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 문명과 야만으로 본 중국사 3천 년
줄리아 로벨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중국사에 대한 냉혹한 비판이 돋보이는 책이다.
사실 나는 유구한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 일견 서구인의 눈으로 본 비판적 시각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국수주의에 매도되지 않은 엄격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새겨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현재 중국의 문제점을 너무나도 잘 짚어 내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외세 세력 추종자로 몰아 세우며 오히려 민족주의의 강화를 통해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려는 공산당 정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마음을 흔들었다.
올림픽에서 보여준 중국 관중들의 혐한주의도 왜곡된 민족주의의 발로이며, 중국를 개방시키리라 믿었던 인터넷이 오히려 폐쇄적으로 내부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중국의 이런 예를 봐도 국가의 이익에 봉사하는 역사 연구 태도는, 또 특히 민족주의는 보다 나은 진보를 위해 제거되야 할 이데올로기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중국 공산당은, 코뮤니즘의 이념 보다는 일당 독재라는 과거의 전제주의적 전통을 잘 승계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중국의 폐쇄성을 만리장성으로 대변되는 국경수비에 두고 있다.
만리장성이 과연 중국의 5천년 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자부심의 원천인가?
저자는 만리장성에 덧씌워진 환상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진나라 이전부터 장성을 쌓는 일은 계속되어 왔고, 현재 관광용으로 보여주는 벽돌로 쌓여진 부분은 명 때 보수된 일부 구간에 지나지 않으므로 근본적으로 만리장성은 벽돌 장성이라기 보다는 흙벽이라고 한다.
만리장성을 쌓느라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인민들의 무수한 피가 벽을 따라 쏟아졌으며 실제로 국경 수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에 그쳤다면 일종의 중국 문화 깎아내리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안에 숨겨진 중국의 팽창주의 욕구와 폐쇄적 민족주의, 문화 우월주의 컴플렉스를 짚어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수천년 간 지속된 그런 감정들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중국인의 자부심 위에 덧씌워져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발달에 저해가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21세기 현대 중국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만리장성으로 대표되는 중국인들의 역사 인식은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만리장성은 그저 단순한 문화 유산이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수확은 중앙 아시아 유목민들의 역사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언제나 중국인의 관점에서 중국의 역사책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봐 왔기 때문에 막연히 유목민들은 중국 문화를 침범하는 오랑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비단 과거 역사 때문이 아니라, 현재 그들의 삶이 뒤쳐졌기 때문에 더욱 과거의 역사가 초라해 보였을 것이다.
만일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세계 경제에 뒤쳐져 있다면 일본 역시 중국 문화권의 수혜를 받지 못한 초라한 문명으로 평가절하 됐을 것이다.
오늘날 그들의 자부심이 되는 상업주의, 장인정신, 독자적인 문화 등은 오히려 위대한 중국 문명, 특히 유교 정신에서 벗어난 이단적이고 한 수 아래의 소박한 이류 문명으로 치부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을 뿐더러 현재도 경제란에 허덕이는 유목민의 역사를 편견없이 바라본다는 일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저자는 중국과 유목민의 대립을 대등한 입장에서 서술했고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서양인이라는 점이 그녀를 편견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시킨 것 같다.

흔히 터키인의 조상이라 일컫어지는 투르크인들, 즉 돌궐은 북위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선비족은 연나라를 세워 고구려와 분쟁했는데 모용씨, 탁발씨가 전연, 후연, 북연 등을 세워 중국 국경을 수시로 침범했으며 요와 금은 남쪽의 송나라와 함께 중국을 양분했으므로 송이라는 나라 자체가 통일 왕국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몽골은 비록 13세기 이후 패망하여 중원을 넘겨 줬으나 그 후에도 끊임없이 명을 괴롭혀 가순제로 하여금 엄청난 길이의 성벽을 쌓게 만들었다.
저자는 이 점을 주목하는데, 중국이 유목민과 교역을 거부하고 고립정책을 취할 때 장성의 길이는 하염없이 길어졌다.
물론 이것은 싸워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한 무제처럼 정복하러 원정길을 떠날 힘은 없고 자존심은 상하니 성벽을 쌓아 스스로 내부에서 고립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만리장성의 역사적 의의라고 본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국가 정책.
이 장성을 쌓기 위해 중국의 황제들은 수많은 물자와 인적 자원을 쏟아 부었고 실제로 효율적인 방어선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착각하면서 국가를 점점 수렁으로 몰고 갔다.
중국이 팽창 정책을 취할 때는 장성을 유목민들의 터전 안쪽까지 확장시켜 오히려 그들을 초원에서 쫓아내는 방식을 취한다.
농경으로부터 수백리 떨어진 곳에 장성을 세우는 행태는, 오늘날 이스라엘이 주민 보호를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침투해 성벽을 쌓고 있다는 점과 비슷하다.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한반도의 경우 완전히 중국화 되어 중국인의 문화를 내면화 시켰기 때문에 그들과 대항하는 유목민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일본은 유교를 수용했으면서도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서 중국 문화에 함몰되지 않고 독자적인 문화를 지킬 수 있었고 그 점이 고대에는 그들을 뒤쳐지게 했으나 근대 이후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된 원동력이 된 것 같다.
고구려의 경우 학자들의 말마따나 다민족 국가였고 유목민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해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졌으며 기본적으로 중국 문화에 크게 복속되지 않았다.
그 점이 고구려를 중국과 대항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로 내려오면 사정이 달라지는데 일단 고구려처럼 초원에 영토가 없으니 유목민과 섞일 일도 없고 기본적으로 완벽한 농경 정착민이었으므로 중국인과 똑같은 입장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선진적인 중국 문명을 내제화 시키는 것이 그들에게는 생존 방식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라 이후 한반도가 사대 외교로 일관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이해된다.
가치관의 완벽한 공유라고 할까?
그러나 저자는 냉정하게도 중국이 안남, 중앙아시아, 일본 등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역시 중국인에게는 그저 오랑캐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임진왜란 때 원정 온 명의 안하무인, 오만방자한 태도는 속국 미개인들에 대한 당연한 태도였으리라.
체면치레 하느라 조공 무역으로 항상 허리가 휘던 중국은, 역시 임진란 원정 때 어마어마한 은을 소비해 몰락에 한 몫을 거든다.

500 페이지에 달하는 비교적 두꺼운 책이지만 마치 소설을 읽듯 흐름이 자연스럽고 주제가 분명해 읽기 편했다.
중간 중간에 한자나 중국 역사에 다소 무지한 면을 보여 역자가 정정한 부분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권을 이해하는 외국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 보고 넘어갔다.
아마 한국인이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통사를 쓴다면 그들 눈에는 당연해 보이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종종 저지르리라.
특히 삼국지의 조조를 단순히 한의 장군으로 소개한 걸 보고 문화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꼈다.
반갑게도 고구려의 이야기도 한 단락 나온다.
고구려가 중국 문화에 대항하는 유목 국가의 일종으로 언급된 것이다.
저자는 고구려와 다른 한반도 두 국가가 다른 성격의 국가였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문득 서구인이 쓴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에 대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보다 객관적인 눈으로 이해타산 관계가 없는 3자의 입장에서 보는 우리의 역사는 어떤지 궁금하다.
만리장성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했다는 점이 단점으로 꼽힐 수 있겠으나 중국 문명에 대한 통사로 훌륭하고 무엇보다 현재의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문화적 우월성에 대해 꼬집은 점은 저자의 탁월한 식견이 돋보인다 할 수 있겠다.
반대로 장성의 의미를 강조한 일본인이 쓴 <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를 다시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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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것은 싫다
조홍식 지음 / 창비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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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지 꽤 된 책이라 아직 유럽연합 얘기도 없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시의성에서 떨어지는 편이다.
외국 생활 몇 년 한 다음에 마치 유학생 와이프처럼 신문도 잘 안 읽고 그저 미국 유치원은 어떻더라, 동네 아줌마들은 어떻더라, 이런 수준의 체류기는 정말 신물이 나기 때문에 가급적 선택을 자제하는데, 이 책은 일단 창비라는 출판사가 믿음직스러웠고 저자가 프랑스에서도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신뢰감을 가지고 골랐다.
전체적인 느낌은 썩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런대로 읽을 만 했다.
저자의 후기에도 나오는 바지만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공평하게 한 문화를 바라본다는 건 참 어려운 일 같다.
그래도 저자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인지 비교적 공정하게 비판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분석하려고 애썼다는 느낌이 든다.
외국인이 한국 사회를 분석한 글을 읽으면 수박 겉핣기다, 혹은 정형화된 편견에 사로잡혀 그 틀에 맞춰서 본다,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는데 역시 타 문화권에 대한 책도 선진국일 때는 동경을, 후진국을 때는 한 수 아래로 접어서 동정과 연민을 남발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한 사회를 전체적으로 아우른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분위기 정도는 잡아낼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책에 나온대로 한국인은 체면을 중시하고 프랑스는 양심을 우선시 한다.
체면과 자본주의의 천박한 결합이 바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가 아닌가?

프랑스인의 기질 중 가장 호감이 가는 것은 바로 취향의 다양성이다.
남들 하는대로 따라 하면 중간은 간다는 우리 속담과는 다르게 이들은 몰개성을 가장 두려워 한다.
확실히 한국은 집단 문화가 대세인데 비해 유럽 쪽은 개인주의가 훨씬 발달한 느낌이 든다.
벨기에에서 온 여대생이 주간지에 기고하기를, 한국인들은 동성애자를 혐오한다는 발언을 공개 석상에서 노골적으로 한다고 비난했다.
누구나 자기 신념에 맞춰 좋고 싫고가 있을 수 있지만, 공개적으로 드러내느냐 여부는 적어도 사회가 통용하는 정의감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를 싫어할 수 있지만 공개적으로 그들을 비난하고 여론몰이를 한다는 건 개인의 인권과 자유라는 더 큰 원칙에 위배된다.
이런 걸 좀 더 지키는 쪽이 프랑스 같다.
선진국이란 경제적 부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자유도 있어야 하며 개인의 삶이라는 작은 틀로 볼 때는, 간섭받지 않을 권리, 취향을 존중받을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된다.

프랑스의 엘리트주의에 대해서는 솔직히 반신반의다.
저자의 말마따나 명분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당연시 하여 입으로는 평등 외치면서 실제로는 불평등을 가장하는 한국 사회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스무 살 때 입학한 대학으로 평생이 결정되는 프랑스 사회도 뭔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스무 살은 과연 그 사람의 평생 능력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순간일까?
유럽 사회가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계급 상승이 어렵다는 말은 종종 들었다.
반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노력하면 상층부로 올라갈 수 있는 역동적인 사회라고 한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치맛바람과 미친 사교육 열풍이 난립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계층 이동이 어려운 사회는 뭔가 이건 아닌데, 싶다.
엘리트가 이끄는 사회, 일견 능력주의로 당연한 것 같은데도 심정적으로 완전히 공감하기 힘들다.
마치 인간의 기본권이 점차 향상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듯 이런 엘리트주의, 능력위주 원칙도 진보될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방법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때때로 선진국을 부러워 하는 것은, 그들이 누리는 경제적 여유와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뭔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일종의 희망을 제시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왕정 시대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진보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처럼 더 나은 사회 제도와 분위기가 있다는 가능성, 그것을 먼저 현실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희망을 갖게 된다.
그래서 가장 진보됐다고 알려진 미국 사회가 무너지는 걸 보면 한숨이 나온다.
대체 우리가 사표로 삼아야 할 모델은 그저 머릿속에나 있단 말인가?

300 페이지 정도로 분량도 짧고 내용도 평이해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경제력은 미국이나 일본에 뒤질지 몰라도 여전히 프랑스는 문화 대국이고 개인의 자유나 인권 등의 문제에서 앞서 가는 나라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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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고대 - 아시아연대총서 5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 삼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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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문에 대한 관심 때문에 다시 읽게 됐다.
220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알차다.
재일 사학자라는 저자의 신분 때문인지 일본과 한국 역사에 대해 상당히 객관적인 관점을 취한다.
궁극적으로는 일국사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고대사를 제대로 복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누누히 언급되어 온 바지만, 민족이나 국사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기껏해야 19세기 말이고, 일본은 서양에 대해, 조선은 일본에 대해 대립항으로써 자기 규정을 위해 민족과 국사를 개발해 낸 것이므로 21세기의 정체성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역사학이 국민교화에 이용된다는 어느 학자의 지적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 같다.
임지헌 교수가 고구려사를 변경사로 보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에 대한 반론으로 만약 제 민족의 역사로 챙기지 않는다면 누가 그 역사를 의미있게 여기고 연구하고 발굴하겠냐고 현실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말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국사를 넘어서자는 주장은 민족주의 역사관에서 한 단계 나아가는 방향임이 분명하다.

다시 한 번 확인한 바지만, 광개토대왕비문 조작설은 말 그대로 음모에 불과하다.
일본인 대위가 발견하기 전에 이미 먼저 뜬 탁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있지도 않은 주어와 목적어를 일부러 집어 넣어 고구려 쪽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한국 학계의 시도에 반대한다.
오히려 비문의 전체적인 형식으로 봤을 때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강조한 다음, 이렇게 힘든데도 불구하고 왕이 직접 친정하여 적을 섬멸했다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왜가 한반도로 넘어와 침략한 것은 사실이고,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왜를 물리쳤다고 본다.
일본에서도 광개토왕에게 패한 것은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대륙 진출이 좌절됐다고 해석한다.
중요한 것은 왜가 한반도에 침임했다고 해서 그것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주장이야 말로 식민지 시대 내선일체를 주장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 낸 근대의 소산물에 불과하다.
또 저자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주장도 억지라고 본다.
조공을 바치는 것은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이 정도지, 정치적 지배력까지 가졌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의 이런 해석이 제일 깔끔하고 무리가 없다고 본다.

저자는 수묘인들에 대해 자세히 논한 기사에 대해서도 고구려가 5부 체제를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한 예시로 든다.
이 점은 이종욱의 주장과 매우 다른데, 이성시는 계루부가 왕권을 계속 이어갔으나 끝내 부를 초월한 지배력을 갖기 못했다고 본다.
5부 체제설은 역사서에도 자주 등장하므로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고구려의 절대 왕정제를 주장한 이종욱의 의견에 더 무리가 따른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책봉 체제에 대한 언급도 신선했다.
저자는 일본 학자의 동아시아 문화권 주장에 비판적이면서도 당시 한자와 한역불교, 유교, 율령 등을 매개로 베트남, 일본, 삼국 등이 책봉 의식을 통해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여 있었음을 지적한다.
책봉은 중국의 화이사상을 받아들여 예를 행함으로써 중국 문화권의 일원이 된다는 일종의 형식 의례였다.
이 때 중국 문화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수당 왕조의 권위를 빌어 각 나라들이 내부의 응집을 꾀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문화권을 논할 때 요즘처럼 중국에 대한 굴욕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하겠다.
한자 역시 내부에서 글자 사용에 대한 욕구가 커져셔라기 보다는 중국과 혹은 외국과의 관계 정립에 필요했기 때문에, 즉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큰 세계에 편입하기 위해 도입한 걸로 본다.
이런 걸 보면, 고구려 역시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원으로 활약했음은 너무 당연한 사실이고 왜 이 점을 비틀고 왜곡해서 중국 측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에 나온 시바 료타로에 대한 비판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감상적 직관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얘기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막연하게 이럴 것이다, 혹은 당위성에 입각해 이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과연 일본이 유교 대신 법가를 취해서 가족주의를 극복하고 화폐경제를 발전시켜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에 의거해 오늘날의 근대화를 이뤘는가?
또 한국은 유교 문화에 함몰되어 가족주의 속에 개인과 상업을 억압하고 근대화에 실패했는가?
이런 관념론을 들을 때마다 이른바 지식인 내지는 방송인, 문화인 하는 사람들의 발언이 얼마나 무책임 한지를 새삼 느낀다.

한 가지 언급해야 할 사실은 발해에 대하여 말갈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점이다.
중국은 당의 지방 정권으로 생각하고 한국은 고구려 지배층을 강조한다.
저자는 지배층이 누구냐가 한 나라의 민족 정체성을 결정하는 일이냐고 반문한다.
또 고구려 계층이 일부 지배층에 편입될 수는 있었겠으나 기본적으로 발해는 여러 말갈 부족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나라이고 신라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던 반면, 당과 일본과는 활발한 교류 활동을 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현재 국사학계에서 남북국 시대 운운하는 것은 억지스럽다고 평한다.
과연 신라와 발해가 남국과 북국으로 나누어져 언젠가는 통일해야 할 한 민족으로 생각했을까?
그것이야 말로 현재의 남북한 분단 상황에 고대를 투영하는 비역사적인 관점이다.
나는 이 점에서 오히려 이종욱의 주장처럼, 고려는 명백히 신라의 인민과 문화를 계승했으며 신라의 통일이 갖는 의미는 훼손될 수 없다고 본다.
말갈족은 숙신, 읍루 등으로 불린 북부 말갈족과 예, 옥저 등에 살던 남부 말갈 등으로 나누는데 유목 집단이었던 만큼 다양한 부족이 있었고 후에 여진족 만주족 등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그러니 한 발 더 나가면 금나라도 한민족의 역사에 포함되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만 하다.
발해는 주로 남부 말갈 중심으로 성장했고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북부 말갈족, 즉 흑수 말갈 쪽을 통합해 갔다고 한다.

민족주의 역사관의 문제점은 모든 민족이 자민족 관점에서 특히 오늘날의 정세에 비춰서 당위적으로 고대를 해석하므로 통합적인 시야를 갖기 어렵다는 점이다.
근대에 투영된 고대사, 저자의 말마따나 일국사를 넘어서야 좀 더 입체적으로 고대를 복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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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의 모든 것
이우상 지음, 성학 그림 / 푸른역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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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재밌게 읽었다.
400페이지라는 분량이 꽤 되지만 사진이 많이 실리고 여행기다 보니 평이한 문장으로 되어 있어 술술 잘 넘어갔다.
무엇보다 그 전에 도올의 앙코르 여행기와 메콩의 슬픈 그림자라는 책을 먼저 읽어 사전 지식이 있어서 쉽게 넘길 수 있었다.
솔직히 세 권을 연달아 읽다 보니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다.
다음에 읽을 책 역시 앙코르와트 관련 서적이니 이제 좀 지겨워지려고 한다.
그래도 전혀 관심도 없고 사전지식도 없는 한 문명이 나에게 실체를 가지고 다가온 점은 고무적인 일이다.
사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앙코르 와트가 불교 사원인 줄 알았다.
태국 근방은 다 불교 국가인 줄 알았고 사원이라고 하니 당연히 부처님을 모시는 사원이라고만 생각했다.
알고 보니 힌두교 사원이 대부분이다.
특히 크메르 문명은 석재 문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사원이 다 돌로 지어졌다.
목재 건축이 대부분인 한국과는 꽤 다른 느낌을 준다.
또 모든 사원의 벽과 기둥에 빽빽하게 들어선 부조와 조각들이 특징적이다.
밀림이라는 자연환경 때문이었을까?
대리석을 만드는 화강암은 드물고 대부분이 사암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손대면 툭 하고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고 한다.
유네스코 문화 유산에 등록되어 많은 나라에서 복원 작업을 후원하고 있다니 다행스럽다.

저자는 앙코르와트에 특별히 꽂혀서 같은 곳을 세 번이나 방문한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이러니 감히 <앙코르 와트의 모든 것>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여행기를 낼 수 있었으리라.
아무리 감동적인 것이라도 연달아 보고 또 보면 살짝 지루해지기 마련인데 해년마다 방문할 정도로 앙코르 와트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 모양이다.
어설픈 가이드북 대신 이 책 한 권 들고 가면 충분한 감상 길잡이가 될 만큼 꼼꼼하게 유적지를 탐방한다.
아쉬운 점은 역시 사진이다.
개인이 여행의 기록 수준에서 찍다 보니 사원의 아름다움을 다 보여주기가 어려웠고 책값 때문인지 전부 흑백으로 실어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었다.
현지의 운전 기사인 스판과의 우정은 눈시울이 시큰했다.
그런 에피소드들이 앙코르 와트를 더욱 가깝게 느끼도록 했으리라.
그러고 보면 문화란 참 대단한 것이다.
앙코르 와트라는 거대한 밀림 속의 사원이 아니라면 세계 최빈국인 캄보디아에 누가 관심이나 갖겠는가?
프랑스 제국주의의 역사는 안타까운 일이나, 앙코르 문명 복원에 대한 초석을 놓은 점이나 전세계적인 관심을 환기시킨 점은 정치와는 분리해서 평가받을 만 하다.

유적지에 치중하다 보니 크메르 제국의 역사나 캄보디아 현대사 부분은 많이 생략되어 아쉬웠다.
기왕이면 캄보디아라는 나라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까지 적절하게 첨부했으면 좋았을텐데.
도올은 킬링 필드를 미 제국주의 시각이라 비판하면서 크메르 루주의 학정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시선을 보냈으나 이 책의 저자는 4년간의 학살을 분명하게 끔찍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어설픈 감상에 젖어 희생자들의 비참함을 무시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 생각한다.
미국이 캄보디아에 쏟아 부은 폭탄은 물론이고, 수십만의 양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폴 포트 정권의 끔찍함도 마찬가지로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던 캄보디아가 결국은 왕정으로 복귀한 게 특이하다.
왕이 상징적인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그래도 조선의 마지막 왕 보다는 국민들에게 더 많은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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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으로 가는 길
강석경 지음, 강운구 사진 / 창비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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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참 좋은 책을 만났다.
역시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마추어들과는 다름을 확실히 보여준다.
강석경의 소설을 언제 읽었던가?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숲 속의 방> 이라는 중편 소설을 읽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나 워낙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작가의 이름은 확실히 각인이 되었다.
양띠 아내를 기념하기 위해 딸들의 이름을 혜양, 소양, 미양으로 지었다는 책 속의 에피소드가 지금도 정겹게 기억하고 있다.
강석경의 글이 아니었다면 손에 안 댔을 책이다.
그렇고 그런 감상 나부랭이나 지껄이는 기행문 내지는 답사기, 정말 지겹다.
특히 손미나의 스페인 여행기처럼 블로그에나 올릴 글을 단지 아나운서라는 유명세 때문에 버젓이 내놓고 베스트셀러까지 되는, 개나 소나 다 내는 그런 여행기는 안 읽고 싶었다.
공지영 소설도 재밌게 읽었는데 뜻밖에도 그의 <수도원 기행>은 별 감흥이 없어 감명을 주는 기행문 쓰기가 꽤 어려운 일임을 느끼는 바다.
강석경의 이 책은, 깊이가 있고 문장의 수려함과 애틋한 감성이 잘 녹아 있다.
사실 나는 제목이 <능으로 가는 길>이길래 조선왕릉 답사기인 줄 알았다.
유명한 작가라면 당연히 서울에 살 것 같고 그래서 당연히 서울 인근의 조선왕릉이라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그녀는 경주에 뿌리를 내렸는데 그 곳의 고분들을 둘로 보고 쓴 글이다.
사진도 참 아름답다.
어쩌면 이렇게 햇빛 찬란한 능 주변을 잘도 잡아 냈는지.
글 뿐 아니라 사진 때문에라도 소장하고 싶은 책 중 하나다.
강석경의 단아한 기행문과 잘 어울리는 사진이다.
한 사진작가가 박물관 관람에 대해 쓴 책이 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이 나온다.
박물관 가면 사진 찍으려고 애쓰지 말아라, 차라리 그 시간에 더 많이 감상해라.
어설프게 찍어 봤자 나중에 보면 별 감동도 없다, 오히려 박물관을 나오기 전에 도록을 구입하거나 엽서를 사는 게 훨씬 더 기억을 붙잡는데 도움이 된다...
정말 그 말에 100% 동의한다.
어두운 구석에서 몰래 사진 찍어 봤자 나중에 보면 어설퍼서 그 때 감동을 집어 내기는 불가능하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어쩔 수 없는 차이인가...

만약 내가 얼마 전 경주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공감하면서 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문화재 답사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가이드와 함께 경주를 돌아다녔는데 대충 봤던 것도 설명을 듣고 보니 모든 게 새로웠고 특히 말로만 듣던 불국사는 실제로 가서 보니 흔히 보던 절과는 매우 다른, 세련되고 화려하며 또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의 글에도 불국사의 아름다움이 소상히 기록됐다.
유리벽으로 가려 놓은 석굴암은 사실 잘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넓은 터에 자리잡은 불국사가 정말 신라인들이 꿈꾸던 서방정토처럼 느껴졌고 관광하러 온 외국인들에게도 괜히 자랑하고 싶어질 정도로 마음에 꼭 들었다.
능도 그렇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규모부터 엄청나게 크고 양식도 달라 한참을 흥미롭게 들여다 봤다.
십이지신상이나 서역인의 모습을 한 무인석, 사자상 등이 무척 흥미로웠다.
첨성대도 직접 가서 눈으로 보니 사진으로 볼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인지 경주는 높은 빌딩이 없고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편안한 분위기라 신라 시대의 문화재를 즐기기에는 최적의 도시 같다.
저자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경주를 다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느낀 것은 역시 우리의 전통 문화야 말로 우리의 힘이고 아름다움의 근원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서구 문화의 유적지에 관한 책이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감동받으면서 읽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세계화 시대가 됐다고 하지만 한국의 아름다움은 한국인이 가장 정확히 느끼다는 생각이 든다.
보편화 되지 못한 문화일수록 더욱 그렇다.
르네상스 시대의 숨막히는 그림들을 보면서 가슴이 울컥해질 때도 많지만, 경주의 능을 보면서 느끼는 애틋한 감정과는 다른 것 같다.
내가 자란 문화권, 나에게 형성된 미의식은 한국이라는 문화권에서 형성된 것임을 절절히 느낀다.
그래서 여전히 세계화 시대에도 우리의 문화는 보존되고 또 재해석 되야 마땅하다.
나이가 먹는 걸까?
정말 요즘에는 우리 문화에 무한한 관심이 생기고 또 그것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애절할 수가 없다.
아마 외국인들은 박물관이나 능에 가서 이런 애틋한 감정을 느끼기 힘들 것이다.
마치 내가 유럽에 가서 그들의 건축물을 보면서 와, 멋지다 하고 끝인 것처러 말이다.
국수주의자가 되는 건 아닌데, 또 민족주의는 정말 싫은데 적어도 미의식에 있어서는 전통의 아름다움을 꼭 지키고 싶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솔제니친의 가슴 사무친 말이 이 책에도 등장한다.
모든 신념과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상의 것, 아름다움이, 예술이 구원이 될 수 있음을 저자는 능을 보면서 토로한다.
인용된 문장들도 어쩜 그렇게 빼어난지, 몇 번을 옮겨 적었다.
언제쯤 나도 이런 그럴듯한 기행문을, 감상문을 써 볼 수 있을까?
문장의 훈련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일 듯 하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 깊이 알싸해진 감동을 받으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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