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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에 대하여
마이클 왈쩌 지음, 송재우 옮김 / 미토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은 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해남에 있을 때 도서관에 신청해 읽었던 것 같다
벌써 한 2년은 지난 듯...
직장에서 시간을 쪼개가면서 잠깐 잠깐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무척이나 감동하면서 메모하면서 열심히 읽던 생각도 난다
몰입했던 책을 서울에 온 후 다시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집어든 것은, 나로서는 좀 특이한 경험이었다
어떤 책이든 재독하지 않는 편이라 이번에 다시 읽은 건 정말 우연이었다
어쩌면 지난 번에 읽은 내용을 완전히 잊어 버렸기 때문에 더 몰입하면서 재밌게 읽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 때와는 상당히 느낌이 달랐고 어쩌면 그 때 내가 제대로 책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기억과는 달리 100% 훌륭한 엄청난 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시 실체에 좀 더 가까이 가면 환상은 깨지게 되어 있는가?
그렇지만 200쪽의 분량에 충분히 훌륭한 내용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재밌게 읽었고 생각할 꺼리도 참 많다
뒤의 역자 해설을 보면 확실히 피가 뜨거운 한국 사람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관용은 조화를 위한 방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안 하면 죄다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자발적이 아니라 하는 수 없이 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른바 단일 민족 국가에서 살아서인지 공동체의 관용 보다는 개인의 관용에 더 관심이 많았다
책의 주제는 독특한 사상과 전통, 습관을 가진 공동체를 국가가 어디까지 인내해 줄 수 있는가이다
가까운 일본의 재일교포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본인이 속한 사회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러니까 재일교포들이 왜 그렇게도 처절하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집하는지 솔직히 100% 공감할 수는 없다
내가 그들에게 연민의 정, 혹은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민족의 주체성을 지킨다는 명분 때문이 아니라, 차이를 가진 모든 집단은 남을 해치지 않는 이상 사회에서 용납해 줘야 한다는, 이른바 다양함의 원리, 혹은 다문화주의에 입각해서다
하나로 통일된 종교, 가치관, 집단주의, 이런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내 성격의 특성 때문이지, 오히려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바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완벽한 개인의 자립도 어느 정도는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느꼈다
인간이 모이면 집단을 만드는 이유는, 혼자서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기본적인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 취향, 내 가치관, 내 정체성 등이 과연 나 혼자 아무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채 얻어질 수 있을까?
가장 가깝게는 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을 것이고, 조금 멀게는 내가 태어난 지역, 내 국가 등이 나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단위가 될 것이다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인지도 모른다
집단은 (종교집단이나 민족공동체 등을 포함해서) 구성원을 억압하지만 대신 강력한 소속감을 주고 정체성의 단단한 기반을 제공한다
저자의 우려대로 완벽한 개인으로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 서 있는 사람은, 인종주의나 전체주의 선동가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성이 다분하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건전한 집단에 속해 (가정을 포함해) 사회화를 배우고 바람직한 의사표현 방식을 습득하는 게 사회 안정을 위해서 훨씬 더 이익일 것이다
스페인의 바스크족이라던가, 미국 인디언, 혹은 흑인 집단, 프랑스의 이슬람교인 등등 공동체의 관용을 요구하는 이질적인 집합체는 많다
우리나라라면 여호와의 증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그룹 등이 있을까?
문제는 공동체의 관용이 개인의 관용에 앞설 수 있냐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이슬람교의 머릿수건 착용과 여성할례(혹은 음핵적출)이 있다
프랑스 학교에서는 한 때 여학생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이유로 머릿수건 착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개방적인 교육 정책이 도입된 후 지금은 머릿수건 착용이 허용됐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정작 그 수건을 써야 하는 이슬람 여학생들은 그 정책으로 피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여성 억압의 대표적인 상징인 머릿수건 착용을 원하지 않지만, 프랑스 정부가 착용을 허용한 뒤부터 집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다닌다고 한다
집단의 관용이 우선인가, 개인의 관용이 먼저인가?
집단은 문화를 재생산할 권리가 있다
즉 자신의 아이들에게 문화를 전수하고 강요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문화를 2세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물론 나는 개인의 권리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아무 결정권도 없는 유아 때 시행되는 끔찍한 음핵적출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부모와 자식은 독립된 인격체라고 믿기 때문에 대안학교에 보낸다거나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집에서 교육시킨다거나, 더 나아가 진화론 대신 창조론을 가르친다거나 하는 일에 매우 부정적이다
선택은 자녀의 몫이기 때문에 최소한 양쪽 모두로부터 교육받을 기회를 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신앙을 강요하는 것도 회의적이다
재세례파라는 교파도 있지만, 진정한 믿음은 충분히 회의하고 충분히 고민하고 충분한 지식을 얻은 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저자에 따르면 관용의 형태는 다섯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싸우다 지쳐서 마지못해 용인해 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종교전쟁 후 갖게 된 신앙의 자유가 있다
두번째는 그러든가 말든가 니네 알아서 살아라, 하고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세번째는 도덕적 스토아주의에서 나온 입장으로, 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타인은 그 권리를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그것을 인정해 준다는 입장이다
네 번째는 타인에 대한 열린 태도로, 차이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고 관심을 갖으며 심지어 배우려고까지 한다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혹시 대한민국이 미국인의 삶의 방식을 존경하면서 따르는 것 정도나 될까? 이것은 아마도 권력차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율적인 선택이 인간 번영의 필수조건이므로 차이는 반드시 존재하야 한다는 다문화주의자 정도가 있을 것이다
내 입장은, 세 번째 도덕적 스토아주의 정도가 될 것 같다
나 역시 매우 편협한 사람으로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럽지 못하다
그렇지만 내가 내 맘대로 원하는 방식으로 살 권리가 있는 만큼 남도 그 권리를 행사할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저자는 민족-국가에서는 민족이 가장 큰 문화집단이 되기 때문에 다른 소수의 모든 집단을 억압하고 오히려 개인에게 관용의 폭을 넓힌다고 했는데, 대한민국에 과연 맞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종교가 아예 헌법인 끔찍한 중동 국가들도 있지만, 혹은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 수십년이 통치되는 왕국 같은 전체주의 사회도 있지만 하여튼 한국도 개인에게 너그러운 곳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인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는, 오히려 민족국가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강화된 느낌이 든다
이것은 저자가 언급한 집단에 대한 관용과는 별개로 다루어야 할 문화적 특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지적대로 만약 개인이 집단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면 (정체성 유지를 위해) 집단과 계급의 결속을 깰 수 있도록 국가가 도움을 주는 실제적인 방법이 꼭 필요할 것 같다
이를테면 책에 나온 바대로, 인디언들 사이에 공무원 계급을 만들어 주는 식으로 말이다
지역할당이나 여성쿼터제 같은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개인에게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혜택을 주는 식이다
역차별 논란도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실보다 득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집단과 계급의 고착이야 말로 사회를 수직적으로 가르는 가장 큰 위험성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말하면 좀 우습지만 전라도 사람은 절대 고위직에 못 오른다, 이런 식의 인식을 깨려면 전라도 출신에게 일정 부분 고위직을 분배하는 식으로 말이다
미국처럼 다인종 국가에서는, 대학 입시에서 흑인이나 소수 민족을 몇 % 까지 뽑는 식의 쿼터제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관용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차원의 다양성 인정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 책은 다양한 집단의 공존을 테마로 잡았다
그러면서도 개인주의 보다는 수많은 건전한 집단에 소속되어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집단을 통한 개인의 목소리 내기를 추구하는 것 같아 신선했다
결국 완벽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이른바 개인주의의 한계 혹은 아나키즘의 한계를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 더불어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집단의 존재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고 (이른바 교회, 민족공동체, 인종집단 등) 민족주의나 종교적 근본주의도 어쩌면 인류 역사가 끝까지 안고 갈 본질적인 것, 곧 인간의 속성임을 깨닫는 기분이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하여튼 나는 모든 종류의 관용을 지지하고, 소수 집단 특히 폐쇄적인 집단 역시 구성원들에게 그 집단을 탈퇴하거나 교리를 어기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관용해야 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원칙이 타인에게 이해되지 못할 수 있음까지도 관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