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노란색의 예쁜 표지만큼이나 내용도 훌륭하다
어쩌면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소비형태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시도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자료 의존적이라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한국인이 쓴 책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서구의 유명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그친다는 점이 늘 아쉽다

 

소비란 무엇인가?
소비가 단순히 재화의 효용을 없애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 확장된 뜻이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소비라고 하면 흔히 낭비와 연결되어 도덕적으로 나쁜 의미와 연결되기 때문에 더 뜻밖이었다
소비가 곧 위세품, 즉 지위의 과시, 혹은 다름의 표지자라는 것은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소비는 곧 비축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더불어 문화를 발전시키며 공동체 사회에서 정을 베푸는 행위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예의범절이나 선물이라는 것도 사실은 비합리적인 소비처럼 보이나 사람들간의 정을 표현할 때 없어서는 안 될 행위들이다
또 예술품이야 말로 먹고 사는 데 아무 영향도 못 미치는 지극히 소비적이고 낭비적인 사치품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 부르고 인류가 이룩해 온 고귀한 정신의 표현으로 생각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야, 즉 내일을 위한 비축품 (여기서는 이걸 낭비로 부른다)이 든든해야 비로소 고차원적인 것, 즉 예술 (이것도 역시 낭비로 볼 수 있다) 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치를 상류계급의 지위추구로만 본 베블런의 현시적 소비론은 절반만 맞는 셈이다
또 크게 보면 소비 혹은 사치, 낭비는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 중 하나다

 

이 책에서는, 진보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부르주아적인 명성과 소비를 누리는 좌파 지식인들을 비꼰다
"혁명을 팝니다" 에서 비판한 반문화와 비슷한 개념이다
또 끊임없이 남과 다른 차이, 차별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보면, 좌파 지식인들의 평등 이론이 과연 현실에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영어 조기 교육이 대표적인 예다
영어가 힘인 사회에 살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은 조기 유학을 보내 자녀를 네이티브 스피커로 만든다
반면 없는 집 애들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사회의 하위 구조를 형성한다
계급이 대물림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고리를 끊어야 할까?
저자는 영어 조기 교육을 공교육에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영어 사대주의니 민족 자주성이니 운운하면서 공교육의 영어 조기 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조기 유학 보낼 수 없는 사람들의 자식들을 계속 하층민으로 고정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이 옳든 그르든)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 같다

 

저자는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이론을 들어 미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소비는 상류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안젤리나 졸리가 매고 있는 루이비통 가방을, 조금만 애를 쓰면 평범한 한국의 직장 여성도 얼마든지 맬 수 있다
물질의 소비가 특정 계층의 차이 표지 기능을 상실해 가기 때문에 상류층은 문화의 소비를 통해 다름을 드러낸다
더구나 이 문화적 감식안이란 것은 쉽게 생기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의 오랜 교육과 훈련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니 교양이나 예술적 심미안 등은 어려서부터 고급 교육을 받아 온 전형적인 상류층의 가장 훌륭한 표지자 노릇을 할 수 있다
벼락부자 보다 재벌 2세를 더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갑자기 떼돈을 번 사람은 문화적 우월성을 누리기 힘들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고급 문화를 익히고 교양과 매너 등을 몸에 익힌 재벌 2세는 돈만 많은 게 아니라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죄다 재벌 2세가 차지할 수 밖에!!

 

그래서 부르디외는 계급의 차이를 줄이는 방편으로 미술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비단 미술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 등 인문학 전반의 교육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즉 공교육에서) 인문학 교육을 철저하게 시킨다면, 즉 예술을 향유할 능력을 기른다면 지식과 문화라는 상징자본이 계급성을 띄게 된 오늘날 (또 물질적 소비가 거의 평등해져 버리기도 한) 계급적 격차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고 강조한다
수요일 하루는 학교에 가지 않고 루브르 미술관에 모여 예술 작품을 관람하는 프랑스 초등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나 역시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는 무리인 것 같다
우선 한국 상류층의 표시가 과연 미적 심미안, 예술적인 감각인지 의심스럽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자본이 한국 사회에서 위세품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클래식 음악은 고사 직전이라고 징징대고 출판의 위기는 어떻게 왔는가?
상류층이 되기 위해 명품을 구입하듯 상류층으로 보이기 위해 인문학도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게 아닌가?
하다못해 지적 허영심을 과시하기 위해 책이라도 한 권 더 읽고 교양강좌라도 나가고 의무적으로라도 음악회나 미술관에 가야 할 거 아닌가?
상류층처럼 보이기 위해, 혹은 상류층을 지향하기 위해 열심히 루이비통 가방은 사들이지만 (한 달간 라면만 먹더라도 말이다) 비싼 음악회에 가거나 책을 사기 위해 굶는다는 사람은 못 봤다
오히려 책 많이 읽는다고 하면 구식케케먹은 사람, 쿨하지 못한 사람, 따분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한국 사회에서 프랑스의 상징 자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엔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그렇지만 학교 교육에서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교육을 강조하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인문학이 계급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나 역시 단순한 암기 위주가 아니라, 실제로 예술을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현장 교육이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일주일에 하루 쯤은 국립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서 수업을 듣는다면 얼마나 신나겠는가!!
상징 자본의 소유가 위세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인문학은 더 이상 죽은 학문이 아니고 계급 차이를 좁힐 수 있는 훌륭한 사회 통합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소비 성향과 그 의미를 분석한 훌륭한 책이다
비단 자본주의 사회 뿐 아니라, 소비는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소비를 죄악시 하는 것은 인간의 욕구 (남들과 다르고자 하는 욕구, 남보다 잘나 보이고 싶은 욕구) 를 부정하는 피상적인 고찰일 뿐이다
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보는 기분이 든다
더불어 위선적인 이른바 진보 지식인에 대한 일갈도 일면 시원한 구석이 있다
(아마 불편해 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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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8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06-11-09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백수라서 시간이 많아요...
문화 때문에 옷 못 사 입는 사람이 바로 저 같은 부류인데 (아주 심한 건 아니지만) 책에서 나온 것 같은 상징자본으로 생각되기는 커녕 어설픈 인문주의적 성향 때문에 놀고 있다는 비난을 듣고 있는지라... ^^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오드리 설킬드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레니 리펜슈탈, 한 세기를 완전히 살다 간 여인
삶의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사실 이 여자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알라딘 서평으로 통해 우연히 그녀의 평전을 발견하고 집어든 책이다
이런 게 바로 독서의 확장이 아닐까 싶다
전혀 관심이 없고 모르는 분야인데, 어떤 기회를 통해 책을 접하게 되면 내 관심의 영역은 확장된다
참 멋진 일이 아닌가?
물론 평전이 워낙 길고 세세하기 때문에 다소 지루한 면은 없잖아 있다
일단 이 여자에 대해 모르는 게 대부분이고 당시 나온 영화들도 본 게 거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중요한 영화라고 강조를 해도 그저 무덤덤하게 그런 게 있나 보다 할 뿐이니까
그렇지만 다음에 다른 곳에서 이런 영화들의 제목을 듣는다면 그 때는 보다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독서의 매력이기도 하다
다양한 분야로 관심이 확장되는 것, 그래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 말이다

 

여기 나온 영화 중에 딱 하나를 본 적이 있다
프리츠 랑이 1924년에 만든 니벨룽겐이라는 무성 영화다
고전을 수집하는 아빠의 DVD 진열장에서 우연히 집어든 영화였는데 무성영화인지는 몰랐고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에 대한 관심 때문에 집어든 거였는데 뜻밖에도 흑백에다가 소리도 나오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당시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작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를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레니가 출연했던 영화들이 어떤 분위기였는지 약간은 짐작이 간다
컴퓨터 그래픽 같은 게 없을 때니 실제로 모든 장면을 배우가 직접 연기하고 찍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간다
특히 레니는 산악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에 직접 맨발로 바위를 타는 장면도 찍어야 했다
촬영이 얼마나 힘들고 심지어 생명의 위험마저 느끼게 하는 고난이도의 일이었는지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 재밌지는 않을 것 같다
니벨룽겐을 보면 아무래도 대사도 없고 흑백이기 때문에 화려한 영상에 길들여진 관객에게는 불친절 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녀가 직접 극본을 쓰고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푸른 빛"은 기회가 되면 꼭 보고 싶다
일단 스토리에 관심이 간다
중세의 마녀에 얽힌 얘기 같기도 하고 마을에 하나 쯤은 전해 내려오는 다소 잔혹한 전설 같기도 하고 하여간 분위기가 참 독특할 것 같다
그런데 재밌는 건 초창기 영화라서 그랬는지 배우들을 마을에서 직접 캐스팅 하고 출연 경력이 전혀 없는 경찰관 아저씨 같은 사람도 주연으로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이다
지금은 생각하기 힘든 어찌 보면 낭만적인 얘기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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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페이지나 되는 꽤 긴 책인데 한 번에 죽 다 읽어 버렸다
두꺼운 분량에 질려 언제 다 읽나 심란하기까지 했는데 의외로 줄줄 잘 나갔다
그렇지만 독해가 아주 쉬운 건 아니었다
일단 외국 책이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지명과 등장 인물들의 이름에 신경이 많이 쓰였고 개인적인 관심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집중도가 다소 떨어졌다
확실히 번역서들은 가독성이 떨어진다
그나마 이 책은 독일인이 주인공이어서 나은 편인데 러시아 책이나 일본 책은 정말 한 번에 죽 읽기 힘들다
어려운 지명과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말이다
사실 나는 서평만 훑어 보고 이 책이 사진집이라고 착각했다
"재키 스타일" 처럼 사진 반 설명 반 이런 식의 전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손에 쥐고 보니 가운데 흑백 사진이 몇 장 끼여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독자를 위한 써비스 정도고 기본적으로 평전이었다
다소 난감했다
모르는 사람의, 특히 별 관심 없는 사람의 일대기를 읽는다는 건 굉장한 인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600페이지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읽어간 것은, 이 여자의 일생이 워낙 매력적이었고 친일 문제와 관련해 여러가지 생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나치 핀업 걸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했던 레니를 보면서 자꾸 서정주와 비교하게 된다
서정주를 친일 경력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하는가 문제는, 단정짓기가 참 어렵다
단지 작품과 작가는 별개로 평가되지 않아야 할까,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레니의 경우는 좀 다른 양상을 띤다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쟁 후 그녀는 단 한 편의 영화도 찍지 못하고 철저하게 영화계에서 소외당한다
학자도 아니고 대중 예술인에게 평단과 관객의 외면은, 더구나 투자자들의 외면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막말로 소설가나 시인은 누가 돈 대주지 않아도 읽어 주든 말든 혼자 집에서 써내려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영화라는 건 투자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매우 비싼 작업이다
그러니 아무리 상상력이 넘쳐 나고 예술에 대한 열망이 치솟아도 돈을 대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말짱 헛수고라는 얘기다
결국 레니는 투자자 모집에 실패하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사진찍기로 돌아 선다
그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레니 리펜슈탈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그저 베를린 올림픽 영화를 찍은, 그래서 손기정 선수의 우승 장면 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 감독이다
책에도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 사진이 나온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라곤 이 책에 서술된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이 내용만으로 본다면 과연 그녀가 뭘 그렇게 크게 잘못했는지 약간의 의문이 든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나름대로 억울하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레니 입장에서는 반유대주의 발언을 한 적도 없고 나치 정책에 특별히 동조한 것도 없고 단지 기록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데 히틀러의 연인이었다는 악의적인 소문 때문에 영화계에서 ?겨 나야 한다는 건 억울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여자이기 때문에, 그것도 배우 경력이 있는 아름다운 여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비난에 시달렸는지도 모른다
히틀러가 매력을 느꼈을지는 모르겠으나 성적 관계까지 갖는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건 여러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그저 악의적인 가쉽에 불과한 것 같다
더구나 히틀러의 애인이었던 에바 브라운의 일기가 날조됐다는 판결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거기에 나온 내용대로 레니를 히틀러의 숨은 연인 따위로 생각한다는 건 아무리 봐도 대중들이 그렇게 만들길 원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실 보다는 이야깃거리를 원하는 것이다

 

서정주는 그래도 문단의 권력을 놓치지 않았지만 레니는 완전히 영화계에서 축출됐다
부정 정권에 하수인이 됐다는 비난을 받으려면 적어도 나치 정권 하에서 그럴듯한 직함이라도 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레니의 평전이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책 내용만으로는 대체 그녀가 나치에 협력한 게 뭐가 있는 건지 매우 의심스럽다
올림피아야 올림픽 기록 영화니 말할 건덕지도 못 되고 뉘른베르크 전당 대회를 찍은 의지의 승리가 문제가 되는 모양인데 이것 역시 1934년 당시 독일인들은 거의 대부분 히틀러를 지지했고 미친 전쟁광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영화 두 편 찍은 걸 가지고 평생 동안 나치 협력자라고 비판한다는 건 너무 억울하다
책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일들이 있지 않나 싶기까지 하다

 

사실 예술가들을 도덕적이나 정치적으로 비난한다는 게 어느 선까지가 옳은 일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다
서정주만 해도 그렇다
대표적인 친일파 시인이지만 그 사람만큼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도 드물다
예술과 예술가는 별개라고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려야 하는가?
그렇지만 또 예술가의 기본 정신이 시에 녹아나는 것이니 100%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하는 바대로 레니나 서정주 모두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머무르지 못하고 진짜 예술 작품을 탄생시켰기 때문에 끊임없이 평가의 대상이 됐는지도 모른다
비난하고 말 것도 없는 함량 미달의 작품이었다면 오늘날 비평가들을 괴롭힐 일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너무 수준있는 예술 작품이 되버려서 무조건 그 정신이 나쁘다고 욕할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약간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생활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가 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이혼을 한다거나 부적절한 대상과 연애를 하면 경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심지어 해고당할 위험도 있다
일만 잘 하면 됐지 사생활이 무슨 소용이냐는 말도 있지만 이건 겉으로 하는 옳은 말일 뿐이고 실제 속마음은 어느 정도 비난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렇다면 좀 더 논의를 확대해서 예술가가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을 했다고 예술 작품까지 비난받아 마땅한가?
화가가 그림만 잘 그리고 감독이 영화만 잘 만드면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작품에 녹아 있는 정신이 문제라고
그렇지만 이 책에서도 지적한 바대로, 멀쩡한 사진 한 장을 가지고 파시즘이 어쩌네 하는 비평이야 말로, 편견에 가득찬 악의적인 비판일 뿐이다
같은 사진을 다른 사람이 찍으면 찬탄의 대상이 되는데 레니가 찍으면 파시즘을 찬양하는 사진으로 돌변한다
저자가 일부러 어처구니 없는 사례를 뽑은 거겠지만, 아프리카 누부족의 육체를 찍은 게 대체 어떻게 파시즘과 연관되는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수전 손택이라는 유명한 비평가가 이렇게 말했다니, 갑자기 그녀의 다른 해석들에도 의심이 생긴다
평론가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가 이미 정한 논리에 맞춰 작품들을 해석하는 건 아닐까?
레니의 사진이 그런 식으로 비난받는다면 거꾸로 그네들이 위대하다고 칭찬하는 작품들도 사실은 지나친 과장에 불과한 건 아닐까?

 

만약 예술가가 권력을 휘둘러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면, 과연 그의 예술 작품은 어떻게 평가되야 할까?
어려운 문제지만 가능하다면 분리되야 한다고 믿고 싶다
노골적으로 인종차별 같은 걸 찬양한다면?
정말 어려운 문제지만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자유로 허용되야 하지 않을까?
비난받을 수는 있겠지만 단지 그 내용의 불순함 때문에 매장되야 하는 건 지나친 처사이지 않을까?
어찌 됐든 자유민주주의 사회란 자기 의견을 개진할 자유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 사람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금지된다면?
솔직히 일개 예술가가 그렇게까지 대중을 계몽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인종 차별주의 영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건 감독이 대중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인종주의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1930년대 독일인들은 레니처럼 히틀러를 위대하게 생각했고 자신들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의식조차 못했던 것이다
모두가 공범자가 아닌가?
레니 혼자 받아야 할 비난은 아니라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도 매력적인 삶이었다
102세라는 기록적인 수명을 산 것도 그렇고, 70세의 나이에 스킨 스쿠버를 배워 수중 촬영을 한 점도 그녀가 얼마나 도전적인지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영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선택을 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특히 60대의 나이로 무려 40여 세나 어린 20대의 청년과 동거한 것은 주목할 만 한 사건이다
얼마나 매력이 넘치는 할머니였으면 손자뻘 되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었을까?
그 남자와의 관계는 레니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됐으니 무려 30년을 넘게 살았다
둘이 어떤 사이였는지 정말 궁금하다
아프리카 누부족 촬영할 때 랜드로버를 운전해 주는 기사로 만나 스킨 스쿠버를 함께 배우며 평생을 살아간 동반자적 관계
마치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면 젊은 애인을 갖는 것도 대단한 능력 같다

 

산악 영화를 찍을 때의 강인함도 인상적이었다
맨발로 바위를 타는 장면을 찍을 때는 그녀의 열정이 정말 놀라웠다
천성적으로 육체 활동을 즐긴 듯 하다
스키도 좋아하고 등산은 평생 사랑한 취미였다
편집 작업에 지쳐 휴가를 얻으면 알프스 산으로 올라갔을 정도니 그녀의 산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알 만 하다
그래서 늙어서까지 매력적인 몸매를 유지했고 무엇보다 체력이 튼튼하고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어쨌든 102세라는 나이는 경이적인 숫자다

 

아프리카 누부족들에 대한 비난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일단 누부족의 전통이 사라짐을 안타까워 하는 게 문명인들의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에 불과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길 원하지만 정작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처럼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길 원한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부족들도 더 이상 사냥하면서 원시 부족으로 살기 보다는, 그래서 그들의 관찰의 대상이 되기 보다는 물질 문명의 혜택을 받고 싶어 할 것이다
또 그래야 앞으로의 후손들도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레니의 입장도 틀린 건 아니다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해 봤자 사회의 최하층민이 될 것이고 자신들의 자부심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그들은 패배자가 될 뿐이다
그나마 모여 있을 때는, 또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전통에 기대어 전사로서의 자부심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부족 사회가 해체되면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할 울타리는 없어져 버린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찌 보면 레니의 비판자들처럼 이미 레니는 그들의 사진을 팔아다 돈을 얻는다
그런데도 누부족이 돈을 모르고 언제까지나 문명세계 사람들의 관찰 대상이 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너무 이기적이다
해법은 무엇일까?
뭐가 됐든 이제 전통 부족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고 말 것도 없게 됐지만 그들이 사회 최하층민으로 편입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안타깝다
또 레니가 절대로 그들을 진실로 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누부족을 향한 마음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부족의 해체를 안타까워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 분량이었지만 지루하지 않게 읽었다
특히 히틀러와 제3제국에 관한 얘기는 역사책에서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난 왠지 히틀러가 그 콧수염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자꾸 코믹한 느낌이 든다
무솔리니나 스탈린은 전혀 그렇지 않는데 히틀러는 왠지 꼭두각시나 어릿광대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책에 묘사된 히틀러는 레니의 시각으로 봐서 그런지 몰라도 그다지 잔인하지도 미치광이도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원래 여러 면이 있는 거니까 그렇겠지만 말이다
괴벨스라는 사람도 나치 선전부장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살아 난다
역시 역사책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 정열적인 여자는 어쩌면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진부한 말이 딱 들어맞는지도 모른다
보다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그녀의 전기 영화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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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색 -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강준만의 책은 인용이 너무 많다
신문 자료 오린 걸로 책 한 권을 쓰는 기분이 든다
자료 조사의 성실성은 인정하지만 가끔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대중 문화의 겉과 속" 이라는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럭셔리 신드롬"이라는 책을 거의 그대로 옮겨 왔기 때문에 그 책을 이미 읽은 독자로써는, 두 책의 차이점을 알기가 힘들었다
좀 더 자기 주장과 색깔이 뚜렷한 책을 쓸 수는 없는가?
자료 전달로서는 훌륭하지만,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 든다
강준만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이 책에서 자기 목소리를 낸 부분은 맨 마지막, 노무현에 관한 평가다
논객으로서 절필을 선언한 후 사회 분석학 쪽으로 관심을 돌렸지만 현실 정치에 대해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겠는가?
어찌 보면 그게 이 사람 전문 분야인데 말이다
여러 가지 자료를 인용해 노무현의 실정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긴 하지만 글쎄, 아리송한 부분이 많다
노무현이 요즘 워낙 죽쑤고 있어서 누구에게도 동정을 사기 어렵게 됐긴 하지만, 노무현을 영남 지역주의자로 정의내리기 위한 편파적인 자료 수집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가 어렵다
노무현의 실책이 과연 영남 지역주의, 혹은 호남 소외론 때문인가?
민주당과 분당한 것이 100% 배신 행위일까?
배신이라는 것의 정의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자기를 대통령 만들어 준 민주당에 대해 "의리"를 지켰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데 재밌는 건 이 책에서 의리란 매우 부정적인 어투로 쓰인다는 점이다
현실 정치에 대해서야 워낙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어쨌든 이 책의 논리 전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차라리 고종석처럼 복지정책 주장하는 좌파적 분위기라도 확실하게 냈으면 옳든 그르든 훨씬 더 선명했을 것 같다
이도 저도 아니고 정치적 주장을 한다기 보다는, 노무현이라는 인물 비판에 그친 것 같아 (그것도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라 인간 노무현 비판) 씁쓰름 하다

 

이 책 보다는 앞서 출간된 "한국인 코드" 가 훨씬 더 와 닿는다
사회 일반의 보편적인 현상을 이야기 해서 그런가?
책 제목과는 달리 저자가 기술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와 닿지가 않는다
모호하게 여러 주제를 그저 나열해 놨다는 인상을 준다

 

한국 사람은 특히 인정욕구가 강하다고 한다
집단적으로 모여 있기 때문에 쏠림 현상이 강하고 반감, 더 쉽게 말해 비호감이 기본 정서라고 한다
인터넷 댓글 문화나 노무현 당선만 봐도 상당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흔히 얘기하는 냄비 근성과도 통하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히 한국은 좁은 땅덩어리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기 때문에 집단주의 문화가 강하고 거기에서 파생한 위계질서나 호칭 문제, 획일주의, 권위주의 등이 기세를 부리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평등주의는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시기심과도 연결된다
시기심이란 그를 시기한다고 해서 나에게 특별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상대방이 가진 사회적 선을 부당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흔히 한국 사람은 남 잘 나가는 꼴을 못 본다고 하는데 이것도 시기심의 발로, 더 넓게는 곡해된 평등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남보다 잘나고 싶은 시기심은 열심히 일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아직도 역동적이라고 평가한다
재밌는 건 시기심이란 나보다 월등하게 잘난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또래 집단에서 앞서 가는 사람, 그러니까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재벌이 잘 사는 것 보다 내 이웃이 비싼 차를 굴리는 게 더 못마땅 하다는 얘기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프다는 속담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사랑의 본질이 권력 관계임을 밝힌 것도 주지할 만 하다
흔히 자본주의, 즉 돈이 사랑을 훼손시킨다고 하지만 오히려 자본주의는 낭만적 사랑의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청춘 예찬과도 비슷한 맥락인데 광고를 통해 있지도 않은 환상을 심어 줌으로써 소비를 유도하는 것이다
기기변화에 열광하는 얼리 아답터들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결혼은 계급을 지키는 수단이었고 재산 보존 내지는 증식의 방법이었다
오히려 자본주의 시대 이후 낭만적 사랑의 환상이 퍼졌으니 돈이 사랑을 망쳤다고 할 것도 못된다
결혼은 팀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 확보를 통한 홀로서기임을 강조한 에릭 프롬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효를 인권의 차원에서 보자는 말은 새롭게 들렸다
여태까지 우리 사회는 유교적 질서에 의해 움직였기 때문에 장유유서나 부자유친 등의 도덕 규범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그러므로 약자를 보호하는 인권의 차원이 아니라, 강제와 의무감이 수반된 지극히 구속력 있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제 노인들은 젊은 세대에게 권력을 뺏긴 후 비참하게 스러져 가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만큼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곳이 또 있을까?
안티 에이징 열풍도 이것을 방증한다
노인 문제를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풀 것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즉 인권의 차원에서 풀자는 말은 새로운 해법으로 들린다
자발적인, 혹은 측은지심에 의한 부모 봉양은 얼마나 아름다운 미담이 될 것인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시집살이를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일 것이다
(여기서도 강준만은 노인들은 투표하지 말라는 정동영에 대한 간접적 비난을 빼 놓지 않는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가족 우선주의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끈끈한 한국 사회는, 복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가족에게 떠넘겨 버리는 경향이 농후하다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는 길은 내 가족 우선주의, 혹은 가족 제일주의의 극복인지 모른다

 

자기 주장이 모호함이 불만스럽긴 하지만 여러 자료를 한 자리에서 읽을 수 있음은 만족할 만 하다
한국인에 관한 보편적인 정서나 가치관 문제는 잘못하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언제나 흥미롭다
우리 자신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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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두기 - 영국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 여성 편집자의 자서전
다이애나 애실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간만에 열심히 읽은 책
재밌는 소설을 읽듯, 한 자 한 자 빼놓지 않고 성실하게 읽었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위트 넘치는 사람 같다
글에 재미가 베어 있다
지루하지 않고 툭 던지는 문장들이 웃음을 유발할 만큼 재밌다
이런 글솜씨라면 편집자 노릇도 훌륭하게 해냈을 것 같다
80이 넘은 할머니의 글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 하고 속된 말로 쿨하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관 자체가 책에 쓰여진 것처럼 돈 쓰기는 좋아하지만 버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는, 승진이나 연봉 보다는 출판일 자체가 좋아서 매달리는 그런 심플한 스타일이었는지 모르겠다

 

20세기 초에 태어나 2차 대전을 겪은 저자는, 일을 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진학한다
지금 같으면 대단한 수재 소리를 들었을텐데, 당시만 해도 지참금 없는 여자는 직업을 가져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20세기 전반만 해도, 아니 비교적 최근까지도 여자는 남자에 비해 적은 연봉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중요한 직책은 맡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던 것 같다
똑똑하다는 말이 욕으로 쓰일 정도였으니, 영국 역시 남녀차별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출판사 내에서의 당연한 권리 찾기 투쟁에 나서기 보다는, 정말 출판일 자체가 좋아서 연봉이나 승진 따위에는 별 관심을 안 두고, 또 여자라서 겪는 사회적 차별에 둔감한 채로 그저 일이 좋아서 페미니즘 운동을 무심하게 바라봤다는 고백은 매우 인간적이고 현실적으로 들린다
사실 1917년에 태어난 저자가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당위적으로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러울 수 있다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모두 권리 찾기 투쟁에 앞장 설 수는 없다
연봉과 승진에 관심이 없는 일부 남자들이 있듯, 그런 것에 무심한 채 일에 매달리는 여자도 있을 수 있지 않냐는 저자의 재치넘치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
왜 차별을 받는지 따지기 보다는 차라리 참는 쪽은 선택했다는 말을, 저자는 참 위트있고 재밌게 써 내려간다
전기를 쓴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시대정신이라도 구현하는 양 모든 분야에서 항상 투쟁적이고 그 싸움에서 늘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현실에 순응하고 부당한 대우에도 그저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채 엎드려 사는 평범한 여성들을 만나기란 참 어렵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저자의 솔직한 고백들이 참 좋다
무엇보다 이런 문장들은 위트가 넘쳐 사이사이 웃음을 유발한다
너무 매력적인 할머니가 아닌가!

 

뒷부분의 작가와 맺은 특별한 인연들은 마치 한 편의 단편들인 양 흥미진진하다
도미니카의 백인 지주 딸로 태어나 영국에 건너 온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작가 진 리스를 돌보아 준 이야기는, 정말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가 이런 것인가 다소 놀라울 정도였다
어느 정도는 유모 역할을 해야 한다는데, 딸마저 부양하기를 거부한 철 모르는 이 할머니 작가를 말년까지 보살펴 준다
친하게 지내는 작가 부부가 또 다른 부부와 여름 휴가를 같이 보내다가 서로 짝을 바꿔 눈이 맞은 얘기는 정말 소설 같다
한 쪽이 눈이 맞아 도망가자,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위로하다가 재혼을 한 것이다
아일랜드 지주 딸로 태어난 몰리 킨의 얘기도 재밌었다
귀족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예절이나 품격들이 사실은 인간적인 감정마저 억제한 매우 위선적인 것임을 간파해 낸 할머니 작가의 분석력이 놀랍다
저자는 여름 휴가를 그녀의 집에서 보낸다
정말 편집자가 작가들과 이 정도로 친교를 유지하는지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책을 찍으면 기본적인 독자는 확보해 두던 호시절에 출판일을 했음을 감사해 하는 글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출판업의 어려운 사정을 통감했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영상물과 경쟁을 해야 하는 책은, 오락거리라고는 책 밖에 없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졌다
독자들이 더 재밌는 놀이 형태를 찾아 버렸으니 출판사로서는 이제 단순히 좋은 책을 펴내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될 문제다
그렇지만 이 책은 정말 재밌다
한 편의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지루하지 않고 중간중간에 웃음을 터뜨렸다
비단 편집자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즐거운 이야기책을 읽는 것처럼 재밌으니 일독을 권할 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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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0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대로 두기'는 힘들겠어요. 장바구니에 넣을래요.^--^
이 책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marine 2006-11-05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정말 재밌는 책이예요 80대 할머니 센스가 대단하세요^^
 
한반도 (2disc) : 한정판 - 초도출시 양장본
강우석 감독, 안성기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어색한 차인표의 연기만큼이나 억지스런 상황 설정이 매우 불편했던 영화
감독이 주장하는 바가 뭔지 궁금하다
영화에서처럼 민비가 자객들의 칼에 맞서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치며 장렬하게 죽어갔다면 아마도 대한제국은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민족주의의 부흥이 과연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인가?
이런 식의 영화가, 역사왜곡을 자행하는 일본에 대한 바람직한 대응인가?

영화 주제와는 별도로 전반적인 스토리 전개도 지루하고 현실감이 떨어졌다
주제가 바람직하지 못하면 스토리라도 재밌어야 하는데 두 가지 점에서 모두 실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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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04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학생이 자긴 울면서 보았다고..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더라구요. 조오금.. 난감했어요^^;;;

marine 2006-11-0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들은 감수성이 예민하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