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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두 얼굴
김태훈 지음 / 창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인상적이고 재밌게 읽은 책이다.
참고문헌이나 각주 하나 없이 온전히 지문만으로 720페이지를 채운 꽤나 두꺼운 책이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시각으로 쓰여진 책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술술 읽을 수 있었다.
보통 내 독서 속도가 한 시간에 60페이지 전후인데 이 책은 100페이지까지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문장이나 내용이 쉽고 재밌다.
아마 사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썼다면 보다 전문적이고 문장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여튼 나처럼 일반인이 교양서로 읽기에 적당한 책으로 마치 소설을 읽는 것과도 유사했다.
마지막에 이순신의 경력을 분석한 장은 꽤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읽었다.
당시 벼슬을 현재의 공무원 직위와 비교한 점이 특이하고, 이순신의 억울한 파직이나 파격적인 승진 등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나름대로 비평한 부분도 신선했다.
이런 부분이 바로 일반인의 새로운 시각이 아닐까 싶다.
물론 현재의 관점으로 당시를 본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해석할 때는 사료와 별 상관이 없는 당시 정세나 문화, 풍습 등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진실에 가까운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 꽂혀 다시보기를 하는 중이라, 여기 나온 전투들이 좀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드라마만 볼 때나, 책만 볼 때와는 다른 독특한 문자와 영상의 결합이었다.
사실 이 책은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고, 이번에 드라마를 보면서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반해서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욕구에 다시 집어든 책이기도 하다.
제목은 <이순신의 두 얼굴>이라고 다소 자극적으로 붙였지만 실제 내용은 이순신의 상황을 보다 현실적으로 분석한 정도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가 파직을 당했다면 일반적으로 상급자가 탐욕스럽고 우매해서 파직시켰다는 식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요즘 현실과 비추어 봤을 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정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식으로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확실히 그는 드라마에 나오는대로 꽤 과묵하고 진중하며 대담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실 드라마를 보면서 이순신이 너무 침묵을 지켜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여러 일화들을 살펴 봐도 그는 꽤나 고집스럽고 주관이 확실하며 시시껄렁하게 농담따먹기를 한다거나 허세를 부리는 식의 위선을 굉장히 싫어했을 것 같다.
방향이 정해질 때까지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한 번 정하면 죽음을 불사하고 밀고 나가는, 전형적인 무관의 성격 같다.
드라마가 보여 주는 이순신의 이미지와 많이 흡사하다.
그러고 보면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 작가가 꽤 연구를 많이 한 것 같다.
책과 드라마의 재밌는 차이점은, 이순신의 실각을 보는 관점이다.
드라마에서는 당연히 이순신에게 무리한 부산 출격을 요구한 정부, 특히 선조를 비난하지만, 책에서는 오히려 이순신의 지나친 신중함이 그를 권좌에서 끌어 내린 것으로 해석한다.
어쨌든 가토는 첩보에 입수된 대로 그 시각에 도해를 했고,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했으니 말이다.
전격적으로 체포를 명령한 드라마와는 달리, 책에서는 조정이 꽤나 신중하게 갑론을박 했음을 보여 준다.
실록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니 신뢰할 수 있다.
뜻밖에도 처음부터 무조건 체포를 주장한 것을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이순신 체포에 가장 열성적으로 나오는 윤두수, 윤근수 형제는 원균과 반목하고 있으니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하고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로 체직시키자는 의견을 낸다.
원균과의 관계는 난중일기에도 무수히 드러나지만, 상부에 올린 공식 보고서에서도 가감없이 나온다.
조정에서도 둘의 불화를 많이 염려하였고 이순신이 심지어 통제사가 된 후 원균 때문에 사임하겠다는 초강수까지 두기도 한다.
조정에서는 한쪽 편을 드는 대신, 원균을 수사에서 병사로 자리를 옮겨 앉게 함으로써 무마한다.
이순신의 강직한 성품과 역시 꼿꼿한 원균이 꽤나 대립했던 것 같은데, 궁극적으로 봤을 때 이순신이 상관임에도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계속한 원균의 성품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하여튼 처음에는 부산 진격을 거부한, 어찌 보면 항명을 한 이순신을 조정에서는 품계를 낮추자는 온건한 의논을 한다.
뜻밖에도 유성룡이 적극적으로 나서 이순신을 비난하기도 하는데, 자신이 천거한 사람이 왕명을 거역하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다 보니 그 역시 보신책으로 역공세를 편 게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전라좌수사로 내려 앉게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곧 사간원 등에서 들고 일어나 이순신은 압송된다.
어쩌면 대전에서만 대신들이 점잖은 논의를 하고, 뒤에서 여론을 일으킨 건지도 모른다.
하여튼 선조는 드라마와는 달리, 이순신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갖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나라를 전쟁에서 건진 영웅에게 호의를 갖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어쩌면 지방의 무관 따위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여러 번 승리를 거두니 그런 놈도 있었구나 하고 겨우 관심을 갖게 됐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이순신이 항명하여 압송이 논의됐을 때 유성룡에게 그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서 심지어 글을 할 줄 아는가, 이런 초보적인 질문까지 하니 말이다.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나라에서 더구나 문신들이 지배하는 조정인데, 국왕이 지방의 장수 하나에 극한 질투감을 보인다는 건 역시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설정 같다.
하여튼 이순신은 갑자기 여론이 악화되면서 서울로 불려 올라 간다.
전쟁 중에 수군 최고 지휘관을 경질하는 건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가 왜군의 부산 진입을 막지 못한 것을 정유재란의 결정적 시작으로 판단했고 더군다나 왕명을 우습게 안 죄를 엄중히 추국한다.
이것은 이순신의 신중하고 대범한 성격 탓이가도 한 것 같다.
그는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의 여러 자료에서 어지간해서는 잘 움직이지 않는 신중론을 편다.
그래서 초반에 원균이 왜군에게 패한 후 구원을 요청하는데도 명령을 받지 못했다고 도와주지 않음으로써 그의 원성을 사기도 한다.
아마 현장지휘관의 판단으로 봤을 때 부산 진격은 무리수가 많다고 생각하여 왕명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판단을 믿고 거부했던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그의 대범함이 나온다.
아무리 현지 판단이 그렇다 해도 왕에게서 내려온 명령을 거부하는 건 일종의 항명이니 하는 시늉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그는 왜군이 바다를 건너 오는 동안 절대로 함대를 움직이지 않는 극히 신중한 자세를 편다.
보통 진중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그 사건이 있기 얼마 전 위험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광해군이 난중에 무과를 실시하려고 하는데 자신 휘하의 수군을 한 명도 안 보내고 일종의 보이콧을 한 것이다.
광해군은 당시 분조를 이끌며 전선에서 왕의 대행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수군에게 불리하다 하여 과거를 거부한 것은 굉장히 도발적인 행위일 뿐더러 전시였기 때문에 용납됐을 것이다.
광해군은 당장 처벌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 꾸짖었으나 결국 이순신의 요청대로 진중에서 시험을 보되, 말타기 등과 같은 수군에게 불필요한 시험은 안 보는 걸로 결론을 짓는다.
당시는 그냥저냥 넘어갔으나 이순신이 몰리게 되자 이 때 사건도 큰 악재로 작용한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그는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왕명도 거부하는 굉장한 배포와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다.
부당하다고 여기면 상관에게 맞서는 장면이 난중일기나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결정할 때는 오래 생각하고 목표가 서면 뒤도 보지 않고 돌격하는 것, 그런 신중함과 대범함이 그를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조선 최고의 영웅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냉철한 모습을 많이 보인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그의 일기에는, 법을 어겼다 하여 곤장을 친 예가 무수히 나온다.
또 군사가 부족하여 친척이나 이웃이 대신 메꾸는 관례를 나라에서 민심 때문에 금지하자 전쟁 중에는 허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반발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적의 섬멸이라는 대의가 우선이었을 것이고, 이런 점은 그가 단지 인기에 영합하는 리더가 아닌 냉철하고 무서운 지휘자임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영웅적인 면모가 더욱 돋보일 뿐더러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첩을 얻어 주위를 소란하게 한 원균과는 달리, (넬슨 역시 해밀턴 부인과 간통을 저지른 사건이 책에 등장한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마저 멀리한 자제심을 보인다.
꽤나 엄숙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을 것 같다.
군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명량해전처럼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는 심지어 대장선이 가장 앞장 서 적을 공격하는 대범함과 솔선수범을 보여 준 이순신, 확실히 승리하는 이에게는 그만한 능력과 위대함이 있음을 새삼 느낀다.
드라마에서 보여 준 이순신의 이미지와,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낸 이순신의 이미지가 거의 일치하여 읽는 내내 흐뭇하고 즐거웠다.
이순신의 두 얼굴이 아니라, 영웅 이순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 준 셈이다.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실은, 끔찍한 고문을 당한 드라마와는 달리 책에서는 아마도 심한 고문은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점이다.
김탁환 소설을 봐도 고문 장면은 꽤나 실감나게 그려지고 그가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고 묘사한다.
아마 소설의 끔찍한 장면을 드라마에서 영상으로 재현한 것 같은데 나도 그 장면을 보면서 너무 잔인해 저렇게 심하게 구타를 하고도 과연 살 수 있을까 염려가 됐었다.
당시는 항생제나 수액도 없었을텐데 감염 문제는 대체 어떻게 해결을 했을지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저자는 이순신이 28일 동안 하옥된 후 즉시 백의종군 길을 떠난 걸로 보아 심하게 몸을 상하지는 않았을 거라 추론한다.
일기를 봐도 하옥된 일에 대한 심회나 원망 따위는 나와 있지 않다.
내 생각으로는 너무나 치욕스러워 아예 기록을 안 한 건 아닐까 싶다.
하여튼 그가 그 후로도 특별한 문제 없이 전쟁을 수행한 걸 보면 52세라는 나이를 생각해도 그렇고 결국 조정에서 사형 대신 살려 보냈으니 극악무도한 고문을 가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김덕령처럼 옥사했을 것이다.
아마도 수군통제사이자 전쟁영웅이라는 그의 카리스마와 과거의 전공이 많이 참작되어 어느 정도는 일반 잡범들과는 달리 예우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항명죄로 끌려온 죄인이고 사형이 논의될 지경이었으므로, 또 조선 시대의 끔찍한 형벌 제도를 생각해 보면 하옥 후 취조가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수군 최고 지휘자에서 (그냥 지휘자도 아니고 모든 해전을 승리로 장식한 이 전쟁 영웅이) 고문을 받는 죄인이 되고 결국은 일개 병졸로 떨어졌다는 그 사실 자체가 모욕스럽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지 모른다.
영웅은 생명보다 명예가 더 우선이지 않은가?
하여튼 원균이 패한 후 바로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점이나, 백의종군 할 당시에 권율도 그를 예우하여 군관을 따로 붙여 준 걸 보면 그의 위상이 절대 곤두박질 친 건 아님이 분명하다.
드라마에서 본 김명민의 이미지가 그대로 책 속의 이순신에 투영되어 즐거운 독서가 됐다.
작가가 이순신의 캐릭터를 잘 잡아 냈고 배우가 훌륭하게 소화해 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우리의 위대한 영웅을 눈에 보일 듯 실체가 잡히게 만든 것 같다.
회사원이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게 성실하게 사료 분석을 하고 꼼꼼하게 집필한 저자의 노력에도 박수를 보내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