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와 공식이 없는 수학카페 - '수학사랑' 박영훈 선생의 수학사 특강
박영훈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25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비교적 얇은 두께의 책이다.
안에 실린 삽화도 신선하고 책 내용도 어렵지 않다.
수학이 주는 의미에 대해 비교적 쉽게 잘 풀어 쓴 것 같다.
무엇보다 그리스에서 비례를 중시하는 수학과 예술이 번성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러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저자의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편적인 시각이 아쉽다.
수학의 원조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이기 때문에 사실 서양은 동양의 학문적 성과 때문에 발전한 것이므로 동양이 더 우월하다는 식의 초보적인 논리를 편다.
또 기독교가 과학을 억압해서, 종교개혁 전까지는 과학이 발달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편견일 뿐, 얼마 전에 읽은 <사회 법 체계로 본 근대 과학사 강의> 에서는 신학이 이성의 힘을 강조함으로써 과학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심지어 그 책에서는 중국이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가 없었기 때문에 근대 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고까지 말한다.
책을 쓸 때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안전하다.
재밌게 책을 읽다가도 가끔 초보적인 저자의 감정적 주장을 접할 때면 솔직히 약간 짜증스러웠다.
뭐랄까,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말로는 괜찮지만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독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좀 더 공부를 하고 말하라고 하고 싶다.

또 로마 문화를 그리스 문화에 비해 단지 실용성만 강조한 것이므로 문화로써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 것도 매우 극단적으로 들렸다.
콜로세움은 그저 검투사들이 사자와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장소에 불과하므로 비례의 미를 자랑하는 파르테논 신전에 비해 형편없다는 식의 감정적 논리는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그리스 문화의 위대함과 로마 문명의 위대함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신의 세계가 퇴보하고 오직 전쟁을 통한 영토 확보에만 주력해 이룩한 문화적 유산이 없다는 식의 발언은 매우 단편적이고 편견에 차 있다.
역시 앞에서 언급한 <근대 과학사 강의>를 펴 보면, 로마법이 법 정신의 얼마나 큰 진보인지 자세하게 나와 있고, 오늘날 서구의 보편평등한 법 정신이 로바법에서 나왔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런 점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수학적 얘기는 괜찮았다.
사실 수학은 지겹고 어려운 학문이라고만 알고 있어서, 대학교 때 교양으로 미적분학을 들은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학책은 펼쳐 본 적이 없다.
대체 어디다 써먹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한 때는 이 어려운 학문을 꼭 모든 고등학생들이 배워야 할까 회의적일 때도 있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수학은 과학을 설명하는 기본 언어라는 걸 알게 됐고 수학이야 말로 과학과 더불어 모든 인류에게 보편타당한 위대한 학문임을 인정했지만, 그 가치를 아는 것과 즐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 책을 읽어도 솔직히 수학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감이 안 잡힌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기호화 공식은 최소화시키고 그리스 수학이 발전한 역사에 대해 주로 서술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인문학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수학이 사물을 추상화 시킨 이성의 학문이라는 건 분명히 알겠다.
그리스들이 추구하는 것은 조화와 비례로 대표되는 균형미였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수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리스의 건축과 조각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제일 독특했던 관점은 그리스인들의 신에 대한 관념이었다.
저자는 그리스어로 신이 주어가 아니고 술어임을 강조한다.
신이 어찌어찌 했다가 아니라, 어떠어떠한 상황이 바로 신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신은 인간의 모든 추상적 감정과 속성들을 의인화 시킨다.
전쟁은 아레스가 되고 사랑은 아프로디테로 표기된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은 기독교의 신처럼 믿는다는 개념이 없었고 신들을 일상의 생활로 이해했다.
그래서 기독교처럼 유일신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적 속성을 가진 여러 신들을 믿었다기 보다는, 인간사의 많은 추상적 개념을 신으로 의인화시켰다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 되어지는 힘,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스인들은 대체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영웅이 신의 장난에 의해 비참하게 죽는 비극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서야 좀 알 것 같다.
비극이야 말로 어쩌면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세상의 우연을 표현한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고 문제 제기를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학문이 세상 모든 것을 죄다 관찰하고 연구하는 게 아니라, 학자가 의문을 갖고 문제를 제기할 때 비로소 선택적으로 관찰하게 됨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일단 세상의 근원에 대해 궁금해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를 해결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문제 제기를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 그리스에서 세상은 원자로 이뤄졌다는 대담한 발상까지 나왔는지, 또 수 천년 전의 그리스 문화가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의 수학은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기술에 불과했다.
그것은 세심한 관찰에 의한 직관적 이해였다.
반면 그리스의 수학은 근본적인 것, 원리적인 것을 찾는 연역적 추론이다.
변치 않는 어떤 것, 즉 공리를 이용해 명제를 증명하는 것, 수학이 비로소 현상의 집합을 뛰어넘어 사물의 속성으로 추상화 되는 순간이었다.

재밌게 읽은 책이고 수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증가했지만 여전히 수학은 나에게는 어려운 학문 같다.
나는 오히려 과학 쪽이 훨씬 재밌고 그 중에서도 생물학, 더 세분해서는 의학이 가장 재밌다.
그런 걸 보면 직업을 잘 선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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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세계의 아틀라스 - 지도로 보는 세계의 미래 책과함께 아틀라스 2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외 지음, 안수연 옮김 / 책과함께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전작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도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 역시 괜찮다.
일단 큼직한 판형이 마음에 든다.
가지고 다니기는 불편하지만, 지도를 보기에는 아주 적합한 것 같다.
보통 지도나 사진이 주가 되는 책은, 설명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주제를 한정시켜 범위를 좁게 한 대신 압축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커버가 되는 느낌이다.
어쩜 이렇게도 예쁜 지도책을 만들었을까?
<지도로 보는 한국사> 나 <아틀라스 한국사> 같은 책들도 지도가 많이 실리긴 했지만 이건 수준이 다른 것 같다.
아마도 이 출판사에서 지도를 만드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저자의 시각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에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는 환경보호론과 세계화 반대, 뭐 이 정도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도 덕분에 세계 정세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막연하게 캘리포니아 하면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미국의 서부 도시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지도를 보니 멕시코 국경과 딱 붙어 있어 히스패닉계가 최대라는 말이 실감났다.
역시 눈으로 직접 봐야 이해가 빠르다.
발칸 반도의 내정 양상도 자주 보니까 이제 각 나라들이 하나의 실체로써 다가오고, 리히텐슈타인 같은 소국들도 지도로 보니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감이 잡힌다.
여전히 이 책에서도 북한은 위험 인자로 등장해서 씁쓸했다.
또 일본이 얼마나 막강한 나라인지 다시금 확인했다.
정말 한국인만 일본을 우습게 아는게 아닐까 싶다.
아마도 일본에 대한 극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한국이 일본과 대등해져야 없어질 것 같다.

나처럼 공간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아주 유익한 책이다.
이런 입체적인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느끼는 바지만 프랑스는 과거 식민지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확실히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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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법 체계로 본 근대 과학사 강의
토비 E. 하프 지음, 김병순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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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페이지에 달하는 꽤나 읽기 힘든 책이다.
일단 분량에서 질리고, 내용 또한 만만치 않다.
과학에 대해 썼다기 보다는,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 그 중에서도 특히 법 체계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다.
그래서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는 것 뿐.
좀 더 자극적인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왜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과학 혁명이 일어났는가이다.
이슬람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그렇게 과거에는 찬란했다는 문명을 가진 이 두 세계가 아닌, 서양에서 산업화가 가능했단 말인가?
사실 이 문제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점이다.
왜 하필 서양에서?
중세 천 년의 암흑기는 다 어쩌고 느닷없이 르네상스와 함께 신세계로 뻗어나가 식민지를 획득하더니 산업화를 일으켜 전 지구를 점령하게 됐는지, 그 힘의 원동력이 정말 궁금했다.
그래서 이런 비교사학적 관점이 필요한 모양이다.
사실 좀 삐딱하게 보자면 결과론적 분석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미 정해진 결과를 놓고,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원인을 분석하는 건 좀 논리적이지가 못하다.
그러나 워낙 상세하고 방대한 증거들을 들이대기 때문에 결국에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단순히 "우연"에 의해 이 거대한 차이가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반드시 인과 관계가 성립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하여튼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는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칫하면 민족주의적, 혹은 평등론적인 시각에서 이 책을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저자는 꽤나 분명하고 단정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서구 사회의 우월성을 설명한다.
문득 이슬람이나 중국 쪽에서 나온 근대 과학의 발전사나, 근대 사회의 형성을 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어찌 됐든 현재의 결과물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서구 학자들에 비해 할 말이 적다는 건 분명한 일이다.

간단히 주제를 정리하자면, 서구 사회가 과학 혁명을 일으킨 가장 큰 원동력은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법적 제도를 정비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법학의 발전은 과학 발전에 선행되야 한다.
이 법은 로마법에 나오는 보편적인 법, 전 세계 어디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보편법을 말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중국에서 통용되던 법이란 실정법 수준으로, 황제의 명령이나 칙령 정도를 의미하고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서양의, 보편법 개념은 아니라고 한다.
저자는 중국법의 문제점으로, 황제의 명령에 의해 간단히 바뀔 수 있고, 판례가 다음 재판의 근거로 이용되지 않으며, 귀족과 평민에게, 혹은 중국인과 외국인에게 다르게 적용된다는 점을 들고 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그렇다면 로마법에서는 형벌의 적용에 있어서 귀족과 평민에게 똑같이 적용됐단 말인가?
신분차를 무시한다는 게 아무리 법전이라 할지라도 중세 시대에 가능했을까?
저자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보고 싶다.
하여튼 중국은 보편법을 발전하지 못해 여러 판례들을 아우를 수 있는 상위법 개념을 만들지 못했다.
이슬람 역시 아랍인들에게 적용되는 샤리아와, 외국인들에게 적용되는 일반법을 분리해서 생각했고, 이슬람법의 절대성으로 인해 오히려 모든 학문과 토론의 생성 자체를 금지시키고 만다.
서구 사회과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완전히 정교분리된 것에 비해, 이슬람은 여전히 종교와 세속의 구분이 없다.
아직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살만 루시디에 대한 사형판결도 이슬람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봐도 아무리 인권운동가나 평등주의자들이 미회시키려 해도 이슬람 국가의 신정주의는 극복해야 할 한계라고 생각된다.
종교와 세속의 분리는 따로 강조할 필요조차 없는 너무나 기본적인 명제가 아닌가?

이 점에서 저자는 좀 색다른 논리를 편다.
중세 교회가 황제의 권한으로부터 분리되면서 교회법을 발전시키고 자치권을 가진 단체로써 인정받았기 때문에 교회야 말로 자치권 확대에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중세는 교회가 사회를 억압하고 과학 발달을 저해했다고 본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황제권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소유권과 재산권, 사법권 등을 갖는 근대적 의미의 자치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이것은 더 나아가 법인의 설립, 대표를 갖는 의회주의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면 이슬람이나 중국과는 달리, 서양에는 동업조합이나 자치 도시의 전통이 있다.
이들의 성장은 과학을 자유롭게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중간지대의 역할을 한다.
반면 종교의 힘이 너무 강한 이슬람이나, 황제권이 절대적인 중국에서는 자치집단이 생기지 않아 대가족에게 의존하는 혈연주의나 족벌주의 전통이 강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의견에 100% 수긍하는 건 아닌데 확실히 동양에서는 서양보다 가족의 개념이 강하고 공과 사의 구별이 좀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과학의 일반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편성
인종과 국가 등을 초월해 과학은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다.
둘째, 철저한 회의론
과학은 기존 권위와 관습에 대한 의심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토론을 법적으로 보호해 줘야만 발전이 가능하다.
저자는 오늘날 중국의 사상통제는 아무리 경제력이 발전해도 우월한 위치에 오르지 못하는 한계점으로 설명한다.
셋째, 공평성
과학은 누구나 똑같은 수단인 논리와 연역적 추론, 경험적 관찰 등을 통해 가설을 증명해야 한다.
증명 수단의 일반성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넷째, 공동체주의
가설은 과학자 집단에 의해 인정받아야 한다.
혼자 주장하거나 아무리 권위있는 사람이 인정한다 해도 집단의 인정이 없으면 옳은 이론이 될 수 없다.
이 점은 서구 과학이 전통 과학에 비해 논문이나 학회 같은 것을 매우 중시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슬람은 그리스 철학을 발전시켜 12~13 세기에 서양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지식을 쌓지만, 꾸란의 절대성을 강조한 나머지 공개적인 자리에서 토론할 수 없었고 마드라사라는 고등교육기관에서도 오직 종교학만을 가르쳤기 때문에 과학을 공식적으로 교육할 수 없어 사적인 자리에서만 개인적으로 전승됐다.
제도적 뒷받침이 없이는 쇠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 문화권에는 공식적인 인증절차나 인증서 등이 없었다.
학자가 제자를 개인적으로 인정하면 끝이기 때문에 표준적인 교육체계를 세울 수 없었다.
중국은 관료주의가 과학의 발목을 잡았다.
저자는 기술과 과학의 구분을 분명히 하는데, 엄밀히 말해 기술은 경험에서 비롯된 한 차원 낮은 개념이고 중국의 과학은 바로 이 기술발전에 근거했다고 본다.
이를테면 화약이나 나침반처럼 말이다.
반면 과학은 매우 고차원적인 문제인데 자연을 어떻게 이해하냐는 일종의 철학적인 개념이다.
서양을 앞질렀다는 중세의 중국 과학은 사회의 변혁이나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엄청난 일을 못했다.
사상의 통제는 과학의 기본 원리인 회의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말할 것도 없이 오직 국가 관료만을 뽑는 과거제도 모든 학문을 통제했고 저자는 한술 더 떠 중국의 대학은 자치권을 갖는 유럽의 대학과는 개념이 달라, 과거 준비학원이라고 폄하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상당히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른다.
어떤 면에서는 중국이나 이슬람 학자들의 반발이 예상되기도 한다.
또 저자는 이성을 중국의 정신으로 번역할 수 없다는 얘기도 한다.
이성은 신이 주신 내면의 빛과도 같은 것으로, 합리적인 피조물이 자연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인데 중국의 정신수양은 음양오행설에 기댄 매우 느슨한 유기적 세계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성이나 양심을 매우 엄밀한 용어로 정의한다.
신이 주신 이성, 내면의 도덕적 저울인 양심이 바로 기독신학이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개념으로 정의한다.
중세 교회가 과학을 억압했다기 보다는 상당 부분 공존했으며 심지어 과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게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이 점은 다른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나는 베버가 주장하는 기독교나 청교도 윤리의 우월함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인데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기독교가 서양 사회에 이바지한 바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꽤나 논리적으로 또 상당히 날카롭게 동양이나 이슬람 사회에 매스를 가하기 때문에 어설픈 평등주의자들이 읽으면 상당히 충격을 받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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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북 - 젊은 독서가의 초상
마이클 더다 지음, 이종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서평에 관한 책, 혹은 독서 에세이인 줄 알았는데, 어린 시절의 회고록 같은 책이다.
책벌레의 어린 시절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가 글쓰기 강의서가 아니라 실은 자서전이듯 말이다.
서평기자라는 독특한 직업 때문인지 저자는 비교적 고른 문장력을 보인다.
위트있고 작가로서의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1950년대 미국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이의 개인적인 일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키득키득 웃을 때도 많았다.
가족에 대한 애정을 한없이 느끼면서도 결코 미화시키지 않고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감추지 않는 게 저자의 매력이다.
아쉽게도 대학교 시절에서 끝이 나버렸다.
분량의 압박 때문인가?
기왕이면 코넬 대학원에 진학해서 본격적인 문학 공부를 하던 시절이나 연애와 결혼, 아이 출산 같은 얘기도 좀 해 줬으면 좋았을텐데.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신의 독서법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한 두 챕터 정도는 넣어 줬으면 하는 거다.
나 같은 독서광들이 책읽기에 관한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얻은 몇 가지 팁이라면, 애들러가 말한 거라는데, 책을 읽을 때 주변에 메모를 많이 해서 나만의 책으로 만들라는 조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책은 사서 읽어야 한다.
저자 역시 헌책방에서 건진 수많은 문고본들을 연필로 새까맣게 만들었다고 한다.
입체적인 독서가 가능할 것 같다.
활자만 읽어가는 수동적인 독서 대신, 저자와 격렬하게 토론을 하면서 읽는 것이다.
대체 왜, 주인공은 여기서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시의 경우 시어는 복수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에 그 단어의 풍성함으로 가치가 있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책의 묘미는, 저자가 나처럼 남독하는 책벌레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의 심정을 100% 이해한다는데 있을 것이다.
나는 텍스트 속으로 빠져 드는 저자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미국에서는 신체적 활동과 우수함을 높게 쳐주는 모양인지, 책 속에 틀어박힌 독서광은 환영받지 못하는 듯 하다.
특히 러시아 이민자인 공장 노동자 아버지에게 뭐 하나 제대로 고칠 줄도 모르고 방에만 처박혀 있는 아들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 앞부분에서 가난한 미국 이민자 가정의 모습을 미화없이 담담히 써내려 갔다는 점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다.
저자는 원하는 대로 책을 읽어 먹고 살 수 있는 서평기자라는 독특한 직업을 갖게 됐다.
코넬 대학교에 진학해 교수가 될 수도 있었으나 저널리즘 분야에 뛰어든 그의 성향도 이해가 된다.
이미 50대 후반인 것 같은데 독서법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알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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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이야기 - 태양, 지구, 그리고 아홉 이웃들이 펼치는 눈부신 역사와 과학과 낭만의 드라마
데이바 소벨 지음, 김옥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처음 읽을 때는 어려워서 포기할까 했다.
태양과 수성까지는 어떻게 읽어 볼까 했는데, 금성을 지나서는 거의 안 읽고 대충 넘어가게 됐다.
학교 다닐 때 제일 어려웠던 과목이 바로 지구과학이었던 만큼, 취미로 교양서를 읽으려고 해도 별이나 지질 쪽은 영 모르겠다.
덮어버릴까 하다가 책이 하도 예뻐서 마음을 고쳐 먹고 노트북을 열었다.
지루하거나 어렵지만 읽어 볼만 하다 싶을 때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이다.
관련 지식을 찾다 보면 어느새 책에 빠져들게 된다.
240페이지라는 얇은 분량도 도전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했다.
결과는 대성공!
처음과는 달리 점점 책에 빠져 들었고, 책의 수준 역시 나같은 초보자를 위해 아주 쉽게 쓰여 있었다.
전공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단지 저술가이기 때문인지, 인문학적인 글쓰기를 한 것 같다.
이 쪽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평도 할 수 있겠으나, 내 수준에서는 이 책보다 어려운 책은 못볼 것 같다.

명왕성이 얼마 전 소행성으로 분류되어 이제 태양계는 8개의 행성을 가졌다고 한다.
이 책은 아직까지 명왕성을 행성으로 분류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명왕성은 논란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카이퍼 벨트라고 해서, 행성이 되지 못한 물질들이 모여 제 3의 지대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데, 명왕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제 1 지대는 지구형 행성, 2지대는 목성을 위시한 거대한 기체 행성들, 그리고 3지대가 바로 명왕성 등의 멀리 떨어진 소행성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안 사실들이 많다.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 봤는데 신문 기사에도 천문학적 지식들이 많이 실려 있고 네이버 지식인이나 블로그에도 일반인들이 자세한 지식을 많이 올려 놔서 깜짝 놀랬다.
내가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여기 나온 지식 정도는 교양 수준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달 외에 유인 우주선을 보내지 못했으나 무인 우주선들이 행성 주변을 돌면서 많은 정보를 전송해 오고 있다.
제일 대표적인 게 바로 카시니- 호이겐스 호가 아닌가 싶다.
토성의 위성을 발견한 과학자들을 기려서 붙인 토성 탐사선이다.
인터넷에서 호이겐스 호가 찍은 토성 고리를 봤는데 정말 환상적이다.
이렇게 발달된 시대에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조작이었다는 설이 존재하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이런 천문학 책을 읽으면 당연히 성경의 창세기는 상징적인 의미를 띤 신화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천문학자들이 과연 종교가 있을지, 문자 그대로의 근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리처드 도킨스처럼 무신론자가 되야 맞을 것 같다.
제일 흥미로운 과학자는 덴마크의 혜성 발견자인 마리아 미첼이었다.
여자 이름이 붙은 혜성은 딱 두 개인데, 하나는 미첼이고 또 하나는 천왕성을 발견한 윌리엄 허셜의 여동생 캐롤라인 허셜이라고 한다.
가상의 편지 형식으로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발견 당시를 쓴 글이 실렸는데 국경을 초월하면서도 여성 과학자 사이의 동료애가 느껴져 무척 훈훈했다.
토성까지는 고대로부터 관찰이 가능했으나 천왕성은 망원경으로 발견한 최초의 행성이고 놀랍게도 해왕성은 단지 수학적 계산만으로 발견했다고 한다.
수학이 만국의 보편적 언어라는 말이 이해된다.
당시의 부정확한 관측 때문에 두 행성 궤도에 영향을 주는 또 하나의 미지의 행성이 있을 거라 예측하고 찾아낸 게 바로 명왕성인데, 실망스럽게도 오늘날의 정확한 계산 결과로는 영향을 주는 행성 따위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명왕성이 더더욱 행성의 위치를 박탈당했나 보다.
비록 명왕성이 행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카이퍼 벨트라는 개념을 태양계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태양계의 범위는 더욱 확대됐다고 볼 수 있다.
우주의 신비는 생각할수록 놀랍고 경이롭다.
칼 세이건이 쓴 <코스모스> 나 <행성이야기>를 읽어 보고 싶다.
갑자기 밤하늘을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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