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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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퍽 달랐다.
제목이 주는 뉘앙스로 봤을 때, 인간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그런 류의 주장인 줄 알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지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났듯, 진화론에 의해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그런 류의 과학 에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나는 굴드의 책을 처음 접했는데, 확실히 이 사람은 스스로 고백했듯, 사회주의적인 신념이 있는 것 같다.
리처드 도킨스나 칼 세이건 등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사회에 보다 관심이 많고 과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순수한 믿음 같은 게 있다고 해야 할까?
과학이 실재적인 팩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충분히 찾아질 수 있다는 기본적인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문화와 계급에 의해 영향을 받고 발전 방향 역시 그 과학이 속한 사회와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식의 고백은 자칫하면, 과학 역시 상대적이며 가변적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굴드는 퍽 신중하게 진술을 한다.
나 역시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우주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생학이나 골상학 같은 황당무계한 이론들도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맹위를 떨쳤다는 걸 사실을 접하고 보면, 굴드의 말마따나 오히려 우리가 절대적인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자만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더 관심을 쏟는 분야가 정해져 있고 과학자 역시 편견을 갖는 제한된 능력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오히려 자신이 편견을 가질 수 있음을 끊임없이 인정함으로써 자료의 선정과 계측에 보다 신중할 수 있다는 굴드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
과학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가는 과학자는, 질투와 시기심과 명예욕과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하여튼 과학과 과학자를 구분하는, 어찌 보면 인간의 한계를 실토하는 그런 솔직한 자세가 신선하게 와 닿는다.
그러나 이 말은, 황우석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과학은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는 조국이 있다는 식의 민족주의적인 말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책의 주제는 범주화와 서열화로 압축될 수 있다.
솔직히 나는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어이없는 이론들이 사회를 지배했다는 사실에 더 놀랬다.
흑인이 가장 열등한 인종이고, 코카서스 인종이 가장 우수하며, 그러한 서열화는 두개골 용량이나 길이 측정 등으로 지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등할수록 원숭이를 닮았기 때문에 침팬지의 두상과 아프리카인의 두상이 비슷하다는 식으로 기술됐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인터넷 상에서 논쟁을 벌였던 사람이 생각난다.
그 사람 말이, 흑인이 미학적으로 못생기고 열등한 것은 사실 아니냐는 것이다.
이 개명천지한 21세기에도 이런 주장이 서스럼 없이 통용되는 걸 보면,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19세기에 흑인을 백인과 똑같이 보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 같다.
범주화는 많은 오류를 낳는다.
이를테면 나는 여자고, 유색인종이고, 전라도 사람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사회에서 나를 규정하는 척도가 된다
내가 실제로 그 범주의 일반적인 경향을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간주되느냐 아니냐가 문제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완전히 똑같고 다만 관습과 교육에 의해 여자로 키워진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굴드의 말마따나,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고 우리들의 유전학적 차이는 구분하기 매우 힘들 정도로 미세하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이야 말로 인간이라는 종이, 동질한 집단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훌륭한 학설이 아닌가 싶다.
인류가 멸망하고 오직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원시 부족만 살아 남는다 해도, 그들은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의 대부분을 충분히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문화적 진보와 생물학적 진보가 다르다는 굴드의 지적은 매우 통찰력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겨우 5천 여년 가지고는 어떤 변화도 관찰될 수 없다고 한다.
반면, 문화적 진화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의해 진행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습득한 지식과 행동양식을 후손에게 학습을 통해 전수시키고, 모방과 반복을 통해 우리는 문화를 건설해 나간다.
우리가 흔히 유전적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인종별 혹은 집단별 특징은, 생물학적 진화가 아닌 이러한 문화적 진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구분이야말로, 인류의 기원과 특성을 밝히는 생물학이 함부로 기득권자들에게 이용되는 위험을 막을 방패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도킨스의 밈이라는 개념도 문화적 진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문화권에서 보이는 인간의 특성이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윌슨 등이 이러한 사회생물학을 지지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공격성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굴드는 오히려, 행동의 유연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지적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공격적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평화적으로 행동하는 것, 즉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지능의 가장 큰 특징인 유연성이라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의 주장은 가끔 모든 것이 유전자에 내제되어 있다는 말인가, 하는 허무주의와 변화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얘기인가, 하는 절망감을 느끼게 할 때가 있는데, 적용의 범위와 한계가 학자들에 따라 차이가 많은 모양이다.
제일 의아했던 것이 나는 아이를 굳이 원하지 않는데 이런 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느냐는 문제였다.
굴드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동성애자의 성향이 인간의 풀 속에서 계속 유지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가 낳은 아이들을 돌봄으로써 그 집단의 생존률을 높히는 역할을 한다.
그들의 손에 자란 아이들은 동성애자의 유전 코드를 복사함으로써 동성애 성향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나는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자손의 번식에 대해서는 특별한 욕구가 없는데, 이것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굴드는 재치있는 문장을 잘 구사한다.
기본적으로 문장력이 괜찮은 편이며, 무엇보다 위트가 있어서 좋다.
번역본으로 읽어야 한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톡톡 튀는 문장들이 많아서 읽는 내내 무척 즐거웠다.
기본적으로 유명한 학자가 되려면 문장력도 훌륭해야 하는 것 같다.
세이건이 수사적인 문장을 많이 구사하는 데 비해, 굴드는 재치있는 문장이 많다.
도킨스는 비꼬는 식으로, 정면 공격을 잘한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수사를 늘어 놓는 창조론자들이나 유사과학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정면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읽을 때 시원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즐거운 책을 쓸 수 있는 과학자가 겨우 60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세이건도 그렇지만, 60이라는 나이는 21세기에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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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행동 - 21세기 민주주의, 거인과 싸우다
에이프릴 카터 지음, 조효제 옮김 / 교양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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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서관에 책을 신청한 후 받아 봤을 때 두께 때문에 깜짝 놀랬다.
500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었다.
더군다나 하드 커버였기 때문에 심리적인 부담감이 더 컸다.
어쩐지 내가 원하는 책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며칠을 미루다가 반납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밀려 드디어 오늘 다 읽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대의민주주의제를 보완하기 위해 파업이나 불매 운동, 시위, 점거, 항의 같은 비합법적인 집단 행동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논의들이 들어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왜 민주주의를 해치는지, 혹은 어떤 점에서 나쁜지는 구체적으로 기술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당연히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겠냐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점이 나로서는 아쉽다.
오히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에 더 자세히 나온 것 같다.
신자유주의가 경제 발전에 정말로 획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실제로 자본가들의 배만 채울 뿐 일반 대중에게 돌아올 이익은 하나도 없는지 등등에 관한 분석적인 책을 읽어 보고 싶다.
나로서는 고용 기회 확대와 기술 혁신, 자본주의 경쟁 체계가 주는 생산성 확대 등을 장점으로 꼽는 현재의 주류 경제 시스템을 극렬하게 반대할 만한 확고한 지식이 아직 부족하다.
빈부 격차 확대와 비정규직 노동자 증가 등과 같은 문제점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결정적인 문제점으로 작용할지는 좀 더 공부를 한 다음에 결론을 내릴 작정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대의명분이 현실을 압도할 수는 없으며, 그 명분이라는 것도 실체를 까발리기 전에는 오해될 여지가 많다는 사실이다.

"화려한 휴가" 에 대한 감상평을 읽다가 깜짝 놀랜 적이 있다.
5.18 하면 당연히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불순분자들의 무장봉기 혹은 내란 시도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익명의 게시판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영화에서도 묘사된 바지만,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해 군인에게 발포한 것은 분명하다.
책에서는 이럴 경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 학문적으로 고민한다.
직접행동은, 토론과 같은 합리적인 과정을 통한 의사표현이 어려울 경우,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세를 과시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의감에 기초하여 공동체가 바람직한 시민상을 구현한다고 인정한다면, 일부 폭력적인 행위도 (즉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는) 직접행동으로 용인될 수 있다고 했다.
폭력은 오히려 국가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혼란을 초래하며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대부분의 경우는 배제되야 하지만, 특별한 경우, 이를테면 광주 민주화 항쟁처럼 계엄군이 시민에게 발포한 경우라면 항의의 표시로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일 경우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한 방법으로는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에, 좀 더 넓은 의미의 집단행동이 용인될 수 있다고 했다.
심의민주주의가 주장하는 갈등 해결 방안인 토론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에게 유리한 방식이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아보리진들에게는 심지어 영어 사용조차 어려우니, 거리로 나가 집단행동을 통해 투쟁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경제 통합 등은, 책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야기된 전 지구적 차원의 시민운동은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얼핏 보면 모순적이기도 한 것이,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막기 위해 국민국가 수준의 통제가 더욱 강화되야 한다고 하면서도, 환경 문제나 인권 등과 같은 세계시민권 옹호를 위한 연대 투쟁을 위해 국가의 경계가 느슨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소멸이나 강화가 분야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을까?
다국적 기업을 규제하기 위해 국민국가의 역할이 커진다면, 즉 국가 간 경계선이 강화된다면, 인권이나 사회정의, 환경 문제 같은 전 지구적 문제들도 어쩔 수 없이 각 국가의 허용 범위 내에서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롤스는 이 점을 강조해서, 보편적 인권의 적용을 확대하다 보면, 국가의 자율성을 침범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서방 세계가 3세계에 인권 문제를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 학교에서의 히잡 금지 문제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공화주의적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공공 장소에서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행위를 금지시킨다.
공화국의 세속주의적 가치를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쟁을 왈쩌의 저서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무슬림들의 주장은, 기독교인이 십자가 목걸이를 한 것과 히잡 착용은 똑같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완벽한 자유가 보장되는 목걸이 착용과,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심지어 어떤 나라에서는 죽을 수도 있는) 히잡 착용을 똑같이 비교하는 것은 맥락의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주장이고, 종교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프랑스 정부의 금지 정책을 심정적으로 지지한다.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이 전적으로 자발적인 의사인지, 집안의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왈쩌는 그의 저서에서, 공동체가 자손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할 권리와 (혹은 전수시킬 권리)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사실 어떤 권리가 우선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물론 100% 개인의 선택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왈쩌는, 완벽한 개인주의자는 불가능한 개념이며, 대부분은 정체성 유지를 위해 어떤 집단에든 속해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집단이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 책에 왈쩌는, 개인주의자 보다는 공화주의자로 분류된다.
더 나아가 전 지구적 시민권, 혹은 세계정부 같은 것은 실현불가능 하다고 봤다.
얼마 전에 인상깊게 읽었던 왈쩌가 거론되니 무척 반가웠다.

직접 행동의 좋은 점은, 거기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자존감을 높힐 수 있으며, 정치적 교육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정치적 집단의 조직은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높여 준다.
또 그런 훈련을 통해 한 사람의 성숙한 민주 사회 시민으로 재탄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교 다닐 때 했던 동맹 휴학이 생각난다.
학교에 정당한 재정 지원을 요구하면서 몇 달 동안 수업 거부를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치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 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마냥 무섭기만 하고 왠지 법을 어기는 것 같고 부당한 일을 하는 것 같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시민 불복종이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인식된다는 것을 그 때 알았으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을텐데 말이다.

의사 파업도 생각난다.
의사라면 대표적인 기득권 집단인데 정부에 대항하여 파업을 일으킨 일로 국민의 지지는 커녕, 엄청난 비난과 분노를 샀다.
이 책에도 비슷한 예가 나온다.
이익 집단의 직접행동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냐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소수민족이나 사회적 약자의 집단행동은 사회정의감이라는 정서적 측면에서 받아들여지는 반면, 의사파업처럼 기득권 세력의 집단행동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넓게 보자면 시민 한 사람으로서, 혹은 하나의 직업 집단으로서 부당한 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표현방식이니 시민 불복종이라는 개념으로 수용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탈리아에서도 의사파업를 했던 전적이 있다.

책에서는 정부나 국제기구에 대항하여 시위 등을 통해 성과를 얻어낸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시민이 자발적 정치 참여라는 의미에서 직접행동은 반드시 있어야 함은 동의하는 바이지만,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약간의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파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전보다는 훨씬 따뜻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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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마이클 셔머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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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바꾸고 나서 훨씬 더 편해질 줄 알았는데,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다.
일단 자판 치는 게 불편하다.
이 모델의 리뷰에서 읽었던 것처럼 워드 치는 게 상당히 불편하다.
구절을 옮겨 적을 때 자꾸 오타를 치게 된다.
하여튼 새 노트북으로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옮겨 적었다.
사실 이 책도 기대했던 바에 미치진 않지만 생각할 꺼리를 많이 던져 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과학자가 아닌, 과학사가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이 사람 책을 통해 많이 배웠다.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을까?
내가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설명 체계를 원하기 때문에 인간의 머리에서 여러가지 상상력이 작용해 미신과 설화 등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인간 사회에 전래되어 내려오는 여러 불가사의한 전설들은, 당시 사람들이 자연현상을 나름대로 이해한 결과물이 아닐까?
또 인간은 희망을 원한다.
희망 역시 진화의 한 산물 같다.
장애물로 가득찬 자연 환경을 이겨낼 힘,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소망, 하늘을 날고 싶은 꿈, 죽은 후에도 생이 있다는 믿음, 이런 것들은 우리가 바라고 꿈꾸던 것들이 아닌가?
이런 희망적 사고 때문에 여러가지 믿기 힘든 기적 같은 일,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초자연적 일들을 믿게 되는 것 같다.
당장 사후 세계만 해도 그렇다.
죽으면 끝이라니, 이걸 어떻게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임사체험을 의식 상태의 변성으로 설명한 이론은 재밌었다.
마약이나 환각제 등을 먹으면 뇌의 화학 수용체에서 그것을 받아들여 지각의 변화가 생긴다.
몽롱하고 날아 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주변 사물들이 왜곡되어 보여진다.
저자의 지적처럼 우리 뇌에 그러한 화학물질들이 작용할 수용체가 있다는 사실부터가 신기하다.
이른바 사후 세계를 체험했다거나, 신이 내렸다거나, 죽은 이를 봤다거나, 하는 등등의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은, 어쩌면 저자의 주장처럼 의식 상태의 변성 때문에 생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의식 상태란, 깨어 있을 때 명료하게 사물을 인식하는 상태를 말한다.
변성된 의식이란,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이나, 죽기 직전에 뇌에 산소가 부족한 상황, 환각제를 먹었을 때 같은 특수한 경우의 의식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뇌에 문제가 생겨 제대로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고 보면 의식이라는 것도 뇌의 진화 산물인 것 같다.
뇌과학이 더 발전한다면 영혼과 정신 세계, 의식, 초감각 같은 이해하기 힘든 일련의 개념들에 대한 해답을 주리라 믿는다.

홀로코스트가 실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 책에서 처음 접해서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유대인 희생자 수가 600만명이 아니라 60만명에 그쳤다거나, 혹은 가스실이 계획적으로 집단살상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고, 단지 쓰레기를 소각시키기 위해 있었다든가, 혹은 독일이 유대인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단지 추방만 하려고 했고 전쟁에서 몰리다 보니 제대로 그들을 돌보기 힘들어져 기아 등으로 죽었다는 주장 등이 있다.
그러니까 핵심은, 실제로 제 3 제국 지도자들은, 특히 히틀러는 유대인의 집단 학살을 계획한 적이 없고, 실제 죽은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다는 얘기다.
그들은 단지 유대인을 독일에서 추방하려고만 했을 뿐이고 그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어쩌다 보니 운 나쁘게 일부가 죽었다는 거다.
문득 드는 생각이, 5.18 민주화 항쟁도 실제로 죽은 사람은 별로 안 되고, 공수부대는 단지 무기를 탈취해 내란을 일으킨 일부 위험분자들을 진압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서 6.25 때 북한군이 양민 학살을 실제로 거의 저지르지 않았고 다만 과장됐을 뿐이며, 또 더 나아가면 일제 시대 때 징용된 위안부나 학도병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나치가 유대인의 시체로 비누를 만들었다는 등의 악의적인 주장은 반드시 진위를 가려야 한다.
광개토대왕비문이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됐다는 설이 허구라는 것처럼 말이다.
음모론과 진실은 반드시 구별되야 한다.
나치가 사람 지방으로 비누를 만든 적이 없다고 해서, 설사 그런 잘못된 소문이 유통됐다고 해서, 나치가 저지른 모든 악행, 집단 학살, 인종청소 등이 죄다 믿을 수 없는 일, 실제로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증명하기 어려운 일, 악의적인 소문 등으로 둔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진실을 가려야 한다.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지나치게 과장하고 확대해석할 필요도 없고 잘못을 저지른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 씌워서도 안된다.
지난 번 요코 이야기 논쟁에서도 보듯이, 일본의 패망 후 한국에 남겨진 일본 여자가 한국인에게 보복성으로 강간당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다.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일본의 끔찍한 식민지 지배 사실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왜 다들 all or nothing 으로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주장은, 비약이 너무 지나쳐 음모론 이상으로는 생각하기 힘들다.

제일 시원했던 대목은, 증명의 부담이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자들에게, 혹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에게 있다는 부분이었다.
기존의 학설을 뒤엎으려면, 자기가 하는 주장이 기존에 용인되던 학설과 다르다면, 그것이 왜 옳은가를 그가 입증해야 한다.
그것이 주변인의 불리한 위치이고 감내해야 할 부분이다.
언젠가 우유가 몸에 해롭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 있어, 내가 그런 댓글을 단 적이 있다.
기존의 학설과 다른 주장을 하려면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대야 하고, 더 엄격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 같다.
그 때는 뭔가 이건 아니다 싶어 나름대로 논리를 편 것인데, 이 책에서 증명의 부담은 소수자에게 있다는 말을 읽으니 속이 다 시원하다.
내 반론이 옳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진화론이 처음 나왔을 때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었고 이제 수많은 학문 분야의 엄청난 증거들이 진화를 지지하고 있다.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우리는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배운다.
진화론이 옳다는 것을 진화론자들이 주장할 필요는 없다.
증명의 부담은, 이제 창조론자들이 져야 한다.
왜 진화가 틀렸는지를 그들이 입증해야 한다.

여기서 또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단순히 진화론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 가지고는 새로운 사상이 될 수 없다.
A가 아니라면 당연히 B일 수 밖에 없다는 논리는 생명의 기원에 해당되지 않는다.
진화론이 틀렸다고 해서 신이 세상을 6일 만에 현재의 모습 그대로 모든 종을 한 번에 창조했다는 신화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의 오류를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서, 생명의 기원이 오늘날 여기까지 온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정교한 이론 체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들의 설명 체계는 단지 성경에 그렇게 나왔다는 것, 진화론에 이런저런 오류가 있다는 것, 100% 입증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 등이 전부다.
저자의 지적대로, 과연 창조"과학" 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과학은 입증 가능하고 실험 가능한 학문인데, 성경이 유일한 근거인 창조론은 대체 어떻게 창조를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대단한 과학자도 창조론자들과의 말싸움에서 제대로 이겨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논쟁은 사실을 입증하는 방법이 아니라,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학문과는 거리가 멀다.
도킨스 같은 이들은 아예 무신론을 들고 나오지만, 진화와 같은 과학적 이론을 설명하는 데 있어 신의 유무를 논하는 것은 과학 발전에 별 득이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다윈 같은 현명한 이들은, 가급적 종교에 관한 논쟁을 피했다고 하지 않는가?

미국에서는 여전히 창조론을 과학 시간에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된다고 하니, 굴드의 지적대로 과학의 진보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나라에서 참, 심히 걱정스러운 현상이 아닌가 싶다.
교회가 확대가족 역할을 한다는 점이 근본주의자가 판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종교적인 사회는 아니라 다행스럽다.

전체적으로 재밌게 읽은 책이다.
번역도 그런대로 괜찮고,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처럼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별로 보이지 않다.
이 사람의 다른 책 "과학의 변경지대" 가 나중에 나온 책이라 그런지 더 매끄럽고 재밌는 것 같다.
여기서 자주 인용되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을 읽어 볼 생각이다.
유사과학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 외에도, 과학이란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는지 등을 밝힌 점도 크게 도움이 됐다.
과학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오류에 대해 열려 있고 교조적이지 않으며, 지식이 누적되고 잘못된 지식은 폐기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기 수정 메커니즘이 작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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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2008-09-1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증명의 부담은 소수자에게 있다는 말'이 재미있네요. 그리고, '진화론이 처음 나왔을 때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었고 이제 수많은 학문 분야의 엄청난 증거들이 진화를 지지하고 있다.'는 말은 정말 사실입니까? 제 생각에는 진화론이 고초를 겪긴 했지만, 당시 서구의 신본주의에 반대하고, 더 이상 기독교의 삶을 살기를 포기하려 했던 지식인들이나 과학자들에게 '진화론'은 자신들의 금욕적 생활을 위한 해방구 역할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진화론을 통하여 과학이 신학에 한방 갈긴 거죠. 정치가들이나 종교가들에게서 고초를 당했다면 몰라도 그당시 과학자들에게 지금 창조론자들에게 대한 박해보다 더 심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것은 가정이지만, 적어도 '멘델의 유전법칙'이 먼저 발견되었다면, 진화론이 조금 고초를 당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파스퇴르의 '자연발생설의 비판'이 먼저 증명되었다면 진화론이 조금 고초를 당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본주의적 배경에서 진화론은 과학자들에게 공감될 수 있는 토양을 충분히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맞는 다는 이야기가 아니구요,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말꼬리를 잡는 다고 하시는데... 창조론에서도 진화론을 인정합니다. 인정할 부분들은 인정하는 것이죠. 실험적으로 증명 가능한 부분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전혀 저희 생각과 충돌하는 부분도 없구요. 그런데, 저한테, 저 정교한, 단세포 하나가, 지금고 끊임없이 외부의 신호를 내부의 신호로 바꿔서 복잡한 신호네트워크를 통해 특정한 유전자의 발현을 이끌어내고, 그 유전자가 또한 복잡한 과정을 통하여 단백질들로 재생산되어 그 신호에 대해서 반응하고 있는데, 이런 복잡하고 정교한 단세포의 발생을 밀러나, 오파린의 실험으로 이해하라나이요. 저희는 그게 안되는 거에요. 또, 많은 유전결과들이 특별히 복잡한 생물체(고등생물)들의 유전현상의 조절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무리 침팬지와 사람의 유전자가 4%(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아시겠지만...)난다고 하더라도, 마치 전자시계에 휴대폰에 있는 부품을 넣는다고 그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왜냐구요? 전자시계 부품 사이에 유기적인 결합이 있기 때문이에요~!!!) 유인원이 조금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처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인원과 사람은 유전자 차이가 몇 %라고 진화론자들이 생각하는 지 모르겠지만...) 이게바로 우리가 물고있는 말꼬리입니다. 그냥 단순해요. 그냥 탑저널에 분자생물학에서 증명하는 방법으로(이것조차 진실을 설명할 정도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필요조건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하시면서, 말꼬리 잡지 말라고 하세요. 저는 제가 믿는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창조론을 믿는 것은 '무식한 기독교 또라이'로 밖에 치부되고 있지 않다는 현실입니다. 저는 그래도 배운 것이 있어서 반론을 가하지만, 진짜 배운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혹 진화론이 진리이고 사실이라고 가르치고 강요하는 부분들은 없는 가 걱정이되고 많은 부분에서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과학으로 신학을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 입장에서는 30cm자로 지구의 크기를 재는 것 처럼 어리석어 보이구요.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도리어 과학이라는 새로운 신앙앞에 기독교인들을 매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안타깝구요.

김효진 2008-09-1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냥 탑저널에 분자생물학에서 증명하는 방법'이란 이야기 왜하냐면요. 한번 논문들 한번 펴보시고, 진화관련 논문과 분자생물관련 논문들의 논리체계가 어떻게 다른지 한번 보세요. 이게 바로 우리사회에서 진화를 사회과학이 아닌 자연과학으로 분류하면서 지원하는 방식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네이처'저널의 태생적 한계를 고려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요. 창조론자들에게도 '창조'라는 저널이 있는 거 아시죠. 저도 좀 우습긴해요. 자꾸 종교과 과학의 방식에 끌려가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런데, 이 '창조'라는 저널이 임팩트 팩터가 높아진다고 자연과학에 포함시키겠습니까? 안되지 않나요. 그런데, 여러분의 논리는 이런 비슷한 체계로 증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탑저널에 발표된 논문=진리'라는 관념에 빠져드는데 어떻게 인용횟수로 진리가 결정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발표하는 사람의 학문적 권위로 진리가 결정되겠습니까? 어떻게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믿는지에 따라서 진리가 결정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창조론자들에게 '증명의 부담을 져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증명을 위해서 할 일은 '창조', '창조와 진화', '창조과학'등등등 적당한 저널 만들어서 적당히 서로 인용해주면서 인용횟수 늘이고, 많은 기독교 과학자들 변화시켜서 그들의 권위로 창조과학 주장하게 하는 것인가요? 진화론은 분명 사회과학 수준의 증명방법을 사용하면서 창조과학보고 분자생물학적 증명방법을 사용하라니요? 제가 '단세포생물의 자살'과 '프리온'가지고 적당한 과학적 설명으로 창조과학적 논문을 낸다면 어느 저널에서 받겠습니까?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창조를 여러분이 말하는 과학에 포함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화론이 이제 그만 과학의 가면을 벗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이론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이지요.

김효진 2008-09-17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 리뷰에 갑자기 진화론이야기가 나와서 흥분했어요. 죄송합니다. 근데, 좋은 리뷰이긴하네요^^ 책도 재미있을 것 같구요.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영어 제목은 어떻게 되나요?
 
르네상스의 비밀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01
리처드 스템프 지음, 정지인.신소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책 판형이 너무 커서 대출을 할까 말까 무척 망설였던 책이다.
사실 서점에 나왔을 때부터 무척 사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가격이 비싸서 구입을 못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읽어야 할 것 같아 크게 결심을 하고 빌렸는데 역시나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낑낑 대며 간신히 들고 왔다.
그래서인지 더 애착이 가고, 내 수고에 충분히 답하는 훌륭한 책이라 무척 흡족하다.

나는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전문가의 포스를 느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훌륭한 전문서적들이 많이 발간되면 좋겠다.
번역은 역시 한계가 있다.
자체적으로 저술을 생산할 수 없는 국가는, 문화적 힘도 약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 서적도 가벼운 감상 위주의 에세이 수준을 넘어 이제 이런 분석적이고 논증적인 책들이 많이 나와 주면 좋겠다.
"생각의 나무" 에서 발간한 교양 시리즈 중 본 것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든다.

얼마 전에 읽었던 "명화를 보는 눈" 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비슷한 시대를 설명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다른 책을 통해서 두 번 확인하니, 확실히 기억에 남는다.
개념이 잡힌다고 해야 할까?
처음 서양 미술에 관한 책을 읽을 때는, 이름도 생소한 치마부에나 조토 등이 대체 누구인지 난감했었는데 이제는 비로소 개념이 선다.
14세기의 르네상스를 연 첫 인물들이 아닌가?
이 책의 장점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들을 많이 소개해 준다는 데 있다.
조토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여기서 처음 봤다.
확실히 다 빈치의 그림과는 느낌이 다르다.
좀 더 엄숙하고 더 중세적이라고 해야 할까?
판형이 워낙 커서 시원시원 하고, 무엇보다 그림 속의 인물 하나 하나를 다 설명해 주니 그림에 대한 인식의 폭이 훨씬 넓어진다.

성경에 언급되는 천사들을 아홉 개의 품계로 나눈다는 얘기는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 비로소 그 위계를 정확히 알았다.
사실은 그 부분 읽을 때 너무 지루해 하품이 나왔고 솔직히 누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다음 날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에서 그 천사 중 하나, 그러니까 권천사가 다시 등장하는 걸 보고 무릎을 탁 쳤다.
같은 지식을 다른 책에서 또 확인하면, 그리고 그런 것들이 반복되다 보면 하나의 개념으로 머릿 속에 확실히 자리잡아 내 것이 된다
그게 바로 독서의 힘이고 기쁨이다.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지식이 확장되서 좋긴 한데 결국 동양 사람이 서양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은 좌절감이 든다.
그들에게는 익숙한 상징이, 우리는 지식으로서 열심히 배워야만 인지가 된다는 한계가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한 문화권의 완벽한 이해는 거기서 살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 같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책들을 통해 조금씩 지식의 경계를 넓히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도판이 워낙 크고 시원시원 하기 때문에 그림 보는 재미가 두 배로 커진다.
또 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과 색체와 구도와 배경 등등을 하나하나 꼼꼼히 분석해 주기 때문에 서양 미술에 대한 이해도를 한층 높힐 수 있다.
비싼 값을 충분히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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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03년도에 어디선가 이 책의 소문을 듣고, 필이 확 꽂혀 책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전화했던 적이 있다.
하필이면 읽고 싶은 책이 품절되어 혹시나 서점에 재고가 있지 않을까 싶어 몇 군데 알아 봤는데 불행히도 못 찾았다.
결국 도서관에서 찾은 뒤 기대를 잔뜩 품고 책장을 열었는데, 생각보다 지루해서 별 흥미를 못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왜 이 책이 논증적이고 사변적이라고 생각했을까?
구체적인 사례를 밝혀 부당함을 증명하는 귀납적 방식, 즉 읽기 쉬운 형식이 아니라. 연역적인 방식으로 추론하는 그런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했었다.
막상 다시 읽어 보니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너무 평이해서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얘기는 조심스러울 수도 있는데, 확실히 과학자들은 직업적으로 책을 쓰고 논증하는 훈련을 하는 인문학자들 보다는 필력이나 깊이 면에서 한 수 아래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지적 사기, 라는 책을 비판하는 리뷰에서 과학자들의 인문학적 깊이가 얕다는 평을 본 적이 있다.
그 때는 인문학도들의 편견 내지는 시샘어린 깍아내리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뜻을 조금 알 것 같다.
"만들어진 신" 에서도 전체적인 뜻에는 동의하지만,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추론 과정이 매우 수준높지는 않다.
그냥 평이하게 대중을 설득한다고 해야 할까?
어렵게 글을 쓴다고 훌륭한 것은 아닌데, 확실히 철학자와 과학자 사이의 인문학적 글쓰기 능력은 차이가 난다.

미국에는 UFO 신봉자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하여튼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미국도 각종 미신과 심령술사들이 판을 치는 것 같다.
기독교적 신정 국가라는 걸 생각해 보면 뜻밖의 일만은 아니긴 하다.
전체 내용의 절반 이상을 UFO 의 존재가 황당무계하다는 것을 밝히는 데 할애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UFO 가 그 정도까지 주목받는 건 아니기 때문에 사실 크게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우주선을 보내고 달에 사람을 보내는 나라라 그런지, 외계인에 대한 미신도 큰 모양이다.
하여튼 나는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전혀 믿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은 솔직히 지루했다.
평소에 외계인을 봤다는 류의 주장을 접할 때 궁금한 게 있었다.
왜 저 사람들이 봤다는 외계인은 인간과 닮은 걸까?
두 발로 서고 두 손으로 사물을 조작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형태야 말로 지적 생물체에게 가장 적합하단 얘기일까?
칼 세이건은 시원하게 답변한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착각이고 환영이기 때문에 고작 생각해낸 한계가 그 정도라는 것이다.
세이건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만들어낸 외계인은 생물학 교과서를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진부하고 내용이 없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이라는 챕터는 나에게 꽤 큰 의미를 줬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도, 악마와 귀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세이건이 말하는 악마, 즉 demon 은 기독교의 사탄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의 말을 빌리면, 정령이나 악령, 요정, 혹은 사악한 마귀 따위는 없다.
그것들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착각이라고 본다.
사람의 뇌는 형상을 만들어내는데 익숙하다.
의미없는 여러가지 이미지들 속에서 친숙한 형태를 찾아낸다.
눈은 단지 영상을 받아들일 뿐,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뇌의 후두엽이라는 강의 내용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점을 치고 기도를 하는 것도 다 무의미한 일은 아닐까?
점성술과 굿, 사주 같은 것도 아무 의미없는 행동이 아닌가?
넓게 확장해 보면, 궁극적으로 영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체가 없는 추상적 명사일 뿐, 결국은 뇌가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얘기가 된다.
흔히 몸과 정신은 다르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영혼이 뇌가 만들어낸 이미지 조합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정신이라는 것 자체가 뇌의 작용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정말로 실존하는 神 같은 건 없다는 것인가?
뇌과학이 더 발전하면 마음의 실체를 밝혀내지 않을까?
결국은 뇌 역시 인간이라는 육체의 일부듯, 마음이나 정신, 혹은 영혼 역시 뇌가 멈추면 사라지는, 육체의 일부이지 않을까?

인간은 설명 체계를 원한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 종교가 자연 현상을 설명해 줬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초자연적인 존재,  신의 뜻으로 해석했다.
이제 과학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해 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과학이 종교라는 말은 종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숭배의 대상이고, 누구 말마따나 이해가 안 되니까 더욱 열심히 믿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해되지 않은 부분은 미완으로 남겨 두고 알고 있는 것의 범위를 넓혀 간다.
무조건 믿으라는 종교와, 정교한 설명 체계를 원하는 과학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신들린 사람은, 정신분열증의 일부로 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무조건 미친 사람으로 모는 것은 아니다.
통념적인 의미의 미친 사람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혹은 뇌과학적으로 일반인들과 다른 뇌작용이 있을 것 같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전체 인구의 1% 라는 걸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 만한 얘기다.
뇌과학이 좀 더 진보한다면 그동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하던 정신적인 영역, 이를테면 귀신들린 사람, 방언을 하는 사람, 환영을 본 사람,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 등등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의 거의 대부분은, 뇌가 만들어낸 이미지이고 환영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속해 있는 문화권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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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ngkiller 2007-12-25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무지하게 두껍고 빡샌 책이었던 기억이...ㅎㅎ 샀다가 다른 책으로 바꿔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

prongkiller 2007-12-25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린님 페이지를 한번 쭈~욱 하고 훑어봤습니다. 이정도면 뭐 '문사철 600' 정도야 대학시절에 가뿐하게 끝내셨겠네요. 부럽습니다.
철학 쪽만 보강하신다면 정말 무시무시한 내공이 되겠네요.(물론 지금까지 읽으신 철학 서적도 충분히 많으시지만^^)
주로 네이버 블로그에서 활동하느라 알라딘엔 무척 오랜만에 들어왔습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여기 한번 방문하시길 빌께요. http://blog.naver.com/ivorymind
그럼 즐거운 크리스마스 맞으세요 마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