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 유물로 보는 세계사 연표
캐서린 윌트셔 외 지음, 정은주.박지연 옮김 / 청아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실망스럽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이게 왠 횡재냐 싶을 정도로 반가워 한 책이었는데 꽤나 부실하다.
일단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서로는 상당히 부족하고, 그렇다고 해서 유물 소개가 잘 된 것도 아니다.
어설프게 연표와 유물 사진을 대충 엮어 논 듯한 인상을 받았다.
뒤에 실린 연표도 난잡해서 한 눈에 알아 보기 힘들다.
사진을 위주로 한 책은 서술 부분이 상당히 약한데 역시나 이 책도 그 함정을 피해가지 못했다.
차라리 범위를 아주 좁혀서 한정된 시대만 서술하는 게 어땠을까 싶다.
아니면 유명한 유물들을 좀 성실하게 설명하든지.
누구를 대상으로 발간된 책인지 궁금하다.
사진도 부실학 설명도 거의 없어서 대체 이게 왜 유명한건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고 나서 얻은 소득은, 그래도 반복해서 서아시아 지역의 역사서를 읽다 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는 점이다.
일단 수메르와 아카드 제국, 바빌로니아로 이어지는 계보는 확실히 알겠다.
이집트의 복잡한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역사도 어느 정도는 감이 잡힌다,
이제는 더 이상 미케아 문명과 미노아 문명을 헷갈리지 않을 수 있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 보다는, 비슷한 주제의 책을 여러 권 읽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히스토리카 세계사>를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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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 닐 애셔 실버먼 지음, 오성환 옮김 / 까치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몇 달 전에 읽다가 만 책을 다시 읽게 됐다.
중간 부분 넘어가면서 30분 정도 졸았지만, 끝으로 갈수록 속도감이 나고 재밌게 읽었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주장에 대한 근거를 명확히 인지하기 위해 꽤 정성스럽게 읽은 책이다.
이름으로 봐서는 이스라엘인, 즉 유다인인 것 같은데, 과연 이 사람이 신앙인일지 궁금하다.
성경이 일획일점도 틀림이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해야만 진실한 신앙인이 되는 건 아니지만, 성경의 거의 모든 사실을 죄다 부인하면서도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 혹은 유대인이 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사색기행> 을 보면, 이스라엘인들이 생각보다 종교적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젊은 세대는 고리타분한 윗세대와 완전히 달라서 자유분방한 서구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정말로 메시아 사상을 믿기나 하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하나의 정형화된 편견에 불과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제일 충격적인 사건은 역시 족장시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토대로 볼 때 가나안을 떠돌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경이 사실을 기록했다는 전제하에 이 시대가 대체 언제인지를 밝히려는 수많은 노력이 지속됐으나, 저자는 이런저런 연대설을 모두 부정하고 아예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가상의 사건, 이를테면 민족신화로 치부한다.
간단히 말해서 환웅과 웅녀의 시대를 규명하려는 것과 똑같은 걸로 여긴다.
환단수가 실제로 어디냐는 것과 비슷하다.
예수가 동정녀에게 잉태된 것을 믿으려면, 석가모니가 마야 부인의 허리에서 출생한 것도 믿어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저자의 주장으로는, 아브라함부터 야곱의 열 두 지파에 이르는 시기가, 기원전 8세기 무렵의 지식을 배경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요셉이 낙타 대상에게 팔려갔다는 일화는 기원전 8세기 무렵의 상황이다.
왜냐면 낙타가 등장한 시기가 적어도 기원전 10세기 무렵이기 때문이다.
족장시대의 배경인 청동기 시대에 낙타가 짐꾼으로 쓰였을 리 만무하며 사육조차 안 됐다는 게 증거다.
가나안 정복 당시 정착민이었다는 블레셋족도 청동기 시대에는 등장하지 않고, 기원전 12세기는 돼야지 비로소 해안 지대에 도시를 이룬다.
암몬족이나 모압족, 에돔족 등도 모두 성서가 집필될 무렵인 기원전 8세기에, 이스라엘과 자웅을 겨루던 이웃들이다.
족장시대로 추정되는 청동기 시대에는, 가나안에 이런 도시국가를 이루고 있었던 흔적이 전혀 없고 유물도 발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가나안 정복은 뭐란 말인가?
물론 여호수아를 앞세워 징치고 꽹과리 울려서 여리고 성벽을 허물어뜨린 사건도 그저 상상의 창작물일 따름이다.
여리고에는 무너진 성벽의 흔적도 없고, 성벽이 세워지지조차 않았다고 한다.
성벽이 애초부터 없었으니, 허물고 말 게 없다는 얘기다.
지층의 구분에 따라 매우 복잡한 예시가 제시되어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초기와 후기 사이, 즉 가운데 시기에는 가나안 지대가 버려진 땅이었다고 한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말이다.

더 복잡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문제다.
성경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해온 아브라함 일파의 자손이 바로 유대인인데,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부터 가나안에 있었던 민족으로 이주민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예전에 읽었던 부분이라 정확한 근거는 아직 이해가 안 간다.
유목민의 생활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베두인족을 근거로 볼 때 유목민 집단이 점차 가나안에 평화적으로 정착했다는 설도 있고, 유목민이 힘을 합쳐 정착민을 몰아냈다는 설도 있으며 (가나안 정복처럼) 농민반란 세력이 고원지대로 올라가 하나의 집단이 됐다는 혁명설도 있지만 정황 증거만 있을 뿐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모두 부인됐다.
이 부분은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후대의 집필자들이 굳이 우르 땅에서 건너온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내세운 것은, 자신들의 기원이 매우 오래됐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실제로 유목민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역사가 긴 민족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이다.
마치 단군신화에서 기원을, 고대 주나라의 시작과 일치한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아브라함이 큰 상인으로 대상 무역을 하기 위해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이동했다는 설도 있으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실존 인물이 아니니 이것도 상상일 뿐이다.

재밌는 것은,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묻힌 걸 두고, 유다 왕국의 조상으로 본 것이다.
또 세겜과 벧엘이 등장하는 야곱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조상으로 본다.
성경에서 언급된 지명이 바로 각각의 시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치부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남유다의 시조이고, 야곱은 북이스라엘의 조상이며,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은 갈릴리 위쪽에 사는 에돔족으로 여긴다.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멸망한 후 통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요시아 왕은, 두 왕국의 전설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성서에 세 사람을 하나의 가문에 포함시킨다.

모세의 출애굽도 없었고 가나안 정복도 물론 없었으며 심지어 다윗과 솔로몬의 화려한 시대도 없었다고 한다.
다윗은 그저 산악지대의 작은 군벌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
오히려 성경에 악한으로 묘사된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야 말로 솔로몬 전설의 실제와 부합하는, 강성한 국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정통성이 유다 왕국에 있다는 것이야 말로, 성경 집필의 가장 큰 목적이었기 때문에, 요시아 시대 집필가들은 오므리 시대의 영화를, 통일 왕국 시대였던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로 각색했고 오므리 왕가는 저주받은 지배자로 격하시켰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다.
특히 므갓도 발굴을 계기로 북이스라엘의 번성했던 도시들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상대적으로 남쪽 유다는 매우 왜소하고 약했다는 걸 알게 된다.

저자는 성경 외의 고고학적 증거를 들어 위와 같은 위험한 주장들을 서슴없이 내세운다.
사실 성경은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고 보는 태도야 말로 성경의 사실 여부를 밝히는 데 가장 위험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상황과 발굴 성과를 오히려 성경에 끼워 맞춰 해석하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성경학자들도 고고학적 발굴 성과, 즉 성경 이외의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하긴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성경은 하나의 민족신화로 격하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요시아라는 인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지나치게 한쪽으로 몰고 가는 느낌도 없지 않다.
다른 책을 읽어 볼 생각이다.
이래저래 믿음이 많이 흔들리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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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등 이펙트 -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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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바보다는 훨씬 못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이 늘 그렇지만 말이다.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야 말로, 내가 가장 고민하던 문제였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했다.
어떻게 하면 타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내 의지대로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책에서 비밀을 찾겠다는 생각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짓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역시 원론적인 얘기에 그친다.
결국 끝까지 다 읽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나를 존중하고 내 감정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고, 나 자신은 타인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자.
내가 언제나 상대방으로부터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또 끌려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인정의 욕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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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 유럽 미술관에 가다 - 젊은 미술사학도가 들려주는 유럽 미술관의 명화 이야기
허은경 지음 / 삼우반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어쩌면 가장 원하던 형태의 여행기가 아닌가 싶다.
내용의 만족도와는 별도로, 이런 미술관 순례 형식의 여행서가 필요했다.
미술관 순례야 말로, 내가 가장 꿈꾸는 여행의 형태다.
풍경을 보려면 함께 떠나는 게 좋겠지만, 그림이라면, 오히려 혼자가 좋을지 모른다.
루브르 등에 한국어 가이드가 없어서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가이드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졌다.
이번에 러시아 거장전을 보러 갈 때도 가이드의 설명이 더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냥 내가 보고 감동을 받는 것, 그림을 통해 얻는 내 느낌이나 감상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미술관은 혼자 가도 절대 외롭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사색의 시간이 될 것이다.
국내 미술관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혼자 가진 않지만, 유럽의 유명 미술관은 책에서만 보던 그 감동을 직접 느끼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 가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이주헌의 미술관 투어는 너무 전문적인 냄새가 나서 따라하기가 좀 어려웠다.
평범한 이들의 미술관 투어는 또 감상 수준이 낮고.
이 책은 미술사를 전공한 저자의 약력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글을 쓰는 솜씨나 호스텔 등에서 묵는 여행 행태 등이 30대 직장인들에게 알맞는 가이드를 제공해 준다.
단 3개월의 시간을 어떻게 내느냐가 관건이다.
유럽은 워낙 작고 고만고만해 정말 한 석 달이면 충분히 중요 미술관을 돌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나는 현대 미술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꼭 가고 싶은 미술관의 갯수를 현격하게 줄일 수 있다.
런던에 가면 기껏해야 내셔널 갤러리와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가 전부고 (책을 읽고 나니 장식 미술의 집합소인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은 추가시켜야겠다. 영국 상류 사회의 아름다운 장식미술을 보는 즐거움을 빼 놓을 수는 없겠지!) 파리로 간다면 루브르와 오르세 정도다.
아, 물론 피카소 미술관은 내가 워낙 좋아하는 화가이니 꼭 봐야겠다.
네덜란드로 가면 고흐 미술관과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정도?
루벤스 그림에 열광하다 보니 플랑드라 화파의 그림이 다수 소장된 브뤼셀 왕립 미술관도 빼 놓을 수는 없겠다.
독일로 넘어가면 베를린의 국립 회화관과 뮌헨의 알테 피타코텍, 이탈리아로 가면 로마의 바티칸 미술관과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은 꼭 가야 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는 빈 미술사 박물관, 마지막으로 마드리드에 오면 프라도 미술관으로 끝을 맺겠다.
저자는 50여 개의 미술관을 석 달에 걸쳐 돌았으니, 나는 한 달이면 될 것 같은데...
한 달의 시간을 낼 수 있을까?
아니면 여름 휴가 때마다 한 곳을 집중적으로 도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대학교 3학년 때 유럽 배낭 여행을 떠난 후, 마지막 일정에 있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루브르나 바티칸 미술관에서는 못 느꼈던 감동을, 내셔널 갤러리에서 정말 무한대로 느낄 수 있었고, 그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생겼다.
이래서 여행은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다고 했던가.
빈에서 쇤부른 궁전만 보고 빈 미술사 박물관을 못 번 것도 못내 아쉽고, 뮌헨에서 알테 피나코텍을 그냥 지나친 것도 안타깝다.
대체 왜 암스테르담에 가서는 고흐 미술관이나 국립 미술관은 안 가 보고 어처구니 없게 풍차 마을만 돈 것인지!
잠깐 들린 브뤼셀에서는 그 흔해 빠진 오줌싸개 동상만 보고 왕립 미술관이 있는지도 몰랐다.
파리에서는 하필 오르세 미술관이 문 닫는 날에 들려 미련없이 포기했다.
여행 일정에는 없었지만 로마에 갔을 때 피렌체도 잠깐 들릴 수 있었을텐데, 안타까운 우피치 미술관이여!
기껏 본 게 루브르와 바티칸 미술관, 그리고 내셔널 갤러리지만, 그 때의 감동 때문에 나는 미술에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도 미술 작품을 통해 삶의 기쁨과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갈 수 있을리라 기대에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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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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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집어든 책이다.
과천 도서관에서 대출 권수를 다 채우고 싶은 욕심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급하게 골라 들었다.
원래는 <오픈북>을 빌릴까 했는데 바로 옆에 이 책이 있었고, 그래도 노벨상 받은 작가의 독서론이 더 나을 것 같아 이걸로 집어 들었다.
독서에 관한 책 중 재밌게 읽은 책은 그나마 표정훈의 에세이 밖에 없다.
다치바나 책도 그런대로 재밌게 읽긴 했지만 하여튼 그닥 유용한 것은 없었고 그나마 앞의 두 사람은 글솜씨가 있어 흥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책을 워낙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는, 왠만한 충고는 귀에 들오지 않는다.
마치 우등생들에게 공부 잘하는 비법을 강의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책 자체가 너무 좋고 내 나름대로 확고한 독서관이 있기 때문에 어설픈 충고 따위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렇다고 수집벽이 있는 쪽도 아니라서, 장서가의 에피소드도 그닥 흥미를 못 끌고 만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독서론에 관한 책은 안 읽으려고 하는데, 그래도 책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대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책을 다루는지, 한 달에 책값으로 얼마나 쓰는지, 서재는 어떻게 꾸미는지 등등 소소한 세부사항들에 대해 관심 때문에 책에 대한 책이 나오면 꼭 한 번씩은 들춰 본다.

결론적으로 나는 비교적 이 책에 만족한다.
전부를 다 재밌게 본 건 아니지만,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장서 수집이야 말로 극도로 섬세한 스포츠라는 재치있는 문구에 무릎을 탁 칠만큼 공감했다.
헌책방을 찾아 다니고 혹은 책 사는데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 오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섬세한 손길을 요하는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스포츠다.
육체적인 활동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하여튼 정서적 만족을 위한 훌륭한 게임이고 경쟁심도 유발시키기 때문에 애서가들이 이것에 몰두하는 것이리라.
언젠가는 나도 개인 서재를 갖고 싶다.
헤세의 지적처럼, 빌려 읽은 책은 그걸로 끝이다.
문득 다시 읽고 싶어질 때 내 책장에 꽂혀 있지 않으면 재음미 할 수 없어진다.
한 번 읽을 때와 두 번 읽을 때는 명확히 다르다.
물론 어떤 책은 두 번까지 읽을 필요가 없는 것들도 있지만, 적어도 고전이라면 한 번 가지고는 부족하다.
인문학이나 과학 서적도 마찬가지다.
정독을 두 번씩 할 필요는 없겠으나, 부분적으로 다시 들춰 보고 확인해야 할 때가 분명히 있다.

헤세는 남독은 나쁜 습관이라고 경계한다.
물론 나도 안다.
일주일에 몇 권을 읽겠다는 욕심에 무리해서 속도를 내면 나중에는 권 수 채우기에 급급하고 자꾸 마지막 페이지를 들추게 된다.
그렇지만, 시간은 항상 부족하고 읽고 싶은 책은 널려 있다.
쏟아지는 신간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란 말인가!
나는 비교적 독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언제나 부족하다.
남독은 책을 사랑하는 현대인의 어쩔 수 없는 운명 같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작가의 전문성과 성실함이었다.
책의 소재나 주제가 아무리 좋아도 기술적인 부분, 즉 구성이나 문체 등이 탄탄하지 못하다면 좋은 글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120% 공감한다.
아무리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어도 구성이 조악하다면 그것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다.
내용이 먼저냐, 기교가 먼저냐고 묻는다면 나는 적어도 예술이라면, 기본적인 묘사력, 구성력이 우선이라고 답하겠다.
간단히 말해서 서정주의 개인사를 욕할 수는 있어도 서정주 시가 가치없다, 이렇게 평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작가와 작품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냐고 묻는다 해도, 혹은 작품에 담긴 정신이 기교보다 중요하다고 해도, 하여튼 예술 작품이 형식적으로 완성미를 띄지 못한다면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다고 본다.

세계고전문학에 대한 욕구는, 책을 읽으면서 더해졌다.
고전은 정말 의무감에라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워낙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항상 뒤로 미뤄졌었다.
여기 소개된 책들의 제목만 들어도 당장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올해는 독서 목록에 꼭 고전도 포함시키겠다.
읽고 또 읽는 것,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 위대한 작가의 묘사력에 감탄하는 것, 작가의 사상과 자아를 발견하는 것,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고민하는 것, 고전을 읽는 즐거움이야 말로 인류 문화의 정수를 느끼는 길 같다.

뒷부분의 헤세 연보를 보니, 85세로 장수했고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첫 아내와의 사이에 적어도 아들이 세 명은 있었고, 불행히도 아내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헤세와 이혼한다.
40대 초반에 재혼을 하는데, 그녀의 요구로 겨우 3년만에 다시 이혼하게 된다.
50대 때 삼혼을 하게 되고 이 결혼은 끝까지 유지된다.
개인적인 불행을 보는 기분이 들어 착잡했다.
한 여자와 만나 평생을 해로하는 일이, 유명인이나 위인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실 헤세에 대해서는 그닥 흥미가 없다.
어렸을 때 <수레바퀴 밑에서> 를 워낙 재미없게 읽어서였을까?
원래 나는 명상적이고 자조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데미안> 은 퍽 인상깊게 읽었다.
에바 부인이라든지, 카인의 표적을 말하는 데미안의 독특한 정신세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히려 헤세에 대해서라면, 그의 책보다는, 전혜린이 독일 유학 시절 헤세에게 팬레터를 보내 답장을 받았다는 에피소드가 더 기억에 남는다.
그러고 보면 이 분도 상당히 현대 사람인 것 같다.
혹은 전혜린이 꽤 오래 전 사람이든지.
192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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