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멸종 - 페름기 말을 뒤흔든 진화사 최대의 도전 오파비니아 3
마이클 J. 벤턴 지음, 류운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사람의 리뷰에서 보고 읽고 싶었던 책이다.
내가 책을 고르는 루트는,  일단 일간지의 북세션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신뢰 수준 높음) 두 번째는 인터넷 서점의 서평이다.
특히 나귀님처럼, 믿음이 가는 서재는 수시로 방문해 읽을 만한 책이 없나 살펴본다.
서점에서도 가끔 재밌는 책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상대적으로 횟수가 적은 편이다.
이 책은 TTB 리뷰를 통해 파도를 타다가, 우연히 이 책을 감수하신 분의 블로그에 들르게 되어 추천받았다.
<삼엽충>을 출판한 <뿌리와 이파리> 에서 나온 같은 시리즈물인데, <삼엽충> 보다 덜 자세하고 읽기도 쉬운 편이다.
<삼엽충>은 세부적인 기술이 너무 많아 결국 절반 정도 밖에 이해를 못한 채 덮고 말았는데, 이 책은 분량이 많으면서도 비교적 쉽게 넘어가는 편이다.
지구과학적인 부분, 그러니까 지질 연대나 화산 활동 같은 게 나오면 좀 헤매긴 했다.
확실히 나는 이런 부분에서는 약하다.

흔히 멸종 하면 6500만년 전의 공룡만 생각한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고생물이다 보니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다 보니 마치 멸종은 그 때 딱 한 번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난 번 <삼엽충>에서도 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 총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고, 보다 작은 규모의 멸종은 꾸준히 있어 왔다.
특히 바다의 지배자인 삼엽충은 일거에 쓸어버린 고생대 페름기 말의 대멸종은,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큰 참변으로 기록된다.
전체 종의 90%가 사라졌다고 하니, 얼마나 큰 재앙이었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흔히 KT 사건이라고 부르는 백악기 말의 멸종은, 공룡을 포함한 50%의 종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제 공룡 멸종의 원인은, 운석 충돌로 확정이 된 모양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렸을 때 열심히 읽은 공룡 관련 서적에서, 멸종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운석 충돌 같은 허무맹랑한 가설도 있다고 소개했었다.
그 때는 지구의 기온 하강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온갖 억측을 잠재우고 우주에서 날아온 지름 10km 의 거대 운석이 지구를 강타한 후 150km에 이르는 거대 운석구를 만들면서 뿜어내는 먼지 구름이 햇빛을 차단하고 대기의 성분을 변화시켰다는 식으로 결론이 났다.
다소 허무하기도 하다.
과연 공룡은 왜 멸종했을까, 하는 미스테리 같은 분위기 때문에 더욱 공룡이 신비로워 보였는데 말이다.

아직까지 페름기의 대멸종 원인은 결론이 안 난 것 같다.
KT 사건처럼 외계에서 온 소행성 충돌 같은 이론도 있지만, 저자는 시베리아 트랩을 주원인으로 거론한다.
간단히 말해 거대한 화산 폭발이락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베수비오 화산처럼 한 번 폭발하는 게 아니라, 80만년의 시간을 두고 계속 폭발하면서 겹겹히 층이 쌓여 트랩을 이룬다.
이 때 먼지나 재, 이산화황 등이 대기로 유출되면서 햇빛을 막아 기온이 하강하기도 하고, 반대로 이산화탄소 등이 온실 효과를 일으켜 당시 지구의 온도는 무려 6도나 상승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찜통 같은 더위였을 것이다.
끔찍한 건기가 지속되고 수많은 생명체들이 말라 죽어 간다.
또 산성비가 내려 토양을 쓸어 내려 식물들이 사라진다.
이 때 씻겨진 토양들은 바다를 오염시켜 무산소화를 촉진한다.
그러니 심해에서 산소 없이도 버티는 일부 완족류들만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보통 대기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네거티브 피드백을 통해 양을 조절하는데, 바다에서 메탄 가스가 분출하면서 오히려 포지티브 피드백을 형성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끝도 없이 증가한다.
생체 조절 시스템의 파괴라고 할까?
기온이 상승하면 극지방의 얼음이 녹게 되는데, 단순히 해수면만 올리는 게 아니라 메탄을 함유하고 있는 기체수화물을 방출하게 되는 게 이것을 메탄 트림이라고 표현했다.

페름기 말 대멸종은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생명계에 치명타를 입힌 경우라고 설명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을 인용해 재밌게 설명한다.
객실 안에서 승객이 살해당했는데 열 두 번 칼에 찔린다.
열차에 탄 승객은 모두 열 두 명, 그들은 서로 옆 사람의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알고 보니, 이들은 공모하여 지난 날 유아를 살해했던 그 승객을, 각자 한 번씩 열 두 번 찔러서 죽였던 것이다.
재밌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페름기의 대멸종은 KT 멸종처럼 운석 충돌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니라, 여러 번의 강타를 맞아 쓰러졌던 것이다.
이 때 또 문제가 됐던 것은, 당시 대륙이 하나로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시베리아 트랩보다 더 큰 폭발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대륙 사이의 바다들이 그 충격을 흡수했다.
그러나 페름기 말의 초대륙은, 거대한 현무암질 용암 분출의 쿠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전체 종의 90% 멸종이라는 끔찍한 대참변을 낳게 된다.

지금은 이런 대변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 저자가 지구과학을 배울 때만 해도, 점진주의가 대세였다고 한다.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동일 과정설 때문이다.
이 법칙은 지구과학의 기본 전제라고 매우 중요하게 배웠던 기억이 난다.
과거에도 현재와 같은 법칙에 의해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의 차이다.
오랫동안 동일과정설을 주장해 온 라이엘은, 현상 뿐 아니라 속도마저 현재와 같다는 점진주의를 지지한다.
반면 비교해부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퀴비에는 (이 사람도 수업 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변화 속도의 급격함을 주장해 대멸종설을 지지한다.
간단히 말해 점진주의는, 공룡이 500만년에 걸쳐 서서히 죽어갔다는 것이고 이 논리를 더 확장하자면, 탄생, 성장, 노쇠의 곡선대로 때가 됐으니까 사라졌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유전학과 진화론의 발달에 힘입어 이런 논의는 그저 사변적인 가설에 불과함이 밝혀졌다.
사실 모든 생명체가 번성하다가 정점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논리는, 관찰을 무시한 책상머리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과 과학의 차이가 이런데서 발생한다.
공룡이 후기로 갈수록 종의 다양성이나 개체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일거에 멸종한 것은 대변혁 설이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
때가 되서 자연스럽게 퇴화한 것이 아니라, 운석 충돌이라는 기가 막힌 참변 때문에 잔혹하게 바뀐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한 것이다.
비슷한 예가 또 있다.
페름기의 대멸종을 이기고 살아남은 유일한 파충류가 리스트로사우르스인데, 한 방송 매체에서 이것을 진화상의 유리한 점으로 설명했으나, 즉 가장 우수한 형질이라 생존했다고 설명했으나, 사실 그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연히 바뀐 생태계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분량에 비해 가독성도 뛰어난 편이라 읽는 내내 즐거웠다.
인류가 존재하기 이전의 엄청난 사건들이 보다 많은 조명을 받아 대중들에게 알려짐으로써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세계문학의 천재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해럴드 블룸 지음, 손태수 옮김 / 들녘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이런 책을 읽을 때면, 내 지적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어려운 책은, 배경지식이 부족할 경우, 재미가 없다.
수준있는 작가가 쓴 글이 재미 없다면, 일단 자신의 독서 능력을 의심해 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교양인의 책읽기" 도 결국 못 읽고 덮고 말았는데, 이번 책 역시 1/3 정도 읽다가 포기했다.
서머셋 몸이 쓴 천재론은, 너무너무 재밌게 읽은 반면, 해럴드 블룸의 천재론은, 흥미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분량이 850페이지에 달하는지라 먼저 기가 질리고 몸이 겨우 열 명의 천재를 언급한 반면, 블룸은 그 열 배인 100명의 천재를 거론하는지라, 양에서 우선 힘이 빠진다.
더군다나, 몸이 작품보다는 작가 개인의 일화에 치중했던 것에 비해, 블룸은 작품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니 그 작품들을 제대로 읽지 않은 나 같은 어설픈 독자로서는, 블룸이 감탄하는 문장들이 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지적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몸의 위트있는 해학적 문체에 비해, 블룸은 너무나 고답적이고 현학적이다!
역시 소설가와 비평가의 차이가 존재하나 보다.
비평가들이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글을 보면, 과연 작가가 저렇게까지 도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사건을 구성하고 인물을 창조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블룸 역시 이 의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하여튼 비평은 소설 읽기보다 훨씬 힘들다.

얼마 전에 읽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평집도 500 페이지가 넘는데 거기 소개된 책은 하나도 읽은 게 없어 결국은 덮고 말았는데, 역시 이 책도 중간에 포기했다.
그렇지만 나름 유익한 시간이었다.
일단 내가 모르는 천재적인 작가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됐고, 위대한 작가들의 그 "위대함" 과 "불멸성" 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됐다.
특히 무함마드나 바울을 문학적 천재의 입장에서 분석한 글은 무척 흥미로웠다.
구약의 저자들을, 야훼를 창조해낸 작가로 본 점도 독특했다.
코란은 접한 적이 없어 모르겠으나, 확실히 성경은, 특히 구약은, 문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신약보다 구약이 훨씬 재밌다.

지루하게 읽은 제인 오스틴은, 워낙 많은 이들이 천재로 거론하는 바람에, 내가 <오만과 편견>을 오독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래서 이 책이야 말로 꼭 다시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그녀가 언니 카산드라에게 보냈던 재치있고 재기발랄한,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관찰력이 돋보이는 편지들은, 이 책에서도 소개됐다.
꽤나 매력있는 작가임이 틀림없다.
내가 좋아하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도 역시 100인의 천재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입센이나 몰리에르, 베게트 같은 희곡작가들은 이름만 들어봤지 작품은 이름조차 생소하다.
흔히 알고 있는 "인형의 집" 이나 "고도를 기다리며" 는 다뤄지지도 않는다.
저자는 세익스피어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류 역사 최고의 천재로 꼽는다.
서구 사회에서 세익스피어의 위치가 얼마나 확고부동하고 위대한지 새삼 확인했다.
그의 명성에 비교할 작가라면 세르반테스나 단테 정도일 것이다.
좀 더 고대로 가자면 베르길리우스와 호메로스 정도?
하여튼 세익스피어에 대한 숭배심은, 저자가 거의 모든 장에서 확고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나 역시 세익스피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그의 유명 작품들을 다시 읽어 보고 싶다.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겐지 이야기>의 저자인 무라사키가 꼽혔다.
다시 한 번 일본의 국력과 위상을 확인하는 기분이다.
괴테가 독일어 문화권 외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이다.
프로이드가 단지 "수필을 잘 쓰는" 의사로만 평가된다는 건 이제는 상식이 됐지만, 설마 괴테의 문학성이 의심되다니, 미국인들이 미친 게 아닐까?
영어권에서는 이제 그 영향력이 거의 사라졌다는데, 미국 최고의 비평가가 하는 소리니 과장일 리는 없고 하여튼 놀라운 일이다.
얼마 전에 영화로 본 <베니스에서의 죽음> 을 쓴 토마스 만이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얘기는 여기서 처음 알았다.
근래에 자주 언급되는 저자 같아, 꼭 한 번 읽어 볼 생각이다.

블룸이 좀 더 맛깔나는 글솜씨를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수준이 거기까지 안 되는 게 더 큰 원인이겠지만, 하여튼 현학적인 문체가 너무 많아 쉽게 몰입이 안 된다.
여기 소개된 책을 좀 더 많이 읽어 본 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한가지 덧붙일 것은, 어떤 강연에서 문학의 본질은 독자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하자, 어떤 청중이 그렇다면 스티븐 킹이나 조앤 롤링도 위대한 작가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겠냐고 질문했다고 한다.
블룸이 개탄한 것처럼 나 역시 한숨이 푹푹 나왔다.
만약 상대적인 기준을 적용해 자기에게 의미가 있으면 훌륭한 작가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세상 어떤 것도 평가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고전이란 혹은 천재란 시대성을 뛰어넘어야 가능한 일이다.
과연 해리 포터 같은 판타지류가 어느 시대까지 그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인지, 내 수명이 100년이 채 못 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 세계 3대 종교 발상지 중동의 역사를 읽는다 지도로 보는 시리즈
고야마 시게키 지음, 박소영 옮김 / 이다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제목은 퍽 끌리는데, 정통 학자가 쓴 책이 아니라 사실 좀 망설였다.
단순히 에피소드의 나열이나 확인되지도 않은 가십거리들로 책을 쓴거라면 차라리 안 읽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첫 부분이 의심스러웠다.
핑컬스타인이 쓴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를 먼저 읽고 내용에 상당히 공감해서인지, 모세 5경의 내용은 신화가 아닐까 이런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터였다.
그래서 장황하게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동 경로나 생몰 연대를 추정하는 저자가 내심 못미더웠다.
학계에서 인정받는 주장인지, 고고학적 발굴 근거는 가지고 있는지, 단순히 성경 하나만 가지고 지껄이는 소리는 아닌지 등등 꽤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책을 읽어갔다.
다행히 뒤로 갈수록 저자와 책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일단 생존 인물로 규정하고 성경은 역사적 사실이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서인지, 앞서 읽은 책과 상당히 비교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근거를 밝히고 있고 무리한 설정은 하지 않아서 읽기가 수월했다.
비약이 심하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든다.

우르에서 출발해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정착했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핑컬스타인은 나중에 삽입된 전설로 치부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진 문명화된 부족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기 위해, 마치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 역시 우리 조상은, 인류 최초의 도시인 우르가 고향이었다는 식으로 기술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 책의 저자는, 일단 성경에 나온 이야기는 사실로 믿고, 그 근거를 역사책에서 찾는다.
대충 기원전 1900년 경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부족을 이끌로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또 모세 이야기는, 이집트 제 18왕조의 람세스 2세 때로 추정한다.
핑컬스타인은 아예 모세 이야기는 없었던 일로 치부한다.
핑컬스타인은 고고학자이고 발굴단의 단장이었던 만큼 워낙 자세하고 세세한 근거들을 거론하고 있어 솔직히 전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무리가 없는 전개라 비교적 그의 설명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일종의 분위기나 느낌을 가지고 모세를 람세스 2세 치세의 사람이라고 단정지은 이 책은, 좀 단순해 보인다.

뒷쪽으로 갈수록 중동의 역사는 자세하게 펼쳐진다.
특히 자신의 여행 경험과 적절하게 섞어 가면서 기술하고 있어 지루하지 않고 흥미를 유지할 수 있어 좋았다.
제노비아 여왕이 대체 언제 사람인가 했더니 <팔미라> 라는 나라의 여왕이었다고 한다.
성경에 나온 헤롯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됐다.
마카베오가 바로 헤롯 집안의 시조격이라고 한다.
중동 역사는 처음에는 하도 복잡해 전혀 감이 안 잡혔는데 반복해서 이 책 저 책을 읽으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다.
인디애나 존스에 등장한 페트라는 나바테아의 수도였는데, 헤롯 왕가와 관련이 있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여러 사슬들이 하나로 꿰어지는 기분이었다.
또 항상 이름만 알고 실체는 모호했던 리디아와 메디나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았다.
리디아는 현재 터키, 그러니까 아나톨리아에 세워졌던 고대 왕국이었고, 메디나는 현재 이란땅인 페르시아의 전신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마치 주 나라와 은 나라처럼 메디나의 지방 영주 격이었다고 한다.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키루스 2세가 메디나와 리디아를 물리치고 메소포타미아의 거대한 왕국을 건설한다.
그의 손자가 그리스 가서 대패한 다리우스 1세다.
책에는 페르시아의 관점에서 바라본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이 나온다.
영화로 만들어진 300의 전사들도 등장한다.
알렉산드로스에게 멸망한 후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다스려지다가, 다음에 들어선 왕국이 파르티아이고, 그 다음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다.
파르티아도 당나라 역사 배울 때 얼핏 들었던 나라인데 왜 안식국으로 알려졌나 했더니, 파르티아 시조의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라고 한다.
정말 새롭게 많이 안 사실들이다.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에서 이야기가 끝이 나 아쉬운 감이 있다.
특히 에필로그가 없어 서운하다.
2부를 써도 좋을 것 같다.
역사학자도 아니면서 이 정도의 수준있는 책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칭찬할 만 하다.
재밌게 읽었고 상당히 유용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rwen45 2008-05-1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다만 계속 메디나..라고 하시는데 사실은 메디아(구약에서는 메대라고 언급)입니다. 메디나는 메카와 더불어 이슬람의 성지로 아라비아 반도에 있습니다.(메카에서 박해받고 메디나로 도망간 것을 헤지라..라고 합니다) 메디아의 마지막 왕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시조 키루스 대왕의 외조부라는 말이 있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 [할인행사]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 더크 보가드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제목이 고풍스러워 관심이 생긴 영화였다.
더구나 토마스 만이 원작자라고 하니, 왠지 작품의 수준도 높을 것 같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2시간이 넘는 다소 지루한 점도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괜찮은 영화였다.
일단 음악이 주제와 잘 어우러져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매력이 있고, 타지오로 나오는 스웨덴 꽃미남 비요른 안데르센은 가히 "조각같은" 이라는 수식어에 딱 어울리며, 소년을 사랑하는 작곡가 더크 보거드의 연기도 훌륭했다.
어처구니 없게도 미소년을 사랑하는 노거장의 고통스러운 심리 상태를 너무나 섬세하게 묘사한 배우의 연기력에 감탄하는 바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해변가에서 친구와 뒹구는 타지오를 바라보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은, 꼭 내가 죽는 것처럼 숨이 탁탁 막혀왔다.
타지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염색하고 화장까지 한 얼굴 위로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줄기, 뭔가 말하고 싶은데, 혹은 행동으로 보여 주고 싶은데 도덕적 장벽이 그를 막고 또 육체의 한계가, 의자에서 꼼짝도 못하게 만든다.

타지오, 이 사람을 보기 전에는 감히 꽃미남을 논하지 말라.
정말 너무나 예쁘고 너무나 아름답게 생겨서, 동성애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한 번쯤은 넋을 놓고 쳐다 볼 것 같은 외모다.
원빈이나 장동건 같은 꽃미남들 보다 한 수 위다.
곧게 뻗은 다리와, 금발의 머리카락, 그리고 오똑 솟은 코, 새하얀 피부, 알고 보니 스웨덴 소년이었다.
역시 북구인들은 키가 크고 피부가 백옥같이 희다.
더구나 금발은 어찌나 탐스러운지...
인터넷에서 최근 사진을 찾았는데 실망스럽게도 좀 기괴한 인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장동건처럼 나이들어서 더 중후하고 우아한 외모를 갖기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저렇게 아름다운 소년이 왜 그런 식으로 나이를 먹는 건지 안타까울 뿐이다.

어머니로 나온 여배우도 굉장히 아름답다.
특히 그 모자가 정말 예술이다.
당시 베네치아 사람들은 모자 쓰는 게 예의에 맞다고 생각했는지, 아이고 어른이고 죄다 모자를 썼는데, 이 귀족 부인의 모자들은 정말 예술적이다.
베일로 얼굴을 가볍게 가리고 있는데다, 양산까지 썼으니 아무리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다들 피부가 새하얀 건지...
우리도 모자에 베일 문화가 있어야 깨끗한 피부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동성애에 대한 내 생각은,  단지 개인의 기호 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 자체가 없다.
영화 속의 구스타브는, 타지오를 단지 바라만 보는데서 기쁨을 느낀다.
물론 가까워질 수 있었다면 그를 안고 키스하고 애무했을 것이다.
롤리타와는 또 다른 의미의 소아성애증 같다.
롤리타는 그래도 이성애였지만, 그래서 험버트는 권력적인 위치였지만, 즉 어느 정도는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었지만, (다소 특이한 성적 취향?) 영화 속의 구스타브는 오히려 약자처럼 보인다.
미소년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분위기, 그동안 쌓아 온 명성과 지위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소년 역시 늙고 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자괴감.
어린 소녀에 대하여 늙은 남자는 권력을 가질 수 있지만,  반대로 소년에 대한 같은 동성의 어른은 그 늙음 때문에 추하고 왜소하게 느껴진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이미 권력 관계가 형성된 반면 같은 남자끼리는 그런 관습적 관계가 훨씬 덜 통용되는 것 같다.
정말 동성애가 일반화 된다면, 즉 누구나 자신의 성적 기호를 제약없이 드러낼 수 있다면, 남녀 관계의 권력적 속성도 함께 변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중간에 삽입된 예술의 절대성 논란은, 사실 영화만 가지고는 깊이 공감하기 힘들었다.
이 부분은 책을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영화에서는 타지오와 구스타브의 동성애적 시선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구스타브가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고 해설에 나오는데, 베니스에 올 때부터 이미 심장 발작을 가진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콜레라를 피해 베니스를 떠나라는 말을 타지오에게 하기 위해 베니스를 떠나지 못하던 구스타브가, 오히려 자신이 콜레라에 걸려 죽는다는 결말은 매우 비극적이고 아이러니 하다.
특히 그의 부모에게 어서 떠나라는 말을 하기 위해, 최대한 단정하고 허술하지 않게 보이려고 이발을 하고 화장까지 하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왠지 모르게 울컥 했다.
늙음을 가려 보려고 꾸미면 꾸밀수록 더욱 촌스럽고 어색해지는 비극성!
결국 구스타브는 하얗게 분칠한 얼굴 위로 검게 물들인 염색약이 지워지는, 코믹 배우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해변가에서 죽고 만다.
왜 그는 타지오에게 접근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사회적 금기 때문에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절대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엄청난 도덕적 제약이 내제되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성격상의 문제도 있었을 것 같다.
행동하기 보다는 고민하는 햄릿 쪽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 분위기는 드러내놓고 동성애를 즐기는 쪽이니, "타임 투 리브" 의 로맹이나 샤샤의 당당함이, 구스타브에 비하면 오히려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다.

책으로 읽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 서머싯 몸이 뽑은 최고의 작가 10명과 그 작품들
서머셋 모옴 지음, 권정관 옮김 / 개마고원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나귀님이 소개한 책은 독특한 울림이 있다.
이 분의 블로그에서 맛깔나는 리뷰를 읽지 않았다면 거의 선택하지 않았을 책들이다.
나와 관심 분야가 다르면서도 (일단 나는 문학에 관심이 적은 편이다. 기껏해야 고전 정도에 의무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의외의 재미를 주는 흥미로운 책들을 가끔 발견하곤 한다.
전기가 그랬고, 이런 서평집 같은 게 또 그렇다.
알라딘의 서재를 운영하면서 이 분에게 가장 실제적인 도움을 받는 것 같다.

 
서머싯 몸의 소설은 읽어 보질 않아서 사실 유명한 작가, 그 이상의 감정은 없다.
의사라는 게 좀 특이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신뢰할 만한 저자라는 점에서, 책에 대한 믿음이 갔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명성은, 확실히 명실상부한 구석이 강한 법이니까.
사실 내가 여기 소개된 책들을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썩 몰입해서 읽은 건 아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처럼, 읽은 책에 대해서는, 흥미를 가지고 눈과 글자가 함께 움직이는데, <모비 딕> 처럼 안 읽은 책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가독성이 떨어지고 자꾸 문장을 놓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주가 아니라 소설가가 主 이기 때문에, 비교적 흥미롭게 통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거장의 명성에 주눅들지 않고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진진하다.
지승호의 인터뷰집은, 일견 재밌는 것 같으면서도,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에게 지나치게 공손하고 지나치게 숭배시 하는 것 같아, 말하자면 인터뷰이보다 한참 아래에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기 보다는, 뭐랄까, 학생처럼 얌전하게 인터뷰를 받아 적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레벨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반면 서머싯 몸의 이 책은, 거장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 톨스토이 부분을 먼저 읽었는데, 상당히 비판적이라 처음에는 톨스토이가 백작이라 지배계급이나 상류층에 대한 날카로운 메스를 가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거의 신성시 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저렇게 막 깍아 내리지는 않겠지, 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왠걸, 여기 소개된 10명이 모든 작가들이 저자의 매서운 눈매를 피하지 못했다.
나는 이런 태도야 말로, 서머싯 몸 자신이 유명한 작가이고 (즉 레벨이 되고) 무엇보다 아무리 위대한 위인인들, 털끝하나 부족한 점이 없다는 식의 어린이 전기 같을 수는 없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위인전을 읽다 보면 정말 짜증나는 것이, 너무나 성인처럼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히려 위인의 위대함이 식상한 삼류 소설처럼 전형적인 것으로 변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 책은 그런 함정을 잘 피해 나간다.

 

흥미롭게 본 부분은, 동성애에 관한 부분이었다.
에밀리 브론테나 허먼 멜빌을 동성애적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추론하는 건,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음모론 같기도 하지만 퍽 재밌는 추측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는 워낙에 동성애 자체를 언급조차 하지 못하는 엄청난 범죄로 여겨졌기 때문에 본인들은 자신의 기질을 인지할 수 조차 없었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에밀리 브론테의 그 기묘한 소설 <폭풍의 언덕> 은 히드클리프나 캐서린 언쇼가 둘 다 작가의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언니인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너무나 편안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읽은 반면, <폭풍의 언덕> 은 섬뜩하고 심지어 불쾌한 기분마저 들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읽었다.
확실히 <제인 에어>는 평범한 소설의 공식을 잘 따른 반면, <폭퐁의 언덕>은 문학사의 천재적인 작품으로 꼽힐 만큼 독창적이고 개성적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10대 문학적 천재를 꼽는다면 과연 누가 들어갈까, 하는 점이다.
이 책에 소개된 10대 작가들은, 반드시 최고의 열 명만을 꼽은 것 같지는 않다.
찰스 디킨즈를 재능이 훌륭하지만, 상업적인 작가로 평한 걸 보면 말이다.
과연 진짜 위대한 10명의 천재를 꼽는다면 누가 들어갈까?
세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들어갈 것 같은데...
제인 오스틴이나 에밀리 브론테도 10위 안에 들 수 있을까?
어쩌면 정말 독창적이고 기발한 혁명적인 사람만 꼽힐지도 모른다.
제임스 조이스처럼 말이다.

 

제일 위안이 됐던 부분은, 아무리 훌륭한 명작이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할 수는 없다고 본 점이다.
전혀 흥미를 잃지 않고, 100% 몰입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빠지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위대한 고전일수록 중간에 재미가 없으면 내 독서 실력이 모자라나 보다, 낙심하기 일쑤인데 100% 완벽한 책은 없는 법이니, 어떤 부분에서는 맥락에 벗어난 일화들도 끼어 있기 마련이고 어쩔 수 없이 지루해지는 부분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위로한다.
그러므로 가끔 건너뛰는 방법도 유용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러다 보면 진짜로 문장의 맥락을 놓쳐 줄거리에 치중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여튼 건너 뛰기에 면죄부를 줬다는 점에서 정말 마음이 놓인다.
아무리 재밌는 책을 읽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가끔 하품이 나오기도 한다.
또 진짜 이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하는 식으로 있을 법한 얘기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 할지라도, 100% 완벽한 사건을 구성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허구성을 이해해 주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폴 오스터의 소설들을 읽을 때도 그렇다.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임이 분명하지만, 솔직히 우연의 연속이 하도 많아서 재밌게 읽다가도 어느 순간, 에이, 이건 말이 안 되지, 싶을 때가 있다.
그렇지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고 죽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작가가 창조해낸 세계에 몰입해 <공중곡예사>를 읽고 나서는, 정말 공중부양이 가능한지 인터넷을 뒤지기까지 했다.

 

확실히 서머싯 몸은, 그 자신이 소설가라서 그런지 창작적인 기법 면에서 작품들을 분석한다.
플로베르의 친구인 편집장이 고백한대로, 글을 쓰는데도 부류가 나눠지는데, 정말로 창의적인 재능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진짜 소설가인 플로베르 같은 사람과, 자기처럼 그 언저리에서 먹고 사는 주변부 인물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작가를 포기한 것도, 바로 그 창의적인 재능,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타고난 자질이 부족하다는 인식 때문이었고, 주변부 인물로는 살기 싫다는 일종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개나 소나" 죄다 작가가 되는 분위기라, 몸이 지적한 바대로 글쓰기야 말로 밑천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직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출판업의 부흥이 좋으면서도 가끔 짜증나는 게, 블로그 같은 개인 일기장에나 끄적거려야 할 잡문들을 어쩌면 이렇게도 뻔뻔하게 수치심 하나 없이 버젓이 한 권의 책으로 펴내나, 하는 것이다.
책에 대한 내 기준이 너무 엄격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역시 제일 좋았던 문구는, 소설은 교훈이나 기타 지식이나 이데올로기 전달에 있지 않고, 지적 쾌락에 그 목적이 있다는 부분이었다.
이야 말로 소설의 목적을 제대로 짚어내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정조가 문체반정을 주도했던 이유도, 소설은 한낱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아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소설의 진짜 목적과 기능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데올로기의 전파, 혹은 교훈이나 지식의 습득, 도덕적 교화, 이 따위는 부수적이고 우연히 얻게 되는 산물이다.
정말 중요한 목적은, 바로 지적 쾌감, 결국 재미가 아닌가 싶다.
3류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고전 역시 교양과 학식을 갖춘 지식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가장 큰 기능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지적대로 교양은 그냥저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 좀 성가시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므로, 교양인들을 즐겁게 하려면 소설 역시 그냥 재미가 아니라 지적 쾌락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수준이 높아야 한다.

 

여기 소개된 책들을 전부 읽었더라면 훨씬 재밌는 독서가 됐을텐데, 그 점이 아쉽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유익하고 즐거웠다.
조지 오웰과는 또다른 매력의 위트있는 문장이 돋보이는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erky 2008-04-14 0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꽤 관심가는데요? 서머셋모옴은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모두 훌륭하게 쓸줄아는 몇 안되는 위대한 작가인것 같아요. 대부분 위대한 작가들이 한쪽(장편 아님 단편)분야에만 두각을 나타내는데 비해서 말이죠..

marine 2008-04-14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우차우님이라면, 훨씬 더 재밌게 읽으실 것 같아요.
전 여기 나온 10편 중 절반 정도 밖에 안 읽어서 좀 듬성듬성 읽게 되더라구요.
서머싯 몸의 작품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