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순 교수와 함께 읽는 인도 현대사 - 동인도회사에서 IT까지
이옥순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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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서점에서 선 채로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만 해도 힘이 넘쳐 나는 학생 때라 그랬는지 가벼운 책은 서점에서 독파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책 몇 권만 골라도 피곤이 몰려 오는 직장인이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 때 읽은 책의 저자가 바로 이 책을 쓴 이옥순씨다.
그 책은 가벼운 에세이 수준이라 유학생이 썼나 보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 교수가 된 모양이다.
솔직히 내용은 살짝 불편했다.
인도가 오늘날 발전이 더딘 이유가 죄다 영국의 식민 지배 탓이라고 보기엔 좀 오버 같다.
내제된 모순은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 무조건 영국이 식민 통치를 했기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영국이 없었다면 오늘날 인도는 선진국이 됐다는 얘기인가?
엄연하게 강력한 신분제 구실을 하던 카스트 제도마저 영국이 나타나고 나서 생겼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건 저자의 명백한 오버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발전이 더딘 이유가 전부 일본 탓이라고 하는 건 자국민이 쓴 책이니 거기까지는 심정적으로 이해를 한다 치자.
그렇지만 적어도 인도사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보다 객관적이고 냉정한 분석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누군가 지적한 바대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에드워드 사이드나 박홍규의 글이 가끔 불편한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이런 불편한 점을 접어 놓고 보자면, 긍정적인 역할로는 영국 식민 통치가 주는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 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막연하게 생각하기를, 그래도 영국은 일본보다는 낫지 않나 싶었던 점이다.
일본의 식민 통치가 워낙 군대식이고 잔인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국은 선진국 이미지가 강하고 왠지 문화적 통치를 했을 거라는 환상을 갖기 쉽다.
그래서인지 그래도 일본보다는 영국이 지배한 인도가 낫지 않았을까? 적어도 영어는 잘 쓸 수 있게 됐으니 말이야, 라는 생각이 순진했음을 알게 됐다.
어떤 식민 통치든 근본적으로 상대국으로부터 무자비한 자원 약탈을 자행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국 역시 아무리 선진국인 체 하더라도 결국 똑같은 인간이고 보면, 피지배자인 인도인을 동등하게 대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타고르가 고백한 것처럼 몸은 인도인인데 정신은 영국인이라고 할 정도로 영국식 교육은 인도의 근대교육을 장악했다고 한다.
한국은 겨우 36년이었으나, 인도는 무려 2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배당했으니, 인도 문화에 끼친 영국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어쨌든 오늘날 세계 공용어가 된 영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다행스런 일인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IT 산업이 발달하게 됐고 (이를테면 미국에서 인건비가 싼 인도에게 하청을 주는 식으로) 미국계 회사에서 일자리 잡기도 쉽다고 한다.
언젠가 신문에서 인도인 변호사들이 워낙 싼 값에 일을 맡기 때문에 미국 변호사들의 생계를 위협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때도 핵심은 인도인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점에 있었다.
하여튼 세상일은 돌고 도는 것이니, 식민통치의 유산이 오늘날 써먹을 데가 있다는 것도 재밌는 역사적 현상이다.

인도는 연방제 국가라고 한다.
인도 아대륙의 크기가 유럽보다 넓다고 하니, 이 정도로 큰 나라를 200년 씩이나 지배한 영국의 힘도 참 대단하다.
중국 같은 경우는 워낙 컸기 때문에 한 나라가 장악하지 못하고 덕분에 식민 통치도 면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인도가 왜 그렇게 쉽게 영국에게 무너졌는지 모르겠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영국인이 오기 전에 무굴 제국은 최고의 국력을 자랑했으며 (?) 인도는 근대화를 곧 맞을 예정이었다는데...
하여튼 숫자가 워낙 적은 영국인은 벵골 지방을 중심으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나머지 지방은 지방왕국들을 간접 통치하는 식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인도에서 한 번도 군사 정권이 탄생하지 않은 배경이 재밌다.
호전적인 시크 교도들을 군대에 중용했던 영국의 정책 때문에 독립 후에도 여전히 군부대를 장악하는 건 소수 민족이라고 한다.
그러니 정치와 무관할 수 밖에.
또 인도는 비록 네루가의 38년 장기집권을 경험하긴 했으나 비교적 민주주의가 잘 유지된다고 한다.
문제는 네루가 공산주의식 폐쇄 경제를 선택했다는 데 있다.
젊어서부터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네루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대외무역을 중단하고 자국내 공업화를 추진했다.
결과는 물론 실패였다.
90년대 후반부터 개방경제로 바꾸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면서 BRIC의 하나로 떠올랐다.
다행인 것은 IT 산업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아 국가가 75%의 재정을 지원하는 IIT 육성에 심혈을 기울인 덕분에, 오늘날의 IT 강국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도자의 혜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우리도 박정희가 개방경제를 택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경제력은 어려웠을 것이다.
독재자 박정희는 역사의 엄정한 심판을 받아야겠지만 적어도 개방경제를 택한 점은 그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인종주의는 근절할 수 없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답답했던 점이 바로 영국인의 인종주의적 시선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도의 오랜 관습인 카스트 제도도 드라비다인과 아리아인을 나누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큰 울타리에서 보면 좋고 나쁠 것도 없는 너무나 비슷한 종인데 왜 이런 근거없는 우월감을 갖는지 모르겠다.
세포이 항쟁 때 세포이들이 영국 여성을 강간했다는 것이 마치 없는 사실을 유포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 부분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인도에 대한 애정이 너무 큰 탓인지, 영국 여성의 희생마저도 영국 정부의 과장이라고 본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아이들과 여성들이다.
요코 이야기, 에서 문제가 됐던 점, 즉 한국인이 패망한 일본 여성을 강간했다는 것도 전후라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민족주의라는 명분 때문에 약자의 희생을 감추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또 인도 여성의 순장 풍습인 사티나 여아 결혼 같은 문제도 타파해야 마땅한 관습이 아닌가?
단지 지배자인 영국의 강제에 의해 없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악습 타파를 나쁘게 얘기하는 건 어딘가 형평성이 맞지 않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지나치게 인도 편향적인 입장에서 쓴 책이라 객관성이나 비판적 시각이 부족하다.
감정적인 서술도 너무 많아 인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인도 현대사에 대한 책이 드물기 때문에 나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쓴 관련 서적을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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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2013-04-04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도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10%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

인도조아 2013-08-11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카스트 제도가 영국이 나타나고 나서 생겼다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던데..
인도사에 대한 선입견과 "편향된 시각"을 갖고서 책을 읽는 바람에 상당 부분 오독을 하신듯..

marine 2013-08-11 12:53   좋아요 0 | URL
<편향된 시각>이 바로 저자의 시각이지요. 읽은지 오래 돼서 정확히 따지기는 어렵겠으나 인도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라기 보다는 한쪽에 치우친 시선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댓글 다신 분 역시 좀더 다양한 관점으로 본 인도사를 "많이" 읽어보시길~

ㅇㅇ 2024-07-29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현재 인도에서 경제가 발달한 주들일수록 대체로 공산당이나 좌파 세력이 세력이 강합니다.
 
세상은 나를 울게 하고 나는 세상을 웃게 한다
알리 아크바르 지음, 이채련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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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복잡한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가볍고 유머 감각이 있다.
나귀님의 페이퍼에서 발견한 책인데,  리뷰가 많이 달려 있길래, 나만 모르고 있었나 싶어 다급히(?) 읽게 됐다.
나귀님이 지적한 책의 한계를 나도 느낄 수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신파조고 잘 된 에세이로 보기에는 전체적인 수준이 한계가 있다는 것) 그 점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재밌고 읽어볼 만한 책이다.
오히려 저자의 약력을 생각한다면, 즉 파키스탄의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열 두 살 때까지 배운 게 전부이고, 프랑스로 이민와서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프랑스어로 이만한 에세이를 썼다면 나름 훌륭하다고 평가할 만 하다.
저자도 밝힌 바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유머가 있어서 좋다.
내가 보기에 알리 아크바르라는 사람은, 굉장히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람 같다.
모험심도 뛰어나고 재치가 있다.
약간 이상한 점은, 알리가 무려 30년이 넘게 프랑스 땅에서 신문을 팔고 있는데도 여전히 체류증 밖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왜 귀화가 어려운 걸까?
불법 이민자라서 그런가?
강대국이 약소국의 이민자들을 좀 넓게 포용해 주면 안 될까?
더군다나 프랑스는 과거 식민 지배라는 과오까지 저질렀지 않은가?
불법 이민자들 덕분에 힘들고 지저분한 일은 자국민이 안 하는데 뭘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제한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민자 수용이야 말로 선진국의 도덕심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프랑스도 자국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무조건 프랑스 국적을 부여하는 모양이다.
그런 줄 알았으면 알리의 큰 아들도 프랑스에 와서 출산했을텐데, 아쉬운 대목이다.
나머지 네 명은 모두 프랑스에서 출산해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으나 큰 아들만 외국인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큰 아들이 겪는 상처가 꽤 큰 모양이다.
아버지가 유명해졌으니 선처를 해 주면 참 좋을텐데...

제 자식만 최고라고 여기는 부모들이 하도 많아 이거야 말로 이기주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다들 하나씩만 낳기 때문에 지나치게 정성을 쏟는 걸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보면 자식도 많이 낳을 뿐더러 그 자식을 매우 함부로 대한다.
우리나라 역시 60년대에는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교육도 못 시키는 집이 많았다.
때리는 아버지와 감싸는 어머니의 대립구도는 60년대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지는 걸까?
알리의 아버지 역시 큰아들 알리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고, 심지어 가출을 했을 때 거리에 발가벗겨 놓고서 행인들에게 침을 뱉어 달라고 부탁했다.
본인의 자서전이 아니라면 믿기 어려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 명예살인 문제는 이 책에도 등장한다.
파키스탄은 자식의 배우자를 부모가 결정하기 때문에, 만약 여자가 연애를 하다 들키면 아버지나 오빠에 의해 살해당한다고 한다.
집에서 쫒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죽여 버린다니, 이 문제는 아무리 문화적 상대성을 들먹인다 해도 (이슬람은 평화와 평등의 종교니 어쩌니 해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재밌는 것은, 알리가 아버지에게 그토록 모욕과 구타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신문팔이로 번 돈을 집으로 송금했다는 사실이다.
딸도 아니고 아들이 말이다.
이런 것만 봐도 알리가 얼마나 착실한 청년이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이었고 자기도 다리 밑에서 잠을 청하면서도 집에 돈을 송금한다.
파리에서 신문팔이로 번 돈을 파키스탄까지 보내다니!!
알리는 이슬람교도로서의 정체성도 잊지 않는다.
결혼 전까지 혼전순결도 지키려고 애쓴다.
배를 타는 선원 생활을 하면서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무척 착실한 청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알리가 파리에서 비록 신문팔이이긴 하지만 자리를 잡고 책까지 낸 데에는 이런 성실한 태도가 밑받침이 됐음이 분명하다.
그는 아내 아지자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을 큰 명예로 생각한다.
아이가 다섯이나 되니 바깥 일을 할 수도 없었겠지만 여자가 일하는 것을 남편의 무능으로 생각하는 걸 보면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쨌든 알리네 가족은 절대적 빈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현대 서구 여성들의 직업 활동과는 별개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페미니즘도 계층적인 문제를 피해갈 수 없는 모양이다.

신문팔이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직업인지라 낯설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가판대에서 신문이나 주간지 사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직접 신문을 파는 사람이 있다면 사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리는 르 몽드가 쉬는 날이면 자기가 쓴 책을 직접 팔러 다닌다고 한다.
벌써 5천부나 팔았다고 하니, 과연 대단한 생활력이 아닐 수 없다.
겨우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 밖에 받지 못한 사람이, 외국 땅에서 외국어로 이만큼의 에세이를 쓸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그가 보통 이상의 지적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여튼 무척 재밌게 읽은 책이고 여전히 신문을 팔러 다닌다고 하는데, 인세 많이 받아서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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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늙는가 - 진화로 풀어보는 노화의 수수께끼
스티븐 어스태드 지음, 최재천.김태원 옮김 / 궁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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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노트라는 다이어리 프로그램을 쓰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장점은 스킨이 마치 진짜 다이어리처럼 아기자기 하고 예쁘다는데 있다.
그런데 최근 문제가 발생했다.
리뷰를 이 곳에 쓰는데 간혹 저장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분명히 저장을 했는데 다음에 열어 보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알라딘의 리뷰란에 직접 쓸 경우 갑자기 인터넷 연결이 안 되면서 리뷰가 등록되지 않고 날아가 버리는 경우가 생겨 블루노트에 먼저 작성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이 프로그램도 믿을 수가 없게 되서 역시 워드에 쓰는 수 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컴퓨터가 편하면서도 이런 경우에는 참 난감한 것 같다.
방금도 이 책에 관해 열심히 리뷰를 썼는데 사라져 버려 허탈하다.
같은 얘기를 두 번 하면 김이 빠질 뿐더러 처음 같은 느낌이 안 살아난다.

책의 결론은, 다소 맥이 빠진다.
특별한 노화 방지책은, 아직까지는 없다는 게 결론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책이 믿을 만 하기도 하다.
현재까지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노화를 막는 특별한 방법은 없고 입증된 것도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무수한 안티 에이징 산업은 확인되지 않은 어설픈 이론을 가지고 돈을 벌고 있는 셈이다.
책을 읽으면서 배운 새로운 개념은 노화와 질병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흔히 생각하기로 늙으면 병이 들고, 마치 기계가 오래되면 녹이 슬듯 질병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기계화의 오류라고 한다.
그러니까 늙는다고 해서 반드시 질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질병에 걸릴 확률은 나이에 따라 늘어나긴 한다.
질병은 신체 기관 하나가 고장나는 것이고, 노화는 전반적인 기능 쇠퇴를 의미한다.
기능이 떨어진다고 해서 작동이 잘못되는 것, 즉 아프다는 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그 노화학자의 주장은,  늙더라도 아프지 않는 이상, 신체 기능이 점점 쇠퇴하여 기능을 멈추는 것 (죽음) 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시력이나 청력 등 일부 기능은 젊을 때 보다 떨어질 수 있으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기능은 젊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없고 병에 걸리지 않을 경우, 자연수명을 다 채우면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흔히 호상이라고 부르는, 편안하게 자다가 돌아가시는 노인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된다.
우리 할머니를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할머니는 85세인데 시력과 청력이 약간 떨어지고 관절염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활동을 제한할 만큼 심하지는 않다) 매우 건강한 편이다.
미국 변호사와 노화학자가 함께 쓴 어떤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본 기억이 난다.
신체의 변화는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젊을 때와 달라지지만, 즉 어느 정도의 쇠퇴를 보이지만, 단계적으로 점차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질병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일정 수준 이상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결론이었다.

비타민을 많이 먹으면 젊어진다거나 적게 먹으면 오래 산다거나 하는 얘기들은 현재까지는 인체 내에서 유의한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실험실에서 쥐를 상대로 한 연구가 많아 실제 사람에게 적용되는지 여부는 입증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비타민은 항산화제로 각광받고 있는데,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인 자유 라디칼이 유해한 영향을 끼친다는 이론에서 비롯됐다.
탄수화물이나 지방, 단백질을 태울 때 연료가 되는 게 바로 산소다.
그래서 이 과정을 산화라고 부른다.
이 때 생겨나는 자유 라디칼이 인체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산화를 방지하는 항산화제를 먹으면 노화를 막을 수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세포 수준으로 발생하는 일이 과연 인간이라는 유기체에서도 똑같은 효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항산화제는 과일이나 채소로 일정양만 섭취하면 충분하다.
정제 형태로 엄청난 양을 먹는다면 오히려 과용량으로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고 보면 흔히 알려진 상식, 즉 저자의 재밌는 표현처럼, 엄마가 하라는대로, 혹은 FDA에서 권고하는 대로만 하면 최소한 질병에 덜 노출되고 덕분에 기대수명만큼은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적당히 운동하고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고 지방질이 적은 식사를 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 정도가 현재까지 입증된 질병 예방책이다.
이 때도 중요한 것은,  이것이 노화를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사실이다.
담배를 안 피우면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떨어지고 저지방 식이를 하면 유방암에 덜 걸리며, 운동을 하면 혈관벽에 찌꺼기가 낄 틈이 없어질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실이 바로 기대수명은 고대로부터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것은, 고대보다 수명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유아사망률이 줄어들고 감염성 질환이 항생제의 개발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이나 현대인이나 병에 안 걸렸을 경우 자연사 하는 나이는 거의 일치한다고 본다.
현재까지 인정받은 최고령은 고흐와 악수했다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잔 칼망 여사다.
그녀는 몇 년 전에 122.5세를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녀는 확실히 입증될 만한 출생기록을 가지고 있으나 그녀보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들은,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과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현재까지 인간의 최고 수명은 122세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노화연구가 계속 진행될 경우 최고 150세까지 살 수 있다고 내다본다.
반면 저자와 반대 의견을 펼치는 쪽에서는 120세가 최고라고 주장한다.
아무리 노화연구가 발전해도 120세 이상 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저자는 유전자 치료에 희망을 거는 것 같다.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고 염기 서열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갖게 되면 어떤 부분에서 노화를 일으키는지 통제할 수 있을리라 본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화 메커니즘은 너무나 복잡하고 정교하여 지금까지 연구로는 실제적인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다행히 곧 뭔가 획기적인 발전이 있을 거라고 낙관한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사실은 여성의 폐경 문제다.
야생에서는 인간처럼 번식이 중지되고도 오래 생명을 유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당장 남성만 봐도 평생 동안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된다.
반면 여성은 50을 전후해 난자가 고갈되고 에스트로겐 분비가 중단되지만 오히려 남성보다 오래 산다.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아이를 낳는 것 보다 낳은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에 폐경이 온다고 할 수 있다.
한 번에 하나 밖에 못 낳고 낳을 때 죽음을 무릅쓸 정도로 위험한 걸 보면, 확실히 계속적인 출산은 개체를 위협할 수 있다.
또 인간의 아이는 오랜 시간동안 양육해야 하기 때문에 계속 출산을 한다면 제대로 돌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게 바로 좋은 할머니 이론이다.
자기가 계속 위험을 무릅쓰고 출산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동안 낳은 아이를 잘 키워 그 아이가 출산할 수 있도록 돕는 전략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트로겐 분비가 끊긴 것이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대표적인 문제로 유방암과 골다공증을 들 수 있다.
유방암은 에스트로겐에 의해 유선 세포가 재생을 반복할 때 즉 자극이 활발할 때, 조절되지 않은 복제 세포, 즉 암이 발생한다.
보통 암은 분열이 활발한 장기에서 생긴다.
피부나 소화기관, 면역계의 혈구 세포, 난소나 자궁, 전립선 등의 생식기관에 암이 생기는 것도 이 기관들의 상피 세포가 활발하게 분열되기 때문이다.
한 번 분열할 때마다 DNA를 복제해야 하는데 여러 번 복제하다 보면 실수하는 놈이 생길 것이고 이것이 자가 치유 기전에 의해 교정되지 않는다면 무한 증식되는 암세포로 변하게 된다.
그러니 생리가 끊길 경우 유방암에 걸릴 확률은 매우 떨어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생활을 하지 않는 수녀들은 자궁암에 걸릴 확률이 떨어진다.
그러나 출산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규칙적인 월경으로 인해 유선 세포가 계속 자극되므로 유방암 확률은 높아진다.

에스트로겐의 중요한 기능으로 뼈의 밀도를 높여주는 것이 있다.
폐경기 이후의 골다공증은 골절의 가장 위험한 요인이다.
그렇다면 호르몬 치료가 골다공증을 예방할 수 있을까?
인위적으로 에스트로겐을 주입하다가 오히려 유방암 위험이 커진다면?
에스트로겐의 역할은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이득과 손실을 따지기도 매우 복잡한 것 같다.
요즘은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트론의 복합 요법을 실시하고 용량도 줄이는 쪽으로 나가기 때문에 암에 대한 공포는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또 폐경기 이후 여성 사망률 1위는 유방암이 아닌 심장병이기 때문에 호르몬 치료를 받을 경우 심장병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저자는 저용량 복합 호르몬 요법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워낙 복잡한 기전이라 반드시 득만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제일 큰 수확은 실험 결과를 얼마나 믿을 것인가의 기준을 정해 줬다는 점이다.
확실히 과학자들은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경험론자들이다.
저자가 든 예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하기를, 세계 지도의 양쪽 끝을 맞춰 보면 누구나 아프리카 해안과 남아메리카 해안이 퍼즐처럼 들어맞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저확장설이라는 이론으로 설명되기 전까지는 지구가 하나의 초대륙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과학자들은 타당한 설명 가능 체계가 세워지지 않는 한 절대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단지 실험실에서 그랬다더라, 하는 것 가지고는 어떤 주장이든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실험실의 쥐에게 발생한 효과가 인간에게도 똑같이 나타날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인간과 비슷한 조건의 포유류, 즉 인간만큼 오래 사는 고래류나 원숭이류 등을 가지고 연구해야 하는 게 낫다는데 동물 보호론자들이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다.
실험실에서 쥐를 쓰는 이유는 물론 그들이 번식이 쉽고 세대가 짧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설치류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이 사람들로 하여금 동물 실험을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하여튼 어디서 이랬다더라, 이 정도로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는지 확실한 인과 관계가 있는지를 반드시 따져 봐야 한다.
그렇지만 솔직히 일반인들이 복잡한 과학자들의 실험을 검증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간단한 기준으로 저자는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다양한 연구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둘째 위험 인자가 있다면 그 크기를 측정해서 질병을 일으키는데 적어도 세 배 이상의 위험이 있는지, 셋째 동물 연구의 증거가 있는지, 그 효과가 일어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는지 등을 든다.
인간에게 직접 실험할 수는 없으니 대안으로 동물 연구라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뜻 같다.
하여튼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하여 공인된 이론으로는, 담배가 폐암을 유발한다거나, 적당한 운동과 저지방 식이가 심장병을 예방한다는 것 정도가 있을 것 같다.
항산화제가 노화를 막는다는 것은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아직까지는 실제적인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비타민제 너무 좋아할 일은 아니다.

과학적인 내용을 쉽게 풀어 쓴 덕분에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저자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선을 지켰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자와 비과학자의 차이일 것이다.
과학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지키는 것이 바로 엄격한 회의주의임을 새삼 확인한 기분이 든다.
역자가 추천한 다른 노화 관련 서적도 읽어 볼 생각이다.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역자 후기다.
지난 번 "과학의 변경 지대" 를 읽으면서도 역자에게 감탄했는데 이 책의 역자 역시 성실하게 역자 후기를 쓰고 또 관련 서적까지 추천해 줘서 도움이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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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학자의 외로움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7-12-12 09:45 
    * 과학자의 외로움 * marine님의 <인간은 왜 늙는가> 2007년 12월 12일자 리뷰 중에서 발췌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하기를, 세계 지도의 양쪽 끝을 맞춰 보면 누구나 아프리카 해안과 남아메리카 해안이 퍼즐처럼 들어맞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저확장설이라는 이론으로 설명되기 전까지는 지구가 하나의 초대륙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과학자들은 타당한 설명 가능 체계가 세
 
 
마립간 2007-12-12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일부를 저의 페이퍼에 인용합니다.
 
미술관에 간 화학자 - 과학의 프리즘으로 미술을 보다
전창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독특한 제목만큼 기획도 신선했다.
화학자의 눈으로 본 명화 해설이라는 새로운 발상이 돋보이는 책이다.
사실 책 자체는 썩 훌륭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저자의 글솜씨가 안정적이고 도판이 훌륭해 읽어 볼 만 하다.
요즘 나오는 미술책들은 생생한 화보집처럼 도판을 싣기 때문에 저자의 문장력이 왠만하기만 하면 일정 수준 이상은 되는 것 같다.
문국현씨가 쓴 법의학자가 본 명화라는 책 보다는 훨씬 재밌고 설명도 자세하다.
아마도 저자가 프랑스 있을 당시 미술품에 대한 원서를 많이 읽었던 것 같다.
풀이하는 수준이 전문가는 못되더라도 아마추어 이상은 된다.

제일 새로웠던 발견은, 물감의 발전이 그림에 가지고 온 혁명이다.
그러고 보면 물감은 그림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미술과 화학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상파들이 풍경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었던 배경도 다 튜브 물감이 나오면서부터라고 하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형형색색의 화려한 색채의 향연을 펼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안료의 비약적인 발전 덕분에 가능했다.
유화 역시 마찬가지다.
플랑드르에서 유화를 처음으로 발전시킨 얀 반 에이크로 인해 르네상스 그림은 생생한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었다.
아르놀피니의 결혼. 이라는 그림을 보면 그 고운 녹색 드레스의 색감이 눈부시다.
또 안료를 석회에 개서 그리는 프레스코화 보다 훨씬 더 섬세한 묘사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니 르네상스 시대의 사진 같은 훌륭한 묘사는 유화의 발전 덕분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달걀 노른자를 바르는 템페라화는 광택이 나는 유화에 비해 보존 상태가 나쁘다고 한다.
특히 수성 물감을 쓰는 템페라화와 기름을 쓰는 유화를 섞어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은 현재 거의 색깔을 잃어 버릴 정도로 훼손이 심해서 최근 복구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수백년 동안 원형 상태를 잃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것도 미술사 발전에 화학이 기여한 부분이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화를 만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저자 역시 화학자라 그런지 라부아지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낸다.
교과서에 보던 위인을 그림책에서 만나니 무척이나 새로웠다.
약간의 미화가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 부부는 매우 세련되고 점잖은 귀족 같이 묘사됐다.
실제로는 세금 징수원이었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파에게 참수됐다고 한다.
역시 같은 세금 징수원이었던 장인도 함께 참수됐다.
참으로 끔찍한 시대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라부아지에를 고발한 마라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욕조에서 온건파 아가씨의 칼에 찔려 죽은 마라의 최후는, 역시 같은 급진파였던 다비드에 의해 그림으로 생생하게 묘사됐다.
다비드의 정치적 행각은 EBS 프로그램의 다큐멘터리에서 자세하게 봤던 기억이 난다.
혁명 때는 로베스피에로를 지지하면서 온갖 권력을 휘둘르더니, 그가 참수되자 한낱 그림쟁이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태도를 바꾼 다비드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중에는 나폴레옹 대관식 등을 그리면서 어처구니 없게 왕정에 충성을 맹세하다가 그마저 귀양가고 나자 결국 벨기에에 망명해 평생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죽고 만다.
그 프로그램의 평론가도 그렇고 이 책의 저자도 다비드를 매우 정치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으로 평가하는데, 인물 평가가 어떻든 간에 다비드의 그림은 정말 위대하다.
그 크기 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고 주제도 역사화가 많아 웅장한 맛이 있다.
특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나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 같은 그림은, 과연 신고전주의의 기수답다는 찬탄을 불러 일으킨다.

언젠가 책에서 보고 좋아하게 된 부그르의 그림을 만난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부그르는 인상파가 세력을 얻기 전, 국전파의 마지막 주자라 할 수 있다.
달력 같은 정형화된 그림에 나올 법한 그의 작품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다.
물론 고흐나 렘브란트 등이 주는 개성은 많이 떨어진다.
뭐랄까, 너무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하나?
밋밋하다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하여튼 마치 천상의 여인을 그리듯 어쩌면 인간을 저렇게도 아름답게 그릴 수 있나 싶을 만큼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훌륭한 그림이 많다.
인상파가 대세를 이룬 후 몇 십년 간 완전히 잊혀졌다고 하나, 어떤 평론가에 의해 발견된 후 현재는 높은 가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어쨌든 개성이 부족하긴 하지만 드로잉 솜씨나 색감은 훌륭한 화가다.

벨라스케스는 인상파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왜 그 화가가 위대한가 했더니, 이미 17세기에 근대적인 감각을 선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유명한 시녀들, 이야 워낙 많이 인용돼서 오히려 식상하지만, 그 외의 다른 그림들을 봐도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에 중점을 둔다거나, 평면적인 강렬한 묘사를 한다던가, 현실에 주제를 찾는다거나 하는 등 시대에 걸맞지 않게 근대적인 기법을 스스로의 천재성에 기대어 많이 선보인다.
그러고 보면 벨라스케스 그림은 세련됐다는 느낌을 준다.
저자에 따르면, 멀리서 보면 분명하게 형채를 갖추었는데 가까이 들여다 보면 쓱싹쓱싹 선으로 대충 버무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밀하게 선 하나하나를 그린 게 아니라 대충 선을 뭉개면서도 완벽하게 하나의 형체를 구현했다는 점이 화가의 위대함을 설명해 준다.
내가 좋아하는 마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화가인데, 마네 역시 벨라스케스를 몹시 존경해서 많은 모사를 했다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화가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이라는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어찌나 정교하게 사물을 묘사했는지 또 그들이 입은 비단옷은 마치 그 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특히 가운데 해골을 교묘하게 배치함으로써 MOMENTO MORI 라는 경구를 실감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가히 당대를 대표할 만한 화가답다.
특히 이 사람이 그린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는 그 고귀한 인격까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 너무 마음에 든다.
대체 훌륭한 화가들은 왜 이리 많은 것인지...

전체적으로 도판도 훌륭하고 저자의 글솜씨도 어지간 하고, 시도도 새롭고, 그래서 평균 이상은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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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8월부터 12월까지 읽은 책. 하반기에 더 열심히 읽은 것 같다. 이용한 도서관은 평촌 도서관과 과천 도서관이다. 본인의 독서 활동에 큰 도움을 준 두 도서관에 감사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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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18,900원 → 17,010원(10%할인) / 마일리지 940원(5% 적립)
2007년 12월 25일에 저장
구판절판
처음 읽었을 때는 지루했는데, 다시 보니 흥미롭다. 외계인에게 납치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새삼 놀랬다. 악령은 결국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책. 그러나 이 논리를 따라가면 결국은 무신론자가 되야 한다.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마이클 셔머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1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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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2일에 저장

믿음 엔진의 진화에 대해 설명한다.
최선의 세계에 살고 싶다는 희망, 자연현상에서 인과관계를 찾으려는 노력이 미신과 우상과 종교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읽어 볼 만 하다.
르네상스의 비밀
리처드 스템프 지음, 정지인.신소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월
48,000원 → 43,200원(10%할인) / 마일리지 2,400원(5% 적립)
2007년 12월 22일에 저장
품절
도판이 너무 훌륭하고 설명도 섬세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그림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꼬집어 준다. 그림에 대한 배경지식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기분이다. 이런 양질의 책들이 많이 번역되면 좋겠다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김갑수의 세상읽기
김갑수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0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7년 12월 21일에 저장
품절
저자의 세상 보는 식견이나 문장력에 실망했다. 전문 분야인 음악 에세이에 주력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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