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탐정들 - 세계 50대 유적의 비밀
폴 반 엮음, 김우영 옮김 / 효형출판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세럼이 쓴 <낭만적 고고학 산책>이 상당히 지루하고 집중도가 떨어졌던 반면, 폴 반이 쓴 <고고학 탐정>은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다.
두 책의 차이를 들자면, 세럼의 책은 발굴자와 발굴 당시의 에피소드들에 대해 꽤 자세히 늘어 놓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상이하고 사전지식이 없는 나같은 먼 나라 독자들이 듣기에는 퍽 지루한 편이다.
마치 한국 고고학자가 신라 왕릉 발굴기라는 지엽적인 주제에 대해 쓴 책을 유럽인이 읽는 기분이랄까?
물론 여기 소개된 발굴들은 대단히 세계적인 것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반면 폴 반의 책은 내용이 가볍고, 복잡하거나 지난한 발굴 과정들은 죄다 생략해 버렸다.
그래서 일면 수박 겉핥기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어쨌든 일반인이 읽기에는 훨씬 편하다.
문체의 차이도 있는 것 같다.
각 발굴지마다 딱 세 장에 국한된 압축된 설명이 책의 응집력을 높이기도 하지만, 대신 너무 가볍다는 생각도 간혹 든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잘 된 책이다.
아마 직업적인 고고학자라는 저력이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즉, 뒷꽁무니가 쫓아다니는 신문 기자 나부랭이가 아니라는 것)

역사학자들이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반면, 고고학자들의 관심사는 유적과 유물인 것 같다
특히 선사시대 연구는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흥미진진한 모험과도 같은데, 고고학자의 이미지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작업 같다.
인디애나 존스 박사처럼 온갖 신기하고 매혹적인 탐험을 한다기 보다는,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너른 벌판을 이잡듯 뒤지는 성실성과 지난한 작업들로 하나의 발굴이 이루어짐을 알게 됐다.
물론 기본적으로 보물 찾기와 같은, 호기심과 약간의 투기 심리와, 몽상적인 부분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말이다.
하여튼 과거를 밝히고자 하는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은 놀라운 지경이다.
비슷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이유로 조상 숭배의 전통도 고고학에 대한 열정과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이미 벌어진 일을 밝힌다는 점에서 보면, 섣불리 미래를 예측하는 것 보다는 과거를 정확히 알고자 하는 노력이 훨씬 더 성실하고 진지해 보인다.

책에 나온 다양한 유적지들은 워낙 유명해서 한 번씩은 들어 본 얘기들이다.
아쉬운 점은 영문 표기가 거의 없어 인터넷을 통해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요즘에는 구글이나 위키피디아가 워낙 발달해서 왠만한 지명이나 지식들은 인터넷에 널려 있다.
특히 문화가 다른 서구 사회의 지엽적인 지명이나 전통들은 저자의 각주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기 때문에 (또 그렇게까지 성실한 번역자도 드물고) 인터넷을 뒤지게 되는데, 원어 표기가 없으면 애를 먹는다.
한글로 번역된 단어를 치면 딱 그 책에 나온 인용문만 뜬다.
전혀 자료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는 고유명사나 번역하기 애매한 단어들에 대해 꼭 원어표기를 함께 해 줬으면 한다.

인상깊은 발굴로는 역시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호미니드들의 화석이 있겠다.
인류는 언제 영장류에서 갈라져 나왔는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 속의 분기점은?
루시는 정말 우리들의 이브일까?
유인원과 인간을 잇는 중간 고리는 과연 어디에?
인터넷을 참조하여 대강의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덕분에 독서 시간은 한정없이 길어졌지만 말이다.
아프리카 평원에서 뼛조각 찾는 일을, 트럭에 뭉개진 계란 껍데기 맞추는 일에 비유한 고고학자의 한탄은, 인류의 진화 과정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노력과 열정들이 축적되어 언젠가는 (가능하면 내가 죽기 전에) 우리의 기원을 밝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발굴도 흥미로웠다.
성경이 사실이다고 믿는 쪽의 책을 읽다 보면 짜증이 나는 게, 일단 성경을 경전으로 보는 대신 역사서로 대하기 때문에, 그것도 오류가 전혀 없는 정확한 기록으로 보기 때문에 그 전제에 맞춰 발굴 결과를 해석한다.
다른 곳에서 반증의 증거를 찾는 대신, 성경의 기록에 맞는 증거물을 찾아다니는 식으로 말이다.
얼마 전에 읽은 이스라엘 고고학자의 책은, 폴 반의 입장과 거의 대동소이 하다.
아마도 역사학계가 아닌 고고학계에서는 어느 정도 일치된 의견이 아닌가 싶다.
솔로몬 궁전의 위대함은 발굴단이 찾기 힘들고 오히려 사마리아 왕국, 즉 북이스라엘이 훨씬 더 번성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속속 발견된다.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서 흘러 들어온 이주노동자 집단이었다기 보다는, 가나안의 토착민이었다는 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다.
물론 아직 정설로 확립된 것은 아니다.
하여튼 그렇게도 경멸하고 배척했던 가나안 토착민들의 풍습이나 건축 양식들이, 실은 이스라엘 역시 가나안의 한 부족으로써 공유했던 문화라고 하니, 유대인 역시 홀로 고립된 독창적인 집단,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선택받은 신의 민족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떤 민족이든 신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이야말로 전형적으로 보여지는 종교의 특성 같기도 하다.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폴 반의 또다른 역작인 <현대 고고학의 이해>를 읽어봐야겠다.
고고학은 정말 위대하고 흥미진진한 학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장의 기억 이산의 책 23
도미야마 이치로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좀 지루했다.
철학 내지는 도덕에 관한 책 같다.
확실히 나는 당위적인 철학책에는 약하다.
좀 더 실제적인 책을 원했는데 아쉬운 대목이다.
다만 생각해 볼 만한 꺼리는 충분히 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식민 통치라는 피해의식 때문에 제대로 된 분석을 하기 힘들었는데, 저자처럼 오키나와인이라는 또다른 피지배 계층이 전쟁이 인간을 구속하는 방식을 규명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
한국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수탈과 억압은, 그 한맺힌 역사가 너무나 깊게 아로 새겨져 자칫 민족주의로 빠져 일본의 전체주의적인 지배 방식을 그대로 내면화 시켜 우리 역시 자국을 맹목적인 애국심과 상대에 대한 적대감으로 무장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 대한 비난이 민족주의적 감상으로 흐르면 궁극적으로는 비슷해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본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은 우리 민족을 식민 통치했다는 사실 보다도,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개인의 자유와 인격이 억압당하고 전체주의에 죄다 동원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타국의 식민 통치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국이 그 주체라 할지라도 국가의 전체주의적 동원은 끔찍하게 싫다.
나치나 일본의 군국주의가 싫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남벌>이나 <한반도>도 거부감이 든다.
이 책은 일본의 그런 제국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가 어떻게 한 인간을 억압하는지 잘 보여준다.
또 같은 일본 내에서도 하층 계급을 차지하는 오키나와인들이 내지인과 비슷한 대접을 받기 위해 어떻게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 시키는지도 잘 보여준다.
감시와 처벌이라는 푸코의 이론을 자주 인용한다.
좀 더 꼼꼼하게 독해를 했더라면 좋았을 책인데 도서관 반납 기일에 걸려 미처 다 못 읽고 돌려 줬다.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 볼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
레이 황 지음, 홍광훈. 홍순도 옮김 / 경당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다.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면 갑자기 인생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살아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연체가 되는 바람에 끝까지 못 읽고 반납하게 됐다.
저자의 이력이 매우 특이하다.
장제스의 군관학교 출신으로 버마 전선까지 나가서 싸웠고 예편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닦이 등을 전전하다가 40이 넘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해 역사학을 전공한 후 뉴욕주립대 교수로 퇴직했다.
퇴직 후 활발하게 중국 역사 서적을 편찬하고 있다고 한다.
40이면 자기 분야에서 업적을 이룰 나이인데 그 때서야 전직 군인이 전혀 새로운 분야로 뛰어 들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이 놀라운 만학도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다.

보통 한 나라의 역사를 개괄하는 이런 종류의 통사는 지나친 압축과 생략으로 맥이 빠지기 쉽다.
그런데 저자는 거시사라는 단어에 걸맞게 전체적인 역사를 조망하는 방법을 택해 600페이지 분량의 저술이 하나의 주제로 수렵되는 효과를 거둔다.
궁극적인 주제는 중국의 자본주의 이행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문에 실린 비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중국 역사를 조망했다.
영국이 도시국가로 변형되는 과정이 수백년 걸렸듯 비록 중국은 수천년의 시간이 필요했으나 이제는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전제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완벽하게 이행했고 그 체질개선의 과정을 흥미로운 필체로 기술한다.
특히 송나라의 상업주의가 자본주의로의 변화를 가져올만큼 활발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사실 이 주장은 한국 학자의 책에서도 읽은 바 있다.
왜 왕안석의 그 놀라운 개혁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과정에서 오히려 국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책에서 잘 분석한다.
화폐만 유통하고 돈만 빌려 주면 끝이 아니라, 금융업이나 대부업, 관련 법규 등등 제반 시설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21세기에나 볼 듯한 여러 상업 육성 정책을 폈으니 실패나 혼란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왕안석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개 현령으로 있을 때 성공을 거둔 것은 통제할 수 있는 작은 범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전역으로 확대시키기에는 정치적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복잡한 중국 역사도 자주 접하다 보니 각각의 독립된 대상으로 인지가 된다.
송나라의 경우 그림을 잘 그렸다는 휘종이나 왕안석를 등용한 신종,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세울 때 인용된 철종 등이 하나의 인물로 다가온다.
삼국지에서 봤던 후한의 황제들도 누가 누군지 좀 알 것 같다.
당나라의 태종이나 현종, 측천무후 등도 어느 시대를 살았는지 대강 윤곽이 잡힌다.
이래서 독서는 즐거운 일이다.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니까.

책을 더욱 빛나게 해 주는 것은 역자의 꼼꼼한 각주다.
대강 뜻만 설명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관련 지식을 성실하게 설명해 준다.
번역도 퍽 매끄럽다.
특히 저자가 미국에서 활동하다 보니 중국 역사를 설명하는데 서양의 경우를 예로 들어 비교하기 때문에 훨씬 이해도 빠르고 재밌었다.
이를테면 측천무후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비교하는 식이다.
구체적인 비교는 아니지만, 예시를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이런 비교사적 작업은 저자처럼 양쪽 문화권에서 충분히 오래 산 학자들이 하면 좋을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국 결과론에 기대어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서양은 산업화와 근대화에 성공했고 중국은 실패했다.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한계다.
어떤 역사서도 인과론을 설명할 때 결과에 맞춰 과거를 해석한다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수 천년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중국이, 근대화에 실패하는 바람에 과거의 영광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함이 안타깝다.
언젠가는 그 위대한 민족의 저력을 발휘할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러고 보면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은 중국을 얼마나 낙후시켰던가!
레이 황의 다른 저서도 읽어 볼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대 세계의 만남 - 교류사로 읽는 문명이야기
제리 벤틀리 지음, 김병화 옮김 / 학고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책을 만난 기분이 든다.
반납 기일이 지나서 못 읽고 갖다 줄 뻔 했는데, 어찌어찌 시간을 내서 읽게 됐다.
요 근래 독서에 대한 욕구가 시들해져 빌려 놓고도 그냥 반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좋은 책을 두 권이나 읽어서 기쁘다.
사실 이 책은 희망도서로 신청한 책이다.
1992년도에 쓰여진 책이니 벌써 20년 가까이 됐을 뿐더러,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것도 2006년이니 신간은 아니다.
도서관에조차 구입이 안 된 걸 보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운데 다행히 희망도서로 구입해 줬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분량도 250페이지가 약간 넘고 내용도 체계적이며 쉬운 문장으로 쓰여져 술술 읽을 수 있다.
내 경우는 관련 지식을 찾아 보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하나의 전체적인 개념으로 정리되는 기분이다.

보통 문명의 교류라고 하면 콜럼버스의 대항해 이후를 생각한다.
15세기가 되서야 비로소 세계가 하나로 연결됐고 본격적인 교역이 시작됐다고 본다.
저자는 교역의 역사가 고대로부터 존재했고 그 범위는 상상 이상으로 넓었음을 입증한다.
아메리카가 신대륙으로 불리는 이유는 비단 서구적인 시각 때문만이 아니라, 그 교역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세아니아나 아메리카가 독자적인 발전을 한데 비해 (상당히 느린 속도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즉 구대륙은 고대로부터 이미 활발한 교역을 했고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러므로 이미 구대륙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됐다고 본다.
책에서는 기술이나 문명의 전파 보다는 문화적인 것, 즉 종교를 주소재로 설명한다.
따지고 보면 종교의 전파야 말로 문명 교류의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과 극동의 일본에까지 전해져 국교가 된 걸 보면 고대 세계의 문명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또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의 전파 역시 마찬가지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일상을 지배했고 기독교 역시 마니교나 네스토리우스파와 같은 변형종교로써, 마태오 리치가 중국 땅에 발을 딛기 한참 전부터 당 제국에 교리를 설파했다.
단순히 변경지대에서 호기심 어린 이국적 종교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세계 종교가 이미 고대로부터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바로 활발한 교역의 명백한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알파벳이나 한자의 전파는 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 같다.
베링 해협의 육교가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먼 땅을 걸어서 아메리카까지 넘어가고 이미 신석기 시대때 통나무를 만들어 오세아니아 대륙까지 건너갔을 정도니 과연 인간의 이동 욕구는 놀랍다.

저자는 새로운 문명이 타 문화권에 전파되어 이식되는 힘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분석한다.
사실 이 책이 훌륭한 것도 바로 이 동기를 분석했다는데 있다.
왜 사람들은 낯선 이방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가장 핵심적인 대답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로 상인들을 통해 전파되는 새로운 문화는 지배 엘리트 계층에 의해 수용되고 하층민들의 모방 욕구에 따라 널리 전파된다.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이득이 되는 문화를 받아들인다.
당연히 상인들이 전해주는 문화는 선진적인 경우일 것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자발적인 제휴로써, 선진 문화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것이 지배층의 권력을 공고히 하므로 받아들인다.
삼국 시대 때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를 국교로 수용하는 것 등이 이런 예가 될 것이다.
혹은 우리가 미국 문화를 모방하는 것, 특히 뉴욕 문화를 동경하는 것도 비슷한 예가 될 것 같다.
엘리트 계층은 선진 문화를 먼저 수용함으로써 피지배 계층에 대해 우월 의식을 공고히 한다.
둘째 강압적인 복종이 있다.
몽골이나 제국 시대 때의 유럽 등을 들 수 있다.
혹은 이슬람의 성전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종교 박해나 탄압 등이 생기고 저항이 극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의 존속을 유지시킬 힘을 제공받지 못하는 이상 지배층의 문화를 내면화 시키고 만다.
셋째 소수 집단의 동화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에 전파된 마니교인데, 기독교의 발상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본류와의 교류가 끊기고 특별한 사회적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공동체가 와해되고 만다.
자연스럽게 다수파에 섞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유럽 사회에서 살아남은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한국 역시 거대한 중국 문명에 동화되지 않고 적절한 교류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사대외교가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를 새삼 느낀다.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절충주의가 필수다.
가끔 개신교에서 가톨릭의 성인 숭배를 극렬하게 비판하는 것을 보는데, 2천년에 걸친 기독교의 긴 역사를 전면 부정하는 피상적인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종교든지 오랜 기간 동안 순수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
만약 기독교가 이교도와 타협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사실은 예수 탄생일이 아니라 이교도의 축제일이었으므로 기념하지 않겠다는 어느 교파의 주장을 듣고서 문득 드는 생각이, 그렇다면 개천절은 왜 쉬는가?
단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근거로 10월 3일에 나라를 건국했다는 걸 믿냔 말이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 토착 신앙과의 절충을 시도했고 성공한 종교는 보다 많은 문화권에 퍼져 나간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왔을 때 제사 등을 문화권의 차이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은 매우 현명한 조치였으나, 그 후 교황의 잘못된 판단으로 (반종교개혁의 여파로) 제사를 우상숭배로 금지하면서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던가?
현재 가톨릭은 제사를 조상에 대한 기념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의 박해 때 제사 문제로 죽어간 그 엄청난 교인들은 얼마나 무가치한 죽음을 당했단 말인가?
단지 해석의 차이로 말이다.
하여튼 종교의 기본적인 교조나 핵심 가치는 보존되어 하겠으나, 근본주의식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가끔을 무섭기까지 한 순혈주의는 오히려 종교의 범위를 축소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기독교가 비판에 직면한 것도 근본주의적인 편협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외에도 권력과 결탁해 마치 교회에 나가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방법의 하나로 인식되는 어처구니 없는 분위기도 한국에서는 한 몫 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굉장히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좀 더 넓은 시각으로 고대사를 바라봤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역시 정통 역사학자의 책은 논리정연하고 지나친 비약이 없어서 읽을 때 마음이 참 편하다.
논리의 비약, 무리한 확대 해석이야 말로 아마추어 사학자 혹은 재야 사학자라는 사람들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널리 소개가 되서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초의 현대 화가들 - 대표작으로 본 12인의 예술가
다카시나 슈지 지음, 권영주 옮김 / 아트북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오래 전부터 읽으려고 찜해 놓은 책인데 이제서야 읽게 됐다.
원글은 1969년에 일본의 미술 잡지에 1년간 연재된 아주 오래된 글이고, 책은 2005년에 출간됐으니 신간은 아니다.
희망도서로 구입해 준 도서관에 감사드린다.

다카시나 슈지의 책은, <명화를 보는 눈> 과 <예술가와 패트런> 을 읽은 바 있다.
이 책까지 포함해 세 권 모두 평이하고 쉬운 언어로 미술사에 대해 잘 조망해 주고 있다.
그야말로 미술에 관심있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쉬운 입문서 역할을 한다.
일본의 국립 서양 미술관 관장이었다는데 지나치게 어렵거나 전문적이지 않고 글을 비교적 쉽게 쓰기 때문에 읽기 편하다.
또 번역자의 말대로 책에 나온 그림을 가능하면 다 실어주려고 애쓴 출판사의 공로도 책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아쉬운 점은 작품의 원어 병기가 없어 인터넷에서 찾으려고 할 때 애를 먹었다.
사실 전부 유럽 작가들이라 영어 표기 역시 원어는 아니겠지만 하여튼 일관된 명칭 표기가 없어 다른 곳에서 같은 작품을 찾기가 어려웠다.

현대 미술은 언제나 어렵고 다소 괴상한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자주 접하면서 조금씩 그 편견이 깨지는 느낌을 받는다.
뭔가 느낌이 온다고 해야 할까?
지난 번 칸딘스키전 때 직접 그 화려하고 역동적인 색체의 미학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책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했을 때 작품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브란쿠시의 그 유명한 <공간 속의 새> 역시 처음 볼 때는 대체 이게 왜 새냐, 이런 식의 추상 조각이면 아무거나 만들어 놓고 이름만 붙이면 되겠다, 이런 반발심이 강했다.
그렇지만 책을 보면서 그의 조각 철학을 이해하게 됐다.
저자의 설명대로, 브란쿠시는 정지해 있는 새를 표현하고 싶은 게 아니라, 움직이는 새, 날아오르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고기를 조각할 때 사람들은 생생한 비늘까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물살을 가르고 헤엄쳐 가는 그 역동적인 모습을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브란쿠시는 죽은 물고기를 똑같이 조각하는 대신,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그 느낌을 추상적으로 조각한다.
또 그는 바라보고 감탄하는 조각품 대신, 만지면서 기뻐할 수 있는 촉각적인 느낌도 중요시 한다.
나중에는 맹인을 위한 조각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다고 한다.
촉감으로 감상하는 조각이라, 정말 멋진 발상이지 않은가?
굉장히 잘 생긴, 정말 예술가처럼 진지하고 철두철미하게 생긴 그의 사진을 보면서 루마니아의 농민 출신이라는, 그래서 언제나 혼자 작업하고 혼자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해 낸다는 투박하고 건실한 이미지가 맞아 떨어져 더욱 관심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매끈한 그 조각상을 만져보고 싶어진다.

에밀 놀데나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도 책을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놀데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네모난 가면을 쓴 남자를 그린다는 화가로 잘못 알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지를 의미한다는 아웃벡에 가면 그 그림이 있는데 대체 누구와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놀데의 <트리오>도 색감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빨강, 노랑, 파랑의 강렬한 원색 대비가 정말 형태는 아무 의미도 없구나, 색체만으로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 이런 감탄을 유발하게 만든다.
키리코의 그 기묘한 광장의 조각상 그림도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된다.
단단한 형태로 분명하게 사물을 표현하면서도 정작 전체적인 분위기는 기묘하고 몽환적으로 표현한 키리코는, 마치 물주머니 모양으로 흐느적 거리는 달리의 초현실주의와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그가 즐겨 그리던 이탈리아의 궁전에 아드리아네의 조각상도 있고 바나나도 있고 놀이 지는 어두운 풍경도 있다.
기차도 달린다.
그 노란색의 색체가 어울어지면서 뭔가 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저녁놀이 질 무렵, 아직 어둠이 깔리기 전 오후 햇살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았을 때 기묘해지는 그런 느낌처럼 말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될 결심을 했다는 이브 탕기나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등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는 바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안 현대 화가로는 콜라주 작품으로 대표되는 다다이스트 슈비터스와, 오르피즘으로 대표되는 피카비아가 있다.
둘 다 생전 처음 듣는 화가다.
사실 콜라주는 이미 회화라고 하기엔 어떤 선을 넘어버린 기분이 들어 크게 관심이 없다.
더더군다나 파괴를 위한 파괴라는 수식어에 딱 들어맞는 다다이스트라니!
음악과 색의 조화를 꾀한 피카비아는 이번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화가다.
말 붙이기 좋아하는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는 조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음악의 명수 오르헤우스에서 비롯됐다는데 정말 그 느낌을 잘 표현한다.
나는 라파엘로나 다비드처럼 대상을 명확하게 그린 고전주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칸딘스키 그림을 보면서 내 취향이 형태보다는 오히려 색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흐를 좋아하는 것도 그 강렬한 노랑과 녹색의 원색이 주는 포스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색으로 느낌을 표현한 오르피즘의 화가 피카비아가 무척 마음에 든다.
실제로 보면 더욱 감동할 것 같다.
특히 3m에 달하는 <우드니>는 더욱 그렇다.
뉴욕으로 가는 배 안에서 발레리나의 춤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퐁피두 센터에 있다는데, 대체 나는 거기 가서 뭘 보고 왔는지 모르겠다.
기억에 전혀 없다.
넝마같은 옷 전시해 놓은 작품 밖에는 생각이 안 난다.
오르피슴의 다른 화가인 들로네의 그림도 무척 마음에 든다.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화가들을 열 두 명으로 국한시키고 특히 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덕분에 짜임새 있는 책이 된 것 같다.
그림 소개도 훌륭하고 현대 회화에 문을 연 화가들의 예술관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추천할 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