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화사 깊이 읽기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1
서양사학자 13인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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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표지도 예쁘고, 제목도 마음에 든다.
열 세 가지 사건을 가지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술한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2008년에 나온 책인데, 마지막 히잡 사건처럼 2004년 당시 결론으로 끝낸 점이나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이 2006년 현재 상태로 마무리 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현대사, 특히 정치 부분은 2008년 현재의 상황까지 언급해 줘야 시의성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맨 첫 장의 그리스 민족 기원설은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집트인이 바로 조상이라는 주장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들이 많아 꽤 열심히 읽었는데, 저자의 논의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저자는 트로이 함락 시기나 그리스인 이주 시기를 십 년의 오차 범위에서 정확히 잡는데, 과연 저자가 근거로 드는 문헌들을 100% 신뢰할 수 있냐는 문제가 생긴다.
내가 다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저자의 주장을, 학계에 통용되는 정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고고학자의 책인,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를 보면 모세의 출애굽은 실제 사건이 아니다.
이집트로의 이민 물결은 특정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됐고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고고학적 발굴은 람세스 2세 치하의 대규모 탈출은 불가능 했다는 걸 입증한다.
핑컬스타인에 따르면 기원전 13세기의 이집트 탈출 사건은, 출애굽기가 쓰여질 당시인 기원전 7세기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므로 당연히 성경에 나온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일 수 없다.
그런데 <서양문화사 깊이 읽기> 의 저자는, 단지 성경에 나온 단 한 구절을 가지고 막연히 람세스 2세 때 출애굽이 일어났다고 전제한 후 논의를 펼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이집트를 지배한 힉소스인이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유대인과 페니키아인이 되었고 그리스로 가서 미케네인이 됐다는 것이다.
고고학자인 핑컬스타인은 성경의 기록을 고고학적 발굴과 일치하지 않은 점을 들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반면, 이 책의 저자는 성경을 일단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비단 성경 뿐이 아니라 헤로도토스나 기타 전해 내려오는 역사서들의 기록을 전부 인정하는 입장이다.
나로서는 그리스인의 기원이 이집트인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우면서도,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와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해, 즉 문헌 증거만 들이대는 것 같아 아직은 의심스러운 입장이다.
저자는 의심하는 쪽을 단순히 동양기원설을 거부하는 서양중심주의자들의 협소한 소견으로 치부하는데 동의하기 힘들다.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성경 왜곡의 역사> 에서도 스파르타와 유대인이 형제라는 주장을, 믿을 수 없는, 당시 날조된 전설로 치부했는데 저자는 같은 힉소스인의 자손이므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앞의 책에서는 스파르타와 유대인이 형제라는 마카오베서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한데 비해, 이 책의 저자는 마카오베서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논의에 더 많은 근거가, 특히 고고학적인 발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맨 마지막에 실린 히잡 사건은, 뉴스위크 같은 데서 얼핏 본 기억이 난다.
1989년도 사건이라니, 상당히 옛날 얘기인데 2008년 현재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궁금하다.
종교적 상징물을 공공장소에서 착용할 수 없다는 정교분리원칙에 대하여, 왜 십자가 목걸이는 되고 히잡은 안 되는지 묻는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로, 심지어는 종교적 의미가 퇴색된 악세사리화 돼버린 십자가 목걸이와, 안 쓰면 처벌받는 히잡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좀 어처구니가 없다.
과연 이슬람 여학생들이 히잡을 자유의지에 의해 착용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슬람 국가에서 히잡을 쓰지 않는 여성에 대해서도 처벌하지 말아야 하며 사회적, 종교적 비난도 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관용에 대하여> 라는 책을 보면, 이슬람 가정에서 여학생들에게 히잡 착용을 강요하고 학교에서는 금지하기 때문에 이것을 개인의 선택 문제로 보기 보다는, 국가과 특정 집단 사이의 힘겨루기로 이해한다.
이슬람 공동체가 강요하는 것을 국가가 금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여학생들은 히잡을 벗을 자유, 즉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
결론내리기 어려운 문제이나, 어쨌든 특정성에게만 강요되는 종교적 제약은 (특히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위반했을 경우 강력한 처벌 기제가 존재하는 한) 철폐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스탈린 시대를 분석한 글도 흥미로웠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곧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비슷한 의미라는 관점이 놀랍다.
나는 단순히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정권 유지를 위해, 마치 박정희처럼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미치광이 독재자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와 학살 기간이 너무나 컸다.
나치가 유대인을 공직에서 몰아내고 사유재산을 압수함으로써 대신 독일 시민계급은 그 이익을 분배받았다.
마찬가지로 스탈린이 농촌과 부르주아 계급에게서 뺏은 재산을 프롤레타리아 전문가 계층이 나눠 가졌다.
서구로부터 자본을 빌릴 수 없었던 스탈린은, 산업화를 위해 농촌을 집단농장화 시킴으로써 생산 기반을 마련한다.
쫓겨난 부르주아 전문가들 대신, 계급성을 띤 노동자들을 대학에 보내 프롤레타리아 전문가 집단을 양성한다.
숙청된 반동분자들은 당시 미개척지인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져 개발 노동력으로 착취당한다.
이것이 소련의 놀라운 산업화 비결이었던 걸 보면 숙청의 범위나 시베리아 수용소 규모가 독재 체제 유지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롤레타리아 전문가들은 소비에트 귀족이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등극한다.
능력보다 계급성, 즉 당에 무조건 찬성하는 충성심을 우선시 하는 특권층의 성장은 결국 소련 몰락의 중요 원인이 된다.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면 결국 몰락하고 만다는,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민주주의의 동력임을 새삼 확인했다.

서양의 결투 전통이 단순히 낭만적인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실은 국가 권력을 배제한 사적 해결책이었음도 새롭게 깨달았다.
중세 시대 생겨난 결투는, 두 사람이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수준이 아니라, 양측의 소규모 전쟁을 방불케 했다.
무력에 의한 사적 해결, 이것이 결투의 본모습이다.
절대주의가 들어섬으로써 국가는 공권력으로 귀족 계급의 사적 해결 방법을 억압한다.
오직 국가만이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을 천명하면서 결투 금지령을 내리고 어길 경우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심지어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마녀사냥에서도 보이는데, 중세에는 마을 공동체에서 자체적으로 이단자를 억압했던 것에 비해 절대주의가 들어서면서부터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여져 학살 수준의 끔찍한 희생자들을 양산했다.
결투 전통을 보면 서양의 귀족 계급은 조선의 양반 계층과는 다르게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전사 계급이었음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재밌게 본 책이다.
여러 사람이 쓴 글인데도 통일성을 저해하지 않고 비교적 유기적으로 연결된 점이나 저자들의 글솜씨가 고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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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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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이 얇고 가벼워서 좋다.
항상 가방에는 무거운 책 때문에 가방 모양이 변형될 정도였는데 간만에 정말 가볍게 한 권 넣고 나갔다.
제목이 약간 도발적인데, 100%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양서만 읽는다 해도 말이다.
이 책에 소개된 다른 책의 주인공의 계산에 따르면, 어떤 도서관의 책을 전부 읽으려면 만 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나처럼 1년에 300권을 읽는다 해도 평생 만 권을 읽기 힘들 것이다.
책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은 계속 쌓여만 가니,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다.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클래식 매니아들이 더 나은 것 같다.
적어도 현대 음악은 신간처럼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지는 않으니 말이다.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좋은 책만 선별해서 읽는 대신, 안 읽은 책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버리고 과감하게 "읽은 척" 하라고 한다.
다소 뻔뻔해 보일 수도 있는 일인데, 꼭 책을 읽은 사람만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책이 주는 사회적인 맥락이기 때문에, 화제가 되는 책이 있고 관련 내용을 방송이나 다른 책에서나 주어 들었다면 아는 척을 해도 되고, 실제로 읽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장미의 이름> 을 든다.
수사관 기욤은 맹인 수도사 호르헤에게 자기가 읽지도 않은 금서의 내용을 줄줄 말한다.
주변 맥락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독이 발라진 금서를 열지 않아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저자가 <장미의 이름> 줄거리를 죄다 까발린 것은, 이런 종류의 추리소설에서는 일종의 스포일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줄거리와 시사하는 바를 인지하고 있으면 <장미의 이름> 이 화제에 올랐을 때 아는 척을 해도 된다.
고전을 요약해 주는 다이제스티브도 꼭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대체 누가 그 많은, 또 어려운 고전들을 일일이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서 읽을 수 있냐느 말이지.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어거지다고 생각했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쨌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시간과 책의 양은 한정되어 있고 엄격하게 책을 읽었을 때만 논쟁에 끼여 들 수 있다면, 요즘 같은 바쁜 세상에 책은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자꾸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만 해도 고전의 생명력은 충분히 유지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대중의 수준은 한계가 있고,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 해도 모든 "위대한"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반드시 읽은 책에 대해서만 양심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책은 우리 삶에서 더욱 유리될지도 모르겠다.

창의력의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이다.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저자는 열심히 책을 읽는 독서가는 절대로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미친듯이 책을 읽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 서평가가 될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독서가인 다치바나도 르포 작가이지만, 본격 문학의 작가는 아니다.
남의 글에 지나치게 탐독하면 정작 자신의 독창성은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말은, 충분히 가능한 지적이다.
책에 소개된 발레리라는 사람은 아예 남의 책은 읽지를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작가 지망생은 자신의 문체 확립에 애를 써야 할 것 같다.

나는 평범한 독자이고, 가능하면 많은 책들을 읽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위안이 됐던 까닭은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육체의 한계, 시간의 한계 때문에 넘쳐나는 이 지식의 향연을 완벽하게 만끽할 수 없다.
또 어떤 책이든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과거에 읽었다고 해서 내가 그 책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읽는 것에 대한 기준을 조금 더 완화시키고 책에 대해 부담없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싶다.
나는 쓰는 것보다 읽는 게 훨씬 좋기 때문에 작가로 나설 일은 없으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읽겠지만, 특정 책을 읽지 못했닥 해서 내 독서수준이 부족한가 싶은 이런 죄책감은 이제 갖지 않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위대한 고전은, 가능하면 많은 이들에게 읽혔으면 좋겠고 나도 읽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책과 내가 직접 읽은 책은 분명히 다르고 일종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 읽는 책, 내가 느끼는 책, 서평가나 주변 맥락에 휘둘리지 않고 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읽고 싶다.
또 완벽하게 읽겠다는 강박관념도 버리겠다.
재미없으면 던져 버리자.
좋은 책이면 나중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
책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숙제 같은 게 아니라, 인간의 가장 지적이고 자유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즐거운 행위다.

 

 

며칠 후 뒷쪽을 다시 읽어 보니, 내가 앞의 내용을 건성건성 읽어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는 것은, 교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해 볼 계기를 얻기 위함이다, 가 바로 이 책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나다운 나를 발견하는 길의 하나가 바로 독서라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만 권의 책을 읽기 보다 한 권의 책을 쓰라는 식의 주장은, 형편없는 글의 출판이라는 점에서 나는 매우 부정적으로 보지만 다른 의미로 본다면 글쓰기야 말로 어쩌면 독서 그 자체 보다 한 단계 위의 창의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일견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을 한다는 느낌이 든다.
자기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 내가 가치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식의 상대적인 평가를 중요시 한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면서 말이다.
마치 뒤샹이 소변기를 갖다 놓고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부분에서는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다수가 훌륭하다고 (특히 수준높은 지식인들이) 평가한 것은, 대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절대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상대성의 범위가 너무 넓어지면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혼란의 상태가 되고 이것은 실제적인 가치물을 생산하는데 큰 장애가 된다.
그렇지만 남의 평가에 너무 주눅들지 말고 나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내가 틀렸으면 어떻게 하나, 저자의 생각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이런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
좀 더 과감해져야 한다.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 를 나는 재미없게 읽었는데 리뷰들이 너무 좋아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참 껄끄러웠다.
그런데 이제 보니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책이든, 심지어 그 책을 쓴 저자마저도 그 책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쓸 때의 저자와 출판 후의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 100% 같은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비평가들이 분석해 놓은 걸 보면 정말 저자가 저런 의도로 썼을까 의심스러울 때가 많은데, 저자들 역시 자기 자신의 당시 의도를 헷갈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손을 떠난 작품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는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심지어 읽지 않은 사람조차 당당하게 책에 대한 자기 의견을 밝히라고 종용하는 판인데, 읽은 사람이 뭘 두려워 하겠는가?
한 문화의 공통된 심상인 집단적 도서관과, 각자의 개인이 느끼는 내면적 도서관 속에서 한 권의 책은 특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자는 하나의 예로써 티브 족이 이해하는 햄릿을 든다.
미국의 인류학자가 티브 족에게 햄릿의 줄거리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인간의 보편성 때문에 그들이 자신과 비슷하게 느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티브 족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일단 햄릿의 죽은 아버지가 나타난다는 것부터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에게 유령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또 햄릿의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렸냐고 묻는다.
여자 혼자서 어떻게 밭매기를 할 수 있냐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햄릿 어머니의 부도덕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가치관이나 문화적 개념들이 없다면 전혀 다른 독법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한국인 역시 16세기 영국의 극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정확히 이해하는 것 보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냐가 더 중요하며 심지어 내용을 직접 읽지 않아도 쟁점이 되는 상황들만 파악한다면, 즉 책이 주는 주변 맥락만 이해한다면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충 귀동냥으로 듣는다면) 얼마든지 그 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내면의 도서관, 그리고 집단의 도서관, 굉장히 창의적인 발상 같다.
결국 인간은 하나의 문화권에서 사는 존재이고, 좀 더 세분화 시키자면 나라는 개체의 특성을 지닌 매우 개성적인 존재다.
뻔뻔할수록 더욱 자기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가 센 사람이 자신이 변화되는 대신 남을 변화시키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개성을 죽이고 집단에 동화되는 걸 매우 중요시 하는데, 확실히 서양은 개성의 발화를 가치있게 여기는 느낌이다.
하여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나라는 사실은, 심지어 독서에서조차 통용되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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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본 한국사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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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것 만큼 유익한 책이다.
흥미롭게 잘 읽고 있다.
제목이 <밖에서 본 한국사>이길래, 재미교포나 외국인이 공저한 그런 책인 줄 알았다.
한국사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겠다는 취지로 이해되는데, 특별히 새롭지는 않다.
민족주의 사관에 지나치게 경도된 일부 재야 사학자가 아니고서야 (이를테면 이덕일 같은) 대부분 저자와 같은 견해일 거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생각해 볼만한 꺼리를 정리해 보자면,

1.  청동기 시대는 최대한 멀리 잡을 경우 기원전 15세기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다.
보통 10세기에서 15세기 사이로 본다고 한다.
고조선의 표지유물이라고 알려진 비파형 청동기는 비단 고조선인들만 사용한 게 아니라 동이족이 썼다고 보는데, 이 때 동이족은 한민족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예맥, 숙신, 한민족, 왜, 동호 등을 한꺼번에 부르는 명칭이다.
단순히 특정 유물이 출토됐다고 해서 그 유물이 나오는 지역은 전부 고조선의 땅이다, 이건 너무 빈약한 추론이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는 책에서, 이덕일은  고조선의 역사가 2000년을 넘을 뿐더러, 왜 청동기 시대에만 국가가 성립할 수 있냐고 주장했다.
또 한4군은 중국 대륙에 있었던 것으로 한 무제가 한반도에 설치한 게 아니라고 했다.
이 책의 저자는 한4군의 실제적인 존재를 인정하며, 다만 한의 지배가 시간이 흐를수록 유야무야 되면서 자치국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추론한다.
나는 이덕일 씨의 주장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가 본격적으로 반론을 전개해 줬으면 좋겠다.
저자는 한4군이 설립된 덕분에 중국의 우수한 철기 문화가 한반도에 이식됐다고 본다.
이덕일씨는 한반도에서 자체적으로 철기 문화가 자생했다고 주장한다.

2. 저자는 기자 조선에 대하여, 우리 조상이 이렇게 오래 됐다는 걸 보여 주려고 은나라 사람 기자를 억지로 갖다 붙인 걸로 추론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자조선은 기원전 11세기에 세워졌는데, 저자의 추론으로는 위만조선이 세워질 무렵인 기원전 4세기에 갖다 붙인 전설로 여긴다.
<중동 이야기>에서 본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굳이 문명의 발상지인 우르 땅에서 가나안으로 건너 왔다고 기록한 것처럼 말이다.
민족의 기원 부풀리기 일종이다.
어떤 게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일단은 최소한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실체가 인정되는 국가는 한 무제에게 멸망한 위만조선이다.
이들은 중국 시황제 무렵에 동란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한 집단이 지배권을 갖고 나라를 건국했다.
여러 민족이 섞이면서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을 만들어 가는 것이니, 이런 문제에 민감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신라의 통일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는 신라의 역할을 상당히 축소시켜 표현하는데, 물론 신라가 삼국 통일의 의지가 전혀 없었고 당을 끌어 들임으로써 만주 땅을 포기하게 만들었다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감상적인 자세가 아니라, 신라의 통일을 계기로 한민족이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어떤 책에서는 고구려라는 나라 자체가 한민족만의 나라는 아니므로 고구려사는 중국과 한국, 또 그 외 소수민족이 다수 관여하는 변경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3. 아마 제일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 같은데 저자는 임나일본부설의 실체를 인정하는 쪽이다.
이희진의 역사책에서는, 사서에 왜라고 표시된 것은 곧 가야를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저자도 가야와 왜를 연합체 정도로 이해하면서 처음에는 가야가 주도권을 쥐다가 나중에는 왜로 주도권이 넘어갔으리라 추정한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5만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러 올 정도로 왜는 한반도 내에서 확실한 군사 활동을 벌였다고 생각한다.
이희진은, 왜의 수가 엄청나서가 아니라, 한 번에 겁을 줘서 누르기 위해, 즉 싸우지 않고 이기기 위해 불필요한 대군을 과시용으로 동원헸다고 해석했다.
내가 보기엔 이 책의 저자 의견이 합리적인 것 같다.
일제 시대처럼 한반도를 집어 삼키기 위해 부풀려진 주장이 아닌 이상,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저자에 따르면 중국이 동이족이라고 일컫을 때는 왜까지 포함했다고 하니, 신라의 통일을 계기로 왜는 가야나 백제로부터 떨어져 나가 독립적인 길을 갔다고 본다.

4. 몽골 침략기에 대해서도 저자는 긍정적인 면을 인정한다.
중국 문명에 통합되어 과학 기술이나 문화 발전을 이루었고 그 성과가 조선 초 세종대왕 때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고 본다.
한글 창제도 몽골의 파스칼 문자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측우기나 인쇄술 등의 과학 기술 발전도 원나라 지배기 때 바탕을 마련했다.
아마 민족주의자들은 이렇게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지면 일제 식민지도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는 말이냐? 이 매국노야!
민감한 일제 시대 얘기는 빼고, 대신 미군정 때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주체사상 외치다가 고립된 북한과 비교해 봐도 금방 답이 나오는 문제다.

시원하게 비판하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편이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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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료와 의료분쟁 - 응급실 근무자를 위한
대한응급의학회 엮음 / 군자출판사(교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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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 소개를 많이 해 줬으면 좋았을텐데, 너무 적어서 아쉽다.
뒷쪽에 의료법규를 나열한 부분은 실생활에 별 도움도 안 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나열된 사례들은 꼭 기억할 만 하다.
대표적인 예로, 아무리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고 자의귀가서까지 받았다 할지라도 일단 환자가 사망한다거나 중대한 문제가 생기면 의사 역시 그것을 방치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충수염이 의심되는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고 귀가했다가 다음날 복막염으로 와서 사망했다.
의사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자의귀가서를 받아놨으나, 질병의 진행을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조취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80%의 과실이 있다고 판결났다.
의사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하여튼 환자가 죽었기 때문에 책임이 전혀 없을 수 없고 더군다나 80%의 과실이라면 상당히 큰 편이니, 단순히 자의귀가서 한 장 받았다고 안심하지 말고, 적극적인 조취를 취해야 할 것이다.
또 상급의료 기관에 전원하는 것도 환자 본인에게 맡겨 둬서는 안 되고 다른 의사에게 넘기는 순간까지 환자의 상태에서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정황으로 봤을 때 설마 죽기까지 하겠어, 하는 심정으로 안이하게 대처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아무리 검사를 많이 하고 진찰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100% 예후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힘든 노릇이다.
그러나 어쨌든 생명이 걸린 문제이니, 의료사고 이런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만에 하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약간 이해가 안 갔던 판결은, 췌장염 환자가 비위관 삽입을 거부해서 결국 사망했는데 환자가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에 의사의 책임은 없는 걸로 나왔다.
다른 정황이 생략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앞의 충수염 환자 사망 사건과 어떻게 다른지 좀 헷갈린다.
유명한 보라매 병원 사건도 나왔는데,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무조건 인공호흡기를 떼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병원 윤리위원회 같은, 동료 집단의 조언을 구한 후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소생 희망이 없다고 해서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들의 요구에 의해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은 자살 방조 행위 등으로 처벌받는다고 한다.
병원 윤리 위원회에 먼저 상정하는 절차를 거쳤어야 한다고 한다.
말초혈관 확보가 어려울 경우는, 골수내 주입이나 중심정맥확보 등의 다른 조취를 취해야 충분한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환자의 사망과 의사의 행위 사이에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다 할지라도 민사에서는 정황만 가지고도 의사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니, 많이 긴장을 해야 할 부분이다.
의사부권주의에서 환자부권주의로 바뀌었다는 말이 이해된다.
응급실의 난동 등을 생각해 보면, 이제는 의사보호법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막연히 병원이나 의사는 강자고, 환자는 피해자라는 일반적인 인상도 이제는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형사 고소가 워낙 많아 의료분쟁 해결 과정의 많은 부분이 협박용으로 쓰인다는 점이 참 씁쓸하다.
그래서 재판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환자와 병원, 혹은 의사간의 화해로 유야무야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점이 방어진료를 불러와 지나친 검사와 치료를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제왕절개 비율일 것이다.
이제는 의사와 환자 모두 의료법에 관심을 기울여 서로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 무분별하게 협박을 당하거나 억울한 피해를 보는 일이 없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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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황홀 - 윤광준의 오디오 이야기, 2판
윤광준 지음 / 효형출판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오디오마니아의 올바른 표현은, audiophile 이라고 한다는 걸, 책에서 배웠다.
오디오파일이라고 하면, 한국식 발음으로 하면 audiofile 과 똑같이 들려 묘한 느낌을 준다.
이런 마니아적인, 아니 마니아보다 한 단계 더 나간 오타쿠적인 책들은 내 성향 때문인지 남다른 위안을 선물한다.
나는, 이른바 책매니아다.
이걸 영어로 뭐라고 표현하는 모르겠다.
책 애호가 정도로는 안 되고, 책 매니아라고 해야 그런대로 내 열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도 구별이 됐지만, 책 자체를 모으는 책 수집벽이 있는 건 아니다.
좋은 책을 보면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나는 갖는 것 보다 읽는 게 훨씬 더 급하고 중요하다.
돈이 많으면 이 책 저 책 몽땅 사 들이고 싶으면서도, 꼭 돈 때문이라기 보다는,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만큼 여유가 없다는 생각에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으니까) 주로 도서관을 이용하게 된다.
1년에 백 여 권 이상 읽는 사람이라면, 읽기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도서관이나 헌 책방을 이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책에도 오디오 매니아와, 레코드판 매니아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오디오에 집착하는 사람은 보다 좋은 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기기를 바꾼다.
레코드판을 모으는 사람은, 실황 연주회가 진짜라면서 더 좋은 음반을 모으기 위해 애쓴다.
하드웨어 보다는 소프트웨어에 집착한다고 할까?
나는 소프트웨어 쪽이다.
읽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막힌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이 판국에, 책을 모으고 있을 시간이 없다...

리스닝룸에 대한 저자의 바램이 자세히 묘사됐는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내 서재를 그려봤다.
서재야 말로 내가 꿈꾸는 평생의 소망이다.
작가의 서재를 소개하는 책에서, 신경숙의 서재를 보고 얼마나 마음이 설렜는지 모른다.
한 면을 완전히 책장으로 짜 맞추고, 반대 쪽에는 컴퓨터 책상처럼 서랍이 없고 널찍한 책상을 배치한다.
한 쪽에는 편안한 쇼파와 오디오가 준비되어 있고 안쪽에는 샤워실까지 있어 방 밖을 나갈 필요조차 없다!
커튼이 드리워져 주변 풍경이 독서를 방해하지도 않는다.
아, 정말 어찌나 부러웠던지...
방 하나를 온전한 서재로 꾸미려면 널찍한 주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애들 키우는 아파트에서 과연 주부가 방 하나를 자기만의 서재로 꾸민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이런 문화적, 정신적 사치를 누리려면 돈을 아주 많이 벌던지, 아니면 책의 저자처럼 이것저것 다 포기하고 오직 취미 그 하나에만 올인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갑수 씨의 그 무모한 열정을 사랑한다.

끊임없이 기기를 업그레이드 하는 이른바 업글병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일인지 모른다.
나를 증명해 주는 것,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내게 완전한 기쁨을 주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극단에 이르고 싶은 마음, 아마 그래서 취미를 직업으로 갖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직장일이 지겨운 까닭은 그 일이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즐거운 일에 들어갈 돈을 벌려고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워커홀릭은 아마 취미처럼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에세이에도 책상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흔들리지 않는 책상, 미세한 떨림도 느껴지지 않는 육중한 책상을 찾기 위해 해메는 그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대충 아무 거나 쓰면 되지 않냐고 묻는 사람은, 그 일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 미세한 차이를 크게 느낀다면, 그리고 그 차이를 위해 큰 돈을 쏟아붓는다면 이미 그 사람은 매니아다.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최고의 품질, 최고의 제품이 탄생한다고 믿는다.

뒷쪽에 오디오 기기들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은 대충 넘어갔다.
워낙 기계치이고 클래식에 관심이 있지만 오디오 소리까지 귀기울일 깜냥은 안 되기 때문에 별 흥미가 없었다.
이른바 막귀라서 좀 더 많은 클래식을 듣고는 싶지만, 아무 기기나 들어도 아직은 좋다.
저자의 글솜씨도 그럭저럭 무난하고 북디자인도 비교적 깔끔한 편이다.
특히 오디오 기기들을 담은 사진들이 무척 마음에 든다.
사진작가라는 저자의 원래 직업이 빛을 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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