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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문화와 사회사 ㅣ 교양 교양인 시리즈 9
다이아나 크레인 지음, 서미석 옮김 / 한길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생각보다 좀 어려웠다.
번역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고 직역한 흔적이 너무 많이 난다.
읽을 때마다 복문이 너무 많아 굉장히 힘들었다.
내용 자체도 패션이라는 키워드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사회적이다.
쉽게 봤는데 꽤 어렵게 읽었다.
그러나 책 내용은 충분히 괜찮다.
주제도 비교적 명확하게 잘 쓰여 있고 유기적인 연결성, 통일성도 돋보인다.
19세기에 의상은 신분을 드러내는 일종의 상징장치였다.
워낙 값이 비싸니 귀족이나 부르주아가 아니면 격식에 맞는 의복을 갖춰 입지 못했을 것이다.
농부들 같은 경우 결혼식 때 입었던 양복이나 드레스를 평생 일이 있을 때마다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부의 양복은 대부분 검은색이었는데 결혼식과 장례식에 두루두루 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딸에게 웨딩 드레스를 물려준다는 말이 이해된다.
지방에 사는 농민층은 돈이 되더라도 중류 계급의 흉내를 많이 내지는 못했다.
일단 교통이 불편하고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중산층의 옷차림을 접해 보지도 못했고 또 규범에 맞게 갖춰 입지 않으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에 함부로 시도하느니 차라리 자기 계급에 맞는 옷차림을 선호했다.
반면 도시의 기술 노동자들은 주로 귀족이나 중산층을 서비스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바로 옆에서 접하다 보니 의상에 많은 투자를 했다.
사회적인 위신 때문에 무리해서 의상에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연히 여성들은 한정된 자산 때문에 옷에 거의 투자할 수가 없었다.
옷은 여자가 많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반대되는 현상이 참 재밌다.
돈이 적으니 일단 가장의 체면부터 살리고 봐야 한다.
외출복이나 새옷은 남편이 사고, 아내는 주로 남편의 헌옷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그만큼 여성은 공적인 자리에 나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옷이 계급 표시에서 개성의 표출로 변한 것은 기성복의 등장 이후다.
저자의 말대로 20세기에 더 이상 옷은 신분이나 계급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다.
옷값은 너무 싸졌기 때문에 누구나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충분히 많은 옷을 살 수 있다.
오히려 옷은 계급 보다 연령층으로 나눠졌다.
젊은이의 스타일을 장년층에서 따라 하려고 하고, 이들이 따라 하면 젊은이들은 또 새로운 스타일로 갈아 타고, 이런 식의 순환이 이뤄진다.
과거 계급 시대에는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에 상류층 패션을 중산층 이하에서 흉내냈다면, 소비자 시대에는 연령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또 하위 문화, 즉 스트리스 패션이 상류층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옷 외에는 자신을 표현할 수단이 없는 하위층은 (이를테면 직업이나 가문이나 학벌, 집, 자동차 등 돈과 노력이 많이 드는 상징물이 없는 노동자 계층) 과감한 패션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특히 이런 하위 문화는 록 음악이나 힙합 등과 연결되어 대중매체를 통해 확산된다.
상류층이 격식에 맞는 보수적인 옷차림을 선호한다면 하위층은 보다 과감하고 혁신적인 옷차림을 추구하기 때문에 종종 이들의 패션은 신선한 아이디어로 상류층에 침투한다.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패션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오트 쿠튀르는 대기업화 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소기업들은 자본이 없어 몰락하고 있는 추세다.
재밌는 건 패션 대기업들이 옷으로 부를 쌓는 게 아니라, 라이센스를 빌려 주고 얻는 로얄티나, 가방, 향수 같은 보조 제품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다.
왜 보그 같은 유명한 잡지에 옷이 잘 보이게 사진을 찍는 대신, 이미지 광고로 일관하는지 알게 됐다.
그들이 파는 것은 옷이 아니다.
명품, 고급패션이라는 이미지를 팔아 돈을 번다.
그러므로 옷 자체를 광고하던 1960년대 이전과는 달리, 기업들은 이제 옷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도발적인 포즈와 동성애적인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광고를 찍는다.
또 명성을 쌓아야 라이센스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에 패션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도를 한다.
젖꼭지를 드러낸 옷이나 비닐 망사로 된 옷 같은, 대체 저걸 누가 입을까 싶은 옷들이 패션쇼에 나오는 것도 간단히 말해 주목을 끌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젊은 디자이너가 안정적으로 고객을 상대하는 보수층 속으로 끼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장인 대신 전위 예술가가 된 것에 대해 저자는 노골적으로 까대지는 않지만 옷 판매 전략의 일종이라는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패션쇼의 과감한 시도는 다양성의 확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지적을 잊지 않는다.
프랑스 디자이너는 상류층의 일원이 되서 예술의 후원자라는 지위를 얻고 고객과 같은 위치에 있으려고 애쓴다.
소비자이자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샤넬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디자이너 스스로 예술가가 될 수는 없으므로 예술의 후원자라는 지위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샤넬 시대까지만 해도 디자이너들은 노동자 계급의 양제사, 재봉사들이었으나 60년대 이후 디자이너는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택하는 직업으로 격상됐다.
반면 미국은 랠프 로렌처럼 허구적이나 사람들이 동경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낸 뒤 수많은 카달로그를 찍어 유포하는 방식을 택한다.
일종의 이미지 광고 전략일텐데, 마치 내가 그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 꼭 카달로그 속의 삶을 살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영국은 왕실이 패션을 주도하다 보니 디자이너들도 굉장히 보수적이고 혁신이 부족하다.
계급차가 심한 사회이니 만큼 진로가 막힌 노동자 계층 중 재기발랄한 젊은이들이 스트리트 패션을 주도하게 된다.
이들은 과감하게 전위적인 의상을 디자인하고 스스로 중고 의상점을 운영함으로써 어떤 제품이 잘 나가는지를 확인한다.
영국은 귀족 문화도 있지만 노동자 문화도 분명히 제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들은 프랑스 디자이너들이 예술-장인 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반해, 스스로를 전위적인 예술가 집단이라고 격상시켜 생각하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실패하더라도 변명의 구실로 삼을 수 있다고 한다.
옷이 정체성의 표현이 된 것은 옷값이 싸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만과 편견> 같은 19세기 시대 배경의 영화를 보면 온갖 격식을 차리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든 여자나 남자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모두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 자본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됐다.
특히 재밌는 것은 여자들이 바지를 입게 될 때까지의 투쟁이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여자의 바지 착용이 법적으로 금지됐다고 한다.
자전거 타기가 유행하면서, 또 해변에서 수영을 하기 위해 상류층에서 암묵적으로 일시적으로 바지 착용이 허용된 반면, 노동자 계층에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오래 전부터 바지를 입어 왔다.
여자 광부들도 있었으니 노동자 계층에서는 사회적인 용인과는 별개로 바지를 입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성별의 표현을 불분명하게 하는 옷차림을 금지시켰다.
마치 장발을 단속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에도 여성처럼 치장한 남자는 게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또 여전히 치마는 남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금기되어 있다.
옷차림이 전적으로 개인화 되는 것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옷은 단지 입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나 복식 문화가 보여주는 수많은 사회적 의의를 인식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문득 메트로폴리탄의 복식 전시관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것은 미국 사람의 책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구 사회를 대표한다는 점이다.
역시 번역은 출판 문화 진흥에 한계가 있다.
한국인 필자들이 이런 사회 분석학적인 책을 다양한 주제로 많이 써 주면 좋겠다.
이제 서구 시대극을 볼 때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