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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행동 - 21세기 민주주의, 거인과 싸우다
에이프릴 카터 지음, 조효제 옮김 / 교양인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 책을 신청한 후 받아 봤을 때 두께 때문에 깜짝 놀랬다.
500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었다.
더군다나 하드 커버였기 때문에 심리적인 부담감이 더 컸다.
어쩐지 내가 원하는 책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며칠을 미루다가 반납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밀려 드디어 오늘 다 읽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대의민주주의제를 보완하기 위해 파업이나 불매 운동, 시위, 점거, 항의 같은 비합법적인 집단 행동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논의들이 들어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왜 민주주의를 해치는지, 혹은 어떤 점에서 나쁜지는 구체적으로 기술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당연히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겠냐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점이 나로서는 아쉽다.
오히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에 더 자세히 나온 것 같다.
신자유주의가 경제 발전에 정말로 획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실제로 자본가들의 배만 채울 뿐 일반 대중에게 돌아올 이익은 하나도 없는지 등등에 관한 분석적인 책을 읽어 보고 싶다.
나로서는 고용 기회 확대와 기술 혁신, 자본주의 경쟁 체계가 주는 생산성 확대 등을 장점으로 꼽는 현재의 주류 경제 시스템을 극렬하게 반대할 만한 확고한 지식이 아직 부족하다.
빈부 격차 확대와 비정규직 노동자 증가 등과 같은 문제점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결정적인 문제점으로 작용할지는 좀 더 공부를 한 다음에 결론을 내릴 작정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대의명분이 현실을 압도할 수는 없으며, 그 명분이라는 것도 실체를 까발리기 전에는 오해될 여지가 많다는 사실이다.
"화려한 휴가" 에 대한 감상평을 읽다가 깜짝 놀랜 적이 있다.
5.18 하면 당연히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불순분자들의 무장봉기 혹은 내란 시도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익명의 게시판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영화에서도 묘사된 바지만,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해 군인에게 발포한 것은 분명하다.
책에서는 이럴 경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 학문적으로 고민한다.
직접행동은, 토론과 같은 합리적인 과정을 통한 의사표현이 어려울 경우,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세를 과시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의감에 기초하여 공동체가 바람직한 시민상을 구현한다고 인정한다면, 일부 폭력적인 행위도 (즉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는) 직접행동으로 용인될 수 있다고 했다.
폭력은 오히려 국가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혼란을 초래하며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대부분의 경우는 배제되야 하지만, 특별한 경우, 이를테면 광주 민주화 항쟁처럼 계엄군이 시민에게 발포한 경우라면 항의의 표시로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일 경우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한 방법으로는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에, 좀 더 넓은 의미의 집단행동이 용인될 수 있다고 했다.
심의민주주의가 주장하는 갈등 해결 방안인 토론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에게 유리한 방식이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아보리진들에게는 심지어 영어 사용조차 어려우니, 거리로 나가 집단행동을 통해 투쟁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경제 통합 등은, 책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야기된 전 지구적 차원의 시민운동은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얼핏 보면 모순적이기도 한 것이,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막기 위해 국민국가 수준의 통제가 더욱 강화되야 한다고 하면서도, 환경 문제나 인권 등과 같은 세계시민권 옹호를 위한 연대 투쟁을 위해 국가의 경계가 느슨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소멸이나 강화가 분야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을까?
다국적 기업을 규제하기 위해 국민국가의 역할이 커진다면, 즉 국가 간 경계선이 강화된다면, 인권이나 사회정의, 환경 문제 같은 전 지구적 문제들도 어쩔 수 없이 각 국가의 허용 범위 내에서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롤스는 이 점을 강조해서, 보편적 인권의 적용을 확대하다 보면, 국가의 자율성을 침범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서방 세계가 3세계에 인권 문제를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 학교에서의 히잡 금지 문제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공화주의적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공공 장소에서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행위를 금지시킨다.
공화국의 세속주의적 가치를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쟁을 왈쩌의 저서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무슬림들의 주장은, 기독교인이 십자가 목걸이를 한 것과 히잡 착용은 똑같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완벽한 자유가 보장되는 목걸이 착용과,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심지어 어떤 나라에서는 죽을 수도 있는) 히잡 착용을 똑같이 비교하는 것은 맥락의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주장이고, 종교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프랑스 정부의 금지 정책을 심정적으로 지지한다.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이 전적으로 자발적인 의사인지, 집안의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왈쩌는 그의 저서에서, 공동체가 자손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할 권리와 (혹은 전수시킬 권리)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사실 어떤 권리가 우선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물론 100% 개인의 선택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왈쩌는, 완벽한 개인주의자는 불가능한 개념이며, 대부분은 정체성 유지를 위해 어떤 집단에든 속해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집단이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 책에 왈쩌는, 개인주의자 보다는 공화주의자로 분류된다.
더 나아가 전 지구적 시민권, 혹은 세계정부 같은 것은 실현불가능 하다고 봤다.
얼마 전에 인상깊게 읽었던 왈쩌가 거론되니 무척 반가웠다.
직접 행동의 좋은 점은, 거기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자존감을 높힐 수 있으며, 정치적 교육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정치적 집단의 조직은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높여 준다.
또 그런 훈련을 통해 한 사람의 성숙한 민주 사회 시민으로 재탄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교 다닐 때 했던 동맹 휴학이 생각난다.
학교에 정당한 재정 지원을 요구하면서 몇 달 동안 수업 거부를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치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 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마냥 무섭기만 하고 왠지 법을 어기는 것 같고 부당한 일을 하는 것 같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시민 불복종이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인식된다는 것을 그 때 알았으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을텐데 말이다.
의사 파업도 생각난다.
의사라면 대표적인 기득권 집단인데 정부에 대항하여 파업을 일으킨 일로 국민의 지지는 커녕, 엄청난 비난과 분노를 샀다.
이 책에도 비슷한 예가 나온다.
이익 집단의 직접행동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냐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소수민족이나 사회적 약자의 집단행동은 사회정의감이라는 정서적 측면에서 받아들여지는 반면, 의사파업처럼 기득권 세력의 집단행동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넓게 보자면 시민 한 사람으로서, 혹은 하나의 직업 집단으로서 부당한 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표현방식이니 시민 불복종이라는 개념으로 수용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탈리아에서도 의사파업를 했던 전적이 있다.
책에서는 정부나 국제기구에 대항하여 시위 등을 통해 성과를 얻어낸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시민이 자발적 정치 참여라는 의미에서 직접행동은 반드시 있어야 함은 동의하는 바이지만,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약간의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파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전보다는 훨씬 따뜻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