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김상근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오래 전부터 보고 싶던 책인데, 드디어 읽게 됐다.
역시 기대만큼 재밌었다.
김원일이라는 소설가가 쓴 <피카소>와 비슷한 분위기다.
한 화가에 대한 책은, 외국 작가보다는 한국 사람이 쓴 책이 훨씬 생생하고 실감나게 와 닿는 것 같다.
번역서도 좋지만, 우리나라 작가들의 분발이 필요한 시점이다.
400페이지 정도로 길이도 적당하고, 생생한 도판이 많이 실려 있어 넘기는 재미가 있다.
맨 마지막에는 자신이 인용한 글들도 성실하게 실어 놨다.
신학 전공자답게, 16세기의 종교개혁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다소 감상적이고 작위적인 해석도 없지 않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독창적인 의견 개진 보다는, 기존의 해석들을 한데 모아 놓은 느낌도 들지만, 비전문가로서 이 정도의 객관성 확립은 필요하다는 생가도 든다.
루벤스 풍의 역동적이고 밝은 그림도 좋지만, 카라바조의 극명한 명암 대비도 무척 좋아한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인상을 주기 때문에 그림을 보면 흠칫 놀래게 된다.
카라바조를 성실하게 계승한 사람이 바로 렘브란트라고 하는데, 카라바조에 비하면 렘브란트는 무척 점잖고 훨씬 정적이며 명상적이기까지 하다.
카라바조는 비단 자신의 격정적인 삶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림만으로도 자극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준다.
카라바조는 기본적으로 데생을 하지 않고 바로 채색을 했다고 한다.
기본 도안 없이 이런 정밀한 그림을 그리다니, 역시 천재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어두움 속에 가려져 인물의 윤곽선은 오직 빛으로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 속에 가끔 등장시켰는데, 마지막에 그린 목잘린 골리앗도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에서 살가죽 벗겨진 자신을 그린 적도 있지만, 노골적으로 목이 잘린 골리앗의 형상에 자신을 대입한 카라바조의 시도가 놀랍다.
그는 성모 마리아든 예수든 누가 됐든 간에 거리의 비천한 사람들을 모델로 세웠다.
성모 마리아의 교회에 걸릴 제단화에다가,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그리면서 물에 빠져 죽은 매춘부를 모델로 세웠다니, 대담하다 못해 지나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고 살인죄를 짓고 쫓겨다녔지만 어느 도시에서든 오히려 그를 반겼다고 하니, 16세기 말의 이탈리아 사람들 눈에도 이 천재 화가의 예술성은 분명하게 보였나 보다.
카라바조의 그림과는 별개로, 16세기의 종교개혁이 비단 개신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는 해석이 인상적이다.
보통 반종교개혁으로 폄하되기 일쑤인데, 저자는 신학자답게 가톨릭의 종교개혁 역시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는 새로운 해석을 소개한다.
나 역시 상식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가톨릭이 인문주의나 개인의 부활이라는 시대정신에 완전히 역행할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유독 순교를 강조하는 제단화를 의뢰했던 것도 신앙심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니, 과연 예술은 시대를 떠나서는 존재하기 힘든 것 같다.
기존의 화가들이 성경의 사건을 역사적인 순간으로 묘사했던 데 반해, 카라바조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그린다.
이를테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그리면 왕처럼 치장한 동방박사들이 찾아오고 성모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처럼 꾸며지며, 위에서는 천사들이 나팔을 분다.
이게 일반적인 도식인데 비해, 카라바조의 그림에서는 정말 헐벗고 굶주린 마리아가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해산을 하고 거리의 방랑자 같은 노인네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해 주려고 찾아온다.
진짜로 마굿간과 가난한 여인의 출산을 그린 것이다.
이러니 당대의 귀족들과 교황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깊은 명암의 표현에 당시 사람들은 환호했다.
오히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그런 극사실주의야 말로 카라바조를 통속 화가와 구별시키는 놀라운 예술성으로 보여진다.
책에 실린 그림들은 대부분 다른 책에서 봤던 그림들이다.
도판 상태가 훌륭해서 넘기는 재미가 있긴 한데, 카라바조 그림들이 워낙 어두운 배경이어서 그런지 세세한 부분은 식별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
역시 직접 원화를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