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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로 먼저 접한 책이다.
3시간이 넘는 다소 지루한 영화이기도 했는데 분위기가 매우 독특해서 비교적 열심히 봤던 것 같다.
특히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워낙 멋지게 나와 인상깊게 본 영화다.
소설 속의 토마스는 남자 배우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 같은데 테레사와 줄리엣 비노쉬는 좀 다른 느낌이다.
영화 속의 테레사는 보다 주체적이고 토마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테레사는 줄리엣 비노쉬가 풍기는 이미지 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종속적인 느낌을 준다.
어쩌면 줄리엣 비노쉬라는 여배우가 주는 이름값 때문에 영화 속에서 더 큰 비중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꽤 있었는데 책을 보니 그제서야 주인공들의 행동이 이해된다.
앞뒤 설명 없이 행동들만 보여 주다 보니, 사건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튀는 느낌을 줬던 것이다.
이래서 문학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보다.
테레사는 어머니로부터 상처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름다웠던 어머니는 테레사를 임신하는 바람에 무능한 남자에게 시집가 결혼 생활에 실패하고, 바람둥이 두 번째 남자를 만나 끔찍한 인생을 산다.
그녀는 자기에게 전혀 반항하지 못하는 딸을 마음대로 조종함으로써 남편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다.
또 자신의 미모가 시들어 가고, 딸이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에 대해서도 질투하고, 육체를 조롱함으로써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인생을 사는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 가학적 취향을 가진 여자다.
일종의 정신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 힘이 없는 테레사는 오직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길 소원했고 소도시에 나타난 젊은 바람둥이 의사 토마스에게 인생을 건 모험을 시도한다.
영화 속에서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기 때문에 왜 느닷없이 테레사가 가방을 들고 프라하에 나타났는지 좀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토마스 역시 이혼남으로 나온다.
그에게 섹스는 일종의 놀이로써, 테레사를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여자들과 하룻밤을 지내는 걸 아무 갈등없이 해낼 수 있는 다소 특이한 남자다.
첫번째 결혼이 준 상처는 더 이상 결혼 생활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했고 테레사와의 결혼은 사회적 의미의 결혼이라기 보다는 오갈 데 없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사는, 일종의 가족과 같은 그런 관계였다.
그러므로 그는 테레사에게 정절을 지키지 않고 그것 때문에 테레사가 괴로워 하는 것을 무시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참 독특한데, 나는 테레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가진 게 없다.
경제적인 것, 감정적인 것을 모두 토마스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가 떠나가 버릴까 봐 두려워 한다.
그런 비참함이 싫어 스스로 토마스 곁을 떠나기도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일종의 운명과 같은 관계라 토마스는 다시 위험천만한 프라하로 테레사를 따라 돌아온다.
그러나 역시 재결합 후에도 토마스의 가벼운 사랑놀음은 그치지 않고 테레사는 사랑과 섹스가 별개일 수 없는 자신의 답답한 현실 때문에 괴로워 한다.
그녀는 토마스와의 관계에서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비참해 한다.
사비나는 꽤 매력적인 여자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줄리엣 비노쉬에 가려 큰 비중이 없었는데 책에서는 사비나의 관점이 자주 등장한다.
또 공산주의 치하의 답답한 사정도 상세하게 드러난다.
러시아가 지배하는 공산주의 사회가 개인들에게 미친 영향이 세 사람의 입장에서 자주 묘사된다.
문득 <닥터 지바고>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러시아 혁명과 유리 지바고 혹은 라라와의 관계처럼 말이다.
취리히에서 사귄 애인 프란츠는 잘 생기고 잘 나가는 매력남으로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좀 형편없이 나왔다.
또 사비나가 그를 떠난 이후 비참해 하는 장면에서 끝났는데 소설을 보니 아내와 이혼 후 여자 제자와 새로운 인생을 사는 걸로 나온다.
이 사람도 한 사람의 주인공으로 꽤 비중있게 그려진다.
이 소설 최고의 백미는 느닷없는 죽음에 있는 것 같다.
영화에서도 그 장면이 제일 인상적이었는데 소설에서도 두 사람은 시골로 내려가 모처럼의 갈등없는 시간을 보내다 어처구니 없게도 브레이크 고장으로 동시에 사망하고 만다.
책을 쓰는 시점도 독특하고 심리 묘사도 훌륭하고 새로운 느낌의 소설이었다.
위대한 문학과 통속 소설의 차이는, 바로 이런 심리 묘사, 혹은 배경 설명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사건 위주로 진행되는 소설이 아니다 보니 중간중간 맥을 놓칠 때가 많다.
영화도 비교적 소설의 느낌을 잘 표현했지만 역시 책을 읽지 않는다면 제대로 영화를 감상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 재독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