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 이상의 도서관 4
아베 긴야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어떤 책이든 처음 접하는 소재는 낯설고 그닥 재미가 없다.
몰입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과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많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졸아 버린다.
이 책 역시 중세의 생활상이라는 다소 낯선 소재를 다루다 보니, 재밌게 읽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읽다가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대충 한 번 읽은 다음 다시 반복해서 읽으니 어느 정도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독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배경시식이 아닐까 싶다.

유럽 영화를 보면 아침에 빵 사러 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저 사람들은 왜 주식인 빵을 집에서 만들어 먹지 않고 빵집으로 사러 가는 걸까, 가끔 궁금했었는데 이 책에서 해답을 발견했다.
빵 굽는 화덕를 설치하려면 상당한 돈이 들 뿐더러, 중세 이후 영주가 지정한 빵가게만 이용해야 하는 이른바 사용강제권이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곡식을 찧는 것도 영주가 지정한 물레방앗간만 이용해야 했다.
집에서 수동 맷돌을 돌리거나 직접 빵을 구울 수도 있었지만 강제로 영주의 지정 가게를 이용함으로써 이중의 세금을 내는 격이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집에서 절구로 곡식을 빻았고, 밥은 지금도 집에서 직접 해 먹는다.
아마 밥과 빵의 조리 과정의 차이일 수도 있겠는데 하여튼 문화의 차이가 새롭다.

중세의 특이한 점으로는 공중목욕탕이 있다.
로마 시대 욕탕은 귀족들의 향락 장소로 유명한데 중세의 욕탕은, 농민은 물론 빈민들까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복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특히 귀족들은 연옥에 있을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이른바 목욕세를 유산으로 남겨 놓는다.
빈민들이 공중목욕탕에서 몸을 씻을 수 있게 돈을 지불함으로써 선행을 베풀어 자기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목욕이 얼마나 중요한 행위였는지 알 수 있다.
도제들도 목욕비를 따로 받아 일주일이 끝나는 날에 한 시간 정도 목욕탕 가는 휴가를 얻었다고 한다.
한국 같은 경우는 공중 목욕탕이라는 시설 자체가 없었던 것 같은데, 현대에는 찜질방이나 사우나가 극성인데 비해, 유럽은 오히려 중세에 공중 목욕탕이 성행했을 뿐, 지금은 다같이 모여서 씻는 문화는 없는 걸로 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 궁금하다.
중세에는 대형 빵화덕의 열기로 욕탕을 운영했다고 하는데, 기술의 차이는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한국인들 역시 욕탕 문화를 좋아하지만, 생활의 특성상 공중 목욕탕을 운영할 형편이 안 됐기 때문에 과거에는 못했고 현대에 와서 성행하는 건 아닐까 싶다.
중세 목욕탕이 쇠락한 것은, 곡물 가격이 떨어지면서 영주들이 공유지인 숲을 목초지로 바꾸면서 벌채에 돈을 지불해야 하면서부터다.
그동안은 숲에서 목재를 대는 것이 목욕탕 주인은 공짜였는데, 곡물 가격이 떨어지자 영주들이 숲을 점령하면서 벌채의 자유가 사라진 것이다.
목욕탕에서는 사혈 같은 민간 요법도 행해졌고, 여기서 갈라져 나온 것이 이발사였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머리와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이발사라는 직업 자체가 없었던 것에 비해, 유럽은 이발사의 전통도 길다.
목욕탕 주인은 이발이나 면도도 하고, 간단한 의술도 행했는데 이발사가 중세에 의사 노릇을 했다는 것도 여기서 같은 맥락이다.
재밌는 것은, 형리에게 고문을 받은 사람을 치료하다 보니, 형리와 마찬가지로 천민시 되었다는 점이다.
농민들 역시 귀족들에게 차별을 받으면서도 또 자기 아래에 천민 그룹을 형성해 무시하는 걸 보면 확실히 위계질서가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모양이다.

중세 유럽의 생활상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해 놨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그러고 보면 서양의 중세에 해당되는 신라나 고려 시대는 이 정도까지 세세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요즘에는 학계에서도 일상사를 따로 연구하는 것 같은데 우리의 중세 시대 생활사도 많이 연구되었으면 좋겠다.
일본인이 쓴 서양 중세 생활사라는 점이 특이하다.
같은 시대를 한국과 유럽 식으로 비교해도 재밌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아마데우스 + 프라하의 봄 - [할인행사]
필립 카우프만 외 감독, 톰 헐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 엄마랑 이 영화를 보다가, 첫 장면부터 여자가 벗는 바람에 꺼 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내가 봤던 충격적인 장면은, 병원에서 의사가 간호사에게 보여 달라고 하자 여자가 가운을 열었더니만 알몸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중학교 때였던가 그랬는데 속옷을 안 입고 다닌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 후로, 대체 "프라하의 봄" 이란 제목과 이런 야한 장면들이 어떻게 연관이 있는 건지 무척 궁금했다.
"프라하의 봄" 이라면 체코의 독립운동일텐데, 저 바람둥이 의사가 독립투사가 된다는 얘기인가? 싶었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 운동과는 별 상관이 없는 얘기다.
그냥 자유주의 운동은 배경으로 삽입된 것 같다.
주인공들의 삶을 뒤흔드는 인생의 큰 사건 정도로 소개될 뿐이지 주인공들이 투사가 된다거나, 이를테면 "화려한 휴가" 처럼 민주화 운동 자체가 주제로 쓰인 건 아니다.
밀란 쿤데라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번역을 잘못한 게 아닌가 싶다.
번역자가 멋대로 갖다 붙인 제목이 아닐까?
"프라하의 봄" 이 상징하는 의미와 내용은 너무 다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아카데미 상을 받은 "나의 왼발" 에서 정박아 역할을 어찌나 잘 소화해 냈는지 지금까지도 약간 떨어지는 장애인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오늘 보니 정말 잘 생긴 미남 배우다.
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일텐데, 전혀 촌스럽지 않고 키도 훤칠하게 크고 얼굴에 세련미가 넘쳐 흐른다.
더불어 줄리아 비노쉬도 정말 예쁘게 생겼다.
피부가 얼마나 뽀얗고 예쁜지 옆에 가서 만져 보고 싶을 정도다.
키가 큰 루이스에 비해, 조그맣고 가녀린 줄리아 비노쉬는 마치 애기처럼 보인다.
미성년자처럼도 보인다.
프랑스 여자들은 키가 작은 편이라는 게 실감난다.
그리고 그녀의 영어 발음은 역시 외국인이라 그런지 약간 촌스럽고 부자연스럽다.
"웨이러" 를 "웨이터" 하고 정확하게 발음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여튼 이 여배우 정말 작고 아름답게 생겼다.

사실 영화는 좀 지루했다.
세 시간에 걸친 긴 영화다.
화면은 정말 아름답다.
카메라 감독이 기막히게 잘 찍은 것 같다.
특히 프라하에 소련군의 탱크가 들어 왔을 때 시위대들이 탱크에 올라가 항의하는 장면은, 중국의 천안문 사태에서도 본 것 같고, 5.18 민주화 항쟁 때도 본 것처럼 너무 익숙하다.
주인공들을 그 시위대에 삽입시켜 흑백으로 처리한 부분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살짝 흘렀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게 처절하고 가슴아픈 것 같다.
다행히 사진을 찍는 테레사가 잡혀 가거나 고문 당하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5.18 을 다룬 영화에서 보면 구타와 고문이 너무나 일상적이라 국가 폭력은 언제나 끔찍하게만 인식됐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이 거의 없어 정말로 소련군이 야만적인 행위를 했는지조차 쉽게 각인되지 않는다.

토마스의 바람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가 사비나 대신 얌전한 테레사를 선택한 것은, 물론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똑같이 바람둥이인 사비나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여자에게만 순결을 강요하는 완고한 가부장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테레사의 말처럼, 사랑과 섹스가 어떻게 별개일 수 있는지, 섹스가 단지 플레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말처럼, 삶이 그렇게 가벼운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토마스는 작고 여린 테레사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자신의 플레이도 멈출 수는 없다.
부부 사이의 정절 의무를 소홀히 하는, 그러나 무척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이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여 할까?
결국 테레사는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토마스를 떠나 난장판이 된 프라하로 돌아간다.
그녀를 사랑하는 토마스도 혼자 버려진 것을 못 견뎌 되돌아 가지만, 전에 발표했던 반공주의 기고문이 문제가 되어 여권을 뺏기고 만다.
그 때부터 토마스의 사회적 몰락이 시작된다.

토마스는 반공주의 사상 철회서에 사인하는 걸 거부해서 병원에서 쫓겨난다.
결국에는 갈 데가 없자 시골 마을에 농사지으러 들어간다.
그는 공산주의나 외세의 억압을 혐오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 투사도 아니다.
그는 정말로 엘리트 외과 의사에서 시골 농부로 전락한 것을 기꺼이 즐거워 하며 받아들인 걸까?
시골로 내려온 후 테레사는 바람 필 상대가 없어 자신에게 충실한 토마스와 행복한 한 때를 보낸다.
일견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정말로 토마스는 행복한 걸까?
저 불안한 행복은 얼마나 유지될까?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어처구니 없게도 비오는 날 트럭을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결국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 버릴 일시적인 행복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 날, 테레사는 술집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산다.
둘이 처음 만나는 날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었던 인연으로, 테레사는 안나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하자, 생긴 건 꼭 수컷 같다면서 안나의 남편인 키레닌으로 붙이기로 한다.
한국의 보신 문화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수도 있지만, 아이가 없던 이 부부는 키레닌을 마치 자식처럼 돌본다.
테레사의 고백대로 언제나 어렵고 불안하던 당신보다 오히려 키레닌을 더 편하게 사랑했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암으로 키레닌은 안락사 하고 만다.
그들을 묻으러 가던 날, 테레사는 계속 속삭인다.
이제 편안해질거야, 아름다운 세상으로 갈 거야...
똘이 생각이 자꾸 나서 마음이 아팠던 대목이다.

사비나와 테레사는 마치 동성애라고 즐기는 것처럼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결국 아슬아슬한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카메라 앞에서 벗겨놓고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카메라가 곧 폭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ppie 2008-04-0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대로 [프라하의 봄]은 번역되면서 붙은 제목이 맞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프라하의 봄]은, 요즘은 원제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소설입니다. 이 영화 원제도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입니다. '프라하의 봄' 이야기라기보다 그 때를 배경으로 한 '어떤 사람들' 의 이야기라고 보는 게 맞겠지요. ^^

tereza 2010-10-30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귓가에 테레사가 "토마쉬"하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테레사로 분한 '줄리엣 비노쉬'가 정말 예쁘게 예쁘게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원작을 한반 읽어보시면 어떨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는 한 개인의 삶이 역사, 세계, 국가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영향받고 영향주는지를 재치있게 쓰고 있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사건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합니다. 체코출신의 밀란 쿤데라는 정말 지적인 작가더군요. 아무래도 영화와 책은 매체 자체가 다르므로 책을 영화화하는 것은 책을 먼저 접한 사람에게는 이래저래 부족한 것이 많이 보이지만 저는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정말 좋았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책제목으로는 아주 멋지지만 영화 제목으로는 관객들에게 어필하기가 힘들 것 같기에 '프라하의 봄'이라고 지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구요. 원작을 한번 읽어보시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민음사 우리말 번역본도 보시고, 영어원서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댓글저장
 

전국 도서관을 하나로 연결하는 상호대차서비스를 실시한다고 한다.
"책바다" 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의 서비스다.
도서관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다.
일단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됐다는 점에서는 반갑다.
그런데 택배비 때문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
공공도서관에서 돈을 받고 책을 빌려 준다는 점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큰 것 같다.
사실 4500원이면 좀 비싼 가격이긴 하다.
인터넷에서 물건을 주문할 때 지불하는 택배비가 2500원 안팎인 걸 생각하면, 대략 그 정도로 낮추면 저항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렇지만 나는 일단, 이런 서비스가 전국적으로 시행된다는 점에서 환영이다.
시골에 있어 봐서 알지만, 시골은 도서관 사정이 열악하다.
없는 책도 많고 신간도 잘 안 들어온다.
도서관 역시 모든 책을 죄다 구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상호교환하면 공간이나 재정 면에서 절약이 되지 않을까?
기왕 택배 서비스를 한다면, 직접 이용자의 집으로 배달해 주면 어떨까?
택배비까지 부담하는데 도서관에 와서 찾아 가라고 하는 건 무리이지 않을까?
집에서 받아 보고 집에서 반납할 수 있는 시스템에 만들어진다면 비용을 낮추지 않더라도 심리적 저항감이 적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더스틴 호프만의 표적 - 초특가판
샘 페킨파 감독, 더스틴 호프만 출연 / 영상프라자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젊은 시절의 더스틴 호프만을 만난 건 좋은 영화의 보너스 같다.
같이 나오는 여배우는 매우 육감적이고 머리가 비어 보이는 전형적인 금발 미녀를 잘 소화해 낸다.
영국이라는 공간은 헐리우드와는 매우 달라 보인다.
똑같은 영어를 쓰는데 도 전혀 다른 공간 같다.
껄렁껄렁한 악당들로 나오는 다섯 명의 건달패들은 폭력적인 성향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치 비틀즈 멤버들을 보는 것처럼 아주 전형적인 영국 청년들로 보인다.
바지가 어찌나 짧은지, 거기다가 운동화까지 신고 머리는 장발인 마치 60년대 패션을 보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이 영화가 언제 제작된 것인지 모르겠는데 60년대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더스틴 호프만은 여리고 섬세한 미국인 수학자를 잘 표현해 낸다.
이 사람은 정말 연기의 천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섬세한 감정의 변화를 잘 잡아낸다.
내가 남들에게 할 말 잘 못하고 사는 성격이라 그런지, 건달패들을 향해 항의하고 싶으나 못하는 그 머뭇거리는 장면이 어찌나 실감나던지, 완전히 이 배우에게 확 빠져 버렸다.

문화적 차이를 실감했던 부분도 있다.
남편이 아내에게 자연스럽게 담배를 권하는 장면이었다.
한국 영화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면 십중팔구는 팜므파탈처럼 도발적이고 난잡한 캐릭터일 것이다.
착하고 얌전하며 순진하기까지 한 주인공이 과연 담배를 피운다고 설정될 수 있을까?
어떤 나라나 문화권이든 터부시 되는 비합리적인 금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하여튼 남자들에게만 열려 있는 기호 선택의 자유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에서 내가 인상깊게 본 부분은 강간 장면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에이미의 도발적인 행동들이 못마땅 했다.
처녀 시절 만나던 껄렁패들을 차고 고치는데 고용한 것도 이상하지만, 노골적인 눈빛으로 불쾌한 시선을 던지는 이 양아치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윗몸을 벗어 제끼는 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더군다나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찾아온 옛 남자 친구가 거침 숨소리를 내면서 찾아 오자 내보내기는 커녕, 오히려 술까지 권하는 행동은, 아예 날 잡아 잡수라는 노골적인 행위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 같은 강간 행위가 용서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창녀 같은 여자라도 원하지 않은 성행위는 절대로 즐거움이 될 수 없다.
대체 남자들은 상대가 죽을 것처럼 반항을 하는데도 일단 삽입을 하면 쾌감을 얻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강간 당하는 에이미의 고통이 너무나 리얼하고 끔찍하게 잘 묘사되어 간담이 서늘했다.
폭력으로 그녀를 제압하는 제임스가 악마처럼 보였다.
한 술 더 떠 그 패거리 중 한 놈이 찾아와 연이어 강간하는 걸 보고, 육체적으로 약한 여자가 그동안 사회에서 얼마나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힘과 폭력성만이 권력관계를 만드는 사회, 확실히 인권과 민주주의가 발달하기 전 사회는 약자들에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으리라.

끔찍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마을에는 절름발이 정신지체자가 있다.
어린 소녀가 그를 성적으로 유혹한다.
어른들에게 거부당하자 자기가 만만하게 유혹할 수 있는 헨리를 건든다.
어린 소녀가 정말 도발적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사람들에게 발각당할 위험에 처하자 당황한 나머지 헨리가 제니스를 목졸라 죽여 버린다.
절름발이가 착할 거라는 편견을 버리라는 니체의 명언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또 헨리는 쫓기는 자신을 숨겨 준 에이미 마저 강간하려고 덤빈다.
지능이 부족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판단 자체가 불가능하고 욕정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의 본성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건의 반전은 제니스를 죽인 헨리를, 마을 건달패들이 찾으러 더스틴 호프만의 집으로 몰려 오면서부터다.
운전하다가 헨리를 치게 된 호프만은, 총을 들고 위협하는 그들에게 절대로 헨리를 내주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소심하던 호프만이 분노한다.
부당한 폭력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 변화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힘없는 사람도 진정으로 분노하면 무서워진다.
호프만은 그들의 폭력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고, 헨리를 결코 내주지 않는다.
그들이 집을 위협하고 공격하는 모습은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지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결국은 주인공이 이기는 식으로 다섯 명은 다 죽고 만다.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약간 작위적이긴 했지만, 부당한 폭력에 분노하는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정의가 승리하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정작 헨리가 제니스를 죽였다는 걸 알게 되면 주인공의 기분은 어떨까?
혹은 헨리가 자신의 아내를 강간했다면?
자기 딸을 강간한 후 죽였다면?
어디까지 정의가 혹은 균형감각이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DVD 소개서에 어찌나 형편없이 줄거리가 나왔던지 짜증났다.
제대로 영화를 보기나 한 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지도 만드는 사람 - 근대 초 영국의 국토.역사.정체성, 역사도서관 006 역사도서관 6
설혜심 지음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 읽을 때는 너무 지루하고 지엽적인 내용이 많은 것 같아 대체 내가 영국 지도 역사를 왜 읽어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내가 도서관에 신간 신청한 책이라 아까워서 억지로 읽기는 했지만 정말 대충 넘기는데 치중했다.
한 번 다 읽고 나니 남는 게 없는 것 같아 정리라도 할 생각으로 다시 앞에서부터 차분히 읽었더니, 이번에는 정말 눈에 쏙쏙 잘 들어 왔다.
왜 처음에 읽을 때는 재미가 없었을까?
아마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던 18,19세기 무렵이다.
헨리 8세에 대해 아는 거라곤, 기껏해야 천일의 앤 같은 스캔들이 전부였다.
그러니 16세기 절대주의가 확립되어 가던 시기의 내용이 낯설 수 밖에.
이번에 새롭게 느낀 것은, 역시 기본 지식이 있어야 책을 재밌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르기 때문에 즐기지도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무척 재밌고 영국의 근세에 대해 기본적인 개념을 잡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마치 중세처럼 인식되는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시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전기 쯤 된다.
그러니까 상당히 가까운 시대였다는 얘기다.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의 장미 전쟁이 끝난 후 헨리 7세가 즉위하면서 영국은 중세에서 빠져 나온다.
아들 헨리 8세가 즉위한 후 영국은 수장령을 통해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는데, 이 때부터 로마로부터 단절된 국민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정체성 확립이 요구된다.
저자는 지도와 역사책이 바로 이 정체성 확립의 상징 체계로 쓰였다는 점을 지목한다.

항해 시대를 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우, 그들의 탐험에 의해 발견된 곳을 기록한 지도는 외부 유출이 금지됐다.
국가가 철저하게 관리했기 때문에 영국의 드레이크는 세계 일주를 계획하면서 지도를 구입하기 위해 리스본까지 직접 날아갔다고 한다.
반면에 영국의 지도 출판은 상업 출판이 대세였다.
이 점이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과 매우 다른 점인데, 영국은 지도를 통해 국민들이 브리튼 섬을 하나의 정치 단위로 인식하기를 원했다.
특히 예전에는 교구를 자연 경계로 인식했던 데 반해, 지도가 보급된 후부터는 지도에 표기된 대로 주를 정치적 경계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사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이고,  특히 중세 봉건 시대를 지난지 얼마 안 됐을 시기니, 평생 영주의 성 주변 영토를 떠나 본 일이 없는 농민들로서는, 국가나 국토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처럼 TV 나 신문이 있는 시절도 아니었으니 대체 브리튼 섬이란 어떤 곳인지, 내가 속한 곳은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도가 만들어지면서 영국인은 지도에 그려진 주를 일상 생활의 공간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색스턴의 지도는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독점계약을 맺어 집집마다 걸려 있었다고 한다.
비단 영국인만 그런 것은 아니고, 대육에서도 항해의 결과물로 얻게 되는 점점 확장된 지도들로 실내를 장식했다.
바티칸 궁이나 베로키오 궁에는 지도의 회랑이라는 곳이 생긴다.
영국은 지도의 상업 출판이 활발해 대륙이 지도자들만 지도를 소유했던 데 비해, 영국은 일반 국민들까지 일상적으로 지도를 접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색스턴이나 존 스피드가 만든 지도를 보면 마치 예술 작품처럼 매우 화려하다.
단순히 통치나 행정의 개념으로만 쓰인 게 아니라 지도 자체가 하나의 장식품이 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대항해 시대 이후 외부로 팽창하는 유럽의 분위기나 힘을 느끼게 된다.
쇄국 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에서 지도가 일반화 되지 못한 것과 비교가 된다.
대원군에게 고문받아 죽었다는 김정호의 전설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지도 제작에 대한 당시 인식은 어떤 것인지 정확한 배경을 알고 싶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마지막의 여행기에 대한 분석이었다.
유럽의 여행 문화는 그랜드 투어라는 형태로 16세기부터 형성된 오래된 전통임을 확인했다.
이미 자국의 문화나 역사, 지리서 등을 편찬한 영국은 외국인이 방문했을 때 자신들을 소개할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륙인들은 영국인이 편찬한 역사지지서 등을 가지고 그들을 들여다 보게 된다.
일종의 기준이 존재했다고 해야 할까?
요즘 같으면 가이드 투어를 들고 여행을 떠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미 영국 하면 떠오르는 기본적인 이미지와 인상이 형성되어 있었고 영국을 방문한 외국인의 여행기도 기존의 인상과 맞는지 틀린지를 논평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객관적이거나 독창적인 관점을 얻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우리의 배낭 여행이 흔히 그렇듯, 16세기 그랜드 투어도 역시 정해진 루트만 돌게 된다.
그러므로 한 나라를 방문한 후 쓰는 여행기가 과연 얼마나 그 나라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외국은 이렇더라, 하고 쉽게 이야기하는데, 어쩌면 그 나라의 분위기기 국민의 기질 등을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오히려 편견만 키운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 나오는 여행기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유학생 아내들의 여행기 수준의 책으로 미국이나 기타 유럽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비슷한 내용이 매 장마다 반복되기 때문에 조금만 집중해서 읽으면 책의 주제를 금방 인식할 수 있다.
그만큼 쉽게 써지기도 했고 또 그 때문에 책의 수준이 아주 높은 것도 아니다.
대중들을 상대로 평이하게 영국의 절대주의 시절 지도 제작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한 것 같다.
워낙 한정된 시대의 한정된 공간에 국한된 지엽적인 얘기라 자칫, 내가 이 얘기를 꼭 알아야 하나, 이런 회의감이 들 수 있지만 어쨌든 한 권을 읽고 나니 영국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잡히는 기분이다.
더불어 지도에 대한 관심도 늘게 됐다.
지리학 교과서에서 보면 메르카르트 도법이 발명자 이름을 딴 사실이란 걸 알게 되는, 자잘한 기쁨들도 들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