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 맞벌이 부부의 가사분담 이야기
알리 러셀 혹실드 지음, 백영미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책이었다
가벼운 에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분석적이고 학술적인 책이다
10여명의 가족을 심층 분석한 저자의 세심한 노력이 돋보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의 배경이 1980년대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21세기와 이렇게도 유사한지!!
기왕이면 과거보다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롤 모델을 보여줬으면 더 좋겠다
미국의 가족 상황이 꼭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지만 여자들 입장에서 보면 가사분담이나 육아분담 측면에서 아무래도 서구 사회를 더 동경할 수 밖에 없다
21세기 미국 가정의 현실이 궁금하다
언젠가 읽었던 책, "현대인의 성생활" 도 이 책과 비슷한 방식으로 성에 관한 의식을 연구했다
심층 인터뷰를 통해 보다 내밀한 부분까지도 파고 드는 방식으로 진행된 연구는, 대규모 집단 연구와는 또 다르게 놓치기 쉬운 점까지도 세세하게 보여준다
이 책 역시 통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방문하고 장기간 같이 있음으로써 쉽게 드러나지 않는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물론 지엽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이 과연 얼마나 평균적인 미국인을 대표할 수 있을지의 문제 말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바람직한 롤 모델을 필요로 한다
내가 본받고 따라갈 수 있는 그런 가족 모델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그나마 선진 사회는 나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위로로 삼고 있던 미국의 가정 현실도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걸 적나라하게 까발려준 이 책 때문에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결국 여자들은 완벽한 의미에서의 가사분담을 이룩할 수 없는 것일까?
더 답답한 것은 여성의 안식처는 가정, 남성은 일터라는 식의 성별 이분법이 어느 사회에서나 보인다는 점이다
저자는 바로 이 관습적인 개념을 분명하게 꼬집는다
겉으로는 집안일을 돕고 아이를 같이 키우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가까이서 실체를 들여다 보면 생색내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발견한다
하긴 당장 주위를 둘려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과연 남자들 중에서 집안일을 돕는 게 아니라, 책임지고 한다는 책임감을 갖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멀쩡하게 아내가 있는데도 아이들 아침을 굶기고 학교 보낼까 봐 걱정하는 아빠의 비율은 대한민국에서 몇 %나 될까?
기껏해야 늦잠 자는 아내를 비난하는 선에서 끝날 것이다

확실히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력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한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가사일을 하는 전업주부의 가치는 농경사회 보다 더욱 더 하락할 수 밖에 없다
이혼율의 증가로 결혼이 더 이상 평생 직장이 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이 책 속의 여자들처럼 대부분 직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전히 가사일을 단지 돕는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일 뿐 자발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나서지 않는다
그러니 여자들은 직장일에다가 집안일까지 겹쳐 개인 시간은 낼 수가 없고 부부 관계는 악화되고 만다
이혼했을 때를 대비해서 든 보험이 (여성취업) 오히려 이혼을 유발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별 욕심이 없는 내 경우에 비춰 보자면, 아이를 안 낳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많은 부부들은 대부분 육아 때문에 힘들어 한다
아이가 없다면 적어도 아내는 가사 도우미를 쓰는 선에서 남편과 적절하게 합의를 볼 것이고 부부관계 개선을 위해 힘쓸 여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 단지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아이는 놀이방이나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는 정도로 해결될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미친 교육 열풍에 휘말리는 대한민국의 경우는 더더욱 엄마 의존도가 심해서, 맞벌이 부부 아이는 서울대에 갈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아이는 부모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솔직히 까발리자면 인간이 종족을 번식시키겠다는 이타심이나 의무감으로 아이를 갖는 건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이기적인 유전자가 후손을 남기게끔 프로그램 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를 닮은 자식을 원한다
이기심이 아니라면 입양 문화가 왜 활발하게 퍼지지 않았겠는가?

문득 드는 생각이, 어쩌면 나는 아이 대신 책을 원하고 있지 않나 싶은 거다
여자들이 일을 줄여가면서까지 아이에 집착하는 걸 보면서, 나는 책에 대한 내 욕심과 집착을 떠올렸다
아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갖기 위해 직장일을 적게 하려고 하고 로딩을 줄이려고 애쓰는 모습은, 내가 책을 보기 위해 빨리 퇴근하고 회식은 빠지려고 하는 것과 유사하다
적어도 하루에 세 시간 정도는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게 내 소원이다
남자라면 이 소원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남자는 직장일이 끝나면 나머지는 모두 자유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라면, 더군다나 아이까지 있는 여자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여자는 직장일이 끝남과 동시에 집에 가서 가사일과 육아를 시작해야 한다
저녁을 차리고 아이를 돌보고 집을 치우는 식으로 말이다
워킹맘으로써 가사노동에서 벗어날 새가 없는 엄마를 보면서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나는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받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즉 다 타고난 대로 산다는 쪽) 이 책의 해석을 빌리자면 나는 언제나 바쁜 엄마를 보면서, 난 저렇게 안 살겠다는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학교 선생님인 엄마는 퇴근 후 가사일에 치여서 자기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자식은 셋이나 되고 교육열도 높아서 애들을 내버려두지 못했다
특별히 슈퍼우먼이지도 않는 엄마는 깔끔하지 못한 집에 대해 언제나 부끄러워 했다
자의식이 강한 나로서는, 엄마처럼 내 시간을 하나도 못 갖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은 바람직한 편이라고 평가하겠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가사 노동에 치여 책 읽을 시간을 한 시간도 못 갖는다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절대로!!
내가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고 특히 아이에 대해 아예 갖기 않겠다고까지 생각한 것은, 가사부담과 양육이 완전히 여자에게만 책임지워지는 한국 사회 시스템 때문이다
나는 결혼 후에도 지금처럼 책을 읽고 싶고 내 시간을 갖고 싶다
책을 못 읽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다
결국 나는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 나에게 안 맞는 건 아닐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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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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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간만에 편하게 읽은 책이다
당직 선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도서관에 가서 꾸벅꾸벅 졸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를 격려해 가면서 읽은 책이다
내용이 평이해서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그 전 날, "서양전쟁고대사 박물관" 이라는 방대한 책을 정말 힘겹게 읽다 보니 상대적으로 오늘 책은 술술 넘어갔다

박상익이라는 사람, 생각보다 아주 전문적이거나 아주 권위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교수라는 직함 때문에 그런지 꽤나 학자다울 것이라는 이미지를 받았는데, 오히려 책을 읽으면서 번역가의 냄새가 더 강하게 풍겼다
책을 읽을 때마다 꼭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저자의 글솜씨, 혹은 문체에 대한 평가인데 쉽게 읽힌다는 점에서는 후하게 점수를 주고 싶지만, 아래 리뷰에도 나온 바대로 너무 흥분만 하고 말았다는 아쉬움도 있다
깊이 면에서 보면 가벼운 에세이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가 번역한 책 두 권, "소크라테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와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를 재밌게 읽은 덕에, 이 사람에 대한 이미지도 덩달아 좋았었다
특히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는 앞의 책에 비해 분량이 2배나 되는데 저자가 각주를 너무 성실하게 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히 지루한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하여튼 번역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높히 사고 싶다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내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원서나 논문을 혼자 읽는 것은 그런대로 하겠는데, 남에게 번역해서 주려면 머리에서 쥐가 날 만큼 힘들다
매끄러운 문장이 안 만들어지고, 왠지 원글의 의도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중언부언 하게 된다
전혜린도 독일어 번역의 고달픔을 수필집에서 토로하지 않았던가!
문학책의 번역이라면 특히나 번역가 자신의 문장력이 많이 요구된다
알랭 드 보통의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를 원서와 번역본을 비교해 가면서 읽은 적이 있다
비교적 직역을 하면서도 우리말의 묘미를 살려 매끄러운 문장으로 바꾸어 놓은 저자의 번역 실력에 탄복했다
그러고 보면 좋은 번역가는 좋은 작가이기도 한 것 같다

책벌레이기도 한 저자의 수필집이다 보니, 비단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여기서 소개된 "지적 생활의 방법" 은 나 역시 감탄하면서 읽은 책이라 더욱 반가웠다
개인 도서관을 만들라는 저자의 충고가 얼마나 가슴을 뛰게 하던지!!
단순히 책만 많아서는 안 되고, 책을 고르는 안목과 함께 공간 확보라는 중요한 경제적 문제가 수반되기 때문에 보통 일이 아니다
"지적 생활의 방법" 저자인 와타나베 쇼이치는 아예 집 한 채를 더 사서 그 곳을 도서관 겸 집필실로 꾸몄다
아파트 위 아래 층을 동시에 산 것이다
정말 최고의 방법이지 않은가?
물론 여기에는 엄청난 경제적 희생과 (다른 물질적인 부분을 포기해야 하니까) 감당할 능력이 필요하므로 함부로 따라할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영어 공용화론에 대한 저자의 분개는, 나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고종석이 이야기한 명제,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 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복거일처럼 도발적으로 영어 공용화론을 부르짖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그 대의에는 충분히 공감하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내가 한글이나 한국어를 사랑하지 않는가?
"슬픈 외국어" 에서 하루키가 토로했던 바대로 모국어는 곧 나의 속살, 나를 표현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진정한 이중 국어자는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영어를 일상적으로 쓰게 된다면, 즉 생활어가 된다면 저자의 걱정과는 달리 곧 영어로 말하는 것이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이민가면 아주 상노인이 아닌 이상 그럭저럭 영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생활 속에서 쓰지 않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이를테면 공부할 때처럼, 그 순간에만 쓰기 때문에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내 직업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영어 사용이 어렵지 않다
왜냐면 일상적으로 매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언어의 장벽을 없앨 수만 있다면 인간이 사고하고 경험할 수 있는 폭은 무한정 넓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미국 시민권에 대한 분개도 그렇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개인이 자기가 태어난 곳과는 상관없이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에서 살고 싶다는데 왜 그게 맞아 죽을 것 같은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전쟁 나면 나라 안 지키고 다 도망갈 놈들이라고 하는데, 전쟁 터져서 안 도망갈 사람이 어딨나?
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전쟁터를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한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게 아름다운 나라, 살기 좋은 나라로 가꾸는데 힘을 쓸 일이지, 왜 비난하는데만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
마치 군대 자체의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개선점을 찾는 게 아니라, 여자도 군대 가라, 혹은 연예인도 군대 보내라 이런 식으로 대중적인 선동에만 앞장서는 것처럼 말이다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롭게 느꼈다는 점에서도 소득이 크다
저자의 울분처럼 인류 지성사에 큰 획을 그은 사상가들의 선집이 제대로 번역된 게 없다는 사실이 참 슬프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일본의 번역 문화는 놀랍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면 알수록 감탄할 때가 많은데, 번역 역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중요한 힘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저자의 주장처럼 번역으로 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한다면 인문학의 폭이 보다 넓어지지 않을까?
언어의 장벽이 없어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불가능한 일이고, 결국은 번역 활동이 보다 활발해져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지성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하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다
영어나 기타 외국어에 약한 사람들로서는 번역이 유일한 해방구라는 얘기가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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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에 대하여
마이클 왈쩌 지음, 송재우 옮김 / 미토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은 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해남에 있을 때 도서관에 신청해 읽었던 것 같다
벌써 한 2년은 지난 듯...
직장에서 시간을 쪼개가면서 잠깐 잠깐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무척이나 감동하면서 메모하면서 열심히 읽던 생각도 난다
몰입했던 책을 서울에 온 후 다시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집어든 것은, 나로서는 좀 특이한 경험이었다
어떤 책이든 재독하지 않는 편이라 이번에 다시 읽은 건 정말 우연이었다
어쩌면 지난 번에 읽은 내용을 완전히 잊어 버렸기 때문에 더 몰입하면서 재밌게 읽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 때와는 상당히 느낌이 달랐고 어쩌면 그 때 내가 제대로 책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기억과는 달리 100% 훌륭한 엄청난 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시 실체에 좀 더 가까이 가면 환상은 깨지게 되어 있는가?
그렇지만 200쪽의 분량에 충분히 훌륭한 내용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재밌게 읽었고 생각할 꺼리도 참 많다
뒤의 역자 해설을 보면 확실히 피가 뜨거운 한국 사람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관용은 조화를 위한 방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안 하면 죄다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자발적이 아니라 하는 수 없이 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른바 단일 민족 국가에서 살아서인지 공동체의 관용 보다는 개인의 관용에 더 관심이 많았다
책의 주제는 독특한 사상과 전통, 습관을 가진 공동체를 국가가 어디까지 인내해 줄 수 있는가이다
가까운 일본의 재일교포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본인이 속한 사회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러니까 재일교포들이 왜 그렇게도 처절하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집하는지 솔직히 100% 공감할 수는 없다
내가 그들에게 연민의 정, 혹은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민족의 주체성을 지킨다는 명분 때문이 아니라, 차이를 가진 모든 집단은 남을 해치지 않는 이상 사회에서 용납해 줘야 한다는, 이른바 다양함의 원리, 혹은 다문화주의에 입각해서다
하나로 통일된 종교, 가치관, 집단주의, 이런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내 성격의 특성 때문이지, 오히려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바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완벽한 개인의 자립도 어느 정도는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느꼈다
인간이 모이면 집단을 만드는 이유는, 혼자서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기본적인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 취향, 내 가치관, 내 정체성 등이 과연 나 혼자 아무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채 얻어질 수 있을까?
가장 가깝게는 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을 것이고, 조금 멀게는 내가 태어난 지역, 내 국가 등이 나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단위가 될 것이다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인지도 모른다
집단은 (종교집단이나 민족공동체 등을 포함해서) 구성원을 억압하지만 대신 강력한 소속감을 주고 정체성의 단단한 기반을 제공한다
저자의 우려대로 완벽한 개인으로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 서 있는 사람은, 인종주의나 전체주의 선동가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성이 다분하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건전한 집단에 속해 (가정을 포함해) 사회화를 배우고 바람직한 의사표현 방식을 습득하는 게 사회 안정을 위해서 훨씬 더 이익일 것이다

스페인의 바스크족이라던가, 미국 인디언, 혹은 흑인 집단, 프랑스의 이슬람교인 등등 공동체의 관용을 요구하는 이질적인 집합체는 많다
우리나라라면 여호와의 증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그룹 등이 있을까?
문제는 공동체의 관용이 개인의 관용에 앞설 수 있냐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이슬람교의 머릿수건 착용과 여성할례(혹은 음핵적출)이 있다
프랑스 학교에서는 한 때 여학생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이유로 머릿수건 착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개방적인 교육 정책이 도입된 후 지금은 머릿수건 착용이 허용됐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정작 그 수건을 써야 하는 이슬람 여학생들은 그 정책으로 피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여성 억압의 대표적인 상징인 머릿수건 착용을 원하지 않지만, 프랑스 정부가 착용을 허용한 뒤부터 집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다닌다고 한다
집단의 관용이 우선인가, 개인의 관용이 먼저인가?
집단은 문화를 재생산할 권리가 있다
즉 자신의 아이들에게 문화를 전수하고 강요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문화를 2세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물론 나는 개인의 권리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아무 결정권도 없는 유아 때 시행되는 끔찍한 음핵적출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부모와 자식은 독립된 인격체라고 믿기 때문에 대안학교에 보낸다거나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집에서 교육시킨다거나, 더 나아가 진화론 대신 창조론을 가르친다거나 하는 일에 매우 부정적이다
선택은 자녀의 몫이기 때문에 최소한 양쪽 모두로부터 교육받을 기회를 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신앙을 강요하는 것도 회의적이다
재세례파라는 교파도 있지만, 진정한 믿음은 충분히 회의하고 충분히 고민하고 충분한 지식을 얻은 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저자에 따르면 관용의 형태는 다섯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싸우다 지쳐서 마지못해 용인해 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종교전쟁 후 갖게 된 신앙의 자유가 있다
두번째는 그러든가 말든가 니네 알아서 살아라, 하고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세번째는 도덕적 스토아주의에서 나온 입장으로, 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타인은 그 권리를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그것을 인정해 준다는 입장이다
네 번째는 타인에 대한 열린 태도로, 차이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고 관심을 갖으며 심지어 배우려고까지 한다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혹시 대한민국이 미국인의 삶의 방식을 존경하면서 따르는 것 정도나 될까? 이것은 아마도 권력차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율적인 선택이 인간 번영의 필수조건이므로 차이는 반드시 존재하야 한다는 다문화주의자 정도가 있을 것이다
내 입장은, 세 번째 도덕적 스토아주의 정도가 될 것 같다
나 역시 매우 편협한 사람으로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럽지 못하다
그렇지만 내가 내 맘대로 원하는 방식으로 살 권리가 있는 만큼 남도 그 권리를 행사할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저자는 민족-국가에서는 민족이 가장 큰 문화집단이 되기 때문에 다른 소수의 모든 집단을 억압하고 오히려 개인에게 관용의 폭을 넓힌다고 했는데, 대한민국에 과연 맞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종교가 아예 헌법인 끔찍한 중동 국가들도 있지만, 혹은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 수십년이 통치되는 왕국 같은 전체주의 사회도 있지만 하여튼 한국도 개인에게 너그러운 곳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인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는, 오히려 민족국가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강화된 느낌이 든다
이것은 저자가 언급한 집단에 대한 관용과는 별개로 다루어야 할 문화적 특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지적대로 만약 개인이 집단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면 (정체성 유지를 위해) 집단과 계급의 결속을 깰 수 있도록 국가가 도움을 주는 실제적인 방법이 꼭 필요할 것 같다
이를테면 책에 나온 바대로, 인디언들 사이에 공무원 계급을 만들어 주는 식으로 말이다
지역할당이나 여성쿼터제 같은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개인에게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혜택을 주는 식이다
역차별 논란도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실보다 득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집단과 계급의 고착이야 말로 사회를 수직적으로 가르는 가장 큰 위험성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말하면 좀 우습지만 전라도 사람은 절대 고위직에 못 오른다, 이런 식의 인식을 깨려면 전라도 출신에게 일정 부분 고위직을 분배하는 식으로 말이다
미국처럼 다인종 국가에서는, 대학 입시에서 흑인이나 소수 민족을 몇 % 까지 뽑는 식의 쿼터제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관용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차원의 다양성 인정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 책은 다양한 집단의 공존을 테마로 잡았다
그러면서도 개인주의 보다는 수많은 건전한 집단에 소속되어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집단을 통한 개인의 목소리 내기를 추구하는 것 같아 신선했다
결국 완벽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이른바 개인주의의 한계 혹은 아나키즘의 한계를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 더불어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집단의 존재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고 (이른바 교회, 민족공동체, 인종집단 등) 민족주의나 종교적 근본주의도 어쩌면 인류 역사가 끝까지 안고 갈 본질적인 것, 곧 인간의 속성임을 깨닫는 기분이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하여튼 나는 모든 종류의 관용을 지지하고, 소수 집단 특히 폐쇄적인 집단 역시 구성원들에게 그 집단을 탈퇴하거나 교리를 어기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관용해야 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원칙이 타인에게 이해되지 못할 수 있음까지도 관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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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할당제, 관용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다.
    from 木筆 2007-06-28 16:11 
       "관용은 조화가 아니라, 생명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다. " 1. 연줄인가? 연결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이엠에프때 사회자본-연...
 
 
마늘빵 2007-06-28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좋은 책 읽으셨군요. 저도 찜해놓은 책입니다. 마이클 왈쩌 한번 다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롤스에 관심 가지면서 왈쩌를 알게 되었는데 왈쩌도 그렇고 관용도 그렇고 매우 심하게 끌립니다. 일단 롤스를 먼저 읽으려고요.

marine 2007-06-2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안 그래도 님 생각이 났어요 왠지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여울마당님, 닉네임을 바꿔서 못 알아 봤어요^^

여울 2007-06-29 09:34   좋아요 0 | URL
ㅎㅎ. 목련을 좋아해, 목련을 뜻하는 목필木筆로 바꿨어요. 맘에 들지 않더라도 잘 봐주세여~

marine 2007-06-2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있어요 전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답니다 한자어에는 이런 운치가 있는 것 같아요^^
 
과학의 최전선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존 브록만 엮음, 안인희 옮김 / 소소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당직 선 다음날 본 책이라 너무 졸려 제대로 못 읽었다
그렇지만 정말 감동적이었고 시간을 내서 다시 읽고 싶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말 소중한 이야기들이었는데 너무 피곤해 꾸벅꾸벅 졸다가, 명문장을 만나 가슴깊이 감동하고 다시 졸고, 결국은 끝까지 못 읽고 책을 덮었다
어쩌면 이 책은 편파적일 수도 있다
특히 편집자 존 브룩만의 서문은 논쟁꺼리가 많다
그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아마도 자신감의 발로겠지만) 말미에 반대 의견도 같이 실어 주었다
역시 인문학자들은 지나친 과학 만능주의를 경계하는 반론을 폈다
브룩만은 평범한 이들의 매우 평이한 수준의 불안감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다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을 너무 경시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까 평범한 우리들은 브룩만의 생각보다 훨씬 더 약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인 것이다

어쨌든 나는 과학이 우주와 생명체가 움직이는 원리를 설명해 주는 "진리" 라고 생각한다
논쟁이 필요한 당위적인 의미의 진리가 아니라, 사실을 밝히는 실제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류가 없다는 얘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과학자가 문제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을 정치 사회에 잘못 해석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정치가나 사회학자들이 문제다
과학은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는 조국이 있다는 황우석 식의 말 만들기는 진정한 과학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방식의 말하기야 말로 과학자가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매우 위험한 시도가 아닌가 싶다

인간이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남자가 보다 지배적인 성향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본능이나 유전자가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보다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운전할 수 있겠는가?
진실을 받아들이려면 용감해야 한다

물론 갈등은 존재한다
제일 큰 것은 역시 종교의 문제다
우리가 흔히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뇌의 화학 작용에 의한, 일종의 연산에 불과하다면 대체 사후 세계나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도킨스처럼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는 모양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인지과학의 발달과 기독교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솔직히 불안하기는 하다
과연 신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 낸 집단적인 발명품인가?
이런 식으로 빠지다 보면 과학은 그저 세상을 보는 여러가지 관점 중 하나라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3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했던 신에 대한 개념을, 그 존재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현대의 우리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건 아닐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했던 세상은 일주일 만에 세상이 창조됐고 완전한 조상, 곧 아담과 이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신이 만든 우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21세기의 인간이 꼭 수 천 년 전의 조상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런 것들은 하나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진실은 변하지 않고 그것을 무기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남들과 논쟁할 필요도 없고 다만 내가 얼마나 그 진실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종교 문제 다음으로 힘들었던 것은 여자가 남자에 비해 사회성이 떨어지고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가장 혐오해 마지 않던, 남녀차별주의 이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 보면 수천년 동안 사회가 남자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과거에 그랬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도 만들어 냈고 여자들 역시 핸디캡을 극복하고 사회로 진출하고 있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그저 한 종의 특징일 따름이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을 너무나 많이 공유한 똑같은 존재들일 따름이다
인종이나 문화적인 차이 역시 무시할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공통점이 차이점을 압도하는, 인류라는 큰 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오히려 이런 본능이나 유전적 성과를 토대로 인종주의나 남성 우월주의로 나가려는 일반인들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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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사회의 여성
김대성 외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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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이다
읽어야 할 책 목록이 빼곡히 쓰여져 있는데 눈에 확 띄는 제목 때문에 우선적으로 대출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라는 발행처가 신뢰를 주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썩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이슬람 세계의 기본적인 개념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기분이 들어 나름대로 소득이 있었다
한 문화권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은, 편견을 치유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얼마 전에 읽은 "러시아정교"가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을 통해 나는 이슬람 세계에 대한 내 편견을 어느 정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세계관을 확대시키고 보다 관용적인 자세를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식의 축적 보다도 훨씬 더 가치있는, 책의 효용성일 것이다
책 수준은 지난 번에 읽은 "러시아 정교" 가 훨씬 낫다

이슬람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명예살인으로 대표된다
가끔 해외토픽에 나오는 끔찍한 기사를 많이 접해서인지 피상적으로 분노하고 굉장한 거부감을 가졌었다
이 대명천지에 아직도 저런 어처구니 없는 살인이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에 의해 버젓이 자행되다니, 더구나 국가가 그것을 인정하다니,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부당한 억압과 종교적인 관습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슬람 사회가 서구로부터 겪는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모른 척 하게 된다
아프리카 난민이나 남미 지역의 가난, 환경 문제 같은 것들은, 제국주의적 정책에 반대하고 분노하게 되지만 솔직히 말해 이슬람, 특히 중동아시아 국가들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는 편이었다
아무리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해도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고, 또 여성을 살인하게끔 만드는 사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는 이슬람 사회의 특성을 이해해게 됐다
역시 항상 느끼는 바지만, 결국 인간은 넓게 보면 거의가 비슷비슷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미국이나 유럽 사회를 동경하는 까닭은, 그들이 우월해서라기 보다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표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먼저 해결한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약간의 위안이 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사회나 그만그만한 문제점들이 비슷하게 분포하고, 결국 유토피아 따위는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슬람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굉장히 낙후됐고 비민주적인 부분이 많으나, 그렇게 비칠 수 밖에 없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꾸란의 초월적 규범과 맥락적 규범의 분리는 새로운 해석이었다
꾸란이 쓰여진 7세기의 사회적 편견과 가치관을 완전히 배제하고 경직된 적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문자주의처럼 꾸란 역시 쓰여 있는 말 그대로 해석하고 현실에 적용하려는 원리주의자들이 종교를 완고하게 만든다
꾸란은 당시 아라비아 사회의 관습에 비해 매우 진보적인 경전이었다고 한다
남녀평등을 주장했고 심지어 노예제마저 부당하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적, 초월적 규범일 뿐이고, 실제로 7세기 사회에 만민평등을 현실화 시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7세기에 쓰여진 문장을 곧이곧대로 21세기 사회에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런 경직된 해석이야 말로 종교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가장 나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왜 여성은 항상 보호되어야 할 존재인가?
여성의 정조는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남성들에 의해 완벽하게 보호되어야 하고, 그것은 그녀들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로 대표된다
이런 종류의 주장을 접할 때마다 항상 답답한 것은, 왜 사회가 그것을 강압하느냐는 것이다
베일로 얼굴을 가릴지 여부를 개인이 선택하면 안 될까?
굳이 보호받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까지도 죽음으로 협박하면서까기 위협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 사회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가장 큰 잣대는 바로 개인의 선택을 얼만큼 존중해 주냐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정교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슬람 사회의 완고함과 보수성은, 개인의 자유 측면에서 보면 답답한 게 현실이다

꾸란 혹은 이슬람교 자체에 대한 오해나 편견은 많이 해소되었으나, 솔직히 말해 여전히 무슬림 사회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고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여전히 절대군주에 의해 지배되고 종교법이 곧 헌법인 사우디아라비아나, 여성을 사회로부터 보호의 대상으로 삼는 이란의 여러 규범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책에 나온 말처럼 이슬람 종교가들이 여성에 대한 우월권을 고수하기 위해 꾸란의 맥락적 적용 대신, 절대적 해석을 계속 고집한다면 여성 인권은 계속 낙후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그 사회에도 변혁은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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