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상의 도서관 6
이병훈 지음 / 한길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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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 디자인은 참 마음에 든다.
퍽 잘 만든 북디자인이라고 생각된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마다 드는 의문이, 대체 왜 겉표지를 죄다 벗겨 버리냐는 것이다.
아마도 바코드 붙이는 문제 때문에 그런 것 같기는 한데, 표지를 보존하면서 붙일 수는 없을까?
북디자인이라는 장르가 생겼을 정도로 표지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이는 요즘, 책의 외형을 보는 재미를 뺏기는 듯해서 참 안타깝다.
그 무미건조한 도서관의 겉모습이란, 참!
하여튼 이 책의 외형은 참 마음에 들고 예쁘다.
모르긴 해도 가격이 꽤 될 듯 하다.

약력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아마도 모스끄바에서 철학이나 미학 쪽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처음 도입부는 그다지 마음을 끌지 못했다.
뭐랄까, 거창한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신변잡기적이고 사소한 감상 위주였으며 무엇보다 글 쓰는 솜씨가 그다지 신뢰가 가질 않았다.
제일 짜증나는 여행책 중에 하나가, 자기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수준의 글을 책으로 펴내는 부류다.
대표적인 예로 손미나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 등을 들 수 있겠다.
지금까지 읽은 여행기 중 가장 맛깔나는 책은, 역시 하루키의 "먼 북소리" 였고, 김인성의 "시인이 있던 자리" 라는 영국문학기행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글 잘 쓰는 작가가 대중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게 참 이해하기 힘든 노릇이다.

다행히 뒤로 갈수록 책의 수준이 조금씩 나아졌고 기대하던 뜨레찌야꼬프 미술관이 나오면서 책에 몰입할 수 있었다.
이주헌의 러시아 미술기행을 통해 접하게 된 이 훌륭한 미술관에는 러시아 거장들의 작품이 수두룩하다.
정말 훌륭한 작품들이 많은데 서유럽 미술에 비해 많이 소개되지 못한 걸 보면 확실히 러시아는 유럽의 변방이었던 모양이다.
칸딘스키나 샤갈 등 20세기 추상미술로 넘어오면서 비로소 세계적으로 알려진다.
사실 이번 러시아 미술전에 다녀오지 않았다다면 이렇게까지 관심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기껏해야 렘브란트나 카라바조 같은 서유럽 유명 화가들이 명화의 전부라고 여겼을 것이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직접 눈으로 전시회를 보고 왔더니, 러시아 미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무한히 늘어났다.
사실 19세기 미술은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책에서 별 감흥을 못 얻었던 칸딘스키와 곤차로바 같은 추상주의 미술가들이 훨씬 더 강렬하게 와 닿았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형상보다는 오히려 강렬한 색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원색의 리드미컬한 배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서 안 사실인데, 러시아 거장전에서 아주 인상깊게 봤던 곤차로바라는 화가가, 그 유명한 뿌슈낀의 이종 증손녀라고 한다.
곤차로바의 수확하는 농촌 풍경이 어찌나 기억에 남던지 구글에서 그림을 찾으려고 그녀의 이름을 입력했는데 정작 나오는 건 왠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였다.
대체 그녀가 누굴까 궁금해서 찾아 봤더니, 유명한 작가 뿌슈낀의 아내가 아니던가!
아내의 연적과 결투하다 총상을 입고 죽은 바로 그 불운한 작가 말이다.
단지 이름만 같을 뿐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친척 관계였다.
러시아에서는 가장 위대한 문호로 추앙받는다는 뿌슈낀의 아내 곤차로바는, 당시에도 사교계 최고의 미녀였다고 한다.
과연 그녀의 초상화도 눈부시게 아름다워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 놨다.
화가 곤차로바의 남편이 바로 아방가르드의 기수인 라리오노프다.
라리오노프의 그림 역시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색감을 선보여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빛에 의해 순간적으로 형체나 색이 바뀌는 인상주의에 반대하여, 사물의 입체감과 용량을 표현하느 형식주의, 즉 "부브노브이 발레뜨" 였다고 한다.
다이아먼드 잭이라는 의미라는데 둔탁하고 질감이 선명한, 중량감을 느낄 수 있는 화풍 같다.
고갱의 원시주의와도 비슷한 맥락 같다.
후기 인상파인 원시주의를 추구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고흐를 좋아하는 것도 그 선명하고 강렬한 색감이 마음을 요동치기 때문이다.
나는 서사 구조가 분명하고 사물을 정확히 묘사한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이나, 앵그르 같은 고전주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내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은, 선명한 평면적 그림인지도 모르겠다.
마네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농촌 여성의 노동하는 모습을 긍정적이고 밝은 화풍으로 묘사했다는 곤차로바는 연극적인 시각성을 추구했다고 한다.
연극적인 시각성, 이 얼마나 멋진 단어인지!!

제일 기대했던 화가는 역시 일리야 레삔이었다.
아마도 러시아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화가가 아닌가 싶다.
"볼가강의 인부들"이나 "꾸르스키 현의 십자가 행렬" 은 두말이 필요없는 정말 최고의 명작들이다.
그 강렬한 감동과 떨리는 기분을 잊을 수 없다.
화면을 압도하는 그 크기도 대단하다.
레삔은 대작을 많이 그린 것 같다.
언젠가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 위대한 걸작을 눈 앞에서 볼 수 있을까?
대체 이런 훌륭한 작품들이 왜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나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라는 게 죄다 서유럽 위주라는 한계점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정말 위대한 예술은 국경을 초월해서 생판 모르는 무지의 이방인에게도 충분한 감동을 준다.

역사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수리꼬프라는 화가에게도 관심이 간다.
"귀족부인 모로조바" 나 노보데비치 수도원을 그린 그림은 지난 번 러시아 거장전에서 본 것 같다.
"귀족부인 모로조바" 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눈덮힌 벌판에서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광기어린 모로조바 부인 외에도, 헐벗고 굶주린 거지들이 등장한다.
한쪽에는 두터운 겨울 외투로 무장한 귀족들이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정말 그 추운 날씨에 넝마를 걸친 거지들이 구걸을 하고 있다.
오히려 모로조바 부인의 유배는 뒷전이고 일단 이 가엾은 빈민들이 먼저 마음을 울린다.
작가의 뛰어난 통찰력이 돋보이는 구성이 아닐 수 없다.
하늘은 알고 계실 거라는 듯, 분노어린 얼굴로 하늘을 가리키는 손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다.
로마 시대의 순교자들은 거룩하게 느껴지는데, 그녀의 신앙은 왠지 광기로 느껴진다.
화가 역시 그녀의 신앙심을 광기로 표현한 듯, 인상이 자못 강렬하다.

제일 인상적인 그림은 지나이다 예브게니예브나 세레브랴꼬바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여류 화가의 자화상이었다.
구글에서 이 그림은 꼭 찾을 생각인데 너무 예쁘고 아름답다.
단지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건강미와 긍정성이 넘쳐나는 역동적인 자화상이다.
무척이나 매력적인 화가였을 것 같다.
이바노프의 "그리스도의 출현" 이나, 부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 은 최고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고 하는데 도판으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전형적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도식적이고 흔한 설정이라 별다른 감동이 없었다.
레삔이 부률로프야 말로 최고의 천재라고 감탄한 걸 보면 또 당시 최고의 화가로 명성을 떨친 걸 보면 대단하긴 한가 본데 기회가 되면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칸딘스키 그림도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왠 난잡한 색체의 배열인가 했으니까.

러시아는 겨울이 길어서 그런지 공연 문화가 매우 발달해 있다고 한다.
유료 관객이야 말로 예술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적어도 클래식의 세계에서는 유럽을 쫓아갈 수 밖에 없음을 이럴 때 실감한다.
공연을 즐기는 것이 일상적인 삶의 일부로 자리잡은 러시아 문화를 보면, 지루한 클래식을 고상한 교양주의 때문에 억지로 참고 듣는 우리의 스노비즘과 대비된다.
박종호가 쓴 유럽음악축제 이야기를 읽을 때도 비슷한 심정이었는데 이 책에서도 러시아 고급문화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연극을 보면서 배우의 아우라가 연극 무대를 현실세계처럼 느끼게 하는 힘이라고 표현했다.
반드시 훌륭한 연극이나 영화가 아니라 할지라도 가끔 드라마를 볼 때도 배우의 연기나 연출력이 너무 뛰어나 완전히 몰입할 때가 있다.
그런 연기력과 철학을 가진 배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
연예인이라는 수식어 대신 정말 배우라는 단어를 붙여도 될만한 연기자가 몇 명이나 될까?
난 김영철을 볼 때마다 배우라는 직함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우의 아우라, 정말 멋진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공연장에 자주 갈 생각이다.
오페라나 발레, 연극, 연주회 등을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풍성할까!

러시아 예술 기행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제목도 잘 붙였고 책 구성도 훌륭한데 사실 내용은 점수를 아주 잘 주기는 좀 그렇다.
다소 부족한 기분이 든다.
7년이나 모스끄바에 있었다면 과연 감상이 남다르긴 할 것 같다.
재밌게 읽고 있다.

뒷쪽 여름이야기는 그저 그랬다.
저자의 글솜씨는 상당히 평이한 편이다.
다른 무엇보다 문장력에 큰 점수를 주는 나로서는, 실망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건조하고 평범한 여행기가 이어진다.
사진은 무척 잘 찍었다.
모스크바의 여름은 그 높다란 자작나무의 싱그러운 초록빛에 빛을 발한다.
겨울이 너무 길고 혹독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짧은 여름이 더 귀하고 찬란한 것 같다.
여름에는 체호프나 똘스또이 같은 예술가들의 생가를 찾으러 간다.
러시아가 워낙 넓어서인지, 아니면 똘스또이 등이 워낙 부유해서인지 하여튼 그들의 생가는 정말 광활했다.
아스나야 뽈라냐의 그 넓고 커다란 저택과 정원을 보라지!
영지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
몇 장 넘기다 보니 러시아 만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상당히 비슷해 보였다.
무엇보다 정원이 있다는 게 참 마음에 든다.
정원은 도시의 아파트에서 자란 이들의 영원한 꿈일 것이다.

중간중간에 러시아 문학가들의 글을 번역해서 다른 글씨로 삽입한 부분은 참 마음에 들면서도, 제대로 읽어 보지는 못했다.
감동받은 부분을 따로 떼내어 읽으면 꼭 이렇다.
앞뒤 문맥을 아무리 많이 인용한다 해도, 글 전체를 읽을 때의 분위기를 감지하기가 어려워진다.
체호프가 의사 생활을 열심히 했다는 점은 다소 놀라웠다.
의학은 나의 아내, 문학은 나의 애인이라는 말을 체호프가 했다니!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다는 건, 즉 직업 외의 분야에 이름을 남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참 대단하다.
희곡이나 단편을 별로 안 좋아해서 체호프는 제대로 읽어 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관심이 확 생긴다.

중학교 때 읽은 세계소년소녀 문학전집에서 유난히 똘스또이 작품은 나에게 큰 감동을 줬다.
특히 "전쟁과 평화" 는 어찌나 감동적이었는지!
사실 한 권으로 압축된 거의 줄거리에 가까운 그 얇은 책이 제대로 똘스또이의 사상을 전달했는지 의문스럽긴 하다.
나중에 아빠 서재에서 무려 세 권으로 그것도 각 권마다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완역본을 보면서 기가 탁 질렸다.
그러나 하여튼 그 때는 전쟁과 평화, 를 날새워 읽고 긴 감상문을 썼었다.
<안나 까레리나> <부활> 도 무척 재밌게 읽었던 반면에, 도스또예쁘스끼는 이상하게도 안 읽혔다.
내 성향이 내면의 성찰이나 투쟁 같은 철학적인 쪽 보다는 서사적인 구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그 유명한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나 <죄와 벌> 은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해서, 지금도 도스또예쁘스끼 보다는 똘스또이 쪽이 훨씬 친근하고 애정이 간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은 몰라도, 야스나야 뽈라냐는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진다.
더군다나 대지주였기 때문에 그의 영지는 풍경 만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만 할 것 같다.

언제쯤 러시아에 가 볼 수 있을까?
뜨레찌야꼬프 미술관이나 에르미따쥬 미술관에 가 볼 영광은 언제쯤 누릴 수 있을까?
러시아의 유명한 발레나 오페라, 연주회도 들어 보고 싶고, 그 유명한 끄레믈리도 직접 보고 싶은데 말이다.
이런 즐거움을 상상만 해도 행복하니, 과연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즐거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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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 -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I. A. 브로드스키 지음, 이현숙 옮김 / 써네스트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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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대했던 것보다 산만하다.
도판도 썩 좋지는 않았다.
일단 책 크기가 크지 않아서 시원하게 그림을 볼 수 없었다.
중간에 레핀의 그림을 많이 소개하긴 하는데, 책 판형 때문인지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었다.
비싼 가격에 비해 책 자체의 질은 떨어지는 편이다.
특히 뒷부분에 나오는 레핀의 편지 부분은 안 싣는 게 나을 뻔했다.
차라리 한 권으로 엮어진 책을 번역하던지, 아니면 직접 작가가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쉬운 대목이다.
이것 저것 취사 선택해서 번역한 것이 책의 통일성을 해치고 있다.

내가 왜 레핀의 그림에 감동을 받는지 책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무한한 감동을 받았던 "볼가강의 인부들" 을 보면 배를 끄는 인부들의 각 캐릭터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단지 고통스러운 농노들의 비참한 삶을 드러내기만 했다면 오히려 이념적이고 감상자의 마음도 편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이념에 함몰되지 않았다.
레핀의 표현대로 그림 자체가 훌륭하지 않다면 아무리 주제가 뛰어나도 감동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그림에 드러난 그 세밀한 인상들을 보라!
차르의 압제에 희생되는 가엾은 농노 무리로 전락하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개개인으로 묘사한 그의 탁월한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덧붙여 강 주위를 감싸는 대기와 주변 배경은 또 얼마나 조화로운지!
"쿠르스크 지방의 십자가 행렬" 역시 마찬가지다.
이 그림도 정말 볼 때마다 감동을 하는 그림이다.
행렬에 어떻게든 끼어 보려는 꼽추를 어쩌면 그리도 생생하게 그렸는지!
확실히 레핀은 인물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지녔다.
그래서 초상화도 많이 그렸던 모양이다.
볼가강의 인부들 같은 경우는 무려 11년에 걸쳐 제작한 그림이고, 무수한 인물 스케치를 했다.
십자가 행렬 역시 인물 하나하나를 수십 번 그렸고 밑그림을 여러 차례 그렸다고 한다.
<자포르쥐에 카자크들> 은 또 어떤지!
터키 술탄의 항복하라는 편지를 받고 깔깔대는 카자크인들의 웃는 모습을 하나하나 생생하게 그려낸다.

처음 레핀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가 그린 니콜라이 2세의 초상을 봤을 때다.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훌륭한 초상화였다.
누가 이 단아하고 감수성 예민한 청년을 압제자 차르라고 생각하겠는가?
인물의 개성과 속내까지 드러내는 그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알고 보니 이것이야 말로 레핀의 전문 분야였다.
오히려 나는 훌륭한 평을 받는, "선동가의 체포" 나 "아무도 기다리자 않았다" 등은 그저 그렇다.
"이반 뇌제" 같은 경우도 정교하지 않아서 그런지 큰 감동은 없다.
정밀하고 세밀한 묘사가 좋다.

레핀은 86세의 긴 생애를 산다.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뒀고 그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도 훌륭한 초상화로 남아 있다.
어떤 그림들은 마치 인상파 그림처럼 보인다.
굉장히 다양한 표현 기법을 구사했던 것 같다.
인상파 화풍으로 그린 그림은 꼭 마네의 그림 같아서 마음에 든다.
국민 회의, 를 그린 후 오른손을 못 쓰게 되서 왼손으로 그려 보려고 했으나 기존의 명성을 지키지 못해 노년에는 가난 때문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모아 놓은 재산이 별로 없었나?
소비에트 건설에 반대하여 핀란드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쓸쓸한 만년이 슬프다.
고수머리에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다.
내가 좋아하는 톨스토이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이래저래 마음에 드는 화가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세월에 그의 진품을 보러 러시아로 날아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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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미술사 - 위대한 유토피아의 꿈
이진숙 지음 / 민음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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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다.
이주헌이 쓴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와 비교해 봤을 때 더 전문적인 느낌이 든다.
아마도 저자가 러시아 미술사를 전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나치게 도상학적이고 서술적이라는 단점도 있다.
아주 전문적이지는 않으면서도, 마치 미술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들을 다소 지리하게 늘어 놓는 경향이 있어 어떤 부분에서는 감상에 방해가 될 때도 있었다.
도판도 다소 불만스럽다.
책의 표지나 편집 등은 비교적 만족스러운데, 양면에 배치한 그림들이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한 면에 실어 놓는 게 어땠을까 싶다.
대작이라면 아예 부분적으로 확대해서 보여 주던지 말이다.
구글을 통해 확대된 그림으로 봤던 일랴 레핀의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 이나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같은 경우, 그 생생한 묘사는 책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니 직접 미술관으로 달려가고 싶을 수 밖에.

 

절대주의를 창시한 말레비치의 정사각형 그림은 이번 러시아 거장전에서 봤는데 거부감이 들었다.
이게 무슨 그림이냔 말이지.
우리가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그것이 명화라고 인정받기 때문에 교양있는 척 하려고 보는 것이 아니다.
그림이 주는 울컥한 감정이라든지, 고양되는 기분, 뭔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그런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무리 평론가들이 훌륭한 그림이라고 치켜 세워도 나에게 감동이 없으면 그런 그림은 볼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런데 책에 실린 말레비치의 다른 그림을 보고 의외의 감동을 받았다.
역시 사각형 하나 그려놓고 20세기의 위대한 화가로 추앙받은 것은 아니었다.
절대주의에 도달하기 전까지 인상주의나 신인상주의, 원시주의 등 각 화파의 화풍을 실험하듯 그린 그의 구상 작품에서 새로운 감동을 느꼈다.
마네나 모네 같은 프랑스의 인상주의자들 그림만 멋있는 줄 알았더니 러시아의 이 위대한 화가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그림을 그렸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절대주의 보다는, 구상 그림들이 훨씬 마음에 든다.

 

칸딘스키의 화려한 색체 감각도 마음에 들고 특히 샤갈의 꿈속 같은 환상적인 그림들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레핀만 관심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관심가는 화가들이 많아졌다.
니콜라이 게의 "최후의 만찬" 도 마음에 들고 브률노프의 아카데미적인 화풍도 과연 레핀이 찬탄할 만큼 훌륭하다.
이동파의 기수였던 크림스코이의 "미지의 여인" 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수리코프의 역사화도 빼 놓을 수 없다.
시슈킨이나 사브라소프가 그린 러시아의 풍경 그림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과연 러시아 미술은 리얼리즘이 돋보이면서도 결코 내용면에만 치우치지 않고 환상적이고 과감한 형식도 기꺼이 시도했다.
인구가 많고 땅이 넓은 거대한 공동체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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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저널리스트 서형욱의 유럽축구기행
서형욱 지음 / 살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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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놀랍다.
축구는 곧 삶이고 문화이며 놀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대리전투를 치르는 것과도 같고 노동자 계층의 오락거리로 탄생했다는 말도 생각난다.
넓은 운동장에서 공 가지고 발로 겨우 1,2 점 얻으려고 90분 내내 뛰어다니는데 익숙하지 않아 월드컵 마저도 심드렁하게 본 나로서는, 사실 쉽게 읽히지 않았다.
저자의 위트있는 글솜씨가 아니었다면 <피버 피치>처럼 읽다가 관뒀을 것이다.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 쓴 축구 이야기라 그런지 이질감이 덜해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읽는 속도가 상당히 떨어졌다.
전혀 관심이 없고 잘 모르는 분야라, 사실 침대 위에서, 혹은 지하철 안에서 슬렁슬렁 읽어야 할 책인데도 비교적 정독을 했다.
그래서 시간도 꽤 오래 걸렸다.
그래도 공들여 읽고 나니 유럽 축구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축구팬들은 경기장에서 좋아하는 팬을 응원하는 집단적인 응원문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TV로 혼자 보는 것도 즐겁지만 기왕이면 함께 어울어져 같은 팀을 응원하고 그 카타르시스에 빠져 들어 일체감을 느끼는 데서 희열을 얻는 것 같다.
그러니까 혼자 집에서 음악 듣는 것 보다는, 공연장에 가서 현장의 열기를 느끼는 것의 차이랄까?
뉴스에서 청소년 게임방 중독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다.
한 학생에게, 집에서 게임을 해도 되는데 왜 꼭 게임방에 가냐고 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공부도 도서관 가서 하면 잘 되잖아요.
이거야 말로 집단에 소속되어 함께 뭔가를 공유한다고 느낄 때의 즐거움을 잘 설명해 주는 대답같다.
그러고 보면, 공연장 쫓아 다니는 오빠 부대들을 빠순이라고 비하시키는 것도 대단히 편파적인 인신공격 같다.
축구에 아무 관심이 없는 내가 보기엔, 이 써포터들이란 사람들도 빠순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어쩌면 10대 소녀들도 자기들 나름의 응원 문화, 혹은 공유할 수 있는 집단 문화를 즐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른들, 특히 남자들의 비하적인 시선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축구 관람하다가 흥분해서 사람 죽이는 것보다야 (라이벌전이 벌어지면 경찰이 출동하고 원정팀 써포터들은 그물망 안에서 보호된다) 훨씬 인간적이고 소박하지 않은가?
이런 저런 경우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인간의 심성은 대단히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경향성을 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주 다른 것 같지만 크게 보면 아주 비슷하다.

 

곳곳에서 우리의 라이벌인 일본의 국력이 드러난다.
워낙 오타쿠 문화가 발달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축구 원정도 끝내 주게 잘 다닌다.
일본 선수를 데려 오면 그 일본인 팬들이 엄청난 부수익을 안겨 주기 때문에 유럽 리그에서는 일본 선수들이 진출하기가 쉬울 수 밖에.
확실히 경제력이 앞서가다 보니 소비하는 수준도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송종국이나 김남일, 이천수, 박지성 같은 한국 선수들의 진출 이야기도 간간히 나와서 반가웠다.

 

다음에 축구를 보면 좀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이래서 뭐든 알아가는 건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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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책 - 죽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책들에 대한 기록 지식여행자 2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언숙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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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재밌지는 않았다.
리뷰가 좋아서 나름 기대한 책이었는데 만족도 면에서는 다소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서평집은 그 책을 내가 직접 읽지 않은 이상 대체적으로 별 재미가 없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는 좀 예외였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문장력이 워낙 좋아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글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수필로써 작용했기 때문에 인상깊게 봤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대체적으로 서평집은 재미가 없다.
장정일의 독서일기처럼 단순한 서평 외에 뭔가 이 사람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꺼리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전체적으로 실망스럽다.
책 내용 자체가 수준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건 물론 아니다.
기대치에 못 미쳤다는 얘기다.

 

분량이 하도 많아 (500 페이지가 넘으니까) 나중에는 대충 휙휙 넘어갔다.
옛날에는 본전 생각 때문에 아무리 지겨워도 나중에 욕이라도 할 욕심으로 끝까지 기를 쓰고 읽었는데 요즘에는 그 강박관념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져서 아니다 싶은 책은 과감하게 던지기도 한다.
재밌는 사실은, 이 책에서 저자 역시 그 얘기를 했다는 점이다.
하루에 평균 일곱 권을 읽어도 결국 읽을 수 있는 책의 한계가 분명해지고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예전 같지 않아지자, 저자는 더 이상 재미없는 책마저 끝까지 읽어내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됐음을 인정한다.
결국 우리는 한정된 시간과 재화를 가진 유한한 존재이니까.
난소암으로 사망했다는 가슴 아픈 얘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혼 얘기가 안 나오는 것으로 봐서, 또 하루에 일곱 권의 책을 읽을 정도라면, 당연히 결혼 생활은 안 했을 것 같다.
몇 살에 죽었는지 궁금하다.
현대인은 모두 "cancer phobia" 를 가지고 있다던데 정말 암이 무섭긴 무섭다.
내가 아는 친구 한 명도 20대의 마지막을 넘기지 못하고 대장암으로 죽었다.
죽음이란 참 가까운 곳에 있는 무서운 존재다.

 

특이하게도 저자는 부모의 직업 덕분에 (외교관 같은 거였을까?) 체코의 프라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소비에트 연방 학교를 다녔다고 하고, 러시아로 수업을 듣는다.
러시아어라니, 참 생소하기도 하다.
일본과 러시아의 교류는 그래도 꽤 있는 모양인지 (북방 영토 문제도 있고) 일소 도서관도 있다고 한다.
하여튼 저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러시아 학교에 편입되어 중학교 3학년 때 일본으로 돌아온다.
러시아어를 익히게 된 방법은, 역시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러시아 문학 전집을 읽으면서부터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 역시 다이제스트가 유행이고, 교과서에서도 축약본이나 내용을 쉽게 바꿔서 싣는다.
어린이 수준에 맞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당시 체코에서는 문학 작품의 원문을 그대로 실을 뿐더러, 교과서에서 소설의 일부를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소설 자체를 읽는 게 수업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홍정욱이 쓴 "7막 7장" 에서도 미국 고등학교 수업이 신약성서나 그리스 로마 신화, 혹은 고전을 직접 텍스트로 쓴다는 얘기를 읽은 것 같다.
하여튼 이 방법이 문학의 숨결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음은 너무 당연하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의 학습 능력이나 감수성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지도 모른다.
다이제스트는 확실히 원전의 맛을 떨어뜨린다.
성에 눈을 뜰 사춘기 무렵, 저자와 친구들은 포르노 구하기가 쉽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고전 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것을 읽고 성에 대해 눈뜨는 식으로 말이다.
이 얼마나 건전한 성교육인지!
하여튼 저자는 책을 통해 러시아어에 입문했고, 다시 일본에 돌아왔을 때도 책을 통해 어설픈 일본어를 극복한다.
이렇게 이중국어자가 된 것이다.
소설만 읽을 수 있어도 무리없이 외국어를 소화할 수 있다는 말에 동감한다.
그 정도 수준이 된다면 충분히 외국에서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단 재미있는 소설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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