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이런 종류의 책이 나오면 마치 자기 계발서가 맨날 같은 내용이어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열어 보듯, 꼭 집어 들게 된다.
책에 관한 책, 독서법에 대한 책, 서평집 등은 대체적으로 독자를 만족시키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일단은 저자 자체가 전문성을 가진 필자가 아닌 경우가 많아 수준 있는 글쓰기를 하기가 어렵다.
이 책 같은 경우도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분량 자체가 겨우 200 페이지를 넘었고 전반적으로 봤을 때 저자의 글솜씨도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나름 몇 권의 책을 낸 사람이라고 하는데, 평균 이상은 아닌 듯 하다.
이런 점에서 표정훈씨는 확실히 글을 잘 쓴다.
<책을 읽는 방법>의 저자 역시, 간략하지만 전문적인 글쟁이답게 소설을 읽는 방법에 대해 핵심을 짚어 준다.
나에게 제일 실제적인 도움을 줬던 독서법에 대한 책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이었다.
<호머 부커스>에서도 나온 바지만 다치바나는 뛰어난 다큐멘터리 작가이고 그 사람의 독서법은 확실히 독서인들이 따라가고 싶은 모범이 된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여러 관점의 책을 읽으라는 조언은 무척 유용했다.
읽고 나서 글을 쓰라는 조언도 마찬가지.
사실 열심히 책을 읽다 보면 나중에 감상문 쓸 때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서 완전한 글쓰기가 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로서는 글쓰는데 시간 소모를 최소화 시키는 쪽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읽기 쪽에 더 투자하는 편이다.
논술 시험을 안 봐도 되는 직장인이라는 게 다행스럽다.

독서 인구의 감소는 하도 문제점이고 떠들어 대서 이제는 새롭지도 않다.
영상 세대에게 책이 얼마나 어필할 수 있는지는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번 와우북 페스티벌에서도 느낀 바지만 여전히 읽고자 하는 이들의 수요는 충분하고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필자진의 확보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교사 필진의 확보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사실 교사들이야 말로 학생들을 일선에서 가르치는 집단인 만큼 훌륭한 필자가 될 자질이 가장 풍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에만 골몰하지 말고 각 계층과 세대에 맞는 훌륭한 필자들을 많이 개발하면 훨씬 독서 인구가 많아질 것 같다.
영상문화가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여전히 책읽기는 영상 매체에 비해 매우 능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훨씬 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번역물은 일단 그 나라에서 성공한 것만 소개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의 현실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국내 필자진을 확보하는 것이다.
아니면 얼마 전에 읽은 <레 미제라블>의 일본판 해설본처럼 국내 독자들을 위해 당시 상황을 풀어 써 주는 것이다.
하여튼 독서 인구의 증가를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나왔으면 한다.

무엇보다 도서관과 서점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들이야 입시 과목에 논술 등을 집어 넣으면 그만이지만, 승진이나 돈벌이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직장인들은 어떻게 책읽기에 끌어 들일까?
독서 문화의 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도서관을 늘리고 홍보나 지역 행사를 자주 해서 도서관에 취업 준비하러 가는 게 아니라 책 읽으러 가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도서관의 중심 기능은 종합자료실의 대출 업무가 아니라 열람실의 수험생들 관리인 것 같다.
지역 주민들이 언제라도 도서관에 들려 가벼운 마음으로 책 한 권 빌려서 읽을 수 있는 공간의 확보, 독서 인구 증진에 중요할 것 같다.
또 서점 역시 단순히 책만 파는 곳이 아니라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고 기분 전환 할 수 있는, 마치 쇼핑의 공간처럼 문화 공간으로 변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값만 생각한다면 누가 굳이 서점에 나가겠는가?
인터넷에서 주문하면 값도 싸고 편한데 말이다.
고르는 즐거움, 신간을 만나는 즐거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보다 편안하고 즐거운 문화 공간으로 변모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경쟁이 더 완화돼야 한다.
시간이 있어야 책도 읽을 게 아닌가?
직장인들은 너무 바쁘고 치열하다.
주 5일제가 된 후 여가 시간이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자기계발이 아니면 즉 영어 공부가 아니면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도 요즘은 문화 재단 같은 데서 교양강좌를 많이 여는 것 같다.
보다 문화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사회 환경이 되길 기대해 본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실망스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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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 사용법
프랑수아 를로르.크리스토프 앙드레 지음, 배영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후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던 책이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했다.
그렇고 그런 심리학 서적이 아닐까 싶으면서도 제목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보게 됐다.
결과는 대만족.
정신과 전문의라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책을 쓸 만큼 그 분야에 전문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가령 김정일씨나 이나미씨처럼)  이 사람은 교수가 아니면서도 인간의 감정 상태에 대해 굉장히 쉽고 신뢰감 있게 글을 쓴다.
단순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치 에세이처럼 대충 쓴 국내의 일부 정신과 전문의들 책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번역을 잘한 탓도 있겠지만 읽기도 굉장히 쉽고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하다.

정신과에서 말하는 방어 기제는 내가 흥미를 갖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스스로 분석해 보기에 나는 경계성 인격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정의에 따르면 감정 변화가 크기 때문에 쉽게 감동하고 쉽게 눈물을 흘리며 또 쉽게 화를 내고 대신 금방 풀린다.
나는 성격이 굉장히 급하기 때문에 뭔가 원하는대로 안 된다거나 지체되면 쉽게 감정을 폭발하는 편이다.
대신 그 순간이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풀린다.
다큐멘터리나 드라마에서 안타까운 사연이 나오면 눈물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쉽게 감동받기도 한다.
또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착한 사람, 좋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기를 열망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편이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화를 참는 편이다.
대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잘못된 일처리라고 판단되면 조목조목 따지는 편이다.
관계의 안정성이야 말로 내가 가장 추구하는 덕목이다.

저자에 따르면 분노는 수위 조절을 해서 표현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참으면 감정이 안으로 쌓이기 때문에 원한으로 발전할 수 있을 뿐더러, 상대방도 나를 무시하게 된다.
분노의 표현은, 파괴적인 행동으로 가기 전 상대방을 위협함으로써 극단적인 결과 대신 적당한 행동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다.
마치 실제로 싸움은 하지 않고 얼굴 표정과 말로써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집단 생활은 동물들의 세력 다툼과 매우 유사해서 집단 내 싸움은 대체적으로 지위과 관계된다.
명예가 훼손됐다고 느끼거나, 지위에 걸맞은 대우를 못 받았다고 판단되면 분노하게 된다.
특히 남자 청소년들처럼 자아가 약한 집단 내에서는 종종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으로 저자는 분노, 시기심, 질투, 사랑, 기쁨, 슬픔, 두려움, 수치심 등을 꼽는다.
감정은 인간의 행복이나 안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저자는 그에 대한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잘 인지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며 감정이입을 하라고 충고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하는 것, 혹은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 우리가 흔히 듣던 역지사지의 방법이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잘 인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함으로써 감정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행동 방식을 결정하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 때 일기를 쓰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
또 정서적으로 지지해 줄 사람에게 감정 상태를 털어놓는 것도 일종의 분출 효과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의 해소에 도움이 된다.
단 격려해 주고 호의적인 사람에게 털어 놔야지 경쟁자에게 솔직히 말한다면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꼴이므로 관계는 더욱 자신에게 불리해질 수 있다.
단순히 털어 놓는데서 끝나지 않는 경우는, 즉 생각을 바꾼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므로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두려움을 지나치게 많이 느끼는 것은 단지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는 부분인 소뇌 편도가 유달리 활성화 되서라고 한다.
즉 심리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현실적인 충고가 마음에 든다.

감정을 컨트롤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저자도 인정하는 것처럼 마음을 달리 먹는다고 해서 쉽게 바뀌는 문제도 아니다.
다만 내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지나친 흥분으로 내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흔한 심리학 책인줄 알았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450페이지 정도 되는 비교적 두꺼운 책이지만 내용이 굉장히 쉽고 재밌어 금방 읽었다.
여기서 배운 바를 실제 생활에 응용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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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 정신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종교개혁의 투사 즐거운 지식여행 20
그레이엄 톰린 지음, 이은재 옮김 / 예경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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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에 대한 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일종의 혁명아 같다는 이미지와 함께, 독일 농민 전쟁이 있었을 때, 그들을 때려 잡으라고 선동했다는 에피소드가 겹치면서 좀 위선적인 사람으로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루터에 대한 비교적 공정하고 호의적인 이미지를 갖도록 유도한다.
이게 전기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루터교는 일종의 국가 교회주의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좀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루터교가 복음주의 신학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모든 개신교의 기본이 되며,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았다는 점에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근본주의의 원류인 셈이니, 여전히 루터교는 현대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95개조 반박문을 잘 읽어 보면 처음부터 종교개혁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불만이었던 것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천박한 논리로 면죄부를 파는 추기경의 행태였고 그것이 오히려 교황의 권위를 손상시킬까 봐 염려됐다.
루터 뿐 아니라 당시 학식과 믿음이 있던 성직자라면 누구라도 독일 지역에서 판매되는 면죄부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교황이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일개 수도사가 자신에게 대항하는 게 괘씸하다는 식의 초보적인 사고를 하는 대신, 교회의 쇄신을 단행했다면 가톨릭은 분열하지 않았을까?
교회의 분열은 다양성의 확보, 믿음과 해석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해 보이면서도 왠지 슬퍼 보인다.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을 거의 마리아 숭배교 정도로 격하시켜 보고 있고 타 종교는 그나마 전도의 대상으로나 보지, 가톨릭은 거의 이단시 하는 분위기다.
가톨릭을 비난하는 개신교 역시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이제 해석의 자유가 넘치다 못해 상대의 믿음은 무조건 틀렸다는 교만으로까지 발전했다.
교황의 권위로부터 신앙을 해방시킨 루터의 가장 위대한 실패는, 교회 대신 권위의 원천으로 제시한 성경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믿겠다는 바로 오늘날의 근본주의의 발흥이 아닌가 싶다.

문자에 집착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일인지를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체설 때문에 대립하게 된다.
츠빙글리는 성만찬 때 "이것은 내 피와 살이다" 라고 한 부분에 대해 단지 상징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반면 가톨릭과 루터는 정말로 예수의 살과 피를 신도들이 먹는다고 생각한다.
츠빙글리는 가톨릭과 루터교가 인육을 먹는 집단이라고 비난한다.
가톨릭은 혹시라도 예수의 피로 변한 포도주를 무식한 신자들이 흘리기라도 할까 봐 아예 포도주는 주지도 않고 빵만 입에 넣어 줬다고 한다.
본질을 놓치고 오직 글자에만 집착하는 기독교의 이런 행태는, 파고 들면 들수록 더욱 우스꽝스러운 꼴만 반복한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성체가 진짜 살과 피로 변하느냐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킬 만큼 중요한 문제일까?
상복을 몇 달 입어야 할까를 두고 정치투쟁을 벌였던 과거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나는 비록 현재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루터의 깊은 신앙심에는 어느 정도 감동받았다.
옳든 그르든 (사실 그런 판단조차 가능한 것이지 모르겠으나) 어떤 대상에 일생을 바쳐 몰입하고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 삶을 진지하게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서 왠지 기품이 느껴진다.
또 어떤 의미로든 교황이라는 거대한 권위로부터 신앙을 해방시킨 점은 역사적으로도 크게 평가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중세인치고는 63세라는 비교적 긴 수명을 누린 루터는 아마도 대단히 열정적이고 부지런하며 경건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보다 점잖고 온화했던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꺼려했다는 점이 충분히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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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문화와 사회사 교양 교양인 시리즈 9
다이아나 크레인 지음, 서미석 옮김 / 한길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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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각보다 좀 어려웠다.
번역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고 직역한 흔적이 너무 많이 난다.
읽을 때마다 복문이 너무 많아 굉장히 힘들었다.
내용 자체도 패션이라는 키워드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사회적이다.
쉽게 봤는데 꽤 어렵게 읽었다.
그러나 책 내용은 충분히 괜찮다.
주제도 비교적 명확하게 잘 쓰여 있고 유기적인 연결성, 통일성도 돋보인다.

19세기에 의상은 신분을 드러내는 일종의 상징장치였다.
워낙 값이 비싸니 귀족이나 부르주아가 아니면 격식에 맞는 의복을 갖춰 입지 못했을 것이다.
농부들 같은 경우 결혼식 때 입었던 양복이나 드레스를 평생 일이 있을 때마다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부의 양복은 대부분 검은색이었는데 결혼식과 장례식에 두루두루 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딸에게 웨딩 드레스를 물려준다는 말이 이해된다.
지방에 사는 농민층은 돈이 되더라도 중류 계급의 흉내를 많이 내지는 못했다.
일단 교통이 불편하고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중산층의 옷차림을 접해 보지도 못했고 또 규범에 맞게 갖춰 입지 않으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에 함부로 시도하느니 차라리 자기 계급에 맞는 옷차림을 선호했다.
반면 도시의 기술 노동자들은 주로 귀족이나 중산층을 서비스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바로 옆에서 접하다 보니 의상에 많은 투자를 했다.
사회적인 위신 때문에 무리해서 의상에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연히 여성들은 한정된 자산 때문에 옷에 거의 투자할 수가 없었다.
옷은 여자가 많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반대되는 현상이 참 재밌다.
돈이 적으니 일단 가장의 체면부터 살리고 봐야 한다.
외출복이나 새옷은 남편이 사고, 아내는 주로 남편의 헌옷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그만큼 여성은 공적인 자리에 나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옷이 계급 표시에서 개성의 표출로 변한 것은 기성복의 등장 이후다.
저자의 말대로 20세기에 더 이상 옷은 신분이나 계급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다.
옷값은 너무 싸졌기 때문에 누구나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충분히 많은 옷을 살 수 있다.
오히려 옷은 계급 보다 연령층으로 나눠졌다.
젊은이의 스타일을 장년층에서 따라 하려고 하고, 이들이 따라 하면 젊은이들은  또 새로운 스타일로 갈아 타고, 이런 식의 순환이 이뤄진다.
과거 계급 시대에는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에 상류층 패션을 중산층 이하에서 흉내냈다면, 소비자 시대에는 연령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또 하위 문화, 즉 스트리스 패션이 상류층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옷 외에는 자신을 표현할 수단이 없는 하위층은 (이를테면 직업이나 가문이나 학벌, 집, 자동차 등 돈과 노력이 많이 드는 상징물이 없는 노동자 계층) 과감한 패션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특히 이런 하위 문화는 록 음악이나 힙합 등과 연결되어 대중매체를 통해 확산된다.
상류층이 격식에 맞는 보수적인 옷차림을 선호한다면 하위층은 보다 과감하고 혁신적인 옷차림을 추구하기 때문에 종종 이들의 패션은 신선한 아이디어로 상류층에 침투한다.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패션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오트 쿠튀르는 대기업화 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소기업들은 자본이 없어 몰락하고 있는 추세다.
재밌는 건 패션 대기업들이 옷으로 부를 쌓는 게 아니라, 라이센스를 빌려 주고 얻는 로얄티나, 가방, 향수 같은 보조 제품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다.
왜 보그 같은 유명한 잡지에 옷이 잘 보이게 사진을 찍는 대신, 이미지 광고로 일관하는지 알게 됐다.
그들이 파는 것은 옷이 아니다.
명품, 고급패션이라는 이미지를 팔아 돈을 번다.
그러므로 옷 자체를 광고하던 1960년대 이전과는 달리, 기업들은 이제 옷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도발적인 포즈와 동성애적인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광고를 찍는다.
또 명성을 쌓아야 라이센스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에 패션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도를 한다.
젖꼭지를 드러낸 옷이나 비닐 망사로 된 옷 같은, 대체 저걸 누가 입을까 싶은 옷들이 패션쇼에 나오는 것도 간단히 말해 주목을 끌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젊은 디자이너가 안정적으로 고객을 상대하는 보수층 속으로 끼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장인 대신 전위 예술가가 된 것에 대해 저자는 노골적으로 까대지는 않지만 옷 판매 전략의 일종이라는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패션쇼의 과감한 시도는 다양성의 확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지적을 잊지 않는다.

프랑스 디자이너는 상류층의 일원이 되서 예술의 후원자라는 지위를 얻고 고객과 같은 위치에 있으려고 애쓴다.
소비자이자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샤넬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디자이너 스스로 예술가가 될 수는 없으므로 예술의 후원자라는 지위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샤넬 시대까지만 해도 디자이너들은 노동자 계급의 양제사, 재봉사들이었으나 60년대 이후 디자이너는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택하는 직업으로 격상됐다.
반면 미국은 랠프 로렌처럼 허구적이나 사람들이 동경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낸 뒤 수많은 카달로그를 찍어 유포하는 방식을 택한다.
일종의 이미지 광고 전략일텐데, 마치 내가 그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 꼭 카달로그 속의 삶을 살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영국은 왕실이 패션을 주도하다 보니 디자이너들도 굉장히 보수적이고 혁신이 부족하다.
계급차가 심한 사회이니 만큼 진로가 막힌 노동자 계층 중 재기발랄한 젊은이들이 스트리트 패션을 주도하게 된다.
이들은 과감하게 전위적인 의상을 디자인하고 스스로 중고 의상점을 운영함으로써 어떤 제품이 잘 나가는지를 확인한다.
영국은 귀족 문화도 있지만 노동자 문화도 분명히 제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들은 프랑스 디자이너들이 예술-장인 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반해, 스스로를 전위적인 예술가 집단이라고 격상시켜 생각하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실패하더라도 변명의 구실로 삼을 수 있다고 한다.

옷이 정체성의 표현이 된 것은 옷값이 싸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만과 편견> 같은 19세기 시대 배경의 영화를 보면 온갖 격식을 차리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든 여자나 남자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모두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 자본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됐다.
특히 재밌는 것은 여자들이 바지를 입게 될 때까지의 투쟁이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여자의 바지 착용이 법적으로 금지됐다고 한다.
자전거 타기가 유행하면서, 또 해변에서 수영을 하기 위해 상류층에서 암묵적으로 일시적으로 바지 착용이 허용된 반면, 노동자 계층에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오래 전부터 바지를 입어 왔다.
여자 광부들도 있었으니 노동자 계층에서는 사회적인 용인과는 별개로 바지를 입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성별의 표현을 불분명하게 하는 옷차림을 금지시켰다.
마치 장발을 단속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에도 여성처럼 치장한 남자는 게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또 여전히 치마는 남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금기되어 있다.
옷차림이 전적으로 개인화 되는 것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옷은 단지 입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나 복식 문화가 보여주는 수많은 사회적 의의를 인식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문득 메트로폴리탄의 복식 전시관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것은 미국 사람의 책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구 사회를 대표한다는 점이다.
역시 번역은 출판 문화 진흥에 한계가 있다.
한국인 필자들이 이런 사회 분석학적인 책을 다양한 주제로 많이 써 주면 좋겠다.
이제 서구 시대극을 볼 때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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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프레스(영상1차할인) (Express)
영상프라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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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어를 못하니 익스프레스라는 뜻이 뭘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 채 영화를 봤다.
아마도 안 쉬고 계속 달리는 특급 열차를 뜻하는 것 같다.
비교적 재밌게 봤다.
적어도 지루해서 졸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영화 시간도 90분 정도로 비교적 짧은 편이다.
서양 영화의 장점은 다양한 연령층의 배우들이 활동한다는 넓은 스펙트럼에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라가 넓어서 그런가?
진 핵크만은 이름이 낯익어 유명한 배우 같기는 한데, 영화 속에서는 적어도 50대는 되보이는 중년이지만 멋지게 배역을 소화해 낸다.

첫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여주인공 캐롤은 변호사와 소개팅을 하게 된다.
맞선 자리에게 둘은 호감을 느끼고 얘기를 잘 풀어나가려는데 웨이터가 전화해 달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핸드폰이 보편화 되기 전 80년대라 그런 것 같다.
하여튼 변호사는 중요한 전화라며 양해를 구하고 잠깐 호텔방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여자 보고 같이 올라가지 않겠냐고 묻는다.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 캐롤은 따라 올라간다.
그리고 전화를 받는 사이 욕실에 들어가 화장을 손보는데...
방문객이 찾아온다.
전화를 달라고 했던 사람, 바로 변호사의 고객인 마피아 두목과 부하였다.
알고 봤더니 남자는 고객의 돈을 몰래 챙기다가 들킨 것이다.
남자는 울면서 갚겠다고 맹세하고 마피아는 용서해 준다.
안도하는 남자는 마피아를 배웅한다.
막 문을 열려던 마피가가 갑자기 뒤를 돌더니 "미안하네" 라고 말한다.
순간 옆에 있던 부하가 변호사에게 총을 갈긴다.
욕실을 나오려다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만 캐롤, 숨이 멎은 듯 굳어 있다.

정말 스릴있는 살해 장면이었다.
긴장감 최고였고 영화의 뒷부분은 첫 장면의 긴박감에 미치지 못한다.
우연히 살해 현장을 목격한 캐롤은 쫓기는 입장이 된다.
그녀의 증언을 받아 마피아 두독 리오를 기소하려는 검사가 바로 진 핵크만이다.
검사는 그녀가 숨어 있는 캐나다로 날아가는데 그만 미행을 당하는 바람에 둘은 기차 안에서 쫓기는 신세가 된다.
킬러 둘이 두 사람을 쫓는다.
기차 객실 사이에서의 숨막히는 도주.
사실 아주 실감나게 그려지진 않는다.
특히 두 사람이 기차 지붕으로 올라가 싸우는 장면은 좀 어설펐다.
역시 특수 효과 보다는 스토리나 심리 묘사가 훨씬 긴장감을 주는 것 같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악당들을 물리치고 캐롤은 무사히 증언을 하게 돼 검사는 리오를 살인죄로 기소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진 핵크만의 연기가 일품이었다.
악당들이 검사를 돈으로 유혹하는 장면이 있다.
미국 검사들도 변호사에 비해 박봉인 것 같다.
물론 권력이 있겠지만.
하여튼 검사는 악당들의 유혹에 웃음으로 대처하면서 난 돈은 못 벌지만 너같은 놈들 감옥에 보내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강철중의 순화된 캐릭터 같다.
그 장면이 아주 리얼하고 속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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