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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ㅣ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책이 얇고 가벼워서 좋다.
항상 가방에는 무거운 책 때문에 가방 모양이 변형될 정도였는데 간만에 정말 가볍게 한 권 넣고 나갔다.
제목이 약간 도발적인데, 100%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양서만 읽는다 해도 말이다.
이 책에 소개된 다른 책의 주인공의 계산에 따르면, 어떤 도서관의 책을 전부 읽으려면 만 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나처럼 1년에 300권을 읽는다 해도 평생 만 권을 읽기 힘들 것이다.
책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은 계속 쌓여만 가니,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다.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클래식 매니아들이 더 나은 것 같다.
적어도 현대 음악은 신간처럼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지는 않으니 말이다.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좋은 책만 선별해서 읽는 대신, 안 읽은 책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버리고 과감하게 "읽은 척" 하라고 한다.
다소 뻔뻔해 보일 수도 있는 일인데, 꼭 책을 읽은 사람만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책이 주는 사회적인 맥락이기 때문에, 화제가 되는 책이 있고 관련 내용을 방송이나 다른 책에서나 주어 들었다면 아는 척을 해도 되고, 실제로 읽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장미의 이름> 을 든다.
수사관 기욤은 맹인 수도사 호르헤에게 자기가 읽지도 않은 금서의 내용을 줄줄 말한다.
주변 맥락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독이 발라진 금서를 열지 않아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저자가 <장미의 이름> 줄거리를 죄다 까발린 것은, 이런 종류의 추리소설에서는 일종의 스포일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줄거리와 시사하는 바를 인지하고 있으면 <장미의 이름> 이 화제에 올랐을 때 아는 척을 해도 된다.
고전을 요약해 주는 다이제스티브도 꼭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대체 누가 그 많은, 또 어려운 고전들을 일일이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서 읽을 수 있냐느 말이지.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어거지다고 생각했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쨌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시간과 책의 양은 한정되어 있고 엄격하게 책을 읽었을 때만 논쟁에 끼여 들 수 있다면, 요즘 같은 바쁜 세상에 책은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자꾸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만 해도 고전의 생명력은 충분히 유지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대중의 수준은 한계가 있고,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 해도 모든 "위대한"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반드시 읽은 책에 대해서만 양심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책은 우리 삶에서 더욱 유리될지도 모르겠다.
창의력의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이다.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저자는 열심히 책을 읽는 독서가는 절대로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미친듯이 책을 읽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 서평가가 될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독서가인 다치바나도 르포 작가이지만, 본격 문학의 작가는 아니다.
남의 글에 지나치게 탐독하면 정작 자신의 독창성은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말은, 충분히 가능한 지적이다.
책에 소개된 발레리라는 사람은 아예 남의 책은 읽지를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작가 지망생은 자신의 문체 확립에 애를 써야 할 것 같다.
나는 평범한 독자이고, 가능하면 많은 책들을 읽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위안이 됐던 까닭은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육체의 한계, 시간의 한계 때문에 넘쳐나는 이 지식의 향연을 완벽하게 만끽할 수 없다.
또 어떤 책이든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과거에 읽었다고 해서 내가 그 책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읽는 것에 대한 기준을 조금 더 완화시키고 책에 대해 부담없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싶다.
나는 쓰는 것보다 읽는 게 훨씬 좋기 때문에 작가로 나설 일은 없으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읽겠지만, 특정 책을 읽지 못했닥 해서 내 독서수준이 부족한가 싶은 이런 죄책감은 이제 갖지 않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위대한 고전은, 가능하면 많은 이들에게 읽혔으면 좋겠고 나도 읽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책과 내가 직접 읽은 책은 분명히 다르고 일종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 읽는 책, 내가 느끼는 책, 서평가나 주변 맥락에 휘둘리지 않고 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읽고 싶다.
또 완벽하게 읽겠다는 강박관념도 버리겠다.
재미없으면 던져 버리자.
좋은 책이면 나중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
책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숙제 같은 게 아니라, 인간의 가장 지적이고 자유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즐거운 행위다.
며칠 후 뒷쪽을 다시 읽어 보니, 내가 앞의 내용을 건성건성 읽어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는 것은, 교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해 볼 계기를 얻기 위함이다, 가 바로 이 책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나다운 나를 발견하는 길의 하나가 바로 독서라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만 권의 책을 읽기 보다 한 권의 책을 쓰라는 식의 주장은, 형편없는 글의 출판이라는 점에서 나는 매우 부정적으로 보지만 다른 의미로 본다면 글쓰기야 말로 어쩌면 독서 그 자체 보다 한 단계 위의 창의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일견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을 한다는 느낌이 든다.
자기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 내가 가치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식의 상대적인 평가를 중요시 한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면서 말이다.
마치 뒤샹이 소변기를 갖다 놓고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부분에서는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다수가 훌륭하다고 (특히 수준높은 지식인들이) 평가한 것은, 대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절대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상대성의 범위가 너무 넓어지면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혼란의 상태가 되고 이것은 실제적인 가치물을 생산하는데 큰 장애가 된다.
그렇지만 남의 평가에 너무 주눅들지 말고 나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내가 틀렸으면 어떻게 하나, 저자의 생각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이런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
좀 더 과감해져야 한다.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 를 나는 재미없게 읽었는데 리뷰들이 너무 좋아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참 껄끄러웠다.
그런데 이제 보니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책이든, 심지어 그 책을 쓴 저자마저도 그 책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쓸 때의 저자와 출판 후의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 100% 같은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비평가들이 분석해 놓은 걸 보면 정말 저자가 저런 의도로 썼을까 의심스러울 때가 많은데, 저자들 역시 자기 자신의 당시 의도를 헷갈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손을 떠난 작품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는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심지어 읽지 않은 사람조차 당당하게 책에 대한 자기 의견을 밝히라고 종용하는 판인데, 읽은 사람이 뭘 두려워 하겠는가?
한 문화의 공통된 심상인 집단적 도서관과, 각자의 개인이 느끼는 내면적 도서관 속에서 한 권의 책은 특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자는 하나의 예로써 티브 족이 이해하는 햄릿을 든다.
미국의 인류학자가 티브 족에게 햄릿의 줄거리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인간의 보편성 때문에 그들이 자신과 비슷하게 느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티브 족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일단 햄릿의 죽은 아버지가 나타난다는 것부터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에게 유령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또 햄릿의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렸냐고 묻는다.
여자 혼자서 어떻게 밭매기를 할 수 있냐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햄릿 어머니의 부도덕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가치관이나 문화적 개념들이 없다면 전혀 다른 독법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한국인 역시 16세기 영국의 극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정확히 이해하는 것 보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냐가 더 중요하며 심지어 내용을 직접 읽지 않아도 쟁점이 되는 상황들만 파악한다면, 즉 책이 주는 주변 맥락만 이해한다면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충 귀동냥으로 듣는다면) 얼마든지 그 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내면의 도서관, 그리고 집단의 도서관, 굉장히 창의적인 발상 같다.
결국 인간은 하나의 문화권에서 사는 존재이고, 좀 더 세분화 시키자면 나라는 개체의 특성을 지닌 매우 개성적인 존재다.
뻔뻔할수록 더욱 자기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가 센 사람이 자신이 변화되는 대신 남을 변화시키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개성을 죽이고 집단에 동화되는 걸 매우 중요시 하는데, 확실히 서양은 개성의 발화를 가치있게 여기는 느낌이다.
하여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나라는 사실은, 심지어 독서에서조차 통용되는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