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읽는 성경 - 구약성서 편
하타 고헤이 지음, 이원두 옮김 / 홍익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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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성경의 결합은 워낙 흔한 소재라 처음부터 흥미가 당겼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예쁜 표지와, 일본 사람이 저자라는 사실이 결국 책을 집어들게 만들었다.
일본인 저자에 대한 약력이 없어 아쉽다.
일본 번역서를 읽으면 서구인의 시각과는 다른, 동양인, 더 정확히는 일본인의 시각을 느끼게 된다.
같은 주제를 서구인과 일본인이 미묘하게 다르게 본다는 걸 많이 느낀다.
그래서 번역서 출판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출판대국, 문화강국이 되려면 자국 필자들을 확보해야 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아쉬운 점은 도판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저자도 밝힌 바지만 강의 때 썼던 그림의 반도 다 못 실은 것 같다.
한 챕터의 강의를 위해 최소 30장의 그림을 사용했다는데 실제 책에 실린 그림은 그 중 일부이고 거기다가 도판이 어찌나 작은지 저자가 설명하는 부분을 제대로 보기에는 무리였다.
도판을 크게 실으면 가격이 올라가고 책 판형이 커지기 때문에 출판사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보급판과 양장판을 따로 만들어 양장판에는 모든 도판을 큼직하게 실어 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혹은 CD를 끼워 넣어 책에 나온 그림들을 모두 실어주는 거다.
음악 관련 서적은 책에 나온 음악을 CD 부록으로 같이 주기도 하던데 미술책도 그림을 CD로 끼워 주면 안 될까?

큰 수확은, 새로운 그림들을 많이 알게 됐다는 점이다.
서양 미술사는 알면 알수록 그 깊이가 끝이 없다.
오늘날까지도 현대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여전히 살아있는 명작들의 원천은 참으로 깊고 광활한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그림들이 성경의 장면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미술관도 참 많다.
그 동안 유명한 그림 수십 점만 반복해서 보고, 에이, 이제 볼 거 없네, 했던 점을 반성한게 됐다.
정말 많은 미술관에 정말 수많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
새로운 미술관도 많이 알게 됐다.
유럽 미술관 하면 기껏해야 루브르,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알테 피나코텍, 우피치 미술관 등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각 나라마다 대표 미술관이 있고 도시마다 훌륭한 성당과 지방 미술관이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정말 예술의 세계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성경과 기독교가 서양 미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어찌 보면 오늘날 유럽 연합을 구성한 것도 그리스도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정서적 공감대와 공통된 문화 기반이 바로 기독교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동아시아도 유교 문화권이라고 하지만 한중일 세 나라가 독립적으로 발전한데 비해 유럽은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서구인들, 특히 근대 이전의 유럽인들에게 세계는 곧 성경 속의 세계였을 것이다.
그들의 가치관과 정신 세계를 들여다 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런 문화 강좌라면 얼마든지 시간과 돈을 투자해 들을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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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실계보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7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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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 시리즈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집필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부정확한 내용이 많아 크게 신뢰가 안 갔었다.
그런데 이번 책은 서문에 밝힌 바대로 저자의 치열한 노력이 돋보인다.
조선왕실의 가계도를 밝힌 책은 이미 각 왕 별로 출간된 바 있으나 한 권으로 모아 읽기 쉽게 편찬했다는 점에 대해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특히 단순히 가계도에 국한되지 않고 조선 왕실의 전체적인 모습을 담아 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흥미가 배가된다.
물론 간간히 잘못된 기록도 보이긴 하는데, 어쩌면 정확하지 않은 자료 자체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일찍 죽은 아이의 경우 자녀로 치치 않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따로 기록한 경우도 있어 어떤 기준으로 자료를 취했는지 약간 모호했다.

제일 좋았던 부분은 왕릉의 구성을 설명한 챕터였다.
조선 왕릉은 고대 시대처럼 부장품이나 벽화가 나오는 것도 아니라 그저 산책하기 좋은 곳 정도로만 알았는데 주변 구성이 나름대로 다 법칙이 있었다.
조선 왕릉의 건축 양식을 알게 되서 기쁘다.
다음에 가게 되면 책의 해설에 맞춰 유심히 봐야겠다.

흥미로운 부분은, 의외로 왕비 뿐 아니라 왕들도 불임이 꽤 있었다는 사실이다.
경종과 순종의 불임이야 유명한 사실이지만, 20대 때 죽은 헌종이나 30대에 죽은 인종도 내 생각에는 불임이었을 것 같다.
더 이른 나이에 죽은 의경세자나 예종도 (둘 다 겨우 스무 살에 요절) 자식을 서넛씩 남긴 걸 보면 헌종이나 인종은 남자 쪽에 문제가 있었을 것 같다.
또 막연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조선 왕비들은 불임도 있었지만, 의외로 자녀들을 많이 출산했다.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나 인원왕후, 혹은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등이 불임이었으나 그 외 다른 왕비들은 대체적으로 다 자식이 있었다.
최고의 금슬을 자랑하는 부부는 역시 세종 내외였을 것 같다.
자식 수로 금슬을 예측하는 게 좀 부정확하다 할지라도 (자식을 여덟이나 낳은 원경왕후와 태종처럼 최악의 부부관계도 있었으니) 하여튼 무려 8남 2녀를 낳은 세종과 소헌왕후는 무척 사이가 좋았을 것 같다.

조선 시대 평균 수명이 겨우 40여세에 불과했음은 왕들을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왕이 40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왕이라고 해서 당시 의학 발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잘 먹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태종이나 중종, 인조 등이 50대까지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고, 숙종이 드물게 60을 살았으며 82세까지 산 영조는 매우 특수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어진을 봐도 작고 단단하게 생긴 것이, 건강 장수 체질로 보여진다.
무려 20 여년을 세자 자리에 앉아 있던 문종이나 인종 등은 한 마디로 아버지 세종과 중종이 당시로서는 너무 오래 살아 왕위에 오르자마자 죽어서 마치 단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30대에 사망했으니 당시 왕의 평균 수명으로 보면 꼭 요절한 것도 아니다.
특이한 것은 왕위에서 쫒겨난 광해군이 제주도의 그 척박한 유배지에서도 67세까지 장수한 걸 보면 무척 건강 체질이었을 것 같다.
반정으로 왕위를 지키지 못함이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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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박스 (Music Box)
미디어체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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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영화 중반에는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잘 못 잡았다.
대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
마지막까지도 나는 아버지의 진실을 믿었다.
당연히 딸이 오해하는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충격적으로 아버지는 나치 학살범의 일원이었다.
공산주의를 증오해 미국으로 망명한 것처럼 위장했으나 사실은 친위대원이었던 것을 감추기 위해 범죄 사실을 숨기고 이민온 것이다.
설마 평생을 성실한 노동자로 살아온 아버지가 딸에게 철저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딸의 분노와 충격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손자에게 홀로코스트는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보면, 과거의 범죄에 대하여 죄책감이 전혀 없고 여전히 그는 과거 친위대 시절과 변한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유대인과 집시를 증오하고 인종학살을 정당화 시키는 친위대원!
어쩌면 자신의 과거가 드러나는 게 두려워 다른 변호사가 아닌 딸에게 변호를 강요했는지 모르겠다.
딸은 무조건 자신의 결백을 믿을 테니까.
결국 법정에서 그에게 학살당할 뻔 했다고 주장한 증인들은 다 옳았다.
딸은 그들의 기억력에 의문을 표하며 동명이인임을 주장해 결국 재판에서 이겼지만 영화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고향인 헝가리까지 가서 알게 된 아버지의 비밀, 나치대원이었음을 숨기기 위해 그 사실을 아는 동료를 협박해서 죽이고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얻은 수십년 된 전당포 표를 얻게 된 딸은 충격적인 증거물과 교환한다.
뮤직 박스 속에는 아버지의 학살 장면이 찍힌 사진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에게 쫓기던 친구가 증거물로 전당포에 맡긴 후 헝가리에 있는 여동생에게 안전하게 맡겼던 것 같다.
결국 딸은 아버지가 저지른 학살 사진을 검사에게 보낸다.
다음날 신문에 특종 기사로 보도되고 딸은 아버지를 떠난다.
얼마나 비극적인 결말인가!
그러나 양심을 택한 딸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검사가 딸에게 한 말이 있다.
당신 아버지에게 원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진실을 밝혀져야 하고 범죄는 응징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당시에는 아버지의 결백을 믿었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전형적인 잔인한 검사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결말을 알고 나니 그 검사의 대사야 말로 영화의 주제를 압축시키는 말 같다.

혈육의 정과 진실 사이에서,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을 한 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결국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방 정리하면서 대충 본 영화라 제대로 감상을 못한 게 아쉽지만 굉장히 독특하고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을 잘 파헤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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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선택 - [초특가판]
씨네코리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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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은 엄청나게 좋던데, 사실 나는 썩 재밌게 보지는 못했다.
두시간 반에 달하는 긴 분량도 그렇고, 한번에 쭉 보지 못하고 나눠 봤기 때문에 몰입하지 못했던 탓도 있다.
굉장히 기묘하고 독특한 느낌의 영화인데, 어떤 블로거의 평처럼, 나치 학살을 노골적으로 고발하는 <쉰들러 리스트>와는 매우 다른 느낌의 홀로코스트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메릴 스트립은 이 영화로 미국 내 다섯 영화제의 여우 주연상을 휩쓸었다고 한다.
1982년도 수상작이니 꽤 오래 전 영화다.
줄거리 자체로 보면 특별할 게 없는데 오히려 아카데미에서 이런 마이너 느낌의 영화에 여우주연상을 수여했다는 게 더 신기하다.
메릴 스트립은 원체 연기 잘하는 배우로 유명해서 솔직히 특별히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기억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이후의 메릴 스트립은 모두 그 연기의 변형으로만 보인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콜드 마운틴>의 니콜 키드먼도 메릴 스트립 못지 않은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둘 다 창백한 금발 미녀라는 점에서 비슷하지 않나 싶다.

서구인들에게 있어 홀로코스트는 일종의 죄의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흑인 노예제에 대해서는 이렇듯 철저한 반성과 죄의식이 없는 걸 보면, 아무리 차별받는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백인, 유럽인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일종의 동료의식으로써 더 깊은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또 유대인이 차별받는 소수 민족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그들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부강해졌고 메이저 그룹에 편입됐기 때문에 여전히 하류층인 집시 민족과는 다르게 더 큰 책임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나치에 대한 서구인들의 증오심은, 비슷한 시기에 함께 행동했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난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 같다.
독일에서 나치즘은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영원히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누구도 발흥을 직접적으로 막기 어려운 문제라는 묘한 차이점이 느껴진다.
하여튼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는 기묘하게 다르다.

스팅고라는 시골 문학 청년의 예술적 성장기라는 생각도 든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서도 영화는 줄곧 스팅고의 관점으로 진행되므로 크게 보면 이 순수한 시골뜨기 남부 청년의 성장기 같다.
배우도 비슷한 느낌의 얼빵한, 그러나 뭔가를 이뤄 보려고 애쓰는 느낌의 작달막한 남자를 골라 무척 잘 어울린다.
배우가 주는 느낌과 영화 속의 캐릭터가 대체적으로 다들 일치한다.
수용소에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딸을 가스실로 보냈다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소피가 자살을 기도하자 갑자기 나타난 흑기사 네이던이 그녀를 구해준다.
전체적으로 보면 소피는 딸을 선택적으로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못 벗어나고 결국 미치광이 네이던의 자살 파트너로 생을 끝내고 마는 것 같다.
딸을 죽이고 대신 살린 아들 얀이 살아 있었다면 그것에 희망을 걸고서라도 죄책감을 이겨 낼텐데, 불행히도 얀 마저 죽고 만다.
어찌 보면 그녀는 인생을 반은 포기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절망적인 삶이,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네이든과 묘하게 어울려 마치 죽음 직전의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같다.
그 시기에 스팅고를 만난 것이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스팅고의 초고를 읽은 네이든이 브룩쿨린 다리에 올라가 스팅고를 위하여, 를 외치며 잔을 들 때였다.
이 장면은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가 배 위에 올라서서 <I'm king of the world> 를 외치는 것과도 흡사했다.
네이든은, 이 브룩쿨린의 다리가 휘트먼과 디킨스 등이 거쳐간 바로 그 다리라고 말하면서 이제 그대를 위해 건배를 들겠다고 한다.
아마도 스팅고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처음으로 인정해 준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만약 소피가 스팅고와 시골로 내려가 가정을 이루었다면?
어떤 상처든 시간이 지나면 줄어들기 마련이니 그녀는 과거의 고통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네이든에게 돌아가 결국 동반자살로 끝맺은 선택은 정말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소박하고 순수한 스팅고는 소피와의 행복한 삶을 잃은 대신, 문학가로서의 성장을 경험했다.
어쩌면 소피는 그가 감당하기 힘든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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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Mr. Know 세계문학 5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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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나 읽으려고 벼르던 책인가!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첫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항상 실패했던 책이다.
자연에 대한 감상을 늘어 놓고 서간체였기 때문에 애틋한 사랑 얘기가 얼른 나오지 않아 집중하기 힘들었다.
알고 보니 원래 이 소설이 자연을 예찬하는 이른바 질풍 노도의 시기 문학이라고 한다.
이성주의, 합리주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 낭만주의의 정수라고 할까?
하여튼 구구절절한 사랑 얘기가 얼른 안 나와 도무지 재미를 느끼지 못해 맨날 읽다가 내팽개친,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읽고 싶은 의무감 같은 책이었다.
서점에서 미스터 노 시리즈로 이 책을 만났을 때, 바로 이거다 싶어서 얼른 집어 들었다.
표지가 어쩜 그렇게 예쁠까!
고전은 그 시대의 언어로 재해석 되야 한다는 말도 맞지만, 책 커버에 나온 것처럼 디자인이나 판형 등도 매 시대마다 새롭게 출간되야 함을 느끼게 한 책이다.
종이질도 무척 가볍고 한 손에 쥐고 읽기 쉬울 만큼 책 사이즈도 아주 맘에 들었다.
다만 역시 240페이지에 불과한 책이 7800원이라는 가격은 비싼 감이 들었고 (민음사에서 나온 같은 책은 할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5천원) 번역도 썩 매끄럽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을 읽어 보고 싶다.
혹은 이 책 자체가 과장되고 수사적인 문체로 되어 있는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내가 생각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3 시간 동안 읽었는데 가벼운 로맨스는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닥터 지바고처럼 사랑 얘기는 뒷전이고 러시아 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방황하는 개인의 갈등을 표출한 것도 아니었다.
괴테가 겨우 스물 다섯에 이 소설을 썼다는 게 충분히 믿어진다.
스물 다섯이면, 나보다도 어린 나이니 충분히 이런 감정에 빠질 것이라고 이해된다.
괴테도 나중에 이런 감상적인 소설을 쓴 걸 부끄럽게 여겼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도 나이가 들면 아마 이런 감정은 젊은 시절의 치기어린 것으로 치부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많이 공감하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자살이 유행처럼 번질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하니, 아마도 대중의 공감을 살만한 어떤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을 것 같다.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그런 분위기가 있었을 것 같다.
정말 나폴레옹은 이 책을 전장에서도 읽었을까?
대체 어떤 점에 그토록 빠져 들었던 것일까?
혹시 한국어로 번역되서 내가 그 맛을 못 느끼는 건 아닐까?

사실 나는 크게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베르테르의 선택은 너무나 극단적이다.
첫 장에서 베르테르는 사랑하는 연인이 죽은 후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빌하임이라는 마을로 요양을 온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로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아무리 사랑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지만 이렇게 쉽게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게 말이 되나?
이 시기를 잘 넘겼으면 아마 베르테르는 또다른 연인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베르테르의 문제는 로테가 살고 있는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는 데 있다.
로테에게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돌아온 후 베르테르는 그 곳을 떠나 어떤 백작의 관리로 일한다.
그 곳에서 일이 잘 안 풀리자 다시 로테의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결혼 생활을 하는 로테에 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만약 백작의 관리로 승승장구 했다면?
아마 그는 로테에 대한 마음을 차츰 잊어갔을 것이다.
일이 안 풀리고, 어떤 대안으로써 다시 로테의 마을로 돌아간 게 문제였다.
스물 다섯 젊은이의 치기라고 할까?
소설에서 로테와의 관계가 마음으로는 어느 정도 통했으나 실제적인 연애는 거의 없었음을 보여 준다.
겨우 베르테르의 강압적인 키스 한 번 뿐!
로테가 베르테르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열렬히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베르테르 혼자 짝사랑 한 것에 불과하다.
로테는 알베르트와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둘 사이에서 홀로 괴로워 하는 베르테르는 삼각관계라고 착각한 후 결국 스스로 빠지기로 결심한다.
그 선택이 자살이라니,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나!

소설 속의 베르테르는 성격이 참 마음에 든다.
불쾌한 기분, 우울한 기분도 다 병이라고 보는 베르테르는, 질병을 치유하듯 그런 기분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자신의 불쾌한 기분 때문에 남에게 그런 기분을 전이시키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한다.
보통 기분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질병의 일종으로 보고 역시 치료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본다는 그의 관점이 마음에 든다.
기분은 전염되기 쉽기 때문에 스스로의 기분을 좋게 유지해야 남에게 피해를 안 준다는 그의 논리가 마음에 든다.
이렇게 긍정적이고 올바른 생각은 갖는 사람이 대체 자살이라니, 이 무슨 극단적인 선택이란 말인가?
로테가 있는 마을을 떠나 다른 일을 찾았다면 아마 베르테르는 곧 자신의 긍정적인 성격을 회복하고 훌륭한 젊은이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로테라고 하면 샤를로테의 애칭 같은데, 여기서 주인공의 이름은 로헤텐이었다.
원래 괴테가 반한 실제의 여인 이름은 샤를로테였다고 한다.
일부러 바꾼 모양이다.
70대의 나이로 10대 소녀에게 프로포즈를 한 괴테의 애정 편력에 비춰 볼 때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한 주인공의 심리 상태가 더더욱 못미덥다.
더구나 단순히 짝사랑만 가지고 말이다.
독일어 소설은 좀 지루한 느낌이 든다.
사실 인문사회 서적도 그렇다.
독일 특유의 어떤 분위기가 있는데 영국, 미국적인 것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언어의 강렬함도 그렇고.
하여튼 벼르던 소설을 읽어 버려서 마음이 홀가분 하고 기회가 된다면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으로 다시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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