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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일곱 계단
에드워드 멘델슨 지음, 김정미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막연히 제목만 듣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논하는 책인줄 알았다.
제목이 좀 지루하지만 내용은 상당히 괜찮다.
보통 왠만한 책은 도서관에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어지간히 홍보가 안 됐는지 비치가 안 됐길래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아마 신문이나 알라딘 서재 어딘가에서 리뷰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알라딘 서재의 도움을 참 많이 받는다.
서점에 가서 직접 책을 고르는 것도 즐겁지만 그보다는 알라딘 서평에서 좋은 책들을 많이 발견한다.
특히 나와 취향은 좀 다르지만 수준있는 책들을 많이 알게 해 주는 나귀님!
댓글 다는 걸 일종의 태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아예 댓글 차단을 하는 바람에 직접적으로 표현은 못하지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은 끝까지 못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반납일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도 억지로 읽게 되는 강제성이 있어서 좋으면서도 바쁜 나머지 대충 읽게 되는 폐단이 있다.
하여튼 시간이 부족해 내가 읽은 책인 브론테 자매들의 소설 부분만 봤다.
<제인 에어>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소설인데 어떤 평론가가 대중소설에 지나지 않다는 식으로 비하를 했길래 속상했다.
특히 동생인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식의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기쁘게도 <제인 에어>를 <폭풍의 언덕> 보다 훌륭하게 평가했다!
사실 나는 책을 읽고 평가하는데 있어 평론가나 독자 다수에 의해 좌우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모든 독서는 제각각 자기만의 방식이 있으며 평가받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본격적인 문학 평론이야 다른 문제겠지만 적어도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수가 환영하는 책이라도 내가 별로라고 느끼면 과감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참 지루하고 재미없게 읽은 책이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도 마찬가지.
그런데 서평란에 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내 감상문 올리기가 참 민망하고 혹시 내가 오독을 한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보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작가 자신마저도 자기 책에 대한 생각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한다.
모든 독서는 매우 개인적인 일이라 정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지극히 개인의 문제이므로 백 명이 읽으면 백 개의 감상이 존재하고 언제 읽느냐에 따라 같은 독자마저도 느낌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게 바로 독서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단 고전이라고 인정받는 책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읽어 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다는 것은 절대로 섣불리 비난할 수 없으며 나름의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이 책은 <폭풍의 언덕> 과 <제인 에어> 에 대해 새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나는 <제인 에어>를 정말 너무너무 재밌게 읽은 데 반해, <폭풍의 언덕>은 매우 힘들게 읽었다.
도대체 그 기묘한 캐릭터들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제인 에어는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캐릭터인데 캐서린과 히드클리프는 주변에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인물들이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고 격정에 싸인 두 인물, 남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고 자신의 광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이 두 사람은 정말 위험하다.
저자는 이 둘의 캐릭터를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는 인물들로 봤다.
너는 곧 나의 일부다, 나와 같다는 표현에서 나는 문득 <사랑과 야망>의 미자와 태준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격정적인 성격의 캐서린은 미자와 비슷하다.
태준이 재혼을 하려고 하면서도 미자에게 소리치기를, 내가 어떻게 널 버리겠느냐, 나는 평생 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면 너는 곧 나니까, 라고 말한다.
그 때는 좀 괴변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 딴 여자와 재혼하면서 미자에게 나는 영원히 너에게 속해 있다는 게 대체 무슨 얘긴가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그 장면이 이해됐다.
태준의 심정이 이해됐다.
너는 곧 나다, 너와 나는 서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해도 영원이 서로에게 속해 있다.
히드클리프와 캐서린이 그랬다.
둘의 성향은 너무나도 비슷하고 서로에게서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결혼해 육체관계를 갖는다 해도 여전히 두 사람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저자는 이들이 섹스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육체적 합일이야 말로 어쩌면 별 게 아닐지 모른다.
정신적인 일치감, 서로에 대한 강한 구속력, 둘은 그래서 각자의 배우자에 대해서 별로 질투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과 매우 구분된다.
나는 에밀리 브론테가 추구했던 그 합일성, 일체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김수현 작가가 이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건 아닌지 궁금하다.
반면 <제인 에어>는 평등에 초점을 맞췄다.
나는 제인의 그 독립적인 성향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자존감을 지키고 물질이나 사랑에 휘둘리지 않고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가 참 마음에 들었다.
저자는 이 소설을 평등한 개인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가난한 가정교사 제인은 부유한 로체스터에게 비록 사랑으로 만났지만 예속될 수 있었다.
그녀는 단호히 아내가 있는 로체스터를 떠난다.
나중에 제인은 부자가 되고 로체스터는 아내 버사의 방화로 아내와 재산을 모두 잃고 심지어 한쪽 팔과 눈마저 잃는다.
그제서야 제인은 당신과 내가 평등하게 만나 사랑을 할 수 있게 됐음을 감사하고 그와 행복하게 결혼한다.
19세기 여성의 소설이란 걸 감안하면 정말 놀라울 만큼 독립적이고 자립적이지 않은가?
소설의 의미를 특히,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의 의미를 밝힌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시도가 돋보이고 인간의 희노애락을 자연스럽게 이애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기회가 되면 다시 정독하고 싶고 책에 소개된 다른 소설들도 읽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