 임상에서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당연히 유전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조금만 깊이 들어가는 책을 읽게 되면, 내 지식의 깊이가 상당히 얕다는 것을 깨닫고 허걱 놀라고 만다.
유전학, 생화학, 세포학 이런 기초 과목들을 분명히 대학에서 수료했는데도 왜 이런 대중 교양서가 어려운 것일까?
이런 걸 보면 의사들 중 상당수가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창조론을 믿고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제 Mr. suh 가 나사의 연구원이 교회에서 진화론의 허구와 창조론에 대해 간증했다고 하던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당연히 진화론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쟁이 붙으면 세세한 부분까지 자신있게 증거를 제시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월리스 같은 위대한 학자 역시 지구가 둥글다는 너무나 명확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미친 놈과 싸우다가 홧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는 만큼 평범한 내가 논쟁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 크게 우울해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즉 논쟁주의자들은 누구와 붙어도 절대로 지지 않는다.
그들은 사실 대신 신념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진화에 대해 가장 많이 오해되는 부분은 자연선택이 무작위적이며 돌연변이가 해롭다는 것이다.
지적인 설계자가 없다면 결코 지금의 최적 조건으로 형상화 되기 어렵다는 것.
흔히 바람이 불어 보잉기가 저절로 조립될 수 없다는 비유를 쓴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자연의 선택압이야 말로 종의 변이에 관여하는 가장 큰 힘의 원천이고 그 기전이 바로 돌연변이다.
인간의 게놈은 70억개쯤 되는데 176개의 비율로 돌연변이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개체이고, 심지어 쌍둥이도 동일하지 않다.
중요한 기능을 가진 유전자 (이를테면 분화를 결정하는 도구 유전자) 들은 돌연변이로부터 보존되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아미노산이 여러 개의 코돈으로 암호화 되어 있다.
유전자 중복이 종의 항상성을 유지시킨다.
자연의 선택압은 종간의 변이를 일으키는 변수로 작용한다.
돌연변이가 자연 환경에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면 그 돌연변이를 가진 개체가 번식하여 자신의 돌연변이를 간직한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런 말을 했다.
아메바에 비해서 인간이 더 우월한 존재인가?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인가?
우리는 진화의 정점에 선 종인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명제이므로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어, 도킨스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전학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진화는 결코 진보나 개선을 위한 메커니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생명의 다양성이 증가한다는 측면에서는 좀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하여튼 모든 생명체는 더 우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연 환경에 맞는 존재만 멸종을 피하고 생존해 나간다.
저자는 모든 유전자가 현재의 환경에 적합하게 작용하므로 결코 앞으로의 변화를 위해 미리 예비해서 만들어 놓을 수 없고, 그런 이유로 처음부터 의도를 지닌 지적 설계자는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신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진화론을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무신론의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종교인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종교는 지동설도 이겨냈고 우주선이나 달 탐사도 이겨냈다.
진화론 역시 결국에는 사실이기 때문에 종교가 포용할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이야 힘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 거부할 경우 종교의 기반 자체를 흔들어 버릴 것이므로 결국에는 적당히 교리에 변형시켜 수용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집단은 아마 유타주에 있다는 아미쉬들처럼 시대를 거부한 소수파로 동정을 사겠지.
내 생전에 그 꼴을 볼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카이로프랙틱, 즉 척추교정을 하는 사람들이 예방접종을 거부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예방접종을 거부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어 어렸을 때 가볍게 앓고 지나갈 수 있는 홍역이 성인이 되서 걸리는 바람에 치명적인 합병증을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을 접한 적이 있는데 확실히 미국은 이른바 대안의료라는 것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
우리나라 역시 한의학이나 동종요법, 허브 치료 등등의 대안의료가 있긴 하지만 범국민적으로 예방접종을 거부하자는 식의 주도권을 잡지는 못하는데 미국은 역시 모든 방면에서 다양한 운동이 있는 나라다.
척추교정은 막연히 구부정한 허리를 바르게 펴 주는 일종의 물리치료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근본적으로 모든 병의 원인이 신경에서 비롯되므로 신경이 지나가는 척추를 바르게 해 주면 신경이 눌리지 않아 병이 회복된다는 게 기본 개념이라고 한다.
병의 세균설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현대의학에 대치된다.
이 점은 한의학과도 비슷하다.
미생물에 의한 감염설이야 말로 현대 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병인론인데 한의학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하여튼 이데올로기 혹은 철학, 몸의 내제된 생명력, 자기치유력, 정신력 이런 것들이 과학적 사실들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게 참 한심스럽다.
책에 인용된 루리 파스퇴르의 말처럼, 상상력은 실험의 결과들에 의해 입증될 때만 비로소 하나의 이론으로 성립되지 않겠는가?
지식은 인류의 유산이라고 했는데 특정 종파나 집단의 이기심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배척되야 한다는 현실이 슬프다.
유전자학이 농업이나 제약학, 심지어 친자 감별, 범죄자 식별에까지 이용되고 있는 21세기에도 이 모양이니,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주장했던 갈릴레이가 얼마나 엄청난 권력과 싸워야 했을지 조금은 실감이 난다.

마지막에 나온 환경 오염과 남획에 대한 우려는 그런 것들이 강력한 선택압으로 작용하여 생명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멸종으로 이끈다는 설명을 듣고 보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자연은 정화력을 가졌기 때문에 곧 회복될 거라는 막연한 위로가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됐을 정도로 생태계 파괴는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적어도 야생동물 밀렵이나 어류 남획 등에 대해서는 전 지구적인 합의가 필요한 시점임이 분명하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화이야기라고 정말 비장한 제목을 붙였는데 역시 학자가 쓴 글이다 보니 당위성이나 반박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유전학 내용을 설명한 부분이 대다수를 이루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나면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쓴 이보디보도 읽어 보고 마이클 셔며의 <왜 다윈이 중요한가>도 다시 봐야겠다.
첨언하자면, 한 번 읽어서 100% 이해할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는 것 같다.
내 경우는 한 번에 자세히 정독하는 것 보다는 틈틈히 반복해서 보는 쪽이 훨씬 기억에 오래 남고 읽기도 편하다.
비슷한 주제의 책을 여러 권 읽는 것이, 한 권의 책을 정독하는 것보다 덜 지루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어려운 책도 억지로 읽을 때가 많은데 선택 독서와 반복 독서를 하는 쪽으로 바꿔 보려고 한다.

방금 재독을 끝마쳤다.
첫번째 독서 때 미진했던 부분들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배경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다시 읽으니 비교적 쉽고 평이하게 써진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역시 내가 너무 게으르게 접근했던 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진화란 결국 돌연변이라는 기회, 그것을 전달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자연선택, 그리고 그 변이가 개체군에 확산되기까지 걸리는 긴 시간, 이 세 가지의 조합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제 지적 설계자 대신 자연선택을 종의 다양성의 근원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돌연변이는 분명히 무작위적이나, 그 변이를 다음 세대로 전달시킬지 말지는 절대로 무작위적이지 않다.
오히려 해로운 변이는 제거하고 이로운 변이만 보존하는 방식으로 자연선택은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진화를 조정한다.
고세균과 인간의 공통 유전자의 존재야 말로 결국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진화에 대한 기본 개념이 잡히는 느낌이 들고 읽다가 포기한 다른 책들 (진화하는 진화론, 생명 최초의 30억년) 에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
정말 다윈은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가장 혁명적이고 위대한 발상의 전환을 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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