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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 ㅣ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9
마틴 헹엘 지음, 임진수 옮김 / 살림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오래 전부터 꼭 읽고 싶던 책인데 드디어 읽게 됐다.
내 수준에는 다소 난해한 책을 읽으면서 꾸벅꾸벅 졸다가, 종합자료실로 내려가 책을 고른 게 바로 이거다.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 <스페인사>와 바로 이 <신구약 중간사> 였는데, 나 말고도 스페인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은지, <스페인사>는 벌써 여러 차례 대출 중이었다.
<신구약 중간사> 는 생각보다 얇았다.
겨우 220여 페이지 정도?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들만 보다가 이렇게 얇은 책을 보니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독일의 신학 교수가 쓴 책이라고 하는데, 번역자는 틀림없이 기독교 신자다.
저자가 기독교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이렇게 역사적으로 까발려진 책을 읽고 쓰면서, 혹은 공감하면서 읽는다면, 과연 기독교를 신앙으로 믿을 수 있냐는 거다.
나는 회의적이다.
번역자는 이 책을 역사적으로 매우 잘 된 책이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던데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하는지 모순적으로 들린다.
어쩌면 성경 무오류설을 주장하는 사람이야 말로 겉과 속이 일치하는 진짜 신앙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주제는 헬라화 된 유대교의 역사다.
기원전 333년 경, 알렉산더가 유럽과 아시아를 제패하면서 팔레스타인은 그리스 군주들의 통치를 받게 된다.
그리고 셀레커스 왕조가 로마에게 멸망한 바로 그 시점까지, 약 150년의 시기를 다룬다.
그러고 보면 역사책에서도 알렉산더의 세계 제패로부터 로마의 등장까지 그 시기는 그저 헬레니즘이 퍼졌다,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 끝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셀레우커스 왕조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생소하고, 그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클레오파르라 정도로만, 일종의 가십거리로써 기억하는 것 같다.
비록 팔레스타인에 국한된 서술이었지만 헬레니즘이 고대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의 얘기를 엿들을 수 있어 무척 흥미진지한 시간이었다.
몇 가지 특이할 점을 살펴보면,
1. 세계사 교과서에 보면, 그리스인은 헬라인이 아닌 사람을 야만인, 즉 barbarian 으로 취급했다고 나온다.
헬라인이란 그리스어를 쓰면서 그리스 땅에 살고 양친이 모두 그리스인인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모든 외국인은 죄다 야만인이 된다.
오늘날의 그리스를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조그마한 도시국가 주민들이 뭐가 그렇게 대단했을까 좀 의아했었는데, 알렉산더의 세계 제패 이후 비로소 헬라인들은 최고의 문화 민족으로 등장했다는 걸 알고 보니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다.
마치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최고의 문화 민족이고 그 외는 죄다 야만인 취급을 했던 것처럼, 헬레니즘 세계에서도 그리스어는 교양있는 사람의 신분 증명서와 다름없었다.
재밌는 것은, 조선이 중화문명을 받아들여 한자와 율령 체제 등을 내면화 시킨 후 중국인들로부터 문화 민족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처럼, 그리스 세계에서도 그리스어와 학식, 교육 체계 등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야만인과 구별하여 헬라화된 아시아인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로마인이 있다.
로마가 그리스 세계를 멸망시키기 전, 후발 주자였던 로마인은 헬레니즘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애썼다.
책에 인용된 키케로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는 그리스인, 로마인, 야만인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을 헬라화된 이방인을 자신들의 세계에 받아들이는 걸 인정했기 때문에 로마인들도 그리스 공동체의 운동 경기, 즉 올림픽에 참가했다고 한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리스인들이 체육 수업을 매우 중요시 해서, 김나지움이라는 체육 학교가 운영됐다고 한다.
김나지움이라면 독일의 중학교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언젠가 읽은 책에서도, 근대 영국 교육의 목표 중 하나가 건강한 신체로, 크리켓이나 럭비 같은 경기가 수업에서 매우 중요시 됐다고 했다.
확실히 동양과는 다른 전통이다.
2. 보통 알렉산더 대왕은 헬레니즘의 세계화를 주장하면서 인종 간의 결혼을 장려했다고 나온다.
자신도 페르시아 공주와 결혼했고 장교들에게도 현지인과의 결혼을 종용했다.
그런데 의외로 혼합결혼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인은 이방인을 야만인이라고 칭할 만큼 경멸했기 때문에 섣불리 자신들의 세계에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았다.
마치 미국 내의 흑백 결혼이 드문 것처럼 말이다.
정작 알렉산더 자신도 페르시아를 떠날 때는, 혼인무효화를 선언했다고 한다.
3.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방인들은 그리스화 되기 위해 노력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에서 그리스어를 배우고 그리스식 교육을 받은 이집트인은 중간 관리로써 행세했고 마찬가지로 유대의 귀족이나 제사장 계급도 그리스화 되기 위해 애썼다.
특히 대제사장 예레제키아는 이집트로의 이주를 종용하기조차 했다고 한다.
마치 조선의 선비들이 중국 문명을 내면화 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헬레니즘 세계에서도 일등 시민이 되려면 당연히 그리스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는 율법과 유일신 사상을 지키면서 색깔을 분명하게 해 나갔다.
헬라화의 물결에 휩싸이지 않고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유대교는 헬레니즘 세계로 뻗어가면서도 좀 더 독자적인 종교로 발전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발전했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 이런 분위기는, 바울의 기독선교에도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헬레니즘 세계라는 큰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세계 종교화가 가능했다는 얘기다.
예수의 등장 이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집단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나 야훼신을 섬겼다고 한다.
이들이 나중에 기독교인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재밌는 건 당시 사람들이 야훼를 제우스나 디오니소스, 심지어 바알 신과도 동일시 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유일신이라는 점만 다를 뿐 결국 경배와 신앙의 대상은 형태의 변형만 있을 뿐 똑같지 않은가?
이집트나 그리스의 다신주의가 세를 잃어가면서 유일신 개념이 퍼져갔고 그렇다면 최고신은 모습만 다를 뿐 결국 야훼나 주피터나 같은 인물 아니겠냐는 의견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결국 알라도 야훼 신앙의 변형일 것이고...
요즘에 가뜩이나 신앙심이 사라져가서 그런지 몰라도, 옛날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던 이런 얘기들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여튼 어떤 종교가 됐든 배타적인 선민의식이나 고립성은 마음에 안 든다.
아무리 이슬람교가 평화의 종교 어쩌고 해도 이슬람을 국교로 삼아 그 외의 종교는 일체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태도는 인정하기 힘들다.
4.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언제 생겼을까?
알렉산더의 팔레스타인 정복 이후 유대인들은 노예로 이집트와 그리스 지역으로 팔려 나갔다.
두 나라 모두 자국의 자유인은 노예로 부리지 않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육체 노동을 할 외국인 노예가 필요했다.
또 유대인들은 용병으로도 활약했다.
유대인 하면 막연히 상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유대인은 상업보다는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헬레니즘 세계로 퍼져나간 용병, 노예, 수공업자, 상인 등과 같은 다양한 계층의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의 효시를 이루었고 그들이 헬라화 되면서 유대교는 더욱 발전한다.
이들은 더이상 현세에서 제국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종말이 다가와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할 거라는 묵시 문학이 유행했고 종말의 예표는 곳곳에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다니엘서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네 개의 금속으로 된 괴물은, 헬라 군주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한다.
교회에서 이 구절을 들고 로마니, 미국이니 하는데 제발 당시의 시대상을 좀 이해해고 갖다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목사가 이 부분을 설교하면서 미국을 들먹거리는데 짜증나 죽는 줄 알았다.
대체 저런 얼토당토 않은 설교에 귀기울이고 앉아 있는 학식 있는 신자들은 또 뭐란 말인가?
5. 70인역의 번역서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이 바로 헬레니즘 세계였다.
그리스식 교육을 받은 유대인이 당시의 국제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문학적인 번역이라기 보다는, 수공업자들처럼 무미건조한 번역이었다고 한다.
안디옥이 이방인 기독선교의 중심지가 됐던 이유도,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가 바로 안디옥이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리스식 교육을 받은 유대인이었다.
6.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와 관련을 맺기 위해 갖가지 전설들을 만들었는데 심지어 헤라클레스와 아브라함의 손녀가 결혼했다는 전설도 있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로마도 트로이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고 하니, 로마인들도 자신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고 싶어 했다.
마치 조선인들이 한반도의 기원을, 은나라에서 건너 온 기자에게서 찾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늘을 떠받드는 아틀라스가 곧 에녹이었다는 전설도 있고, 스파르타와 유대인은 친척간이라는 주장도 유행했다고 한다.
지난 번에 읽은 <지도로 보는 중동이야기>에서도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건너왔다는 것도 실은, 자신들의 민족이 문명의 시작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비롯됐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 설정한 부분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우리들의 시조는 이렇게 오래됐다, 역사가 유구하다 하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리 청동기 시대가 기원전 10세기 무렵 시작됐다고 가르쳐 줘도, 끝까지 단군조선은 2333년 전에 세워졌다고 우기는 민족주의자들도 아마 같은 심정일 것이다.
인간의 보편성은 세상의 모든 역사와 지역에서 눈에 띄기 때문에, 스티븐 핑커의 말대로 인간은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은 족속이라 인종차별이라는 말 자체가 우스울 뿐이다.
전반적으로 흥미롭게 재밌게 읽은 책이다.
예수 탄생 이전의 유대 역사에 대해 알고 싶은 분이라면 읽어 볼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