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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나타 - [초특가판]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 잉글리드 버그만 외 출연 / PS Kr. / 2004년 7월
평점 :
대체 얼마만에 본 DVD인지...
고전 영화를 수집하는 아빠의 고상한 취미 덕분에 눈이 호강한다
한동안 영화 다운받는 재미에 빠져 하루에만 두 세 개 씩 해치울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좀 지나니까 시들해졌다
그래도 드라마 보는 것 보다는 낫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봤었다
아빠 덕분에 고전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요즘 영화처럼 스펙타클 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또 스토리나 플롯이 아주 정교하지는 않지만 세월의 흐름을 이겨낸 나름의 매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누가 저런 케케묵은 영화를 볼까 싶지만, 마치 헌책방을 찾는 손님들처럼 고전 영화를 수집하는 매니아층도 꽤 있는 것 같다
난 영화 기법이나 촬영 각도 같은 기술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또 크게 관심도 없지만) 뭔가 생각할 꺼리를 준다는 점에서 옛날 영화를 좋아한다
왜 그게 명작인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에게 감동을 주는 영화, 아주 재밌지는 않더라도 보고 나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 그런 영화가 좋다
이른바 예술 영화라고 하는 것들은 자극적이지 않아서 좋다
가끔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기승전결이 전혀 없는 그 밋밋한 설정에 황당하면서도 현실 세계를 너무나 가감없이 드러내고 특히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마치 날것을 먹는 것 같은 신선함을 느낀다
하여튼 고전도 그렇다
과장이 없고 오버하지 않아서 보기가 편하다
잉그리드 버그만이라면 '카사블랑카'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로 유명한 그 청순가련형의 스웨덴 여배우가 아닌가?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사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젊어서 찍은 건지 늙어서 찍은 건지도 몰랐다
또 젊은 시절 모습만 봐도 나이든 얼굴은 매우 낯설어 처음에는 못 알아 봤다
다만 할머니가 참 곱게 늙었다, 노인인데 키도 굉장히 크고 옷이 잘 받는구나, 딸보다 더 예쁘게 나온다, 이런 느낌만 받았다
알고 보니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잉그리드 버그만이었다
당시에는 보톡스 시술이 없었는지 얼굴 주름살, 특히 입가의 팔자 주름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나이에 맞는 늙음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60세 넘은 할머니가 피부가 팽팽한 건 왠지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
딸인 리브 울만은 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페르소나였다는데 연극배우였다고 한다
솔직히 외모는 감성을 불러 일으키기엔 너무 평범하다
어머니를 몰아 세우는 장면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최고였다
서양 어머니들은 확실히 한국적인 정서와는 다른 것 같다
어머니 하면 자식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외국 영화를 보면 오히려 어머니의 자아발전 때문에 소외받는 딸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 영화도 전형적인 모녀 갈등을 그리고 있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열연한 샤롯트는 우리나라의 성공한 아버지로 치환해도 될 것 같다
성공을 위해 가정을 희생하고 가족은 항상 자기를 위해 존재하고 언제나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아버지!
성공지향적이라는 점에서, 가정보다는 사회적 명성을 우선히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남자들과 비슷하다
영화 속의 어머니, 샬롯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다
그녀는 1년 내내 공연을 다니고 남편과 딸은 소외당한다
등이 아파 최고의 공연을 못하게 되자 샬롯트는 과감하게 피아노를 접고 가족에게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다
정말로 가족을 위해 피아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자 대신 가족에게 행복을 얻기로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것이다
나는 가족을 위해 내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자연스레 그녀는 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그 기대에 못 미치냐는 식으로 말이다
가끔 보면 한국의 젊은 엄마들도 사회적 성공을 자식에게 대신 바라는 경우가 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리만족 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딸 에바는 엄마에 비해 외모도 떨어지고 피아노 솜씨도 형편없다
완벽한 엄마의 기대에, 더구나 피아노를 포기하고 선택한 엄마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딸을 자꾸 자기 기대에 맞게 변형시키려는 엄마,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딸, 결국 소심한 딸은 정신병이 생기고 만다
그녀는 열 여덟 살 때 나이 많은 남자의 아이를 가짐으로써 안식처를 얻는다
엄마는 둘을 갈라 놓고 유산시켜 버린다
모녀간의 갈등은 정점에 달했고 엄마는 곧 잊어 버렸으나 딸은 평생을 상처로 안고 산다
기억에 남는 대사는, 에바가 엄마를 원망하면서 했던 말이다
"알렉스는 어른이었어, 충분히 나를 책임질 수 있었다고"
나이 많은 남자와 18세의 어린 숙녀가 한 때의 불장난으로 끝날 거라는 게 일반적인 시선인데 비해, 당사자인 본인은, 오히려 남자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자신과 임신이라는 상황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관점의 차이가 재밌다
어쩌면 부모들의 생각과는 달리, 알렉스는 에바를 책임질 만큼 사회적으로 준비가 돼 있던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자식의 행복을 위한다고 억지로 강행했던 일이 결국은 자식의 인생에 큰 상처를 남기고 평생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일으키는 걸 보면, 아무리 사랑이라는 이름이라 할지라도 타인에게 절대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건 없지 않나 싶다
누구도 인생사를 100% 예측할 수 없고 더군다나 상대의 마음을, 비록 부모 자식간이 할지라도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과연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사 자신도 모른다 할지라도 어쨌든 최소한 자기가 직접 선택했다는 점에서는 후회할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나는 기본적으로 부모에 대한 이런 식의 원망을 좋아하지 않는다
에바는 끊임없이 엄마를 비난한다
어린 시절 사회적 성공을 위해 자기를 버려뒀다는 것이다
자식을 고아원 같은데 버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혹은 기본적은 의식주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또 혹은 폭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가 자식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모도 부모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다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을 권리가 있는 인간이다
왜 부모는 자식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가?
특히 여자는 여자이기 이전에 엄마라는 식의 사회적 표어 같은 발언이 정말 싫다
누구도 설사 자식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다
또 그것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이어야 한다
자식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받는 건 옳지 않다
희생한 부모가 칭송받는 것 까지는 좋으나, 희생하지 않았다고 비난받는 건 부당하다
영화를 보면서 재밌었던 건, 가족에 대한 각자의 바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가 사회 생활에 지친 자신을 어루만져 주길 바란다
샬롯도 공연으로 바쁜 자신을 가족이 위로해 주길 바란다
에바 역시 부모가 자신의 정서를 만족시켜 주길 바란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회는 엄마가 가족의 희생자가 되어 구성원들의 요구 사항이나 정서적 만족감을 채워준다
그러나 여자들의 사회 생활이 늘어나면서 여자들 역시 집에서 가족들에게 위로받기를 원한다
70년대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바로 그런 상황이 연출된다
여전히 가부장제 구조를 가진 한국 사회에 살고 있어서인지 자꾸 샬롯이 성공지향적인 아버지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하여튼 결혼이란 배우자와 그 가족들을 위해 나의 일정부분을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인데 과연 그런 마음의 준비를 얼마나 하고 결혼을 하는지 궁금하다
어제 잠깐 본 "웨딩" 이라는 드라마에서 류시원이 장나라에게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생각난 답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 내지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나 헌신이라고 답하고 싶다
장애아의 등장은 샬롯을 힘들게 만든다
출산 후 곧 버려진 헬레나가 등장한다
이 가엾은 동생을, 언니 에바가 돌본다
의붓아버지 레오나르도와 헬레나의 관계는 명확히 서술되지 않아 다소 모호한 점이 있으나 하여튼 심상치 않게 보였다
엄마의 새 남편 레오나르도를, 사춘기의 헬레나가 사랑한다
키스까지 했다는데 자발적이었다는 점에서 성폭행 같은 개념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목을 못 가누는 선천적 질병을 앓던 헬레나는 레오나르도가 떠난 후 정신적 충격으로 아예 하반신을 못 쓰게 된다
이 점은 영화에서 퍽 허술하게 그려진 것 같은데, 정신적 충격으로 사지 마비가 된다면 역시 정신 요법으로 회복될 길도 있지 않을까?
하여튼 에바는, 자신의 새 남자와 딸이 눈이 맞는 눈치니까 그 남자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엄마가 멀리 떠나 버렸다고 생각한다
애가 탄 레오나르도는 냉정하게 헬레나를 뿌리치고 샬롯에게 달려간다
그 날 밤 헬레나가 갑자기 전신 마비가 왔다는 것이다
어린 딸에게 질투를 느끼는 엄마라!
한국 사회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힘든 설정이 아닌가 싶다
뭐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 속의 샬롯은 사회적인 성공 만큼이나 성적으로도 매력적인 여자로 나온다
레오나르도의 장례를 치루고 딸 집에 쉬기 위해 내려오는데, 딸과 갈등 후 갑자기 떠날 때도 위로해 줄 남자를 동행하니까 말이다
성적으로 무력한 할머니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재력과 사회적 명성, 성공 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 부분이었다
노르웨이의 시골은 참 아름답다
저렇게 넓은 집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다운 쉬프트 족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빡빡하게 들어선 아파트, 밀실 같은 이 좁은 공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이러 처리고 저리 치이면서 사는 인생, 혹 아프기라도 한다면 금방 마음이 약해져 경쟁이 없는 사회로 도망가고 싶을 것 같다
샬롯과 에바가 돌아가면서 연주하는 쇼팽의 소나타 곡이 참 좋았다
영화 내내 은은하게 울리는 OST도 제목에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