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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보다 소중한 것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신선하고 상큼하고, 무엇보다 가벼운 무라카미 하루키
<슬픈 외국어> 나 <먼 북소리>를 읽던 때가 생각난다.
소설도 잘 쓰지만, 하루키 문장의 진수는 역시 수필에 있는 것 같다.
꼭 소설을 잘 써서 유명해졌다기 보다는,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 현대인의 취향과 잘 맞아서 독자들이 열광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번 수필은 특히 기대를 했던 작품이다.
나도 그처럼 달리기를 좋아하고 프로 스포츠 보다는 올림픽 같은 아마추어 기록 경기에 더 열광하기 때문에 시드니 올림픽 참관기를 어떻게 썼을지 참 궁금했다.
맨 첫 장에 일본 여자 마라톤 선수가 나오길래 혹시 이거 소설 아닌가 걱정스러웠는데 (소설로 쓰기엔 뭔가 유치한 느낌이 들어서) 나중에 보니 하루키가 그 여자 선수의 심정을 대신 이야기한 것 같아서 안심했다.
에세이 자체가 아주 수준있다거나 아주 재밌다거나 문장이 훌륭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가볍고 부담없고 담백해서 좋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바로 그 주인공을 보는 기분이 든다.
왠지 아이가 없고 마라톤에 열중하는 성향이 그와 꼭 맞아 보인다.
아이가 있다면 뭔가 하루키와 안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49년생이지만, 그러므로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버지라는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기분이 든다.
시드니 올림픽에 기사를 쓰기 위해 갔던 모양이다.
호주에서도 그의 책이 유명한지 호주 기자와 인터뷰도 하고 100만원이 넘는 개막식 티켓도 얻었고 호텔에서 묵으며 경기를 관람했다.
그런 서비스들은 그가 이룬 문학적 성과 때문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들이겠지만 하여튼 그런 대우를 받으며 올림픽 관람을 하는 하루키가 부럽다.
왠지 놀면서 돈까지 버는 느낌이 든다.
마치 유명인사가 공짜로 유럽 여행 갔다 오면서 덤으로 책 써서 인세 버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시드니에서도 평소처럼 달리기를 한다.
달리기 광인건 확실하다.
어디서라도 뛸 수 있으니 말이다.
내 경우는 유일하게 즐기는 운동이 바로 달리기인데도 밖에서 뛰지는 못한다.
런닝머신이 제일 편해서 호텔에 가면 주변을 달리는 대신 스포츠 센터를 방문한다.
어디서나 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달리기 매니아다.
포도주 이야기를 맛깔나게 해서 나도 한 잔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일종의 문화적 허영심인지도 모르겠으나, 소주는 아무리 미화를 시켜도 텁텁하고 쓴 느낌이 드는데 반해, 포도주 이야기는 왠지 달콤하게 들려 입맛을 다시게 된다.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면 괌이나 몰디브 같은 휴양지 말고 호주로 신혼여행을 가자는 말을 최근에 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더욱 호주가 가고 싶어진다.
확실히 살고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을 가 본다는 건 굉장한 문화적 경험인 것 같다.
이래서 사람은 여행을 많이 해 봐야 하나 보다.
올림픽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아테네 올림픽 때부터 내가 꼭 주최국을 방문해 직접 경기를 관람하겠다고 십 여 년 전부터 결심을 했으나 결국 코 앞에서 벌어지는 북경 올림픽까지 그냥 넘기고 말았다.
사실 북경이라면 휴가를 써서 다녀올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시드니 올림픽 때 인기없는 남의 나라 야구 경기장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관람하러 온 호주 사람들처럼 나도 올림픽 경기라면 아무리 지루한 경기도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을 것 같다.
4년 후 런던 올림픽을 노려야 할려나?
제일 부러웠던 것은 그의 어학 실력이다.
영어는 이제 생활어 수준이 되서 나라 밖을 나가려면 당연히 할 줄 아는 언어인 것 같다.
호주 기자와 영어로 인터뷰 한 것도 부럽지만, 무엇보다 호주의 서점에 가서 책 몇 권을 고를 수 있다는 게 정말 부럽다.
외국 여행을 가서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그 나라 서점에 가서 책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영어에는 까막눈이니 그저 침만 흘릴 수 밖에.
요즘에는 서점에 외서가 많이 들어와 가끔 구경을 하는데 어쩜 이런 분야까지 출판이 되나 싶을 정도로 장르가 참 다양하고 편집이 예쁘다.
영어책을 부담없이 읽을 수준이 된다면 삶의 폭이 참 넓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