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양반의 사생활
하영휘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흥미진진한 제목과는 달리, 솔직히 좀 지루하다.
1700여 통의 방대한 서신을 성실하게 분석한 점은 인정하나, 전개 방식이 지루함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런 생활사를 기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자가 자료 수집을 열심히 한 다음에 저자의 언어로 다시 풀어 쓰는 길 같다.
임용한씨의 <조선국왕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탁월하다.
단순히 실록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뜻, 행간을 읽어내는 것이 바로 저자의 집필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병덕이라는 유학자가 쓴 편지를 너무 곧이곧대로 번역하다 보니 요즘에 잘 안 쓰는 한자어가 많아 이해도 안 가고, 서신 역시 안 쓰는 한문체라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했다.
저자가 자신의 언어로 편지를 재해석 했다면 훨씬 재밌었을텐데,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고서가 소장학자들에 의해 번역되고 있는 현실은, 조선시대를 좀 더 사실적으로 복원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조선 시대 양반의 일상 생활이 눈에 잡힐 듯 보인다는 점이다.
사극 작가들이 참조하면 좋을 책이다.
조병덕이라는 인물은 조상 중에 인조의 장인도 있고, 노론 4대신도 있는, 이른바 노론의 명문 사대부가다.
그러던 것이 세도 정치로 흐르면서 정권으로부터 소외되어 과거 합격자를 내지 못하자 결국 시골 양반으로 전락해 버린 비운의 유학자다.
본인은 과거에 뜻을 접고 학문에 전진하여 많은 제자들을 남기긴 했으나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가세가 기운 몰락 양반이 체면 유지를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 했는지 잘 드러난다.
비루한 일상의 영위가 고결한 유학 정신과 얼마나 안 어울리는 일인지 정말 여실히 드러난다.
누가 주경야독과 안분지족을 아름답다고 했던가?
다 먹고 살만 해야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아침에 밭 갈고 저녁에 책 읽어서는, 도저히 양반의 체면에 맞는 품위를 유지할 수가 없다.
단지 사치스럽게 치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예학과 의례를 돈이 없으면 제대로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조병덕이 비록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으나 조상으로부터 받은 땅덩어리도 있꼬 가문의 위세도 있어 여기저기서 선물과 증여도 많이 받아 시골로 낙향하긴 했으나 완전히 향반이 되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학을 제대로 지키려다 보니 계속해서 논을 팔아 돈을 댔고 결국은 양식이 없어 친척들에게 구걸하는 편지를 써야 할 지경에 이른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체면 유지를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 하고 과도한 지출을 했는지 편지에 낱낱이 드러난다.
결혼식 때 돈 많이 드는 풍습은 비단 현대에 국한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떤 무식한 필자가 조선 시대에는 혼수라는 게 없고 그저 시부모에게 비단 버선 한 켤레를 성의 표시로 준다고 하던데, 실제 조선 후기 양반이 쓴 편지를 보니 앞의 얘기는 그저 관념적 상상에 불과함이 잘 나타난다.
저자는 셋째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200냥이나 예산을 잡았는데 100냥은 간신히 구하고 나머지 100냥은 친척들에게 구걸하다싶 해서 맞춘다.
그는 가장 부담되는 것이 바로 혼례와 장례라고 했으니, 조선 시대에도 결혼식 비용은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장례 역시 묘지를 쓰는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격식에 맞게 하려면 엄청난 빚을 져야 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양반 문화는 확실히 체면치레, 좀 더 우아하게 말하자면 품위 유지와 예절 지키기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이런 의식들이 현대화 과정에서 많이 단절됐기 때문에 양반 문화라는 것이 전수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허레허식, 겉치레 등으로 매도되어 섬세한 절차나 과정은 예술로 승화되지 못하고 껍데기만 남았으니 전통의 단절을 새삼 확인하는 기분이다.
조선 시대 양반층은 전통적인 귀족과는 좀 다른 계층이었던 것 같다.
관직에 진출해야 재력과 위세가 보장된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은 능력 사회였던 것 같고, 경쟁 구도에서 모든 가문이 탈락하고 오직 안동 김씨 일문만 세력을 쥐었다는 점이 조선 후기의 가장 큰 비극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순조의 정치력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열 한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고 하나 그 후 34년 간 집권했고 세력을 휘두르던 정순왕후는 세도 정치 4년만에 권력을 내놓고 곧 사망한다.
단지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것만으로는 세도 정치를 설명할 수 없다.
정치력이 전무한 왕들이 연이어 즉위했다는 점이 조선의 불행이었던 것 같다.
차라리 쇄국을 주장한 흥선대원군 같은 강력한 왕이, 비록 시대 정세는 제대로 못 읽었더라도 적어도 집안 단속은 할 수 있는 통치력을 지닌 왕이 즉위했다면 조선이 그렇게 허망하게 식민지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왕이 무능해지면 오히려 신하들이 알아서 입헌군주제로 바꾸고 대의 정치로 잘도 전환하던데 왜 조선 시대 세도 정치는 온갖 폐단만 낳고 결국은 식민지로 전락하게 됐는지 참 한심한 일이다.
사회 구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적어도 영조나 정조 혹은 태종이나 세종 같은 국왕이었다면 아무리 왕조 말기라 할지라도 순조나 고종처럼 무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 쓰는 한자어가 너무 많아 책 읽기에 영 불편했다.
한문 표기가 되 있어서 사전 검색을 했으나 그마저도 대부분 안 나왔다.
기왕이면 저자가 각주로 설명을 달아 놨더라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을텐데 아쉽다.
요즘은 정치사 대신 생활사가 유행하는 것 같다.
소시민들의 삶을 조명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보고 이런 고문서들이 많이 번역되어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또 한 가지, 드라마 작가들이 이런 책을 좀 열심히 읽어 고증에 충실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