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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
수아드 지음, 김명식 옮김 / 울림사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예상했던 것과는 느낌이 좀 다르다
나는 아주 끔찍한 학대를 상상했었다
그래서 읽기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너무 분노하고 너무 가엾어서 책을 읽다 던져 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이 됐다
명예살인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마다 과연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꼈기 때문에 이 책 역시 그런 증언으로 나를 힘들게 하지 않을까 미리부터 겁을 먹었다
그러나 내용은 다소 달랐다
책의 주인공 수아드의 어린 시절은 물론 견디기 힘든 학대였고 또 읽는 이로 하여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상식 이하의, 어쩌면 인권 유린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고통스러운 고백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웃기는 우월감처럼 비출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학대받고 노예처럼 남자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그런 문화권에서 태어나지 않음이 정말 다행스럽다
1957년 생인 수아드는 이스라엘과 대치 중인 요르단의 서안 지구에서 태어난 후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집에서 농사를 짓고 양치는 일을 했다
그녀는 55년생인 우리 엄마보다 두 살 어리다
엄마 역시 6.25를 막 치른 후 전쟁으로 폐허가 되버린 가난한 극동 아시아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찌됐든 엄마는 대학 교육까지 받았고 지금 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수준으로 어려운 농촌에서 태어난 두 여자의 삶은 왜 그렇게 다를까?
아랍 여성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농촌에서는 여성의 교육을 불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오히려 교육을 받으면 불행해진다고 믿었다
한국의 높은 교육열은, 분명히 부작용도 있지만, 지식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아드의 마을 남자들은 폭력이 일상화 됐다는 느낌이 든다
마을에서는 서열에 따라 움직이지만, 가정에서 남자는 왕이 된다
아내와 아이들, 특히 딸들을 소유하고 처분할 권리를 갖는 것이다
수아드는 자신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물론이고 마을 대부분의 남자들이 폭력적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당연한 결과다
그들은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해 전혀 죄의식을 갖지도 않고 오히려 가정을 다스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구성원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 속에 내제된 폭력성을 아무런 제재없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보고 배운다
아들은 아버지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한에서 모든 집안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다음 주인이다
수아드네 집에서 하나 뿐인 남동생 아사드는, 누나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머니에게까지 머리채를 잡아끄는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어머니의 존재는 한국의 가부장 문화처럼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니고, 딸들보다 약간 나은, 그러나 여전히 노예 비슷한 위치에 있는 듯 하다
수아드는 어머니 역시 아버지로부터 무수히 맞았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렇게 엄청난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그녀의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고 딸에게 망을 보게끔 만든다
얼핏 생각하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남편과 살면서 대범하게도 바람을 피울 수 있다니, 사랑이라는 본능은 두렵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
수아드는 어머니가 다른 사내를 만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왜냐면 아버지에게 있어 어머니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노예에 불과하고 채찍으로 때리기나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 하다고 믿은 것이다
너무 기막히고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여동생은 수아드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오빠 아사드에 의해 전화줄에 목이 감긴 채 죽임을 당한다
심지어 그녀의 마을에는, 바람났다고 소문난 여자를 그녀의 오빠들이 죽인 후, 그 머리를 잘라 동네에 조리 돌린 일도 일어난다
정말 이게 사실일까?
너무 무서워 믿고 싶지가 않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에 의해, 그것도 복수심에 불타는 남편이 아닌, 친오빠들에 의해 끔찍한 살인이 일어난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명예살인에 관한 기사를 읽어 보면, 죄를 저지른 여자를 (주로 간통) 친정 집에서 죽여야 그 집안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부정을 저지른 여자들은 (강간을 당했어도 마찬가지다 강간범을 죽이는 게 아니라 강간을 당한 딸이나 여동생을 죽인다) 집안의 위신을 깍이지 않기 위해 가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만약 부정한 여자를 가족이 죽이지 않으면, 그 가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공동체 내에서 축출된다고 한다
그러니 딸이나 여동생을 살해하는 수 밖에
그녀들을 죽이지 않으면 가문 전체가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필연적인 선택이기도 한 것이다
수아드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의 꼬임에 빠져 혼전에 임신을 하고 만다
그 남자를 잡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몸을 허락하고 임신이 됐으나 남자는 그녀를 버린다
아랍 세계에서는 결혼 전에 자신과 관계를 했을지라도 그녀와 결혼을 하면 명예가 상실되는 것이라고 한다
파샤드라는 이 남자는, 혼전임신까지 된 수아드와 차마 결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파샤드에게는 불명예스러운 결혼이 될 테니까
결국 파샤드는 도시로 도망치고 수아드는 임신 6개월째 형부에 의해서 불에 태워진다
가족들이 일부러 집을 비운 사이, 형부가 악역을 떠맡아 빨래를 하고 있던 수아드에게 석유를 뿌린 후 라이터를 켠 것이다
죽이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어쩌면 이렇게도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을 택했는지 정말 그녀의 부모에게 물어 보고 싶다
혹시 혼전임신한 여자는 불에 태워 죽이라는 율법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차라리 전화줄에 목졸려 죽은 그녀의 여동생이 행복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동네 사람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나 병원으로 옮겨진 수아드는, 그러나 혼전임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병원에서도 치료가 거부되고 방치된다
온 몸이 화상을 입었으나 아무런 처치없이 소독도 해 주지 않아 그녀의 주변에는 화농 냄새로 코를 찌르고, 턱은 가슴에 붙어 떨어지지 않고, 양 팔도 화상입었을 때 상태 그대로 가슴께에 달라 붙어 있다
이 일로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자, 수아드의 어머니가 찾아와 그녀에게 독약을 건넨다
니가 죽어야 남동생이나 형부가 경찰에 가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빨리 죽으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그러나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누가 이런 상황을 단지 문화의 차이, 혹은 이슬람 문화의 고유성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명백한 인권 유린이고 살인에 불과하다
이런 명예살인이 아직도 관습이라는 미명하에 사회의 가장 약자인 농촌 여성들에게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고 끔찍하다
진보란 바로 이런 끔찍한 문화를 사라지게끔 하는 게 아닐까?
수아드는 프랑스 인권 단체에게 구출되어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로 가서 치료를 받고 결혼도 한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진보적이고 복지가 잘 되어 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100% 행복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수아드는 스위스로 온 후 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겪는다
나는 이런 솔직한 심정까지 고백한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인권 단체에 의해 구출된 후 지금은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걸로 끝내도 될텐데, 그녀는 그 후의 괴로운 심정까지 가감없이 다 고백한다
생각해 보면 전혀 다른 문화와 관습 속에서 20년이나 자란 사람이, 느닷없이 말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낯선 인종들이 사는 도시에 떨어져 살아가야 했을 때 적응하는 게 힘든 것은 너무 당연하다
더구나 그녀가 서구 사회의 가치를 접하게 될수록, 예전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가족들의 폭력과 살인 행위가 견딜 수 없는 상처로 다가왔다
걸핏하면 채찍으로 때리던 아버지의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단지 결혼 전에 임신을 했다는 이유 만으로 자신에게 석유를 끼얹어 불을 붙인 가족들을 용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웨스트 뱅크 지역에 살 때만 해도 여자란 맞는 게 당연하고 혼전임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나, 스위스로 건너 온 후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부당하고 또 끔찍한 일이었는지 자각하게 됐다
더구나 화상의 상처가 온 몸에 남아 여름에도 팔과 다리를 드러낼 수 없어 칭칭 감고 다니기 때문에 그녀의 정신적 외상은 지울 수 없는 게 되버렸다
가엾은 수아드...
그녀는 날마나 몸에 불이 붙는 악몽에 시달렸고 가스불만 봐도 노이로제 증상을 일으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또 당시 임신 상태였던 아들을 스위스로 데려 온 후 입양시켰다는 사실 때문에 엄마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몹시 괴로워 한다
이제는 책을 낼 정도로 많이 호전됐지만 여전히 그녀의 상처는 다 아물지 못했고 어쩌면 평생 동안 극복해야 할 숙제로 남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Burned alive" 다
살아 있는 채 불태워진다는 뜻이 너무나 실제적으로 와 닿는다
잔혹한 여성 학대 혹은 살인이 단지 문화적 차이로 방관될 게 아니라,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인권의 문제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수아드 역시 자신과 같은 불행한 여자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라며 용기를 내 고백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신분 노출을 꺼린다
가족이 외국으로까지 쫓아 와 죽인 예가 있기 때문이다