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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르를 벗겨라
베흐야트 모알리 지음, 이승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지난 번에 읽은 "화형" 과는 다른 느낌의 책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슬람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홍보 문구 때문에 거의 비슷한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단지 이슬람 여성이 썼다는 것만 같을 뿐 매우 다른 책 같다
"화형" 의 수아드가 농촌에서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여성이, 종교와 관습의 희생자가 되어 부모에 의해 불태워지는 끔찍한 살인을 경험한 반면, 이 책의 주인공 베흐야트는 관습에 저항하여 투쟁해 나가는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 준다
수아드가 매우 특별하고 지역적인, 보편적이지 않은 경우였다면, 베흐야트의 이 책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일정 정도의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세계 대부분의 여성들이 겪는 보편적인 투쟁 이야기 같다
꼭 이슬람 여성이 아니라 할지라도, 미국의 변호사든, 대한민국의 여성 변호사든 자서전을 쓴다면 비슷한 느낌으로 쓸 것 같다
책의 주인공 베흐야트는, 수아드와 전혀 다른 삶을 산다
물론 그녀는 수아드처럼 농촌 중에서도 최악인, 이스라엘 점령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아니라, 이란의 농촌이긴 하지만, 사업가 아버지를 뒀기 때문에 학교도 다니고 심지어 대학 교육까지 받는다
할아버지가 느닷없이 망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고 다섯 명의 정부인과 서른 여섯 명의 여자들을 부양할 (이른바 시게) 정도로 능력있는 집이었다
큰아버지가 비록 살해당하긴 했지만 검사였던 점도 그녀의 집안이 중산층 이상은 됐다는 걸 보여 준다
"화형" 에서 보면, 수아드가 신발 신은 사람을 굉장히 부러워 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발은 남자만이 신을 수 있는 일종의 특별한 상징 같은 것이었고, 그 마을에 사는 모든 여성들은 맨발로 다닌다
이 책에서도 주인공 베흐야트가 예쁜 신발을 매우 동경한다고 나온다
웨스트 뱅크를 떠나기 전 한 번도 신발을 신어 보지 못한 수아드에 비해, 베흐야트는 딸을 사랑하는 부유한 아버지 덕분에 언제나 비싼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벌써 두 여성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눈에 보인다
저자의 아버지 하신은 매우 특별한 이슬람 남성 같다
교육을 받아 읽고 쓸 줄 알았고, 외사촌인 아내와 빨리 결혼하기 위해 열 일곱 살에 군입대를 자원할 만큼 열렬히 사랑했다
또 사업을 통해 망한 집을 일으켜 세웠고, 장인이 죽자 오갈 데 없이 된 장모와 유복자 처남을 받아 들여 부양한다
이 때는 아직 자기 집안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전이었고 자신도 죽은 형의 딸과,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 하는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먹더라도 함께 먹고 굶더라도 함께 굶는다는 심정으로, 친정에서도 도와 주길 거부한 가엾은 장모와 그의 아이들을 받아들인다
저자의 표현대로 전혀 그럴 의무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다행히 외할머니는 교육을 받지 못한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여성으로, 저자에게 여성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임을 가르친다
마호메트의 외동딸이자 초대 이맘이었던 알리의 아내, 파티마가 아버지에게 자신이 천국에 1순위로 들어갈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아버지는 엉뚱한 시골 여인이 1번이라고 답한다
자존심이 상한 파티마는 그 여인을 찾아갔는데, 세 번 놀랜다
먼저 일부러 밖에 딱딱한 빵을 내 놓은 걸 보고 왜 부드러운 상태로 먹지 않냐고 묻자, 사냥꾼인 남편이 밖에서 딱딱한 빵을 먹는데 나만 집에서 부드러운 빵을 먹을 수는 없다고 답한다
(여기까지는 착한 아내라고 칭찬할 만 하다)
다음에 입구에 세워진 막대기가 뭐냐고 묻는다
그러자, 남편이 집에 들어와 자신을 때리고 싶을 때 빨리 막대기를 찾을 수 있도록 집 앞에 세워 놓는다고 답한다
(점점 엽기 내지는 피학미로 흐른다)
마지막으로, 왜 구멍난 바지를 꿰매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 바지 사이로 음부가 노출됐기 때문)
그러자, 남편이 욕구를 채우고 싶을 때 바지를 벗지기 않고 재빨리 응할 수 있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그러자 파티마는 그 집을 나서면서, 차라리 두 번째로 천국에 들어가고 말겠다고 고개를 흔든다
이 이야기는 저자의 외할머니가 그녀에게 들려 준 것으로써, 여자는 남자의 예속물이 아니고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저자의 할머니는 우리나라로 치면 구한말에 태어난 분일텐데, 시골에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자랐을 전통적인 여자가 이렇게 깨어있는 의식을 갖는다는 게 참 놀랍다
어쩌면 저자는 외할머니의 이런 독립적인 기질을 물려 받았을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저자가 자랄 무렵은, 팔레비 왕에 의해 서구화가 진행될 시절이라 군복무 대신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부대라는 것이 창설되어 여자아이들도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또 이렇게 교육을 받은 여학생들은 국비로 학교에 다니는 대신, 일정 기간 여교사로써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저자와 그녀의 언니도 이런 과정을 거쳐 선생님이 된다
이 때 교사로 나가게 되면 고향에서 떨어진 시골로 가야 하기 때문에 딸을 외지에 둘 수 없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치나, 외할머니가 자신이 손녀들을 데리고 있겠다고 나선다
비록 외할머니는 베흐야트가 교사로 발령나던 첫 날 세상을 떴지만, 손녀가 교사가 되는 것을 그토록 소원했던 이 분은 변호사로 성공한 손녀를 보면서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것 같다
그 후 베흐야트는 진보적인 남편을 만나 대학 교육까지 마친다
학교에서도 일등을 놓치지 않고,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혼자 입시 준비를 해서 법대에 입학한 그녀는, 결혼할 때도 대학 입학을 1순위로 내세울 만큼 대범했다
뿐만 아니라 일체의 지참금도 가져가지 않았고, 남편이 친정에 아내를 데려가는 조건으로 내놓는 돈도 거절한다
이런 관습을 깨는 행동이 용인된 것은, 그녀의 친정이나 남편이 모두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자유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결혼을 한 후 아이까지 미루면서 대학에 입학했고, 교사 생활을 하면서 돈을 번다
관습대로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을 부양하면서 말이다
매우 정열적이고 유능한 여성임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인 그녀의 성향이었다
그녀는 팔레비 왕조 때도 정부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지만,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에도 변호사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팔레비 왕조가 전반적인 부패에 물들었다면, 호메이니 정권은 중세 이슬람 율법으로 특히 여성들을 강압했기 때문에 간음한 여성은 말 그대로 돌로 쳐 죽이는 투석사형제를 도입하고, 차도르를 쓰지 않는 경우 채찍으로 70대를 치고, 네 번째 발각되면 사형에 처하는 끔찍한 법을 시행한다
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물라라는 일종의 종교 지도자들이 법원에서 판사 위에 군림해 최고 결정권을 갖는 것에 대해 베흐야트는 크게 반발한다
이야기의 축은 타라 젠데라는 농촌 여성을 변호하는 것으로 옮겨 간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재혼하라는 주위의 강압에 못 이겨 사게라는 일종의 한시적 혼인을 올린 후 아크바르라는 남자의 첩으로 들어간다
농촌에서 여성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으면 혼자 살지 못한다
과부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재혼을 해야만 한다
개인의 삶을 본인이 선택하지 못하고 사회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관습인지, 그녀의 삶을 통해 잘 드러난다
문제는 아크바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본처 파테메는 그녀를 매우 질투했고, 유난히 아름다웠던 타라는 마을 여자들의 질투 섞인 적대감으로 힘들어 한다
다들 그녀가 자신들의 남편을 유혹할까 봐 두려워 했던 것이다
결국 여러 사건들 끝에 그녀는 파테메의 두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뒤 기소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책에서는 타라가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아이들을 죽인 것이기 때문에 정신감정서를 동봉하여, 그녀의 무죄를 주장한다
의도적이지 못한, 정신착란 상태의 살인이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그녀는 무기징역에 처해지지만, 아이들의 어머니 파테메는 끝까지 죄값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사형을 주장하고, 이슬람 혁명 이후 고의적 살인은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형벌을 받는다는 이슬람 율법 게사스에 의해 사형을 당한다
타라의 변론을 맡은 베흐야트는 그녀가 이미 무기징역에 처해졌고 의도하지 않은, 일종의 사고와 비슷한 살인이었는데도, 파테메가 남편의 사랑을 받은 타라를 질투해 끝까지 사형을 주장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일로 내 아이가 둘 씩이나 정신나간 여자에게 살인을 당했다면 과연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줄 어머니가 흔할까?
비록 타라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검사측 말을 들어 보면 그녀는 살해 후 익사로 위장하려고 욕조에 두 아이의 시신을 집어 넣기까지 했다
또 정신감정도 세 명의 의사 중 한 명만이 이상하다고 인정했을 뿐이다
두 아이를 살인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잃은 어머니라면, 솔직히 용서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좀 더 확장시키면 사형 제도의 존폐와도 연결된다
범인을 사형시킨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 오는 것도 아닌데 피해자의 복수를 사회가 살인이라는 형태로 갚아 줄 필요가 있냐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나는 사형 제도에 반대한다
타라의 사형이 부당하다고 느낀다면, 결국 사형제도 역시 반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베흐야트가 사형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만약 자신의 두 아들들이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해진다
결국 저자는 이런 저런 사건을 맡으면서 정부의 감시를 받게 되고 둘째 아들을 데리고 외국 여행길에 오르다가 독일로 망명한다
다행히 그 곳에는 남동생이 유학 중이라 정착하기 쉬웠다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남편과 정치적 대립을 자주 겪던 터라, 또 남편의 안전을 위해서, 망명 후 이혼하고 대신 큰 아들 파르시드를 데리고 온다
어머니 때문에 국제 수영대회의 출국이 금지되는 등, 나름대로 박해를 받았던 파르시드는, 독일로 유학 온 후 망명해서 함께 살게 되지만 가치관의 차이로 갈등을 겪는다
독일 망명 후 언어 문제 때문에 쉽게 독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에, 두달치 생활비를 들여 독일 대학생 캠프에 참여시키는 어머니의 행동을, 아들은 매정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련의 행동들을 봐도, 확실히 베흐야트는 독립적이고 행동력이 있다
독일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법률적 지식을 살려 이란 망명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아마도 어학 실력이 뛰어났던 것 같은데, 통역관으로도 일하고, 자신이 독일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를 독일어 실력이라고 판단하고 아들에게도 빨리 독일어를 익힐 수 있도록 격려하는데, 오히려 이것이 고향을 떠나 온 아들에게 부담감을 주어 둘의 관계를 위험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재 그녀는 재혼했고, 독일 시민권을 획득해서 망명자들을 위한 법률 서비스를 업으로 삼고 있다
비록 전남편과 이혼하긴 했지만, 자신이 낳은 두 아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던 행운아이기도 하다
언뜻 생각하면 이란 남자가 아들들을 모두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어머니 때문에 사회적 진출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아마도 전 남편으로 하여금 아들들을 독일로 보내게 된 이유가 된 듯 하다
베흐야트는 매우 똑똑하고 결단력 있는, 그리고 진취적인 여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는 글은 없지만, 그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매우 강인한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또 변호사라는 직분에 걸맞는 이란의 엘리트 여성이었다는 걸 느꼈고, 독일에서도 비록 망명자의 신분이지만, 시민권 획득을 위해 투쟁하고 거기서도 법과 대학을 다니고 자신의 능력을 살려 다른 망명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걸 보면서 평범한 여성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목은 "차도르를 벗겨라" 라는 다소 극단적인 주장이지만, 실제로 책 내용은 이슬람 여성의 투쟁기라기 보다는, 한 여자가 걸어 온 인생 역경 같은 느낌을 준다
비단 이슬람 여성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어느 정도 보편적인 여성 이야기 같다
행동하는 여성, 베흐야트가 독일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