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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기대를 많이 했던 것에 비하면 실망이 크다
제목이 독특해서 독창적인 내용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서평집이다
독서 일기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겠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가 내면의 고백이 많은데 비해,이 책은 순수하게 서평집이다
그런데 왜 제목을 자극적으로 붙였을까?
독특하긴 하지만 독창적이지는 않다
그저 그런 서평집은 물론 아니다
깊이도 있고 분석력도 역시 탁월한 편이다
시사적인 내용이 많아서 그런지 전부 동의할 수는 없었다
1. 민노당에 대한 평가는 나로서는 아직 판단 보류하는 바이다
진보정당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과연 훌륭한 대안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2. 일본의 사소설에 대한 분석은 새로웠다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 에서 처음 접한 용어였는데 장정일의 해석을 통해 감이 좀 잡히는 기분이다
원래 소설이란 기본적으로 작가의 내면적 고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소설이 일본 특유의 현상인지는 여전히 좀 갸우뚱 하다
제국주의적 팽창을 할 때도 사회비판적 소설 보다는, 개인의 심리적 갈등에만 초점을 맞춘 소설을 써 낸 전통이 바로 사소설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여튼 정확한 개념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재밌는 건 사소설에 대립되는 한국의 민족주의적 소설 경향을 두고, 장정일이 이광수를 변호했다는 점이다
나 역시 이광수가 친일파로 돌아선 배경을, 민족 자강의 방법으로 여겼다는 점에 동의하는 바다
개인의 심경을 자전적으로 쓰는 일본 사소설에 비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열망이 컸던 한국 근대 소설가들은, 너무 나가다 보면 일본의 식민 통치를 근대화의 원동력으로 이용하자는 잘못된 논리를 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말 일본 소설의 대부분은 사소설일까?
국가와 사회에 대한 소설가의 교훈적 메세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개인의 심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춘 일본 사소설에 매우 끌리는 바다
그렇다고 해서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가벼운 소설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왠 말장난이 이리도 심한가 싶은 게 내 소감이었다
3. 다치바나 다카시에 대한 인신공격은 좀 심했다 싶다
다치바나가 문학에 비해 과학적 교양을 강조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 사람이 문학의 효용성, 혹은 가치를 완전히 무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과학 교양에 대한 환기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좀 거친 주장을 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현대인들의 과학적 상식 수준은, 과학 문명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실에 비하면 너무나 협소하지 않는가?
기계의 작동법이나 원리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과학적인 사고 방식이나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기초 과학에 대한 개념 정도는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도쿄대생만 바보가 된 게 아니라,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과학에 너무 무지한 게 현실이다
문학에 비해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치바나에게, 그의 동창생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대한 질투심 아니냐는 말은, 인신공격이라고 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아무래도 장정일은 문학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다치바나의 다소 과격한 주장에 거슬렸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다치바나의 주장을 완전히 배격한 것은 아니다
4. 민족주의의 배격은 나와 생각이 거의 비슷했다
나 역시 민족주의를 위험하게 생각하는 쪽이기 때문에 장정일의 비판은 일견 시원한 면이 있다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이 결국은 민족주의와 같은 맥락이라는 부분을 읽으니, 이스라엘의 팽창주의 정책이 왜 위험한지 새삼 느껴지는 바다
유럽에서는 유대인이 배척을 받는다고 하는데, 한국은 미국의 영향인지, 아니면 기독교의 희한한 논리 때문인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이 성경이 예언한 바라는) 굉장히 우호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특히 유대인 교육법, 유대인의 민족적 우수성, 유대인 상술 등 유대인이 들어간 단어는 대체적으로 좋은 쪽으로 작용한다
유대인에 대한 한국인의 일반적인 정서가 얼마나 허구인지는, 진보적 논객들에 의해 널리 알려진 바지만, 하여튼 시오니즘이 민족주의, 팽창주의라는 것을 알면 유대인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한 가지 의문스러웠던 점은, 임지현의 "대중독재" 에 대한 비판이었다
"나치 시대의 일상사" 에 대한 독후감을 보면, 독일 민중이 나치를 원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즉 독일 대중들이 전체주의적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나치가 집권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대중독재" 의 독후감에서는, 박정희 독재를 받아들인 한국 대중들의 전체주의적 성향에 대한 임지현의 지적을 반대한다
내가 보기엔 두 책이 똑같은 논리인데 왜 독일 대중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한국 대중에 대해서는 반대하는지 약간 의문스럽다
한국인들이 박정희 독재를 받아들였던 것은 임지현의 지적처럼 전체주의적인 성향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독재에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무력으로 강하게 억눌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정일은 대중독재를 개발독재와 같은 맥락으로 본다
내가 보기엔 두 개념이 상당히 틀리다
민중의 파시즘적 성향을 지적한 단어와, 경제 발전을 위해 정치적으로는 억압된 상태를 뜻하는 단어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한 쪽은 공범자를 가리키고, 한 쪽은 희생자를 뜻하는데 말이다
5. 현 미국 정부를 장정일은 과두정 체제라고 규정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현하고 있다고 하지만 로마 제국에 비해 이념적 보편성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제국이 되지 못하고 과두정에 불과하다는 "제국의 몰락" 이라는 책을 옹호하면서 말이다
미국에 대한 평가는, 나에게는 유보된 사항이다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을만큼 중요한 문제고, 또 너무 복잡해 내 지식으로는 판단하기 힘들다는 게 현재의 내 생각이다
부시 정권이 호전적이고 보수적인 건 사실이지만 과연 유럽 지식인들의 말처럼 미국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또 세계화 내지 신자유주의가 지식인들의 말처럼 정말 100% 나쁘기만 한 건지도 아직은 더 생각해 봐야겠다
자꾸 드는 생각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말을 위한 말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시사성 있는 책들을 위주로 깊이 있는 서평을 써 낸 이 책에 절반 정도 만족했다
기존의 독서 일기에 비하면 여흥은 훨씬 적었지만, 생각해 볼 꺼리를 던져 준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한다
"신성 동맹과 함께 살기" 를 읽을 때도 느낀 바지만, 문학가들의 시사적 발언은 왠지 신뢰성이 떨어진다
주장에 대한 근거를 앞세우기 보다는, 당위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역시 자기 전문 분야에서 글을 쓸 때 가장 돋보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