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 서양고중세사 깊이읽기
윌리엄 레너드 랭어 엮음, 박상익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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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스캐너라는 걸 샀다
필요한 문장에 줄을 그으면 사진처럼 찍혀서 컴퓨터로 옮길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역시 성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렇게 편한 물건이 이렇게 안 팔리는 걸 보면, 제대로 기능을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끝도 없는 내 호기심이 충동구매를 하게끔 만들었다
영어와 한글이 같이 있으면 영어는 아예 읽지를 못하고 글씨가 깨져 버린다
배터리도 어찌나 빨리 닳아지는지 한 시간도 채 못쓰는 것 같다
내가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이런 물건을 산 이유는, 옮겨 적을 글들이 워낙 많이 때문이다
내 책이라 할지라도 줄을 그어 놓으면 그걸로 끝이다
다시 들여다 보기란 참 어렵다
그나마 한 곳에 옮겨 놓으면 몇 번은 들여다 보게 된다
그 노동을 안 하고 싶어 출혈을 했건만 만족도는 매우 떨어진다

하여튼, 나는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렸다
그만큼 심장에 콕콕 꽂히는 문장들이 많았다
역시 괜히 유명한 게 아니었다
보통 여러 사람들이 집필을 하면 통일성이 깨지고 수준도 제각각이라 산만한데 이 책은 정말 유기적으로 잘 엮여 있다
오히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기가 전공한 인물들을 썼기 때문에 더 신뢰가 간다
어쩜 이렇게 글솜씨들이 좋은지, 감탄하면서 읽었다

1.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억울하지만은 않다는 점은 새롭게 안 사실이다
보통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민주정의 폐해, 우민 정치의 표본으로 꼽힌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당시 아테네는 놀라울 정도로 사상의 자유가 인정되는 훌륭한 민주정이었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천재에 대한 대중의 시기심이 아니라, 체제를 뒤흔드는 위험성 있는 발언 때문이었다고 진단한다
플라톤이 철인에 의한 독재정을 주장한 걸 보면, 확실히 스승인 소크라테스도 위험성이 다분했을 것이다

2. 일리아드와 오딧세이가 음유 시인 특유의 문법으로 구성됐다는 점을 간과하면 호메로스 혼자 쓴 게 아니라는 오해를 받게 된다
심지어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까지 있을 정도로 평가절하 되기도 하지만, 저자는 이 놀라운 서사시가 읽기를 위해서가 아닌, 낭송용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크레타 멸망 후 왜 선문자 B는 전승되지 못했을까?
저자의 말로는, 크레타 멸망 후 새롭게 일어선 그리스 본토에서는 아예 문자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나중에 페니키아 상인들을 통해 알파벳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문자 발명이란 보통 일이 아닌데 왜 이처럼 훌륭한 발명품이 전승되지 못했는지 의아하다
완전히 폭삭 망해서 문화 전승 자체가 불가능했던지 아니면 아예 교류 자체가 없었던 걸까?

3. 노예 상인에 관한 서술은 챕터 중 가히 최고라 할 만 하다
고대 시대에 노예 무역이 갖는 의의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한다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여가나 문화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는 바다
또 노예가 될만한 열등한 민족이 있는 게 아니라, 가능만 하다면 그리스인은 그리스인을 노예로 삼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타인의 권리를 빼앗고 노동력을 갈취하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본성인 셈이다

4. 새롭게 인지하게 된 매력적인 인물들, 샤를마뉴 대제, 알렉산드로스 대왕, 정복왕 윌리엄
이 세 사람은 단지 이름만 들었을 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던 인물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모두가 개성있고 매력적인 존재로써 분명하게 인식됐다
윌리엄의 영국 정복을 수놓은 그 유명한 테피스트리를 보고 싶다

5. 중세는 야만족의 시대가 아니었다!!
이 명제는 이미 새로울 것도 없지만, 하여튼 게르만족이 위대한 로마 문명을 망가뜨린 후 암흑의 중세 천년이 시작됐다는 말은 틀린 얘기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는 유럽이 하나의 동질성을 획득하는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지배하는 동아시아와 유럽 대륙은 느낌이 다르다
수십 개의 나라가 유럽 연합으로 뭉치는 것은 가능해도, 단 세 나라, 중국, 일본, 한국이 동아시아 연합이 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 같다
게르만족의 이동을 통한 중세의 성립과 발전과정이 놀라운 필체로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외에도 아직 읽지 못한 챕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각 챕터마다 너무 재밌고 흥미로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다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같은 가벼운 역사서 보다는 역사 이해에 훨씬 더 많은 지식과 흥미를 줄 것임이 틀림없다
강추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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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7-05-10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고나니 이 책에 관심갑니다. 마린님께서 강추하신다니 완전 신뢰가는 책인데요? ^^

marine 2007-05-1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인사 드려요, 차우차우님^^
저자들의 글 쓰는 내공이 상당합니다 재밌게 읽으실 거예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 100 - 인류의 가장 위대한 보물
만프레드 라이어 외 지음, 신성림 옮김 / 서강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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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이 선명해서 마음에 든다
깔끔하고 선명한 그림들이 큼직큼직 하게 나열되어 있어 기분을 흐뭇하게 만든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림 판형을 워낙 크게 하다 보니, 설명에 나온 그림들을 전부 못 본다는 점
100개의 미술관을 전부 훑는다는 게 욕심이었을까?
기왕이면 저자가 언급하는 그림들이 모두 들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책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겠지만 말이다

내가 아는 미술관이라곤 프라도, 오르세, 루브르, 메트로폴리탄, 우피치 등이 전부였다
그 외에도 유명한 미술관이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또 각 미술관 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고 자랑할 만한 소장품이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됐다
미술관 기행만 해 봐도 몇 년은 즐겁게 여행 계획을 짤 수 있을 것 같다
소장품 외에 미술관 건물 자체에 대한 짤막한 리뷰도 같이 들어 있다
너무 짧아서 좀 부실하기는 하지만

중국이나 타이페이, 일본 미술관이 따로 설명되어 있는 걸 보고 아시아에서 그 나라들의 위치가 어떤지 새삼 느낀 기분이다
자금성과 타이뻬이 고궁박물관, 일본의 교토 국립미술관, 도쿄의 국립미술관 다음에 책장을 넘기면서 혹시나 우리나라 미술관은 없는지 가슴이 살짝 설렜는데 역시나 없었다
한국 독자들을 위해 번역자가 추가로 리움 미술관과 현대 미술관, 중앙 박물관을 끼워 넣긴 했지만 세계 100대 미술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그러고 보면 일본은 세계인에게 하나의 독립된 문화를 가진 나라로 확실하게 인지된 것 같다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는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기분
서양인이 서술해서 그런지 발트 3국의 미술관도 빼 놓지 않았다
라트비아라든지 크로아티아 등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독립된 국가로써 인지한 것 같다
어쩌면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한국도 그런 존재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책장 넘기는 재미가 있는 책이고 각 미술관에 대해 자세히 설명된 책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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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패닉 세계 -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
존 H. 엘리엇 엮음, 김원중 외 옮김 / 새물결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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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문에서 미국 내 소수 인종 비율이 바뀌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히스패닉이 흑인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히스패닉은 단순히 스페인 사람이라기 보다는 스페인어를 쓰는 라틴 아메리카인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앵글로 색슨 문화를 향유하는 백인들과는 또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헌팅턴이 쓴 "미국" 이라는 책에서도 히스패닉인의 유입 증가에 따른 미국의 분열을 우려했는데, 이제는 이중 언어 정책이 논의의 수위에 오를 모양이다
확실히 수적으로 승부하는데는 못당하는 것 같다

스페인 하면 생각나는 것, 카톨릭, 대가족, 플라멩고, 돈 키호테, 콜럼버스 기타 등등...
피상적이고 단편적이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그 보다도 훨씬 더 단조롭다
사실 남아메리카의 지도는 어디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해피 투게터"에서 양조위와 장국영이 가고 싶어했던 이과수 폭포가 있는 아르헨티나 정도가 구체적으로 다가올까?
그만큼 관심이 없는 지역이었다
"백년 안의 고독" 이 노벨상도 받고 알라딘에 심심찮게 리뷰가 올라올 만큼 인기가 좋았는데도 왠지 끌리지가 않았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 도 마찬가지
뭐랄까, 비현실적이고 과장적인 느낌이 많았다
익숙하지 않은 양식이랄까?
이 책에서는 이것이야 말로 라틴 문학의 특성이라고 설명한다
이른바 환상 문학이라는 것이다
합리적인 서구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할 수 밖에 없다는 문구를 읽고서야 라틴 문학이 소설을 풀어가는 방식이 서유럽이나 미국 쪽과는 매우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런 점 때문에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도 2세의 결합으로 시작된 레콩키스타야 말로 스페인의 역사를 결정지은 가장 큰 사건인 것 같다
무어인을 몰아내고 국토 재수복 과정을 통해 하나의 스페인으로 태어났음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스페인도 과거 우리의 삼국 시대처럼 독립된 소왕국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기독교라는 정신적 지주 아래로 단결할 수 밖에 없었던 속사정도 알게 됐다
모든 스페인인은 카톨릭 교도다라는 말이 성립되는 나라
무어인과 유대인을 몰아 내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투쟁한 나라
엘 그레코와 피카소, 벨라스케스, 그리고 위대한 고야의 나라
그러고 보면 스페인의 영향력도 엄청난 것 같다
당장 라틴 아메리카만 생각해도 어딘가!!
아메리카가 여전히 앵글로 색슨 중심인데 반해 라틴 아메리카는 단순한 스페인인이 아닌 메소티스라는 혼혈인의 나라라는 점이 특이하다
과연 라틴 아메리카인들은 스페인 문화권이라는 공동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인디오 문화가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이식된 문화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백년 안의 고독" 을 읽어 봐야 감을 좀 잡을 것 같다

미국의 히스패닉 문화에 대한 단락이 제일 흥미로웠다
여러 사람이 쓴 글이라 통일성이 부족하고 중구난방인 점은 상당히 불만스럽지만 꼭 뷔페 가서 이것저것 집어 먹은 기분이 든다
스페인 미술사도 재밌게 읽었다
엘 그레코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던 "아비뇽의 처녀들" 과 엘 그레코의 "묵시론적 환상" 이 비슷한 분위기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랬다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것인가?
16세기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엘 그레코의 그림에 관심이 많이 간다
역시 프라도 미술관을 가 봐야 할 것 같다

스페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독서의 장점은 바로 이런 것 같다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진부한 표현이 딱 들어 맞는다
관심 분야의 확대, 혹은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
막연하게 투우사와 플라멩고의 나라라고만 알고 있던 나라를 새롭게 인지하게 돼서 기쁘다
더더군다나 관심이 없었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서도 이제는 어느 정도 흥미가 생긴다
역시 독서는 에너지를 주는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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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과학자가 되었는가 - 천재 과학자 27명의 호기심 많은 어린 시절
존 브록만 엮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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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차마 리뷰 쓰기가 미안할 정도로 정말 대충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인데 너무 바빠 결국은 겉만 슬쩍 훑고 나서 반납하게 됐다
바쁜 일상을 탓할 수 밖에...

관심있는 사람들 편만 먼저 읽었다
역시 가장 흥미롭고 재밌게 읽은 과학자는 리처드 도킨스다
과학자라기 보다는 과학 저술가 내지는 평론가라 해야 할 것 같은데, 하여튼 이 아저씨의 문장력은 언제나 위트가 넘치고 직설적이고 단호해서 읽을 때마다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진화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심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처럼 진화가 곧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도킨스의 글이 시원한 청량음료처럼 느껴지리라

다중 지능론을 주장한 하워드 가드너의 글도 재밌게 읽었다
확실히 미국 사람들은 한국인처럼 겸손한 척 하지 않고 대놓고 자랑을 한다
겸손이 미덕인 사회가 아님을, 미국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많이 느낀다
자랑해도 될 만한 사람들이 자부심에 넘치는 글을 쓰는 건 대환영이다

과학자들은 확실히 다른 족속 같다
그 지긋지긋한 물리나 화학에서 어떻게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유명 과학자들을 많이 안다면 책 읽는 기쁨이 배가 될 것 같다


친구를 기다리면서 크리스피 크림에 몇 시간씩 죽치고 앉아 결국 이 책을 다 읽었다
항상 내가 생각했던 로망 중 하나가 조용한 커피숖 혹은 스타벅스처럼 죽치고 앉아 있어도 종업원 눈치 볼 필요 없는 곳에서 몇 시간씩 책을 읽는 거였는데 비로소 실천에 옮기게 됐다
옆 사람과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듣고 싶지 않은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듣는 괴로움도 있었지만, 독서 환경이 바뀌어서 신선함 점도 있고, 또 책 내용이 워낙 평이하고 재밌어 비교적 집중하면서 볼 수 있었다
칼 세이건의 전처였던 린 마굴리스 에세이를 보고 눈이 번쩍 띄였다
열 네 살에 대학에 입학한 뒤 열 여섯 살 때 다섯 살 연상의 세이건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전 남편이 워낙 유명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서스름 없이 전 남편과의 연애담을 기술하는 게 다소 놀랍다
세이건이 워낙 자신감이 넘치고 똑똑한 사람이다 보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지만 지적 자극도 많이 받았다는 문장을 읽으면서 이혼은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파트너는 부담스럽다

스티븐 핑커의 기억 조작론도 재밌었다
인문과학이 점점 자연과학에 예속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절감한다
결국 뇌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그 신비화를 벗겨 낼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정신이라고 지칭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저 신경 화학 작용에 불과하다는 게 밝혀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스티븐 핑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현재의 감정에 맞춰 재구성 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과학자를 만들어 낸 어린 시절 경험 같은 건, 사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경험의 차이를 전면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미국인이라면 거의 똑같은 경험을 겪게 될 것이고 결국 유의한 차이는 유전, 즉 타고난 성향이라는 얘기다
쌍둥이를 전혀 다른 환경에서 키워도 같이 자란 입양아들 보다 훨씬 비슷하게 성장한다는 식의 얘기는 오래 전부터 들어 왔다
그러고 보면 영재 교육이라는 것도 결국은 교육업자들 돈 벌어 주는 짓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의 공통된 특징이라면 끊임없는 호기심을 들 수 있겠다
일회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연속적인 호기심 말이다
나 역시 호기심이라면, 특히 지적 호기심은 누구 못지 않게 강한데 세계적인 과학자는 커녕, 오늘날 이 모양으로 한심하게 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연속적이지 못한 데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뭔가 그럴 듯한 업적이라는 걸 이루려면 쉽게 질려서는 안 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난 너무 금방 지치는 게 문제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라마찬드란이 한 말이다
흔히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에디슨의 말을 인용하면서 연구는 고행길이라고 참고 열심히 하라고 하지만 실제로 획기적인 발견은 순간적인 영감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왓슨과 크릭이 겨우 6개월 만에 DNA 나선 구조를 밝혀낸 것처럼 말이다
어느 수준에 도달하려면 지긋지긋한 훈련 과정을 밟아야 하긴 하지만, 라마찬드란이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인생은 짧고 쏟을 수 있는 노력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식하게 파고 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창의성을 가지고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하면 된다, 식의 구호는 정말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
이제 천재의 99% 노력과 1% 영감설은 너무 낡은 표현이 된 것 같다

하여튼 새삼 느낀 것이 아이들 교육에 다양한 경험과 도서관 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조기 유학은,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일견 부러운 면이 있다
일단 영어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 엄청난 정보를 받아들일 기본을 갖췄다는 얘기니까
한국어로 된 정보다 다 소화하지 못하긴 하지만, 어쨌든 영어를 구사한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의 양이 수십배 커진다는 뜻일 것이다
언젠가 로버트 레드포드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의 과거 이력까지 꽤 자세하게 나온 기사였는데 좋아하는 배우였기 때문에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구글에 그 사람 이름을 입력했다
그랬더니 방금 내가 읽은 기사의 원문이 그대로 뜨는 게 아닌가?
내가 읽은 기사는 분명히 한국 기자의 이름으로 쓰여졌는데 정작 원문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그 기자는 외국 싸이트에서 적당히 정보를 빌려와 손질해 기사를 쓴 것이다
그 때 느꼈던 그 배신감!!
결국 영어라는 장벽이 있기 때문에 그걸 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기자나 작가 같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그 정보를 간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직접 구글에서 검색해도 될 일을, 언어의 한계 때문에 걸러진 정보를 받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있어 구글에 검색을 해 보면 정말 똑같은 문장을 단지 번역만 해서 책에 실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출처도 밝히지 않고 말이다
인터넷이 무섭긴 무섭다
결국 정보의 공유화가 세상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고, 사람들 사이를 평등하게 만들고, 영어라는 언어가 barrier를 형성하는 느낌이 든다

책 읽다가 자꾸 엉뚱한 곳으로 빠지는데, 하여튼 재밌게 읽은 책이고, 유명 저술가들이라 문장력이나 위트가 넘치며 한 편의 에세이로서 완성도는 좀 떨어지지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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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김태용 감독, 문소리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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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좋은 영화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는 별로였다
어떤 영화는 역시, 사람들이 칭찬할 만 하다,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고, 또 어떤 영화는 작품 질에 비해 너무 뻥튀기 된 게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다
괴물이나 왕의 남자가 그랬다
이번 "가족의 탄생" 은 뭐랄까, 나는 주제의식이 선명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영화 보면서 내내 "대체 주장하는 바가 뭐야" 이렇게 중얼거렸으니까

문소리는 역시 연기를 잘 하고 (그렇지만 마지막에 나이든 역으로 나와 오버하는 건 좀 부자연스러웠다 너무 전형적이라고 해야 할까?) 엄태웅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저 엄정화 동생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깜짝 놀랬다
그런데 의외로 엄태웅 비중이 작아서 좀 의아했다
공효진도 참 자연스럽다
배우마다 자기에게 딱 맞는 캐릭터가 있는 것 같다
가운데 잠깐 나온 류승범은 과연 우정 출연이라는 게 실감날 정도로 아무 의미없이 있다가 사라지고...
일본어로 관광 가이드 하는 공효진 모습, 깜찍했다
역시 일본어 발음은 사근사근 하다
젊은 고두심을 본 것도 재밌었다
언젠가 고두심이 지금보다 좀 더 젊었을 때 토크쇼에 나온 적이 있다
혜은이 토크쇼에 게스트로 초대됐는데 (전인화랑 같이) 얼마나 화려하게 하고 나왔는지 깜짝 놀랬다
아무리 한국의 어머니상을 구현한다 해도 배우는 배우인 모양이다, 화려한 끼는 내제되어 있었구나, 싶었는데 이번에도 딱 그 모습을 본 기분이다

왜 영화 속의 미라는 김사장과 결혼하지 못했을까?
동생 형철 때문에?
형철은 그 뒤로 소식을 딱 끊은 것 같은데 어떤 사연으로 채영과 무신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였을까?
그 부분이 생략되어 좀 아쉽다
그렇지만 가족이 반드시 혈연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일종의 대안 가족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언젠가 저출산 해결책으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해야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미혼모와 아이의 가정도 인정하고, (그러러면 빨리 호주제 폐지되고) 동성애자들이 입양하는 것도 인정하고, 여러 형태의 가정을 정상적인 울타리 범주로 받아들여야 출산 감소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결혼한 성인남녀 (그것도 둘 다 초혼이어야 하고 나이도 엇비슷해야 하고 심지어 집안까지도!!) 가 낳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있는 집만 정상적인 가정으로 인정한다는 건 너무 좁은 폭이 아닌가 싶다
갑자기 김명민이 나온 "불량가족" 이 생각난다
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에서 본 이런 구절도 생각난다
공화당이 낙태 반대를 외치는 진정한 이유는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미혼모에게 아이 낳기를 강요함으로써 그들을 벌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낙태는 못하게 하고 미혼모는 사회적 지탄을 받아 정상적인 가정으로 인정하지 않는 벌을 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낙태 반대는 생명권 옹호라기 보다는 (그런 부분은 적고)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구호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생명권을 지키고 싶다면 혼전순결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피임법을 섹스 가능한 나이부터 철저하게 교육시키고, 더불어 미혼모들도 정상적인 가족의 울타리 안에 끼워 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가능하면 원하지 않는 아이는 안 낳고 (즉 낙태시킬 필요가 없이) 생기면 마음 편하게 낳는 쪽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경석(봉태규)이는 채영(정유미)이 너무 착해서 봉으로 보인다고 화를 낸다
확실히 채영은 좀 모자란 구석이 있다
영화 속에서는 예쁘게 그려지지만, 실제로 내 애인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끌려 다닌다면 정말 화날 것 같다
헤프다는 말에 화가 나서 헤어진 뒤, 다시 만나면서 채영이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헤픈 게 나쁜 거야?"
이 대사는 진짜 깬다
여기서 헤프다는 건 남자들에게 쉽게 마음을 허락하고 더 나아가 몸까지 주는 거 아니냐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데 말이다
하긴 반드시 여자만 성적으로 정숙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편견이니 뭐, 넓게 생각하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정을 퍼 주는 채영이 나는 좀 부담스러웠고 경석이 화를 내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힘들다고 채영에게 전화해 하소연 하면서 꾼 돈을 안 갚으려는 선배의 전화를 받은 채영은, 역시나 착한 성격답게 급한 거 아니니깍 걱정마세요, 라고 대꾸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경석이 전화를 뺏어 들고 이렇게 말한다
"형, 제발 징징대지 좀 마, 사람 다 힘들어, 그리고 채영이 돈 빨리 갚아!!"
이 대사가 어찌나 시원하던지~~
자기 힘들다고 징징대는 사람, 그러면서 남의 호의를 이익 챙기는 쪽으로 이용하려는 사람, 정말 싫다

무신(고두심)과 형철(엄태웅)의 결합은 참 깨는 스타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어머니 같은 나이의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가 있을까?
여선생님과 결혼한 남제자도 있긴 하지만...
이상하게 여자가 열 댓 살 어린 건 오히려 남자가 능력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왜 남자 나이 어린 건 한 두 살이라도 파격으로 보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늙은 마누라 데리고 살기 힘들다는 쪽으로 생각하고 불쌍하게 생각한다
왜 이런 편견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걸까?
확실히 남자들은 어린 여자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다
남자는 여자의 젊음과 미모를 원하고, 여자는 남자의 사회적 지위와 돈을 원한다는 속설이 생각난다

하여튼 영화 보면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관용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성숙한 사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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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kor 2007-05-0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명받은 데가 저랑 비슷하시네요 정유미를 발견한 것만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리멸렬한 마무리 때문에 디비디구입은 망설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